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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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스마트푼과 자동차 설계부터 의료, 노동, 도시계획까지

남자가 표준인 세상에서 여자는 어떻게 투명 인간이 되는가

출간 즉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젠더 '팩트풀니스'

 

 

'빅데이터' 라는 말이 익숙해진, 그야말로 데이터의 시대다. 그런데 이 넘쳐나는 데이터들 중에 인간에 관한 데이터 중에 인간은 남성과 여성 둘로 나뉘지만 데이터는 남성데이터와 여성데이터가 반반씩 차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데이터의 모든 기준값은 남성이 디폴트 였다. 저자는 편향된 데이터를 각 분야별로 조목조목 분석하며 얼마없는 여성들에 관한 데이터를 끌어모아 이를 증명한다.

당신이 이 책에서 읽게 될 많은 주장과는 반대로, 문제는 여성의 신체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신체에 부여하는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 의미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 18)

이 책의 목표는 정신분석이 아니다. 남성 편향적 도구를 생산하는 사람이 은밀한 성차별주의자인지 아닌지에도 관심이 없다. 개인적인 동기는, 일정 수준을 넘지 않는 이상,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데이터의 경중을 고려했을 때 모든 젠더 데이터 공백이 그저 하나의 큰 우연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p. 19)

남자를 디폴트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 사회구조의 근간임을 저자는 다양한 문헌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 에서 '인간이라는 부류로부터의 첫 이탈은 남성이 아닌 여성 자손을 낳는 것이다' 라며 여성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이탈이라고 얘기했다. 10세기의 바이킹 해골이 명백하게 여성의 골반을 가졌음에도 무기일습과 제물로 바쳐진 말2마리가 함께 묻혀있는 전사의 무덤이었기에 (여성이 전사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100년 넘게 남자의 해골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2017년 DNA검사결과가 나오고서야 여성의 골반임을 인정받았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2012년 세계경제포럼의 분석에 딸면 성굴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 즉 거의 모든 발언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성 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p. 28)

당신은 언어에 밴 남성 편향이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증거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사용자가 증가하는 언어, 전 세계 누리꾼의 90%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모티콘이다. 그런데 2016년까지 이모티콘의 세계는 이상하리만치 남성적이었다. (p. 29)

성굴절어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언어 자체에 깊이 배어 있다. 모든 명사가 남성 또는 여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어로 탁자는 여성명사이지만 자동차는 남성명사라고 한다. 변호사가 여자인 경우 변호사라는 단어 앞에 여성임을 뜻하는 접두어를 붙여야 한다. 이모티콘이 유행하기 시작했을때 다양한 이모티콘은 중성적 캐릭터로 표현한것 같지만 누가봐도 여성은 아니었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왜곡된 성 개념이 들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성평등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나마 새로 만들어지는 이모티콘 같은 신언어들은 이제 남성과 여성을 모두 표현하는 중이라고 한다.

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다. 백인이라는 점과 남자라는 점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른 정체성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보편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고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 데이터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성이 보편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소수자의 위치로 끌어내려진다. 특수한 정체성, 주관적 관점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여자들은 문화에서, 역사에서, 데이터에서 잊어도 되는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여자는 투명인간이 된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우리가 인류이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남성데이터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p. 50, 51)

여자가 사람취급 받게 된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법적 권리만을 따져봤을때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동등해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그러니 사회가 발달을 거듭해올 수록 기준은 하나로 점점 더 굳건해져 왔다. 애초에 사람의 종류가 남/여 둘이므로 기준도 둘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늘 기준은 하나였다. 오래되어 온 그 하나의 기준을 문제시하는 질문들은 늘 위험하고 불순하고 예외적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무차별적 단 하나의 기준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게 아닐까?!

<일상>

눈이 많이 왔다고 하자. 제설작업을 어디부터 하는가? 도로부터 한다. 도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다. 자가용을 소유한 가구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들은 제설작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주변을 아이와 함께 수시로 걸어야 다녀야 하는 보행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보행자가 미끄럽거나 얼어붙은 도로에서 다칠 확률은 운전자의 3배라고 한다. 대중교통의 인프라에 있어서도 여성의 이용현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대중교통의 이용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히 많은데도. 하지만 <일상>에서 교통분야의 여성데이터 부재는 화장실 문제에 비하면 차라리 심각하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똑같은 면적을 부여하는 것이 공정해 보이고 지금껏 그렇게 설계되어왔다. 위생공사 기준에도 면적을 50대50으로 분할하라고 명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 소변기와 칸막이가 같이 있다면 동시에 용변볼 수 있는 인원수는 여자화장실보다 남자화장실이 훨씬 많다. 아까까지 동등했던 면적이 갑자기 동등하지 않은 면적이 된다. 그러나 설사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동수의 칸막이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의 화장실 사용 시간이 남자의2.3배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이나 장애인, 노인을 동반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여성인구의 20~25%는 가임기 여성으로 언제든 생리 중일 수 있으며 그 경우 생리대를 갈아야 한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알면서도 동일 면적 화장실이 공정하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형식적인 평등만 외치는 독불장군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겉으로는 성평등해보이지만 사실상 남성 편향적인 화장실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겠다. (p. 76, 77)

인간의 기본적 생리욕구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화장실 문제과 생명의 위협과 직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UN에 따르면 여자3명 중 1명은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도의 경우 화장실이 집에 없는 경우가 많고 공중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여성전용도 없어서 성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폭행의 위험은 화장실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스정류장, 기차역, 주차장, 공원등 여성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공공장소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계자가 젠더를 고려하지 않을 때 공공장소는 남성 디폴트가 된다. 그런데 현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은 매일같이 그 신체에 가해지는 성적 위협과 싸워야 한다. 세계 인구 전체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데 현재 그 돌봄 노동은 주로 여자들이 무급으로 한다. 이것들은 특수한 관심사가 아니라 보편적 관심사다. 그리고 공공장소가 정말로 모두를 위한 곳이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세계 인구의 나머지 절반을 배려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이는 정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간단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대상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공공장소와 공공 활동 설계에 여성의 사회화를 반영하면 여성의 정신 건강 및 신체 건강이 보장되어 또 한번 장기적 비용이 절약된다. 한마디로, 공공장소를 설계할 때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빼놓는 것은 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현재는 고의든 아니든 우선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불의이자 경제적 무지다. 여자들은 공공자원을 이용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 우리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자를 제외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97, 98)

비용도 절감되고 남성/여성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왜 안될까... 몰라서 일까 알아도싫어서 일까...

<남자다움의 사회학>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일상에서 여자답다 남자답다 라는 편견이 남성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일상에서 소외된 여성의 현실들을 읽다보니 여성의 입장을 좀 생각해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남성이 남성의 입장을 생각할때에도 관점을 달리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보고 싶다.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 사는 남자들의 삶도 행복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직장>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랜 시간 일한다. 성별 구분 데이터가 모든 나라에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에 34분 더 일한다. 포르투갈에서는 90분, 중국에서는 44분, 남아공에서는 48분이다. 격차의 크기는 나라별로 다르지만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일관적이다. (p. 104)

여려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 책이다 보니 세계적 데이터가 자주 인용되는데 세계속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 데이터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었다. 좋은 의미건 안좋은 의미건 간에 세계적 경향을 살펴보는데 있어 소외된 나라보다는 그 데이터 속에 포함된 나라가 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은 희망을 갖게 했다.

여자들이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이 돌보지 않기' 와 '집안일 안 하기'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50년간의 미국 인구조사 세이터에 따르면 여자들이 한꺼번에 어떤 업종에 진출하면 그 업종은 임금이 내려가고, '위세'를 잃는다. 즉 여자가 저임금 노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노동이 여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p. 109)

'돌봄노동' 과 '가사'는 전업주부이건 일하는여성이건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전담되어진다. 경단녀는 어쩔수 없는 현실이고 일을 하고 싶다거나 경제적으로 일이 급한 경우이거나 어느 경우이든 간에 다시 일하려는 여성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는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의 저임금 노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돌봄노동과 가사를 하면서 동시에 일을 하려면 그런 일자리만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여자들의 상황은 더 나쁘다. 전 세계에서 최소한의 유급 출산 휴가조차 보장하지 않는 4개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급휴가 조차도 전체 직장 여성의 60%만 사용할 수 있다. 나머지 40%가 해고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미국의 산모 4명 가운데 1명은 출산 후 2주 안에 직장에 복귀한다. (p. 114)

일본에서는 아빠 쿼터제가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는 남녀 임금격차나 여성의 신체를 반영하지 않은 제도 설계 때문이다. 일본의 극단적인 노동문화도 상관이 있다. 휴가만 써도 상사가 얼굴을 찌푸리는 나라에서는 남자 육아휴직을 쓴다고 하면 창피나 불이익을 당한다고 아빠들은 말한다. (p. 119)

여러 나라의 사례들이 나오지만, 북유럽의 몇개 나라 빼고는 우리나라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극빈층이 많은 나라들의 경우를 차치하고라도 선진국이라 하는 영국이나 미국, 일본 보다 한국의 상황이 그나마 나아보였다. 사회문제를 다룬 외국책들을 읽을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나라만큼 살만한 나라가 별로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리고 몇몇 나라들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물론 증거를 바탕으로 한 육아휴직 정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여자의 무급 노동이 신생아에서 시작되어 신생아에서 끝나는 것도 아닌 데다 전통적인 직장은 가상의 '돌볼 가족이 없는' 직장인의 삶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늘 남자로 가정되어 있다-는 자식이나 노인 가족 돌보기, 요리, 청소, 아이 병원 데려가기, 장보기, 학교폭력, 아이 숙제봐주기, 목욕시키고 재우기, 이 모든 일을 내일이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의 삶은 단순하고 쉽게 두 부분, 일과 여가로 나뉜다. (p. 120)

유급 노동 문화 전반에 근본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전통적인 직장은 '돌볼 가족이 없는 노동자'에 맞게 설계되었지만 여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 남자가 그런 이상에 잘 들어맞을 확률이 높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혹은 어떤 회사도 양육자의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무급 노동을 하는 여자들에게 불이익 주는 것을 멈춰야 한다. (p. 126)

일과 여가.. 그렇다. 원래 직장과 가정은 일과 여가로 나누어졌었다. 그런데 여성에겐 이 '여가' 시간이 없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여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예 출퇴근도 없고 임금도 없어 노동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당연시 되어온 무급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동안 평가절하되어온 무급 노동 없이는 유급 노동도 불가능하다고.

'능력주의' 라는 것이 결코 평등하지 않은 '신화'에 가까운 생각이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충분히 친절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친절하면 전문가다워보이지 않는다는 사면초가에 빠지기 일쑤이며, 그동안의 역사에서 여자 천재들이 없었던 것은 데이터 공백의 결과로 '총명편견'을 만들어 왔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다고 사회생활 하는 여성이 남성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라면 그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의 사회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여성이 자라는 동안 받는 교육의 내용에서 주입되는 '여자다움'의 특징들은 사회생활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최근 읽은 <오만하게 제밥하라> 라는 책이 생각난다. 사회생활 하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환경에서도 문제가 좀 있다. 같은 직종에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환경에서 받는 영향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사무실 냉방온도는 표준남성 기준으로 여성의 신체에서는 추위를 느끼고 산업현장에서 화학약품들이 여성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데이터가 없다. 게다가 직장내에 만연한 성희롱 문화는 업계를 막론하고 너무 흔해서 그냥 문화인가 싶을 정도다. 어디를 봐도 항상 남자는 보편이고 여자는 특수 였다.

<설계>

여성이 사용하는 물건 여성이 생활하는 공간 에 대한 설계에서도 여성의 의견은 조사조차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핸드폰만 해도 남성보다 작은 여성의 손으로는 한손으로 사진찍는 것이 대부분 불가능하다.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데이터베이스에도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뚱뚱한 대머리 남자의 사진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렸다. 알고리즘에서는 '대머리' 보다 '부엌'이 더 강력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부엌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생김새건 여성이라는;;;

성 중립적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편향적인 제품은 기술업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평균 여자 머리에는 너무 큰 가상현실(VR)헤드셋, 남자 몸에는 딱 맞지만 여자에게는 '두꺼운 겨울 외투 위에 입어도 맞을 만큼 큰' 햅틱 재킷(촉감을 구현하는 재킷), 여자가 쓰면 렌즈 사이가 너무 멀어서 초점이 안 맞거나 '코에 안 걸려서 밑으로 떨어져 버리는' 증강현실AR안경, 또는 손목 밴드나 큰 주머니에 넣어서 차야 하는 마이크. 남성 디폴트는 특히 운동 관련 기술에 많은 듯 하다. (p. 227)

이뿐만이 아니다. 자동차안전평가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인형도 남자의 신체평균으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 안전벨트도 임부를 위한 것은 나온 적이 없다. 설계와 계획에서 여자와 여체가 무시되어온 사례들은 차고 넘쳤다. 여자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때에도 남자들의 생각만으로 '이러면 좋을거야'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하는데... 그게 참... 많이 어려운가;;;

<의료>

역사적으로 남체와 여체는 크기와 생식기능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없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의학교육은 오랫동안 남성 '표준'에 초점을 맞추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것에 '이례적' 또는 심지어 '비정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몸무게 70kg의 일반 남성'이 너무 많이 언급 된다. 마치 그가 남녀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자가 언급될 때는 표준 인류의 변형처럼 소개된다. (p. 248)

하지만 여체는 작은 남자의 신체와 같지 않다. 학자들은 인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에서는 물론이고 흔한 질병의 '유병률, 추이, 강도'에서도 남녀 차이를 발견했고 심장의 운동, 폐활량도, 질병마다 그 질병에 걸릴 확률도 남녀 차가 있음을 밝혀냈다. 남체와 여체는 세포 단위에서까지도 다른데, 지난 20년간 여자가 단순히 '작은 남자' 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되어 오고 있음에도 의학계의 젠더 데이터 공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크다.

여자들이 훨씬 많이 앓는 병에서조차도 동물시험에 암컷을 포함하지 않고, 진단을 함에 있어서도 여성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고통을 호소해도 심리적인 문제라며 우울증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영미권에는 정말 많은가보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의료> 부분의 내용과 동일하지만 보다 상세하게 분석한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의료계의 현실이 여전한 것을 확인하니 너무 씁쓸하고 답답했다.

<공공생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은 공공서비스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문제는 이런 예산 삭감이 사실 절약이라기 보다는 비용을 공공부문에서 여자들에게 떠넘기는 형태라는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7년 추산에 따르면 50세 초과 잉글랜드인 10명 가운데 1명은 공공서비스 예산 삭감 결과, 필요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돌봄 노동의 책임은 대개 여성에게 돌아갔다. (p. 301)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p. 311)

정부의 공공서비스 예산운용이 여자의 돌봄노동과 직결되는 구나 를 깨달았다. 예산을 줄인다고 그 수요가 사라지지 않고 결국 여성이 떠안게 되는 노동이라... 저자는 이 문제가 노동을 떠안는 것 자체보다도 전사회적으로 사회비용의 낭비임을 밝히고 있다. 예산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여성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즉 문제는 재원부족이 아니라 (젠더에 따른) 지출 우선순위라고 강조한다.

공공생활 문제는 여성정치인의 진출과는 관련이 있었다. 여성정치인의 존재여부가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법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정치인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도 그렇고...

<재난>

우리가 여성을 배제하는 진짜 이유는 인류 절반의 권리를 소수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354)

여자는 이미 전쟁, 팬데믹, 자연재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고 있다. 트라우마, 강제이주, 부상 및 사망은 남녀가 똑같이 겪지만 여자는 여성만이 겪는 피해까지 겪어야 한다. (p. 361)

여자는 전쟁에 뒤따라오는 사회질서 붕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소위 분쟁 후 상황에서도 강간과 가정폭력의 수위는 여전히 극도로 높다. (p. 362)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전쟁에서 생기는 난민도 있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많다. 난민이 되면 집단 수용시설에 일단 머물게 되는데 이 수숑시설에서의 위생과 성폭력 문제는 더욱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이상 갈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성들에게 가정폭력과 성폭력까지 겹쳐지는... 이럴거면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워지는;;; 저자는 다양한 재해의 사례들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여성들인 재난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성별/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해법은 분명하다. 여성 진출 공백을 매우면 된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의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로 돌아가보면 해답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있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기만 했으면 됐던 것이다. (p. 387)

읽는 내내 이정도였나...싶었다. 이렇게까지 여성이 소외되어 왔던가... 싶었다. 개인적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내용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이라면 공감가는 사례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여성만 화장실에 줄을 서고 여성만 가로등 없는 버스정류장이 무섭고 여성만 만원 지하철에서의 성추행을 감내해야 하고 여성만 돌봄노동에 의하여 경력이 단절되고 일상용품이든 산업용품이든 여성의 사이즈는 고려되지 않으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연구는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고 여성의 무급노동이 당연시되다 못해 사회적 재난이 겹치면 여성의 안전은 더욱 심각한 위협을 받는 현실 속에서 여권을 인정해달라는 말은 그동안 무시되어 온만큼 여자의 권리를 더 생각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부여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저자의 이 길고긴 이 두껍고두터운 하소연의 목소리를 과연 누가 들어줄 것인가... 작년 겨울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팩트풀니스' 여성버전이랄 수 있는 이 책이 그만큼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너무 과한 바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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