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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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춘향전 하듯이 해적전 이라는 제목에서 옛이야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주인공이름으로 붙여진 이야기들에서 알수 있듯 길동이 춘향이 말고 이번 00전의 주인공은 신라공주 다.

영상매체의 영향 탓인지 신라공주 하면 선덕여왕이 그리고 미실 이 떠오르고, 여자 해적 이라고 하니 손예진 주연의 영화 해적이 떠오른다. ^^;;;

하지만 이 소설에는 신라 공주도 무예출중한 여자두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었나를 개인적으로 풀이해 보자면, 신라시대 공주 불렸던 해적 이야기 이라고나 할까 ㅎㅎ

신라 장보고가 망하고 15년이 지난 때(서기 861년을 말함), 한주지방(지금의 서울, 경기도, 충청북도 일부)에 장희(張嬉)가 살고 있었다. (p. 8)

소설의 첫문장 풍이 전래동화속 '옛날 옛적에' 하는 느낌의 이야기 시작을 알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장희가 등장한다.

가상의 인물 이름을 굳이 한자까지 써놓은 것은 이유가 있을터. 베풀 장張에 즐길 희嬉, 장희.

장희가 어떤 즐거운 이야깃거리들을 베풀어줄 지 개봉박두~!

어려서부터 장보고 패밀리에 섞여 자란 장희는 장보고가 망하자 한주로 넘어와 빈둥거리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밑천이 바닥나자 배가드나드는 강가 공터에 깃발하나를 꽂으며 자리를 잡는다. 깃발에 써놓은 글자는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다.

파리를 날리며 자리를 정리하려는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장희를 붙잡는다. 이 남자의 이름은 한수생 漢水生 "낭자, 부디 나를 살려주시오" (이름을 보아하니 물에서 살아날 팔자다 ㅎㅎ)

"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오? 왜 우리가 한수생이 나눠주는 쌀을 걸인이 동냥 구하듯 받아야 한단 말이오? 시 한 구절을 모르고, 옛 성현의 지혜 한마디를 몰라서, 그저 재물만 탐하는 벌레 같은 자에게, 우리가 배고프다는 이유로 쌀을 달라고 빌며 구걸하듯 해야 한단 말이오?" (p. 23)

아전인수도 이런 아전인수가 없다. 한수생이 땀흘려 농사일 할때 여기저기 놀러다니던 마을 사람들이 겨울한파가 닥치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한수생 집을 털러오면서 하는 말이다. 도둑이 아무리 입만 살아있다해도 이렇게 양심없이 입만 살수가 있나 싶은 지경이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한수생이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장희를 만난 것이다.

"이곳은 신라의 도성이 아니라, 백제의 도성이다"

"여기가 백제의 도성이란 말이오?"

"궁궐이 있고, 공주께서 머무르고 계시며, 장군들이 지키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도성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그대들은 백제를 되찾겠다는 이름으로 모인 해적 떼라는 이야기요?" (p. 58, 60)

마을사람들에게 쫓기고 관군에게 쫓기고 대포고래와 비단잉어 해적단에게 쫓기고 이제 죽었구나 싶었을 때 붙잡힌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섬을 백제의 도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수생을 본 백제의 공주는 한수생을 바로 남편으로 삼고 종부리듯 부려먹는다. 백제가 멸망한지 이백년이 지났는데 부패한 신라를 뒤엎고자 모여든 백제 무리들이라... (장희는 대번에 해적떼라고 했지만 ㅎ)

장희와 한수생이 목숨을 걸고 조세를 걷어 싣고가는 신라관청의 배를 공격하여 재물을 탈취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수생에게 주어진 병사라고는 섬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는 졸개 3명 뿐이다. 그런데 이 3명이 한목소리로 자신들이 섬에 오게된 배경을 말하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잃고 막막해하고 있을 때, 상잠장군께서 보내신 백제의 검사가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신라 조정이 백제를 간교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 (p. 88)

노름을 해서 전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얻어 도망친 노름꾼, 향락에 취해 먹고놀고마시다 불을 내 이웃에 피해를 입혀 도망친 방탕꾼, 빚을 내어 물이 없는 땅을 샀다가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친 나머지 빚 때문에 도망친 농사꾼 모두 자신들이 망한 이유는 신라때문이라며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또다짐을 한다. 하지만 전투에 나설 때가 되어 다시 3명을 불러모아 훈련은 잘 했는지 확인하니,

"신라 조정에서는 아직도 노름꾼을 붙잡아 가지 않았으므로 그놈들을 언제고 다시 만나면 저는 또 노름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저는 하루 종일 주사위 노름을 하며 이기는 법을 궁리하였습니다." (p. 96)

"신라 조정의 사악한 관리들에게 붙들려 갔을 때에 그 놈들이 내 다리를 묶었던 적이 있으니, 아직도 다리가 아파 오래 서 있으면 왼쪽부터 저려옵니다. 다리가 빨리 나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거나 누워 있기만 해야 했으므로" (p. 97)

"밤이 되면 신라 조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낮이 되면 졸음이 밀려와서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p. 97)

자기 잘못은 하나 없고 온통 남탓이란다. 앞서 나왔던 베짱이 이웃들보다 더한 놈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오는 배경인물들의 뻔뻔함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해적들의 오합지졸만 문제가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신라 관군 대장을 만나 장희가 담판을 지으려 할때 한 첫 마디가 바로,

"썩은 세상이니 결국 썩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입니다. 여기 지금 장군을 돕고자, 이렇게 서해에서 가장 뛰어난 해적이 찾아왔습니다." (p. 124)

대놓고 해적이라 말하며 휘황찬란한 옷을 걸치고 노래하며 춤추며 배에 오른 장희를 본 관군의 대장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장희의 썩은 세상 논리는 장군의 귀를 홀린다. 바람앞의 등불같은 목숨이었다가 '공주 해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장희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군은 들으라. 백제 조정이 남긴 가장 큰 보물을 하늘의 도우심으로 드디어 우리가 손에 넣게 되었느니라. 이 기쁜 때에, 내가 직접 그 보물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주는 기뻐하며 웃었다. 상잠이 따라 웃었다. 그런데 상잠의 웃는 모양이 이상하였다. (p. 172)

역사판타지의 모양새를 한 이 작품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서 도둑이 되어가는 민중과 대의명분에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충신의 사라짐과 뺏고 빼앗기는 탐욕의 아귀다툼이 장희의 영민함과 한수생의 순박함과 어우러져 한바탕 시끄러운 해적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앞서 나온 소설Q시리즈 작품들 중 몇 작품을 읽고 이 작품까지 읽으며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작고 짧은 소설 한편한편이 도전하는 분야가 너무나 다양하게 제각각이라 그 실험정신에 박수쳐 주고 싶어진다.

가제본으로 받아 읽으며 궁금했던 작가가 검색을 해보니 SF판타지 작가라고 한다. 그런데 SF판타지가 아니라 역사판타지라니, 역시 소설Q시리즈 답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참신한 소재와 독특한 신예작가를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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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 우리가 지나쳐 온 무의식적 편견들
돌리 추그 지음, 홍선영 옮김 / 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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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연 나는 내 생각만큼 윤리적인가?

The Person You Mean To Be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 '선한 사람' 이 되고 싶어 한다. 일부러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에서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도 스스로는 아마 자신이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도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다면적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단 한 가지로 규정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편견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다. 교수이자 사회 심리학자로서 자료와 실험, 집필과 교육을 통해 당신과 나 같은 선한 사람의 무의식적 편견을 탐험한다. 더군다나 나는 여성이고 외국에서 태어난 유색 인종이다. 나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고자 모든 것을 뒤로한채 미국으로 떠나온 인도 이민자다. 힌드교 여성인 나는 갈색 피부에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남자와 결혼했다. 나는 미국을 열렬히 사랑하며 내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유색 인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을 겪는다. (p. 25)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이 갖는 입장은 분화된다. '나'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자식이 되고 자라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친구, 동료, 선후배, 스승, 직장상사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의 '나'는 늘 일관된 입장이 되기 어렵기 일쑤고 같은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다양한 모습들이 상대방의 다양한 모습들과 어떤 식으로 엮이느냐에 따라 '나'는 더 다양하게 규정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형성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습득하게 되는 '편견'들은 '나'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는 기분이다.

어떤 이들은 2016년이 또 다른 1968년 같다고 얘기한다. 2016년 미국 대선으로 깊은 분열이 드러났고 또 발생했다. 이번 분열을 계기로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논의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p. 30)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분열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제 평등이라는 가치를 그저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편견에 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p. 32)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더 나은 직장과 더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시도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들은 해결하고 구하기보다 성장하고 고심한다. 나와 당신처럼, 이들은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선한 사람들이다. (p. 38)

트럼프의 취임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긴 했나보다. 이후 영미권의 책들에서 사회서이건 소설이건 많은 책들이 트럼프의 대선이후 미국사회에서 표면에 드러난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동안 백인남성만의 지배를 인식하면서도 아닐꺼라고 나아졌을꺼라고 평등한 사회라고 자부해오던 미국에서는 트럼프 등장이후 아니었다고 분열의 골이 깊이 파이고 불평등이 너무나 오래되었으며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은 현대사회문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내재된 편견들이 수도없이 많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표면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방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퍼지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도 그러한 인식전환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책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이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길 기대한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지 못하면 위협을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렇게 자기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p. 52)

이 책은 인종과 민족, 젠더와 종교,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더 나은 직장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겠다'에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선한 듯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로 생각을 전환하면 기대하는 감정의 반응도 달라진다. 선한사람은 수치심을 잘 느낀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력한 자기 위협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때 하게 되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우리는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p. 71)

친구가 슬픈일을 당했다고 가정하자. '나'는 당연히 위로를 건낼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나'의 위로에 그닥 감흥을 보이지 않았을때 '나'의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건넨 그 위로는 과연 친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선한 행동을 한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가까운 지인이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한 강력한 목소리를 낼때 그 의견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으면서도 선뜻 동조의 의견을 내기보다는 일단 거부하고 싶어진다면 그때의 내 마음 속에 자리한 '자기 위협'은 어떤 편견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었을까?

이 책은 다양한 편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읽는이가 느낄 수 있는 수치심도 죄책감도 모두 다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그러한 심정적 부담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이란 배우고 발전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그림 그리기에 대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막대 인간 같은 그림밖에 못 그려도 노력과 시간을 쏟고 피드백을 잘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든 훌륭하든 아니면 어중간하든, 그 실력이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고정형 사고방식은 '양자 택일적' 사고방식이다. 발전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p. 80)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틀리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맞닥뜨릴 경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거나 아예 노력 자체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장형 상고방식을 고수할 경우, 좋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지려 한다. 스스로 성장할 여지를 주면 책임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다. (p. 97, 98)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이견에도 자기위협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럴 수록 더 철저하게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기 쉽다. 편견에 갇히기 쉽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 편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편견이었다고 인지한 순간 편견을 버리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친구에게 건네는 위로' 에 있어서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상대에게 자기 마음이라도 편하게끔 위로에 동의해달라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요구하며 또 다른 짐을 지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위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사고방식은 삶의 여러 면에서 다양하게 나뉘고 다양하게 영향을 준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느냐는 보다 바람직한 삶의 지향점을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다. 시스템에 내재한 무의식적 편견에 맞서려면 성장형 사고방식을 쉼 없이 가동해야 함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교육자이자 저자 데비 어빙은 시스템 전반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집단적 차별을 흔히 아는 역풍과 순풍에 비유한다. 역풍은 크거나 작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시련으로,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의 삶을 힘들게 한다. 역풍을 맞으며 달리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더욱 힘껏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역풍은 느낄 수 있다. 반면 순풍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갈 더 큰 힘을 얻는다. 순풍은 중대한 역할을 하지만 인지하기 힘들거나 쉽게 잊힌다. 실제로 순풍을 맞으며 달리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게 될 텐데, 모두 자신의 기량으로 이룬 것인 마냥 득의양양해질 것이다. 순풍을 맞고 있는 사람은 반대로 역풍을 맞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ㅁ소할 것이다. 역풍을 맞는 사람은 순풍을 맞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들보다 더 열심히 달리겠지만 훨씬 더 느리고 게으른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다 지쳐서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은 자기 파괴적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말 것이다. 순풍과 역풍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풍을 맞은 사람만 비난을 받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역풍을 맞은 집단이 가장 부정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p. 143)

미국에서 동부에서 서부로, 또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비행기의 행시간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뉴욕에서 LA로 가려면 LA에서 뉴욕으로 갈 때보다 40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서부로 갈 때는 역풍이, 동부로 갈 때는 순풍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풍과 순풍의 비유는 미국내에서의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백인은 순풍을 유색인종은 역풍을 맞으며 성장하고 사회생활을 한다. 이 바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능력주의로 설명하려 든다면 이 자체가 편견이 될 수 있음을, 단순한 '능력주의'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개인화된 허구적 '능력주의'를 벗어나 시스템적 '공평'을 생각해야 할 때임을 깨닫게 된다.

대다수 교과서에서는 "노예제에 대해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상대로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사실상 아무 원인 없이 일어난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어째선지 미국에는 노예 400만 명만 있을 뿐 노예 소유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 교과서에 비일비재했다. 미국 역사에서 나쁜 일은 익명으로 일어났다" 널리 읽히는 역사교과서에는 대부분 제목에 '노래' 나 '모험' '승리' 등 희열을 암시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역풍 때문에 흑인 선조들이 뒤처진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역풍의 존재마저 후대에 설명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흑인과 백인의 격차가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듯이 보였다. (p. 165, 166)

미국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미국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역사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왜 미국을 사랑하는 행동에 포함될 수 없는가? 선택적 애국심은 순풍과 역풍을 무시하여 눈앞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해결책을 강구할 수 없게 만든다. (p. 166, 167)

주차벌금을 제때에 내지 않았을때 백인남성이라면 경고조치 되지만 흑인남성이라면 구속까지 될 수 있고, 경찰이 검문을 요청했을 때 백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겠거니 여겨지지만 흑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겠거니 여겨져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이것이 과연 편견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바른 역사인식은 침략을 당한 기억이 있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지배를 했던 외국에서도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있던 역사를 드러내지 않고 없던듯이 여기는 것도 문제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순풍이 계속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뒤에 작용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잊게 된다. 개인 안에서 편견을 찾으면서도 시스템 자체에 편견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라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은 받아들이면서 역풍에 맞서 힘겹게 달리는 이들을 게으르고 무가치하며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비난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사회 과학자들은 결국 시스템 전반의 고단한 삶 효과에서 편견을 지우는 것이 개인의 무의식적 편견을 지우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적 관점은 시스템적 관점보다 덜 위협적이며, 우리는 이익(순풍)보다 불이익(역풍)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p. 169)

사회적 시스템이 정말 중요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개인적 편견은 이슈에 따라 바뀌고 다시 바뀔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순풍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개인적 역풍이 능력주의와 맞물려 인지되지 못할때라도 사회적 역풍은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게 되곤 한다.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개인들이 마주하는 시스템적 역풍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회제도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개인적 편견을 고치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그렇게 사회 시스템을 공평하게 만들어가다 보면 개인들의 편견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이용해 스스로 깨우쳐 나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교차적 정체성은 개인에게 독특한 형태의 순풍과 역풍을 야기한다. 누구나 다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아마도 하나 이상의 일상적 특권을 누릴 것이다. 자신의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금방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일상적 특권이 '일상적인' 것은 이것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거나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 특권이 '특권'인 것은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 작용한 순풍이 무엇인지 찾고 싶다면 당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p. 215,216)

사람에겐 다양한 입장마다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하는 말과 배우자로서 상대방에게 하는 말과 상사로서 직장에서 하는 말들은 그때마다 다른 가치관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특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한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조언을 건낸 것이 자식입장에서는 간섭이 되고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제자 입장에서는 월권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입장이 상대방이 봤을때 우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지 그래서 대화의 의미가 왜곡될 여지가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태도가 없을때 '일상'의 위치가 '특권'으로 비춰지고 편견으로 이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지.

온정은 호의를 베푸는 자신이 구원자라 여기면서 어떤 대의를 앞세우고 조직 사회로 파고 들어가 구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구원자라는 덫에 빠진 사람은 온정에 중독된다. 이제 모든 일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된다. 자신이 구원자가 될 기회를 잃을까 봐 상대가 주도적으로 나서거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p. 275)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편견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구원자 유형' 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경험담을 통해 풀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을 나보다 아래로 낮춰보는 상태에서 도와주는 것은 그러한 온정주의는 결국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자기도취적 마음이랄까. 그또한 편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저 사람들은 나와 똑같지 않은 사람들이야 라는.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전 스스로 이렇게 말해요. 이제 성숙해져야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싶잖아 라고 말이죠. 선한 사람이 되는 건 힘들어요" (p. 410)

"가끔 강당하기 벅찰 때도 있어요. 해도 욕먹고 하지 않아도 욕먹죠. 점진적 변화와 총체적 변화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에요" (p. 411)

구축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힘들다. 힘들지 않다면, 적어도 가끔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믿는 사람일 것이다. 뜨거운 열이 되고 싶지 않다 해도 모든 노고를 오로지 뜨거운 열에 떠맡길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이해하고 지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서 빛을 밝혀 각자의 몫을 해낼 수 있다. (p. 415)

올바른 가치를 믿는 사람이 모두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구축하는 사람들도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음이 빛나고 환한 빛이 모이다 보면 열기를 띠게 되면서 그 열기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크게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젠더차별에 대한 편견을 읽다보니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생각났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을 읽으면서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차별주의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같은 내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 마음이 좀 힘들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좀더 부드럽게 조언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내가 모르던 내 안의 편견을 일깨움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지지의 방법도 생각하게 해주어서 고마웠다. 이런 좋은 생각들이 퍼지고 퍼지다 보면 사회도 점점더 공평해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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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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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스마트푼과 자동차 설계부터 의료, 노동, 도시계획까지

남자가 표준인 세상에서 여자는 어떻게 투명 인간이 되는가

출간 즉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젠더 '팩트풀니스'

 

 

'빅데이터' 라는 말이 익숙해진, 그야말로 데이터의 시대다. 그런데 이 넘쳐나는 데이터들 중에 인간에 관한 데이터 중에 인간은 남성과 여성 둘로 나뉘지만 데이터는 남성데이터와 여성데이터가 반반씩 차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데이터의 모든 기준값은 남성이 디폴트 였다. 저자는 편향된 데이터를 각 분야별로 조목조목 분석하며 얼마없는 여성들에 관한 데이터를 끌어모아 이를 증명한다.

당신이 이 책에서 읽게 될 많은 주장과는 반대로, 문제는 여성의 신체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신체에 부여하는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 의미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 18)

이 책의 목표는 정신분석이 아니다. 남성 편향적 도구를 생산하는 사람이 은밀한 성차별주의자인지 아닌지에도 관심이 없다. 개인적인 동기는, 일정 수준을 넘지 않는 이상,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데이터의 경중을 고려했을 때 모든 젠더 데이터 공백이 그저 하나의 큰 우연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p. 19)

남자를 디폴트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 사회구조의 근간임을 저자는 다양한 문헌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 에서 '인간이라는 부류로부터의 첫 이탈은 남성이 아닌 여성 자손을 낳는 것이다' 라며 여성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이탈이라고 얘기했다. 10세기의 바이킹 해골이 명백하게 여성의 골반을 가졌음에도 무기일습과 제물로 바쳐진 말2마리가 함께 묻혀있는 전사의 무덤이었기에 (여성이 전사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100년 넘게 남자의 해골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2017년 DNA검사결과가 나오고서야 여성의 골반임을 인정받았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2012년 세계경제포럼의 분석에 딸면 성굴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 즉 거의 모든 발언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성 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p. 28)

당신은 언어에 밴 남성 편향이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증거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사용자가 증가하는 언어, 전 세계 누리꾼의 90%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모티콘이다. 그런데 2016년까지 이모티콘의 세계는 이상하리만치 남성적이었다. (p. 29)

성굴절어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언어 자체에 깊이 배어 있다. 모든 명사가 남성 또는 여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어로 탁자는 여성명사이지만 자동차는 남성명사라고 한다. 변호사가 여자인 경우 변호사라는 단어 앞에 여성임을 뜻하는 접두어를 붙여야 한다. 이모티콘이 유행하기 시작했을때 다양한 이모티콘은 중성적 캐릭터로 표현한것 같지만 누가봐도 여성은 아니었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왜곡된 성 개념이 들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성평등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나마 새로 만들어지는 이모티콘 같은 신언어들은 이제 남성과 여성을 모두 표현하는 중이라고 한다.

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다. 백인이라는 점과 남자라는 점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른 정체성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보편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고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 데이터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성이 보편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소수자의 위치로 끌어내려진다. 특수한 정체성, 주관적 관점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여자들은 문화에서, 역사에서, 데이터에서 잊어도 되는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여자는 투명인간이 된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우리가 인류이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남성데이터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p. 50, 51)

여자가 사람취급 받게 된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법적 권리만을 따져봤을때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동등해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그러니 사회가 발달을 거듭해올 수록 기준은 하나로 점점 더 굳건해져 왔다. 애초에 사람의 종류가 남/여 둘이므로 기준도 둘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늘 기준은 하나였다. 오래되어 온 그 하나의 기준을 문제시하는 질문들은 늘 위험하고 불순하고 예외적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무차별적 단 하나의 기준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게 아닐까?!

<일상>

눈이 많이 왔다고 하자. 제설작업을 어디부터 하는가? 도로부터 한다. 도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다. 자가용을 소유한 가구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들은 제설작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주변을 아이와 함께 수시로 걸어야 다녀야 하는 보행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보행자가 미끄럽거나 얼어붙은 도로에서 다칠 확률은 운전자의 3배라고 한다. 대중교통의 인프라에 있어서도 여성의 이용현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대중교통의 이용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히 많은데도. 하지만 <일상>에서 교통분야의 여성데이터 부재는 화장실 문제에 비하면 차라리 심각하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똑같은 면적을 부여하는 것이 공정해 보이고 지금껏 그렇게 설계되어왔다. 위생공사 기준에도 면적을 50대50으로 분할하라고 명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 소변기와 칸막이가 같이 있다면 동시에 용변볼 수 있는 인원수는 여자화장실보다 남자화장실이 훨씬 많다. 아까까지 동등했던 면적이 갑자기 동등하지 않은 면적이 된다. 그러나 설사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동수의 칸막이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의 화장실 사용 시간이 남자의2.3배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이나 장애인, 노인을 동반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여성인구의 20~25%는 가임기 여성으로 언제든 생리 중일 수 있으며 그 경우 생리대를 갈아야 한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알면서도 동일 면적 화장실이 공정하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형식적인 평등만 외치는 독불장군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겉으로는 성평등해보이지만 사실상 남성 편향적인 화장실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겠다. (p. 76, 77)

인간의 기본적 생리욕구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화장실 문제과 생명의 위협과 직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UN에 따르면 여자3명 중 1명은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도의 경우 화장실이 집에 없는 경우가 많고 공중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여성전용도 없어서 성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폭행의 위험은 화장실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스정류장, 기차역, 주차장, 공원등 여성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공공장소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계자가 젠더를 고려하지 않을 때 공공장소는 남성 디폴트가 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은 매일같이 그 신체에 가해지는 성적 위협과 싸워야 한다. 세계 인구 전체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데 현재 그 돌봄 노동은 주로 여자들이 무급으로 한다. 이것들은 특수한 관심사가 아니라 보편적 관심사다. 그리고 공공장소가 정말로 모두를 위한 곳이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세계 인구의 나머지 절반을 배려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이는 정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간단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대상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공공장소와 공공 활동 설계에 여성의 사회화를 반영하면 여성의 정신 건강 및 신체 건강이 보장되어 또 한번 장기적 비용이 절약된다. 한마디로, 공공장소를 설계할 때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빼놓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현재는 고의든 아니든 우선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불의이자 경제적 무지다. 여자들은 공공자원을 이용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 우리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자를 제외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97, 98)

비용도 절감되고 남성/여성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왜 안될까... 몰라서 일까 알아도싫어서 일까...

<남자다움의 사회학>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일상에서 여자답다 남자답다 라는 편견이 남성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일상에서 소외된 여성의 현실들을 읽다보니 여성의 입장을 좀 생각해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남성이 남성의 입장을 생각할때에도 관점을 달리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보고 싶다.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 사는 남자들의 삶도 행복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직장>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랜 시간 일한다. 성별 구분 데이터가 모든 나라에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에 34분 더 일한다. 포르투갈에서는 90분, 중국에서는 44분, 남아공에서는 48분이다. 격차의 크기는 나라별로 다르지만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일관적이다. (p. 104)

여려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 책이다 보니 세계적 데이터가 자주 인용되는데 세계속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 데이터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었다. 좋은 의미건 안좋은 의미건 간에 세계적 경향을 살펴보는데 있어 소외된 나라보다는 그 데이터 속에 포함된 나라가 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은 희망을 갖게 했다.

여자들이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이 돌보지 않기' 와 '집안일 안 하기'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50년간의 미국 인구조사 세이터에 따르면 여자들이 한꺼번에 어떤 업종에 진출하면 그 업종은 임금이 내려가고, '위세'를 잃는다. 즉 여자가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노동이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p. 109)

'돌봄노동' 과 '가사'는 전업주부이건 일하는여성이건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전담되어진다. 경단녀는 어쩔수 없는 현실이고 일을 하고 싶다거나 경제적으로 일이 급한 경우이거나 어느 경우이든 간에 다시 일하려는 여성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는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의 저임금 노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돌봄노동과 가사를 하면서 동시에 일을 하려면 그런 일자리만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여자들의 상황은 더 나쁘다. 전 세계에서 최소한의 유급 출산 휴가조차 보장하지 않는 4개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급휴가 조차도 전체 직장 여성의 60%만 사용할 수 있다. 나머지 40%가 해고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미국의 산모 4명 가운데 1명은 출산 후 2주 안에 직장에 복귀한다. (p. 114)

일본에서는 아빠 쿼터제가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는 남녀 임금격차나 여성의 신체를 반영하지 않은 제도 설계 때문이다. 일본의 극단적인 노동문화도 상관이 있다. 휴가만 써도 상사가 얼굴을 찌푸리는 나라에서는 남자 육아휴직을 쓴다고 하면 창피나 불이익을 당한다고 아빠들은 말한다. (p. 119)

여러 나라의 사례들이 나오지만, 북유럽의 몇개 나라 빼고는 우리나라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극빈층이 많은 나라들의 경우를 차치하고라도 선진국이라 하는 영국이나 미국, 일본 보다 한국의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사회문제를 다룬 외국책들을 읽을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나라만큼 살만한 나라가 별로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리고 몇몇 나라들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물론 증거를 바탕으로 한 육아휴직 정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여자의 무급 노동이 신생아에서 시작되어 신생아에서 끝나는 것도 아닌 데다 전통적인 직장은 가상의 '돌볼 가족이 없는' 직장인의 삶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늘 남자로 가정되어 있다-는 자식이나 노인 가족 돌보기, 요리, 청소, 아이 병원 데려가기, 장보기, 학교폭력, 아이 숙제봐주기, 목욕시키고 재우기, 이 모든 일을 내일이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의 삶은 단순하고 쉽게 두 부분, 일과 여가로 나뉜다. (p. 120)

유급 노동 문화 전반에 근본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전통적인 직장은 '돌볼 가족이 없는 노동자'에 맞게 설계되었지만 여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 남자가 그런 이상에 잘 들어맞을 확률이 높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혹은 어떤 회사도 양육자의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무급 노동을 하는 여자들에게 불이익 주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126)

일과 여가.. 그렇다. 원래 직장과 가정은 일과 여가로 나누어졌었다. 그런데 여성에겐 이 '여가' 시간이 없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여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예 출퇴근도 없고 임금도 없어 노동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당연시 되어온 무급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동안 평가절하되어온 무급 노동 없이는 유급 노동도 불가능하다고.

'능력주의' 라는 것이 결코 평등하지 않은 '신화'에 가까운 생각이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충분히 친절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친절하면 전문가다워보이지 않는다는 사면초가에 빠지기 일쑤이며, 그동안의 역사에서 여자 천재들이 없었던 것은 데이터 공백의 결과로 '총명편견'을 만들어 왔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다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이 남성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라면 그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의 사회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여성이 자라는 동안 받는 교육의 내용에서 주입되는 '여자다움'의 특징들은 사회생활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최근 읽은 <오만하게 제밥하라> 라는 책이 생각난다. 사회생활 하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환경에서도 문제가 좀 있다. 같은 직종에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환경에서 받는 영향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사무실 냉방온도는 표준남성 기준으로 여성의 신체에서는 추위를 느끼고 산업현장에서 화학약품들이 여성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데이터가 없다. 게다가 직장내에 만연한 성희롱 문화는 업계를 막론하고 너무 흔해서 그냥 문화인가 싶을 정도다. 어디를 봐도 항상 남자는 보편이고 여자는 특수 였다.

<설계>

여성이 사용하는 물건 여성이 생활하는 공간 에 대한 설계에서도 여성의 의견은 조사조차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핸드폰만 해도 남성보다 작은 여성의 손으로는 한손으로 사진찍는 것이 대부분 불가능하다.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데이터베이스에도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뚱뚱한 대머리 남자의 사진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렸다. 알고리즘에서는 '대머리' 보다 '부엌'이 더 강력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부엌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생김새건 여성이라는;;;

성 중립적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편향적인 제품은 기술업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평균 여자 머리에는 너무 큰 가상현실(VR)헤드셋, 남자 몸에는 딱 맞지만 여자에게는 '두꺼운 겨울 외투 위에 입어도 맞을 만큼 큰' 햅틱 재킷(촉감을 구현하는 재킷), 여자가 쓰면 렌즈 사이가 너무 멀어서 초점이 안 맞거나 '코에 안 걸려서 밑으로 떨어져 버리는' 증강현실AR안경, 또는 손목 밴드나 큰 주머니에 넣어서 차야 하는 마이크. 남성 디폴트는 특히 운동 관련 기술에 많은 듯 하다. (p. 227)

이뿐만이 아니다. 자동차안전평가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인형도 남자의 신체평균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 안전벨트도 임부를 위한 것은 나온 적이 없다. 설계와 계획에서 여자와 여체가 무시되어온 사례들은 차고 넘쳤다. 여자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때에도 남자들의 생각만으로 '이러면 좋을거야'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하는데... 그게 참... 많이 어려운가;;;

<의료>

역사적으로 남체와 여체는 크기와 생식기능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없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의학교육은 오랫동안 남성 '표준'에 초점을 맞추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것에 '이례적' 또는 심지어 '비정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몸무게 70kg의 일반 남성'이 너무 많이 언급 된다. 마치 그가 남녀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자가 언급될 때는 표준 인류의 변형처럼 소개된다. (p. 248)

하지만 여체는 작은 남자의 신체와 같지 않다. 학자들은 인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에서는 물론이고 흔한 질병의 '유병률, 추이, 강도'에서도 남녀 차이를 발견했고 심장의 운동, 폐활량도, 질병마다 그 질병에 걸릴 확률도 남녀 차가 있음을 밝혀냈다. 남체와 여체는 세포 단위에서까지도 다른데, 지난 20년간 여자가 단순히 '작은 남자' 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되어 오고 있음에도 의학계의 젠더 데이터 공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크다.

여자들이 훨씬 많이 앓는 병에서조차도 동물시험에 암컷을 포함하지 않고, 진단을 함에 있어서도 여성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고통을 호소해도 심리적인 문제라며 우울증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영미권에는 정말 많은가보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의료> 부분의 내용과 동일하지만 보다 상세하게 분석한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의료계의 현실이 여전한 것을 확인하니 너무 씁쓸하고 답답했다.

<공공생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은 공공서비스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문제는 이런 예산 삭감이 사실 절약이라기 보다는 비용을 공공부문에서 여자들에게 떠넘기는 형태라는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7년 추산에 따르면 50세 초과 잉글랜드인 10명 가운데 1명은 공공서비스 예산 삭감 결과, 필요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돌봄 노동의 책임은 대개 여성에게 돌아갔다. (p. 301)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p. 311)

정부의 공공서비스 예산운용이 여자의 돌봄노동과 직결되는 구나 를 깨달았다. 예산을 줄인다고 그 수요가 사라지지 않고 결국 여성이 떠안게 되는 노동이라... 저자는 이 문제가 노동을 떠안는 것 자체보다도 전사회적으로 사회비용의 낭비임을 밝히고 있다. 예산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여성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즉 문제는 재원부족이 아니라 (젠더에 따른) 지출 우선순위라고 강조한다.

공공생활 문제는 여성정치인의 진출과는 관련이 있었다. 여성정치인의 존재여부가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법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정치인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도 그렇고...

<재난>

우리가 여성을 배제하는 진짜 이유는 인류 절반의 권리를 소수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354)

여자는 이미 전쟁, 팬데믹, 자연재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고 있다. 트라우마, 강제이주, 부상 및 사망은 남녀가 똑같이 겪지만 여자는 여성만이 겪는 피해까지 겪어야 한다. (p. 361)

여자는 전쟁에 뒤따라오는 사회질서 붕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소위 분쟁 후 상황에서도 강간과 가정폭력의 수위는 여전히 극도로 높다. (p. 362)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전쟁에서 생기는 난민도 있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많다. 난민이 되면 집단 수용시설에 일단 머물게 되는데 이 수숑시설에서의 위생과 성폭력 문제는 더욱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이상 갈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성들에게 가정폭력과 성폭력까지 겹쳐지는... 이럴거면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워지는;;; 저자는 다양한 재해의 사례들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여성들인 재난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성별/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해법은 분명하다. 여성 진출 공백을 매우면 된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의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돌아가보면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있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기만 했으면 됐던 것이다. (p. 387)

읽는 내내 이정도였나...싶었다. 이렇게까지 여성이 소외되어 왔던가... 싶었다. 개인적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내용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이라면 공감가는 사례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여성만 화장실에 줄을 서고 여성만 가로등 없는 버스정류장이 무섭고 여성만 만원 지하철에서의 성추행을 감내해야 하고 여성만 돌봄노동에 의하여 경력이 단절되고 일상용품이든 산업용품이든 여성의 사이즈는 고려되지 않으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연구는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고 여성의 무급노동이 당연시되다 못해 사회적 재난이 겹치면 여성의 안전은 더욱 심각한 위협을 받는 현실 속에서 여권을 인정해달라는 말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만큼 여자의 권리를 더 생각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부여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저자의 이 길고긴 이 두껍고두터운 하소연의 목소리를 과연 누가 들어줄 것인가... 작년 겨울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팩트풀니스' 여성버전이랄 수 있는 이 책이 그만큼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너무 과한 바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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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 - DNA 속에 남겨진 인류의 이주, 질병 그리고 치열한 전투의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밥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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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속에 남겨진 인류의 이주, 질병 그리고 치열한 전투의 역사

대륙을 넘나들며 인류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유전자 여행!

 

고고학은 첨단의 과학기술을 가장 필요로 하는 학문 분야인 것 같다. 과거에는 유물과 유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했다면 최근에는 DNA 분석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인류의 진화와 고인류 문명사는 어쩌면 몇 년 안에 크게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는 A 다음에 B, B 다음에 C 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진화해 온것이 아니다. 동시대에 다양한 고인류가 존재했고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었다. 인류가 시작한 문명도 4대강이 출발점이라던가 농경과 정착이 시작된 후 종교와 중앙집권이 생겨났다던가 하는 상식에 가까운 역사지식도 정설의 자리를 내놓을 지도 모른다. 인류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고 DNA 들은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인류의 역사는 곧 이주의 역사라고 저자는 알려주고자 한다.

이 책의 집필 아이디어는 2015년 '난민의 여름' 이라는 진통을 겪으면서 탄생했다. 이후 불붙기 시작한 수많은 사회적 논의에서 고고유전학은 큰 역할을 했다. 태곳적부터 유럽에서 나타났던 대이동 행렬은 이곳 유럽에서 시작되어 서구 세계의 기반을 다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룰 주제다. (p. 8)

공동 저자인 토마스 트라페는 크라우제 박사의 지식을 취합해 짜임새 있는 글로 만들고, 이 글을 동시대의 프레임으로 재구성해, 최근 정치적 논의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맡았다. 트라페는 다년간 크라우제의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크라우제와 공동 작업을 해왔으며, 오늘날의 국수주의와 민족들의 사고 총체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p. 9)

이 책의 저자는 2명으로 한 명은 고대 DNA 연구자이고 한 명은 과학 및 정치분야 전문기자다. '난민' 문제가 급부상하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난민' 수용을 어려워 했다. '난민' 수용력이 떨어지는 나라일수록 자국민에 대한 난민과의 차별성, 이질성을 강조하곤 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수백년 수천년 정도가 아니라 수만년 이전의 역사를 헤집으며 인류가 얼마나 섞여왔는지, 유럽내에서 뿐만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섞여온 이주의 역사인지를 DNA 를 통해 증명해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서술방식은 크게는 연대기식이면서 동시에 중간중간 현재와 교차되며 쓰여지고 있어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잡아가며 읽기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고고학적 최신 정보를 습득하기에도 고인류와 지금의 현실문제를 접목시키기에도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주는 유용한 책이었다. 무엇보다 각 장 마다 앞서서 제시되는 지도들이 훌륭했다. (그래서 양쪽의 책장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는 중간부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ㅠ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인류 가계도의 연대표는 좀 더 수정이 필요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약30만년 전이 아니라 약 50만년 전에 갈라졌다는 것이다. 현생 인류로부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공통 조상이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45만년 전이 아니라 약60만년 전인 셈이다. 데니소바인이 원시 네안데르탈인의 mtDNA를 갖고 있고 후기 네안데르탈인이 현생 인류와 비슷하다는 발견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p. 33)

작은 뼛조각에서 또 극미량의 뼛가루만으로도 DNA 분석은 많은 결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mtDNA 분석을 통해 '유전자 시계'를 계산하여 '미토콘드리아 이브'를 찾아내는 과정은 다른 책에서 간략하게 읽은적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좀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조상의 혈통은 최소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종인 침팬지로부터 분화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9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의 혈통이 탄생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몇만 년 내에 전 유럽과 유라시아 대륙 일부로 퍼져 나갔으며,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원시 인류였다. 호모 에렉투스는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계속 발전하다가 결국 멸종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 혈통이 나타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현생 인류로 발전했다. 어떤 경로와 분기점을 거쳐 아프리카에서 인류의 진화가 이루어졌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우리의 유전적 뿌리는 아프리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p. 48~50)

모든 인류의 공통조상은 결국 한 뿌리다. 거슬러올라가고올라가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수천년을 걸쳐 갈라지고갈라진 지금의 민족들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무어 그리 큰 차이겠는가 하고 저자는 원론적 전환을 제기하는 듯하다.

진화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직립보행이었다. 이것은 최근 읽은 다른 인류의 진화관련 책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뇌의 발달이 먼저가 아니고 직립보행이 먼저였다. 그 차이가 침팬지와 인류를 분화시켰다. 이 책에서도 '직립보행' 관련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만 9000년 전, 안 그래도 열악했던 유럽의 생활 환경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환경이 되었다. 화산 폭발은 아프리카에서 새 이주민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미 그 지역을 떠나, 주로 서부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최후의 일격이었던 셈이다. 물론 다른 자연재해도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 일조했을 것이다. 어쨌든 최후의 네안데르탈인은 지금으로부터 약3만 9000년에서 약3만 7000년 사이에 살았고, 현생 인류가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p. 60)

지금으로부터 약3만2000년 전 점점 매섭게 몰아치는 추위를 피해 중부 유럽에서 남서부 유럽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최대 빙하기에 피레네산맥이 빙하로 뒤덮이면서 다른 유럽 지역과 격리되었다. 중부 유럽의 기온이 급강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피난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들의 유전자는 아직까지 유럽에 남아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8000년 전, 대빙하기 말에 사람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중부 유럽으로 돌아갔다. (p. 65)

이후 3000년 동안 유럽에서는 유전자가 서로 다른 이베리아반도와 발칸반도의 개체군들이 혼합되면서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유럽과 아나톨리아의 유전자 결합을 처음으로 입증할 수 있었따. 수천 년 동안 상당히 발달한 기술 문명을 갖고 있던 푸른 눈과 검은 피부의 수렵민과 채집민이 유럽 대륙에 나타났다. 이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얼음 장벽이 서서히 사라졌고 인간의 이동이 더 많아졌다. 사회 교류가 활발해졌고 유전자 풀에서 강한 동화현상이 나타났다. (p. 66,67)

원시인류의 시작은 채집민이었다. 그리고 일부가 농경민이 되었다. 그때에도 채집민과 농경민은 공존했다. 그리고 섞였다. 유전자적으로는 점점 같아져갔다. 기원전 몇천년 전에 이미 서로 비슷하게 동화된 DNA를 가진 인류가 지금 서로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의 대답은 NO다. DNA 구성비율이 다를뿐 지금의 인류는 같은 '종' 이라고 저자는 차근차근 DNA 증거들을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자꾸 세계 곳곳의 현생 인류가 결국 똑같은 사람임을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의 초반에 제시한 이 책의 출발점과 연결되어 있다.

1만1700년 전이 되어서야 유럽은 다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홀로세의 온난기가 시작되면서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다. 어쨌든 이후 현재를 살고 있는 인류의 관점에서 빙하기는 끝난 것이다. 홀로세 초기는 인류에게 뜻밖의 행운을 안겨주었다. 진화론적 의미가 있는 사건, 즉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역사의 변혁이 시작되었다. 직립보행의 기원은 유럽이 아니라 근동 지방이었다. 이 지역은 북부 지역보다 날씨가 훨씬 따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후의 혜택을 한껏 누릴 수 있었따. 드디어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수렵민과 채집민에서 농경민과 가축 사육자로,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다. (p. 74, 75)

날씨가 따뜻했을때는 먹거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미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알았지만, 잠깐 머물렀던 곳에 도구들을 그냥 두고 갔다고 한다. 어디로 가든 주변의 나무와 돌로 또 새로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종족이 번식하고 날씨의 변덕으로 먹거리가 부족해졌을 때 배고픈 수렵과 채집이 아닌 정착해 곡식을 기를 선택을 하는 인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생활방식의 변경은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돌연변이를 거듭하게 했다. 예를 들면 피부색 같은 것 말이다.

초기 농경민의 피부색은 선택압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더 밝은 피부를 가질 때만 생존에 필요한 비타민D를 풍부하게 생성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피부를 더 밝게 만드는 돌연변이가 여러 차례 필요했다. 이러한 돌연변이를 거쳐 더 밝은 피부색을 갖게 된 아나톨리아인들은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았으며 자녀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아나톨리아인들이 피부색은 농경 문화와 육류가 적은 식생활의 정착을 통해 나타났다. 이러한 진화론적 발전은 유럽 전역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위도가 북쪽인 지역의 사람들일수록 피부색은 더 밝았다. 반면 수렵민과 채집민은 이러한 선택압력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육류와 어류를 풍부하게 섭취했기 때문에 비타민D를 공급받기 위해 더 밝은 피부를 갖지 않아도 된 것이다. (p. 91)

어두운 피부가 밝아지는 돌연변이는 육류나 어류에서 섭취할 수 있던 비타민D를 곡물위주로 먹거리를 충당하는 농경민이 섭취할 수 없게 되면서 피부와 햇빛반응을 통해 비타민D를 얻을 수 있도록 환경에 적응한 생존형 자연선택이었다. 사는 환경과 먹을 것이 달라지면서 피부색과 눈동자색과 머리색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색깔 때문에 우월성을 따질 근거는 없는 셈이다.

노동은 인체에 부담을 주었고, 이들이 섭취하던 음식도 소화가 잘 되는 편이 아니었으며, 건강에 가장 좋은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석기인들은 대가족 제도를 발명해, 장기적으로 후손들의 생존 가능성과 총 개체군을 증가시켰던 것이다. 큰 욕심 없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수집민과 채집민을 보며 농경민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p. 103)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 가 생각났다.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더 질낮은 식사와 더 힘든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그러나 이또한 어쩔 수 없는 당대의 환경에 따른 적응 과정이기도 했다. 다만 정착생활을 하고 가축과 함께 살면서 위생은 더 열악해지고 그에 따라 전염병도 발달했다는 것이 인류가 자연을 함부로 소모하는 것에 따른 필요악처럼 느껴져서 그 필요악이 진작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씁쓸해졌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스텝DNA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폰투스 스텝DNA는 북부 유라시아 조상뿐만 아니라,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서부와 동부의 유전적 특성이 다른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동쪽 지역, 즉 현재 이란 지역의 이주민에서 유래한다. 지금으로부터 4800년 전 유럽에서, 예전에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2개의 유전적 요소가 맞붙었다. 현재의 유럽인은 유럽과 아시아 출신 수렵민과 채집민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그 비중이 비옥한 초승달지대 서부와 동부 거주자의 60퍼센트에 달한다. (p. 121)

일반적으로 스텝 유전자는 현재 유럽 북부 지역에서 우세하고, 농경민DNA는 스페인에서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를 거쳐 발칸 남부 지역까지 압도적으로 많다. 스텝지대 거주자들이 평지를 선호한 경우, 현재의 폴란드와 독일을 거쳐 프랑스 북부와 영국 방향으로 가는 길이 서부 유럽으로 가는 최단 경로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4200년 전 반대 방향의 이동이 나타났다. 스텝 유전자는 서부로 이동하지 않고, 농경민DNA를 축적시켜 동부로 이동했다. 그래서 현재 저 먼 러시아 중부와 심지어 알타이 산맥 사람들이 서부 유럽인과 동일한 아나톨리아 유전자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p. 127)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올수록 문명에 기록된 역사와 연결되어 더 흥미로웠다. 이제 원시적 고인류가 아니라 문명을 발달시키는 인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데 이때에도 역시 상호간 교류에 의해 여전히 유전자교환과 동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만년 수천년에 걸쳐온 유전자가 수백년 사이에 확 달라졌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스텝지역 유전자를 읽으면서 말과 우유에 대해 얻게 되는 상식은 일종의 보너스처럼 재미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200년 전 청동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아마 스텝지대 출신 이주민들이 유럽에 새로운 언어를 들여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제 유럽은 한 가지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p. 139)

DNA 분석을 통해 인류의 어원까지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현재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는 전 세계 30억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언어라고 한다. 지금은 세계에 6500여가지의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고어로 올라갈 수록 그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DNA로 확인하는 과정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청동과 청동으로 만든 제품은 사회, 가족, 개인의 생활에 점점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가 소유물, 수직적 서열 구조, 가부장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는 사실은 유전적으로도 입증되었다. (p. 164)

이제 우리는 8000년 전과 5000년 전 유럽 대륙에 있었던 유전자 이동이 이후에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시기 유럽에서 번성했다 사라진 대제국들에서는 아무런 유전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p. 174)

역사시대가 된 이후 유전전 변화가 없다는 말은 즉 현재의 세계 인류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인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주장한 민족들이 나타나고사라지고를 반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유전자는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재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천 년 전 이주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 끊임없는 교류, 억압, 싸움, 모든 아픔이 녹아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변혁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후손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유럽의 이주는 언제나 존재했던 극적인 사건이다. 게대가 우리는 이 시대의 유전자 덕분에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이주가 없었다면 현재의 유럽 대륙은 존재하지 못했다. 이주가 없었던 선사시대 유럽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동물과 식물군만이 존재했다. (p. 241)

유전학은 역사 기술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유전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p. 245)

인종 갈등에 관한 유전적 근거는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것은 유전학이 일궈낸 성과다. (p. 249)

인종 혹은 혈통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DNA 믹스에 과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10년 후면 의학계에서는 이러한 평등주의적 관점을 표준으로 삼게 될 것이고, 유전자 분석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p. 253)

민족과 인종에 대한 이견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DNA 분석을 통해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유전자 분석 결과 (히틀러의 우생학은 말할 필요도 없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고유한 유전자는 없었고, 아프리카인들보다 유럽인들의 지능이 우수하다는 근거도 없었다. 이러한 유전자 분석은 크리스퍼를 통해 맞춤형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일으킬 정도로 과학기술은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라는 속도가 아니라 어떻게 왜 라는 가치를 따져보는 태도일 것이다.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인류는 다 제각각인 것으로 그렇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지만 DNA 는 모두가 동일하고 평등함을 증명하고 DNA의 변천과정은 이주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저자는 "고고유전학은 복잡한 논의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지난 수천 년간 인류의 이동과 이동성이 없었더라면 유럽이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p. 8) 고 한 말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마지막장에서 저자가 직접 질문하고 있진 않지만 책을 다 읽은 독자를 만난다면 왠지 물어볼 것 같다. '난민수용'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주민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냐고.

고고유전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과거에도 현재에도 '순수' 유럽 혈통을 가진 사람은 없다. 유전자 분석으로 과거를 추적해보면 우리 모두는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다. (p. 7)

 

 

8장과 9장은 책의 본래 흐름에서 살짝 벗어난 번외 내용처럼 느껴졌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유전자 분석을 통한 페스트, 한센병, 매독, 발진티푸스, 결핵 의 전파와 원인분석은 기존에 역사에서 배웠던 상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고학도 역사도 결코 멈춰진 학문이 아니라 새롭게 뒤집어질 수 있는 학문임을 다시금 느꼈다. 무엇보다 이러한 질병의 역사를 읽다보니 작금의 코로나시대에 '세균과 바이러스의 이동'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러하든저러하든 DNA 가 알려주는 것은 이주와 이동이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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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의 헌법 이야기 -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
김영란 지음 / 풀빛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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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

우리 헌법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사회가 확대되고 혼란해질수록 기본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국가와 사회체제질서의 기본은 법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다 법학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누구나 법전문가처럼 법을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수많은 조항을 매달고 있는 법들과 법 중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은 다르다. 헌법에 대한 기초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우리는 법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시작을 헌법의 역사에서 시작하는 것은 재미있고도 유익한 출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우리 헌법에 많은 영향을 끼친 네 나라 즉,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의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헌법 이해의 기초를 마련해주고 있다. 또한 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이야기처럼 술술 읽힘과 동시에 핵심사항이 저절로 정리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서술형 질문에 대한 정답모음집 같은?! ㅎㅎ

'차례'에서 확인되듯이, 영국의 대헌장은 헌법의 주춧돌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은 헌법에 인권을 불어넣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는 헌법에 살을 붙이고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현대 헌법의 기틀이 되었다. 이 네 나라의 헌법 형성과정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의 헌법에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네나라의 역사가 세계역사의 주름을 잡았었고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헨리2세 시대에 와서 지역마다 다르게 적용되던 관습법 대신 나라 전체에 적용되는 하나의 공통된 법체계가 성립되었다. 보통법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체계 마련으로 헨리2세는 '법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후 왕과 의회의 권력경쟁 속에 영국의 대헌장이 만들어졌다. 여러번의 수정을 거친 대헌장은 '법의 지배'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기에 '헌법의 기원'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이 영국에는 헌법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영국에는 따로 헌법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요?

영국은 우리처럼 하나의 문서로 된 성문헌법을 가지지 않은 나라 중 대표적인 나라지요. 1215년의 대헌장과 1628년의 권리청원, 1689년의 권리장전이 영국의 헌법정신을 담은 3대 문서라고 합니다. (p. 62)

'헌법의 기원'이 된 개념을 만든 나라 영국은 여전히 성문헌법 없이 헌법적 효력을 가지는 관습법에 따라 다스려지고 있다고 한다. 워낙 오랫동안 판례가 축적되어 있다보니 이것이 헌법적 관습법의 일부로 형성되어 있어서 이런 방식이 가능하다는데 그런 방식이 현대에도 가능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성문헌법이 없기에 좀더 자유롭게 토론하고 충분한 숙려기간을 가지며 합의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왠지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은 인권과 연결되어 다방면에 회자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1789년의 혁명 외에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프랑스 혁명기간은 거의 100년에 가까운 혼란의 시기를 포함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배경에는 재정파탄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이 재정 파탄의 직접적 원인은 미국독립전쟁을 과도하게 지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바스티유 함락 사건'은 왕과 대표단의 협상내용이나 경과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불러올 시대적 여건은 충분히 차오른 때였기에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 탄생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영국의 권리장전이나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폭넓은 인간의 권리를 선언하였다는 평가도 있으나, 당시 제헌의회를 지배하던 부르주아의 특성이 반영되어 자유와 평등을 형식적으로만 인정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p. 99)

여담으로 의장석 왼쪽에는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찬성하는 의원들이 자리했는데 이후로 '좌익' '우익' 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뉴스나 언론에서 나오는 '좌파'나 '우파'라고 하는 말의 유래가 되었지요. (p. 101)

역사로 읽는 법이야기는 그냥 역사만 읽는 것과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영국의 법을 이야기할 때는 '로빈 후드'이야기를 프랑스의 법을 이야기할 때는 '장발장' 과 '두도시이야기'를 곁들여 하니 소설 속 내용들이 생각나면서 더 이해가 잘 되는 기분이었다.

보통 미국은 아무도 살지 않은 곳에 유럽인이 건설한 나라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원주민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겠네요.

그 땅에는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이 있었고 초기 어떤 자들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이어 가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미국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원주민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옳습니다. (p. 131, 132)

역사를 읽을 때 균형잡은 시각은 굉장히 중요하다. 미국의 법과 미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땅에 살았던 원주민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여하튼,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개척자들이 만들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거의 영국의 식민지화 되어 간다. 하지만 개척자들의 자치권이 영국 본토에서 제약에 걸릴 수록 독립의 현실적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갈등 끝에 미국의 독립이 선언된다.

미국 독립선언서가 영국의 권리장전, 프랑스의 인권선언과 함께 인간의 권리를 선언한 문서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잘 알려진 이유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가 정부를 조직했는데 인민의 동의로 탄생한 정부가 이 권리를 어긴다면 인민은 저항권을 가진다고 독립선언서는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뒷부분에서는 영국의 왕이 그와 같은 인민의 권리를 훼손해 왔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어요.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고 저항권을 가진다는 선언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p. 144)

유럽에서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될 때 종교는 큰 역할을 했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 교황이나 왕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는 이 중간존재를 걷어낸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직접 권리를 부여받았음을 천명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희미하게 남아있던 왕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다.

프랑스왕이 영국왕에게 패전의 복수를 하려고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느라 프랑스왕은 자국의 재정을 파탄냈는데 그렇게 지원한 미국의 독립이 프랑스왕을 몰락시킨 혁명을 유발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정말 한치앞도 내다보기 힘든 것 같다.

혼란이 계속되자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미국에도 군주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군주제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어요. 그 외에도 앞서 제정한 연합규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p. 148)

당시 사람들은 왕정이나 대통령제나 특별히 다르다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평생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제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던 거지요. (p. 154)

미국이 독립은 했으나 워낙 큰 땅덩어리에 각 주마다의 연합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에의 향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프랑스혁명도 결국은 나폴레옹을 황제로 등장시켰고 독립된 미국도 평생 재임가능한 강력한 대통령제를 승인했다. 뒤에 나오지만 히틀러의 등장도 이와 비슷한 배경이다. 이후의 발달과정 속에서 많은 수정이 있게 되지만, 자발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혼란과 강력한 지도자 사이의 균형은 늘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바이마르 헌법의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입니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이론가로 활동하면서도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도 맞섰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장한 수정주의와도 맞서는 노선을 걸었지요. (p. 174)

룩셈부르크는 점진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는 자본주의를 돕고 혁명을 방해할 뿐이라며 비난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칭찬했던 레닌과도 맞섰는데, 직업 혁명가의 정치적 폭력을 옹호하는 레닌의 노선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자발적 혁명인 사회주의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p. 176)

가장 현대적인 헌법이라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 이야기를 시작함에 있어 로자 룩셈부르크 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똑똑했고 이상주의자로 보이는 혁명가였는데 그녀가 바이마르 헌법 어떤 조항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친것인지 알수 없어서 아쉬웠다. 룩셈부르크가 사망하고 얼마안되 치뤄진 총선에서 여성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 관련이 있었을까...

이 소설(알퐁스 도데 의 마지막 수업)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주민들의 상황과는 관련 없이 프랑스에 퍼져 있던 반독일 정서를 프랑스 작가가 작품에 반영한 결과물이라는 견해가 많아요. <마지막 수업>은 우리에게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어 수업을 하지 못하게 한 일제의 정책을 상기시켜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혔지만 역사적 배경은 전혀 달랐던 거지요.

그래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일본어로 마지막 수업을 하면서 슬퍼한다는 패러디가 만들어졌던 거군요. 소설도 얼마나 시대적 배경을 알고 읽는지에 따라 이해의 깊이가 달라지겠네요. (p. 180)

'마지막 수업' 기억난다. 독일의 지배로 들어가게 된 지역에서 프랑스로 하는 마지막 수업을 안타깝게 그렸던 소설... 그런데 원래 독일의 땅이었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가 침략하여 독일어 대신 프랑스러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다가 다시 독일이 그 지역을 수복하면서 프랑스어 수업을 금지시킨 것을 프랑스 작가가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라니;;;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나라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이 내놓은 식민지를 승전국인 영국이나 프랑스가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 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당시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 원칙이었어요. (p. 183)

1차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 공화국이 된 정치상황은 시민들에게 제대로 인식될 수 없었다. 패전으로 황제는 폐위되고 하루아침에 등장한 민주제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제는 파탄났고 사회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랜 세월 왕정에 익숙했던 사람들중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독일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연합국들과 손잡고 공화국이라는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들에게 강요했다고 생각했기에 민주주의나 공화국에 대한 반감도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공산당 쪽에서 나왔던 위협이 이제부터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민족주의적인 선동을 하는 세력들에서 나오게 되었지요. (p. 193)

혼란한 와중에도 바이마르 헌법은 공포되었고 이원정부제를 도입했으나 애초에 불안정한 연립정부 형태였기에 이를 악용한 히틀러의 등장을 독일 국민들은 환영하기에 이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과정은 민주주의가 대중과 함께 가지 않으면 극단적인 세력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고 몰락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 199)

프랑스 혁명기간에 있었던 폭력과 미국 독립과정에 있었던 자치와 독일 공화국의 짧은 집권을 모두 겪어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역사는 독립하자마자 닥친 냉전시대와 맞물려 더욱 혼탁한 시간을 보냈다. '신탁통치오보사건'은 읽고 또 읽어도 너무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때 제대로 알았더라면 분단은 안되지 않았을까...

지금 헌법은 1987년에 전부개정된 헌법인가요

그렇지요, 네 차례의 전부개정에서 세 차례의 개정은 권위주의 정권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한 개정이지만, 1987년의 마지막 전부개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만들어진 것이고 현재도 계속 적용되는 헌법이지요. (p. 234)

독립되자마자 독재가 이어져왔고 민주항쟁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급하게 수정해야 했던 헌법이 지금에 이르렀다. 헌법에 문제점이 있다고 말할만큼 잘 알지 못하지만 헌법개정논의가 끊임없기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변화된 시대의 가치를 반영시켜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만 해볼 뿐이었다.

참고로, 이 책과 '주민의 헌법'이라는 책을 세트로 읽으면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 기초이해는 왠만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로 법의 형성과정을 읽는 동안 법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 질문을 숙고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경의, 정의, 숙고 의 감정을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지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로서 민주주의를 향하여 계속 도전해 왔고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실수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헌법뿐 아니라 근대를 대표하는 여러 헌법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의 순간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며 여기서 긴 여행을 마칩니다.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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