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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 우리가 지나쳐 온 무의식적 편견들
돌리 추그 지음, 홍선영 옮김 / 든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과연 나는 내 생각만큼 윤리적인가?
The Person You Mean To Be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 '선한 사람' 이 되고 싶어 한다. 일부러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에서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도 스스로는 아마 자신이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도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다면적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단 한 가지로 규정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편견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다. 교수이자 사회 심리학자로서 자료와 실험, 집필과 교육을 통해 당신과 나 같은 선한 사람의 무의식적 편견을 탐험한다. 더군다나 나는 여성이고 외국에서 태어난 유색 인종이다. 나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고자 모든 것을 뒤로한채 미국으로 떠나온 인도 이민자다. 힌드교 여성인 나는 갈색 피부에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남자와 결혼했다. 나는 미국을 열렬히 사랑하며 내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유색 인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을 겪는다. (p. 25)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이 갖는 입장은 분화된다. '나'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자식이 되고 자라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친구, 동료, 선후배, 스승, 직장상사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의 '나'는 늘 일관된 입장이 되기 어렵기 일쑤고 같은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다양한 모습들이 상대방의 다양한 모습들과 어떤 식으로 엮이느냐에 따라 '나'는 더 다양하게 규정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형성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습득하게 되는 '편견'들은 '나'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는 기분이다.
어떤 이들은 2016년이 또 다른 1968년 같다고 얘기한다. 2016년 미국 대선으로 깊은 분열이 드러났고 또 발생했다. 이번 분열을 계기로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논의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p. 30)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분열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제 평등이라는 가치를 그저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편견에 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p. 32)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더 나은 직장과 더 나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시도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들은 해결하고 구하기보다 성장하고 고심한다. 나와 당신처럼, 이들은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선한 사람들이다. (p. 38)
트럼프의 취임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긴 했나보다. 이후 영미권의 책들에서 사회서이건 소설이건 많은 책들이 트럼프의 대선이후 미국사회에서 표면에 드러난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동안 백인남성만의 지배를 인식하면서도 아닐꺼라고 나아졌을꺼라고 평등한 사회라고 자부해오던 미국에서는 트럼프 등장이후 아니었다고 분열의 골이 깊이 파이고 불평등이 너무나 오래되었으며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은 현대사회문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내재된 편견들이 수도없이 많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표면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방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퍼지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도 그러한 인식전환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책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이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길 기대한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지 못하면 위협을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렇게 자기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p. 52)
이 책은 인종과 민족, 젠더와 종교,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더 나은 직장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겠다'에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선한 듯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로 생각을 전환하면 기대하는 감정의 반응도 달라진다. 선한사람은 수치심을 잘 느낀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력한 자기 위협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때 하게 되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우리는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p. 71)
친구가 슬픈일을 당했다고 가정하자. '나'는 당연히 위로를 건낼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나'의 위로에 그닥 감흥을 보이지 않았을때 '나'의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건넨 그 위로는 과연 친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선한 행동을 한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가까운 지인이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한 강력한 목소리를 낼때 그 의견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으면서도 선뜻 동조의 의견을 내기보다는 일단 거부하고 싶어진다면 그때의 내 마음 속에 자리한 '자기 위협'은 어떤 편견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었을까?
이 책은 다양한 편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읽는이가 느낄 수 있는 수치심도 죄책감도 모두 다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그러한 심정적 부담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이란 배우고 발전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그림 그리기에 대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막대 인간 같은 그림밖에 못 그려도 노력과 시간을 쏟고 피드백을 잘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든 훌륭하든 아니면 어중간하든, 그 실력이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고정형 사고방식은 '양자 택일적' 사고방식이다. 발전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p. 80)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틀리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맞닥뜨릴 경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거나 아예 노력 자체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장형 상고방식을 고수할 경우, 좋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지려 한다. 스스로 성장할 여지를 주면 책임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다. (p. 97, 98)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이견에도 자기위협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럴 수록 더 철저하게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기 쉽다. 편견에 갇히기 쉽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 편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편견이었다고 인지한 순간 편견을 버리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친구에게 건네는 위로' 에 있어서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상대에게 자기 마음이라도 편하게끔 위로에 동의해달라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요구하며 또 다른 짐을 지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위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사고방식은 삶의 여러 면에서 다양하게 나뉘고 다양하게 영향을 준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느냐는 보다 바람직한 삶의 지향점을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다. 시스템에 내재한 무의식적 편견에 맞서려면 성장형 사고방식을 쉼 없이 가동해야 함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교육자이자 저자 데비 어빙은 시스템 전반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집단적 차별을 흔히 아는 역풍과 순풍에 비유한다. 역풍은 크거나 작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시련으로,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의 삶을 힘들게 한다. 역풍을 맞으며 달리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더욱 힘껏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역풍은 느낄 수 있다. 반면 순풍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갈 더 큰 힘을 얻는다. 순풍은 중대한 역할을 하지만 인지하기 힘들거나 쉽게 잊힌다. 실제로 순풍을 맞으며 달리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게 될 텐데, 모두 자신의 기량으로 이룬 것인 마냥 득의양양해질 것이다. 순풍을 맞고 있는 사람은 반대로 역풍을 맞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ㅁ소할 것이다. 역풍을 맞는 사람은 순풍을 맞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들보다 더 열심히 달리겠지만 훨씬 더 느리고 게으른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다 지쳐서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은 자기 파괴적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말 것이다. 순풍과 역풍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풍을 맞은 사람만 비난을 받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역풍을 맞은 집단이 가장 부정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p. 143)
미국에서 동부에서 서부로, 또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비행기의 행시간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뉴욕에서 LA로 가려면 LA에서 뉴욕으로 갈 때보다 40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서부로 갈 때는 역풍이, 동부로 갈 때는 순풍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풍과 순풍의 비유는 미국내에서의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백인은 순풍을 유색인종은 역풍을 맞으며 성장하고 사회생활을 한다. 이 바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능력주의로 설명하려 든다면 이 자체가 편견이 될 수 있음을, 단순한 '능력주의'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개인화된 허구적 '능력주의'를 벗어나 시스템적 '공평'을 생각해야 할 때임을 깨닫게 된다.
대다수 교과서에서는 "노예제에 대해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상대로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사실상 아무 원인 없이 일어난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어째선지 미국에는 노예 400만 명만 있을 뿐 노예 소유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식의 설명이 교과서에 비일비재했다. 미국 역사에서 나쁜 일은 익명으로 일어났다" 널리 읽히는 역사교과서에는 대부분 제목에 '노래' 나 '모험' '승리' 등 희열을 암시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역풍 때문에 흑인 선조들이 뒤처진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역풍의 존재마저 후대에 설명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흑인과 백인의 격차가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듯이 보였다. (p. 165, 166)
미국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미국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역사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왜 미국을 사랑하는 행동에 포함될 수 없는가? 선택적 애국심은 순풍과 역풍을 무시하여 눈앞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해결책을 강구할 수 없게 만든다. (p. 166, 167)
주차벌금을 제때에 내지 않았을때 백인남성이라면 경고조치 되지만 흑인남성이라면 구속까지 될 수 있고, 경찰이 검문을 요청했을 때 백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겠거니 여겨지지만 흑인남성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겠거니 여겨져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이것이 과연 편견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바른 역사인식은 침략을 당한 기억이 있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지배를 했던 외국에서도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있던 역사를 드러내지 않고 없던듯이 여기는 것도 문제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순풍이 계속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뒤에 작용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잊게 된다. 개인 안에서 편견을 찾으면서도 시스템 자체에 편견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시스템의 일부라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은 받아들이면서 역풍에 맞서 힘겹게 달리는 이들을 게으르고 무가치하며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비난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사회 과학자들은 결국 시스템 전반의 고단한 삶 효과에서 편견을 지우는 것이 개인의 무의식적 편견을 지우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적 관점은 시스템적 관점보다 덜 위협적이며, 우리는 이익(순풍)보다 불이익(역풍)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p. 169)
사회적 시스템이 정말 중요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개인적 편견은 이슈에 따라 바뀌고 다시 바뀔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순풍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개인적 역풍이 능력주의와 맞물려 인지되지 못할때라도 사회적 역풍은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게 되곤 한다.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개인들이 마주하는 시스템적 역풍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회제도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개인적 편견을 고치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그렇게 사회 시스템을 공평하게 만들어가다 보면 개인들의 편견도 성장형 사고방식을 이용해 스스로 깨우쳐 나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교차적 정체성은 개인에게 독특한 형태의 순풍과 역풍을 야기한다. 누구나 다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아마도 하나 이상의 일상적 특권을 누릴 것이다. 자신의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금방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일상적 특권이 '일상적인' 것은 이것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거나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 특권이 '특권'인 것은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 작용한 순풍이 무엇인지 찾고 싶다면 당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p. 215,216)
사람에겐 다양한 입장마다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하는 말과 배우자로서 상대방에게 하는 말과 상사로서 직장에서 하는 말들은 그때마다 다른 가치관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특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한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조언을 건낸 것이 자식입장에서는 간섭이 되고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제자 입장에서는 월권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입장이 상대방이 봤을때 우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지 그래서 대화의 의미가 왜곡될 여지가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태도가 없을때 '일상'의 위치가 '특권'으로 비춰지고 편견으로 이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지.
온정은 호의를 베푸는 자신이 구원자라 여기면서 어떤 대의를 앞세우고 조직 사회로 파고 들어가 구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구원자라는 덫에 빠진 사람은 온정에 중독된다. 이제 모든 일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 된다. 자신이 구원자가 될 기회를 잃을까 봐 상대가 주도적으로 나서거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p. 275)
성장형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편견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구원자 유형' 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경험담을 통해 풀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을 나보다 아래로 낮춰보는 상태에서 도와주는 것은 그러한 온정주의는 결국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자기도취적 마음이랄까. 그또한 편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저 사람들은 나와 똑같지 않은 사람들이야 라는.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전 스스로 이렇게 말해요. 이제 성숙해져야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싶잖아 라고 말이죠. 선한 사람이 되는 건 힘들어요" (p. 410)
"가끔 강당하기 벅찰 때도 있어요. 해도 욕먹고 하지 않아도 욕먹죠. 점진적 변화와 총체적 변화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에요" (p. 411)
구축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힘들다. 힘들지 않다면, 적어도 가끔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믿는 사람일 것이다. 뜨거운 열이 되고 싶지 않다 해도 모든 노고를 오로지 뜨거운 열에 떠맡길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이해하고 지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서 빛을 밝혀 각자의 몫을 해낼 수 있다. (p. 415)
올바른 가치를 믿는 사람이 모두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구축하는 사람들도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음이 빛나고 환한 빛이 모이다 보면 열기를 띠게 되면서 그 열기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크게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젠더차별에 대한 편견을 읽다보니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생각났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을 읽으면서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차별주의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같은 내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 마음이 좀 힘들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좀더 부드럽게 조언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내가 모르던 내 안의 편견을 일깨움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지지의 방법도 생각하게 해주어서 고마웠다. 이런 좋은 생각들이 퍼지고 퍼지다 보면 사회도 점점더 공평해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