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마리 개
앙드레 알렉시스 지음, 김경연 옮김 / 삐삐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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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 세상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신 아폴론과 헤르메스가 어느날 술집에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다가 토론을 하게 됐다. 인간의 본성을 놓고 아폴론은 모든 피조물이 다 거기서 거기다 라고 하는데 비해 헤르메스는 인간들이 특별하다고 했다. 예를들자면 인간의 언어능력 같은 것을 이유로 들어... 그렇게 두서없던 토론은 내기를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약 동물이 인간의 지능을 갖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헤르메스가 말했다.

"난 동물이 인간들만큼 불행하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아폴론이 대답했다.

"어떤 인간은 불행하지만 어떤 인간은 그렇지 않아. 지능은 다루가 까다로운 선물이야"

"동물이 인간의 지능을 가지면 훨씬 더 불행하다는 데 일년 노예 노릇을 걸겠어. 어떤 동물로 할지는 네가 선택해" 아폴론이 말했다.

"인간 세상의 일년이지? 좋아. 내기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목숨이 다할때 동물 중 하나라도 행복하면 내가 이기는 거야" 헤르메스가 말했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때로는 최고의 삶이 나쁘게 끝나고, 최악의 삶이 좋게 끝나기도 하니까" 아폴론이 말했다.

"맞아. 삶은 끝날 때까지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 헤르메스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행복한 존재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행복한 삶을 말하는 거야? 아냐, 괜찮아. 어느 쪽이든 네 조건을 받아들일게. 인간의 지능은 선물이 아니야. 이따금 쓸모있는 골치거리지. 그래, 어떤 동물로 할래?

이런 대화를 할 때 신들은 쇼 스트리트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리하여 빛의 신 아폴론은 병원 뒤쪽 견사에 있는 열다섯 마리 개에게 '인간의 지능'을 허락해주었다. (p. 17~19 발췌)

동물병원에 있던 열다섯 마리 개들에게 인간의 '지능'이 갑자기 주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능' 이 주어진 것이지 '지혜' 나 '지식' 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개들이 그 능력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고 발전시켜 나갈 지 알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하고 모호한 능력이다. 능력인지 아닌지조차 사실 애매하다. 여하튼 개들은 본능에 따라 살던 삶에 대해 갑자기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또 중요한 점은 '인간처럼'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개들은 개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쪽과 능력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패가 나뉘게 된다. 개들에게 인간수준의 '지능'은 과연 선물이었을까?

그러한 변화 뒤 최악의 대립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개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무리가 정중하게 굴든 모호하게 굴든, 어떤 개들은 으르렁 소리를 내거나 이를 드러내지도 않고 대뜸 공격하려 들었다. (p. 36) 열두 마리 개는 자신들의 달라진 지위에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p. 37)

동물병원에 남기로 한 세마리의 개들 외에 열두마리 개들은 동물병원을 탈출하여 거리의 개들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거리의 개들은 이들 새로운 개들이 낯설고 그건 열두마리 개들도 마찬가지다. 자의식이 생긴 이 열두마리 개들인 이 모든 상황들이 당혹스럽다. 일반적 개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개들은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입장이 갈라지게 된다.

"아무도 내면의 말을 침묵할 수 없지만, 무시할 수는 있지. 우리는 옛날의 존재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어. 새로운 사고방식은 우리를 무리에서 멀어지게 해. 하지만 개는 개에 속하지 않으면 개가 아니야"

"난 동의하지 않아. 우리에겐 새로운 길이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걸 왜 이용하면 안돼? 우리가 달라진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p. 46)

개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게 되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개들의 자의식은 혼란스러워지고 급기야 지능을 무시하고 본능대로 살아가자는 쪽이 새롭게 생긴 능력을 활용해보자는 쪽을 공격하게 된다. 무참했던 살육전에서 살아남아 인간에게 구조된 매즈논은 거리가 아닌 인간의 집에서 살게 되고 인간의 특성을 관찰하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그는 인간의 언어를 안다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숨기기로 다짐했다. 이유야 어떻든, 인간들은 개가 말하는 것을 못 견디는 게 분명했다. (p. 69)

메즈논은 스스로 인간의 언어를 습득했다. 하지만 첫마디를 내뱉어 본 순간 바로 깨달았고 결심했다. 다시는 인간의 언어를 말하면 안되겠다고.

매즈논은 예전의 패거리나 잔당을 발견하고 싶은 욕구를 전달할 수 없었다.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마지막 남은 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그 감정은 외로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황폐한 느낌이었다. 하이 파크에 있으면 매즈논은 예전 은신처 친구를 만날까봐 경계하면서도 만나기를 바랐다. (p. 83)

무척 공감가는, 뭐랄까... 굉장히 인간적인 문장이라고 느껴졌다. 자신이 죽을뻔했던 장소에 찾아가는 심리도 친구였다가 적이 된 상대방을 다시 만나고싶은 복잡한 심리도 그냥... 이해가 갔다. 이것이 인간의 '지능'의 능력인 것이려나...

"멋지든 안 멋지든, 내가 이끌 거야. 싫으면 떠나도 좋아. 머무는 개는 제대로, 개처럼 살게 될 거야. 우린 문이나 나무를 나타내는 말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는 시간이나 언덕, 별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 전에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 조상들도 이런 언어 없이 잘 지냈고, 지금부터 옛날 말이 아닌 것을 말하는 개는 누구나 벌을 받을 거야. 우린 사냥을 할 거야. 우리 영역을 지킬 거야. 나머지는 우리하고 상관없어"

"난 내면에서 일어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어"

"그건 아무도 멈출 수 없어. 그냥 내면에 간직해"

"만약 실수로 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야" (p. 93)

그들은 짖었지만,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옛날 언어라고 기억하는 것을 흉내 내도록 강요받았다. 사실상 개 흉내를 내는 개였다. (p. 96)

반대파를 숙청한 개들은 개들의 본성대로 살고자 한다. 헌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개들을 흉내내는 개들이 되었고 혼란스러움은 다양한 모습으로 분출되었다.

아폴론과 헤르메스는 이런 개들을 지켜봤는데 이 둘의 내기가 올림푸스산 신들의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다른 신들도 저마다의 내기들을 하게 된다. 제우스는 아폴론과 헤르메스를 비롯한 신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다시는 이 개들에게 개입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제우스 본인은 슬쩍 개입을 한다. 신화속에서도 늘 그랬듯이.

애티커스는 기도를 시작했다. 애티커스는 이미 이상적인 또는 순수한 개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사유에 결함이 없는 개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고귀하다고 믿는 모든 자질을 이 순수한 존재에 덧붙였다. 예리한 감각과 절대적인 권위, 견줄데 없는 사냥 솜씨, 저항할 수 없는 힘이 그것이었다. 어딘가, 반드시 그런 개가 있을 거라고 애티커스는 생각했다.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개의 자질 가운데 하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개는 진실로 이상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애티커스가 마음속에 품고 있듯이, 개 중의 개는 실존해야 했다. 존재해야 했다. (p. 149)

개들의 언어를 거부하고 본능파의 우두머리가 된 개 애티커스의 모순은 인간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본능대로 살자고 개들을 이끌면서도 본인은 스스로의 자의식이 성장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제우스는 애터커스에게 마음이 쓰였고 죽는순간 마지막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기로 한다. 그 소원은 무리의 종말에 책임 있는 자가 벌을 받는 것이었다. 서로 물고 뜯는 살육전 후에 남아 있던 무리를 일거에 제거시킬 생각을 한 '개' 가 있었다.

한편, 인간의 집에 살던 매즈논은 생각하는 능력이 발달할 수록 인간이란 족속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헤르메스는 슬쩍 매즈논에게 특별한 능력을 추가로 부여한다. 그러자 갑자기 매즈논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보살펴주던 인간이었던 니라와 갈등이 심해져가던 매즈논은 이제 진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개입하지 않기로 했던 신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운명이 꼬여버리게 된다;;;

니라와 미구엘의 실들은 거의 니라와 매즈논의 실들만큼이나 가까이 얽혀 있었다. 니라와 미구엘은 매즈논보다 더 오래 살기로 되어 있었지만, 셋 모두의 생명의 실들이 너무 얽혀 있고 크기와 두께도 너무 비슷해서 아트로포스는 가위질을 하면 누구의 생명이 끝날지 확신하지 못했다. (p. 210)

생명의 실을 잣는 클로토, 각 필멸의 존재들이 갖게 될 길이만큼 실을 뽑는 라케시스, 실을 끊어 지상에서 그들의 시간을 끝내는 아트로포스 이 운명의 여신 세 자매는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그리스 신화속 신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변덕스러웠다. 얽히고 설킨 운명의 실들에 대해서는 간혹 의도적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매즈논의 운명의 실은 인간인 니라와 미구엘의 실과 너무나 가깝고 비슷하게 얽혀버렸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의 삶을 살게 된 매즈논 앞에 마지막으로 헤르메스가 나타난다.

동물병원을 탈출했던 초반에 개들의 언어를 즐기고 시를 읊던 개 프린스는 아폴론의 도움으로 개들 무리에서 홀로 도망쳐 나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긴 방랑의 시간을 낙관적이었던 프린스는 나름 즐거운 삶으로 영위하고 있었다. 프린스는 새롭게 획득한 능력으로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로 말장난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지능'을 부여받았던 개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개가 되어 있었다. 프린스에게 내기의 사활이 걸리자 아폴론은 프린스에게 불행을 선물한다. 이 노쇠한 개의 시력과 청력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프린스는 굴하지 않았다.

"내 운이 변한 게 느껴져" 헤르메스가 말했다.

"운이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건 맞아" 아폴론이 말했다. (p. 271)

그들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신이 아무리 힘과 지식과 섬세함을 지녔다고 해도 위반할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한쪽에는 불멸의 존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필멸의 존재들이 있었다. 헤르메스가 죽음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듯이, 필멸의 존재들은 죽음없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헤르메스는 그 차이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신들이 필멸의 존재들에게 품고 있는 은밀한 사랑의 핵심이었다. 죽음은 이 피조물들의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 있었다. 그들의 언어에 숨어 있고, 그들 문명의 뿌리에 숨어 있었다. 헤르메스는 그들이 내는 소리에서 죽음을 듣고,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죽음은 그들의 기쁨을 어둡게 하고 또 절망을 가볍게 해주었다. 헤르메스는 죽음을 갈망하기에 지상에 사는 모든 필멸의 존재를 매혹적이라고 여겼고, 심지어 때로는 그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감정에 값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감정'은 본성으로 보아 언어나 인간의 이해를 넘는 것으로, 헤르메스가, 모든 신이, 필멸의 존재를 없애버리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 손에는 권능이,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이 있었다. (p. 273~274)

헤르메스는 프린스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었다.

'개에게 인간의 지능이 주어진다면' 이라는 가벼운 판타지일 줄 알았던 작고 얇은 이 소설 한권이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을줄 몰랐다. '~답다' 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답게 산다' 라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인간만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으로, 인간처럼 의인화 시킨 동물이 아니라 인간만의 특성을 개들이 갖게 되었을때를 가정해보는 상상은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선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행복한 삶과 불행한 죽음에 대해 우화 아닌 우화처럼 읽히는 이 소설이 던져주는 묵직함에 머리도 묵직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가볍자면 또 한없이 가벼울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의 특성이기에 훌훌 털고 한번쯤 해봄직한 상상이었다고 여기며 책장에 책을 꽂았다. 일단은 프린스의 낙천성만 남겨두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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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쓸모 - 시대를 읽고 기회를 창조하는 32가지 통찰
강은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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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읽고 기회를 창조하는 32가지 통찰

"예술은 반드시 새로운 길을 만든다"

단단하고 창조적인 삶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예술사용설명서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예술은 어렵다? 아니다? 에서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예술은 쓸모가 있다? 없다? 에서 혹시 없다 로 쉽게 대답이 나온다면 필시 예술을 어렵게 느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예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해온 저자는 예술을 여유와 사치의 범주에서 끄집어내어 일상을 사는 모두에게 쓸모있는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또다른 접근법을 제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가 있다는 말은 곧 상품가치를 의미할진대, 어머어마한 경매가로 나와 상관없어 보이던 예술품들을 내가 쓸모있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절로 마음이 끌리지 않겠는가.

예술은 다람쥐 쳇바퀴돌듯한 일상에 효과적인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로 심미안, 카타르시스, 감각의 확장, 욕망의 이해, 창조성, 통찰 을 제시하며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도록 해준다. 구체적인 사례로 당대를 매혹시켰던 전략적인 화가들을 소개하고 브랜드화 되기까지 한 과정들을 알려준다. 그렇게 점점 더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예술을 통해 삶의 자세를 반추하도록 함으로써 예술의 쓸모는 완성미를 거둔다.

보통 창의 성이라고 하면,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적 예술가도 스승이든, 동료든, 라이벌이든 영향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까요. 창조와 혁신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p. 44)

창의적으로 창조한다는 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발명'에서도 마찬가지다. 발명에 관한 책을 읽어도 비슷한 개념으로 풀이되어 나오곤 한다. 앞선 선배들의 시행착오가 없다면 시대를 변화시킨 발명들도 없었을 거라고. 누군가의 실패가 쌓이고 쌓여 과학적 발견도 기술적 발명도 가능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도 스스로 알아서 갑자기 확 잘 그릴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배우고 끊임없이 노력했을때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미술관에 걸리게 될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500년 전 작품을 가져와 현대적 메시지를 담아낸 쩡판즈, 그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혼재된 현대 중국의 모순된 현실을 날카롭게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고전 회화를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해 단순한 패러디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담아낸 예술적 성과입니다. (p. 52)

혁신적인 패러디그림으로 어마어마한 경매가(약250억원)에 낙찰됐다는 중국의 화가 쩡판즈의 '최후의 만찬'을 찾아보았다. 흐음... 나같으면 그돈을 주고 샀을 것 같지 않은 그림이었다;;; 아무리 거창한 메시지를 담아 풍자했다고 해도 그림은 일단 보기에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 내가 예술을 보는 방식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면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준 화가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였다.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선 냉철한 현실 인식만큼이나, 낭만도 필요한 법입니다. 알마 타데마는 자기 그림의 무대인 고대 로마에 대한 기록만 노트 수십 권 분량을 가지고 있었고, 그림에 필요한 꽃들도 직접 공수할 만큼, 자기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알마 타데마는 '대리석의 화가' 라고 불릴 만큼 대리석을 많이 그렸는데도, 차갑게 느껴지기는커녕 따스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p. 138)

개인적으로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 다른 수식어 다 필요 없고 일단 보면 그냥 와~ 예쁘다!

화가가 활동했던 19세기 산업화되어가던 유럽에서 타데마의 그림은 평단에선 그리 호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새로운 화풍을 전혀 따르지 않은 고전적인 그림은 그저 기술만 뛰어나다고 평론가들은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삭막해지고 경직되어가던 당시에 타데마의 그림은 낭만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문화생활도 주로 책을 읽는 것으로 채우곤 하는 나이지만 때로는 찐한 낭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화면속 배우들의 로맨스에 가슴떨려 하기도 하고 감동스토리에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기도 한다. 타데마의 그림도 비슷하다. 고대그리스로마 책에 빠져들어 있을때 타데마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야말로 숨멎 의 순간이었다. 너무 좋았다. 책속 시대가 그림에서 뛰쳐나올 듯 했다. 타데마의 그림은 내게 아주 쓸모 있는 작품들인 셈이다.

어쩌면 영영 묻혀버렸을지 모르는 화가, 그러나 명작은 결국 그 반짝임을 숨길 수 없는 법이죠. 그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집니다. 어느 눈 밝은 사람의 우연한 발견은 그야말로 나비효과를 낳았고, 명화 하나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이야기 덕분에 페르메이르는 시대를 뛰어넘은 위대한 예술의 아이콘이 되었지요. (p. 176)

페르메이르의 유명한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기에 상상의 산물이었지만 그럴싸한 스토리에 저절로 빠져들었더랬다. 그림은 참 묘한것이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다. 보는이에게 제각각의 상상을 발동시킨다. 저마다 다른 스토리를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은 매력적이다. 엄청난 크기의 대작이나 걸출한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 소소한 매력에 더 끌릴때가 많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가 런던을 평정한 시기, 파리는 무하의 도시였습니다. 그는 포스터 업계의 총아였고, 거리의 가판대에는 그의 작품이 모네나 피카소의 작품과 나란히 놓일 정도였죠. 이 시대의 포스터는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눈길이 저절로 갈 만큼 높은 예술성을 겸비했습니다. (p. 182)

검색해보니 올해 초에 알폰스 무하 전시회가 있었다. 하아... 알았다면 가서 관람했을 텐데... 아쉽다... 전시회를 갔었다면 무하의 포스터는 잔뜩 보고 올 수 있었을텐데... 언젠가 체코에 가게 된다면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연작' 시리즈도 꼭 보고 싶다. 포스터로 성공하였으나 말년에 자신의 인생역작이라며 남긴 그 작품들은 왠지 감동적일 것 같다...

페르메이르의 그림도 그렇지만 무하의 포스터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인 듯 하다. 가방이나 폰케이스등 소품 배경그림으로도 훌륭하다. 나는 이렇게 일상에 활용될 수 있는 그림들이 좋다. 예술적인 가치는 잘 모르더라도 내게 예술의 쓸모는 아무래도 편안함 쪽인 것 같다.

구상화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라고 말하고, 추상화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이해하라고 말한다면, 마그리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계속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그의 그림은 끊임없이 우리의 선입견에 딴죽을 걸고, 회화가 보여주는 대상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 속임수를 씁니다. (p. 258)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처음 보면 재미있지만 자꾸보면 어렵다. '이미지의 반역' 이라는 유명한 그림엔 덜렁 파이프 하나만 그려져 있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써있는 글씨때문에 관람객은 혼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파이프 그림을 보고 파이프가 아니라는 글씨를 보며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생각하다보면 왠만한 추상화보다 더 어렵게 느껴져서 당황하게 된다. 쉽고 예쁜 그림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하지만 왠지 모를 매력에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저는 늘 장 시메옹 샤르댕의 이름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꺼내면 대부분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샤르뎅이 누구냐는 반응을 보이거나, 고흐, 클림트, 페르메이르 등 쟁쟁한 화가들을 제치고 왜 지극히 평범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정물화 작가를 좋아하냐는 반응이죠. 그러나 저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샤르댕의 정물화에 끌립니다. 그가 담아낸 일상의 풍경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애정이 갑니다. (p. 316~317)

예전에 그림을 좀더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으로 '내가 그림을 산다면 어떤 그림을 살것인지'를 생각하며 미술관을 둘러보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뒤로 나는 그림을 볼때마다 그 기준을 생각해서 판단해보곤 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멋있지만 내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진 않다. 루벤스의 그림이 웅대하지만 내방벽에 걸어두고 싶진 않다. 경매가가 아무리 높다한들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림들을 사고 싶진 않다. 내가 사고 싶은 그림은 내가 일상을 지내는 공간에서 오며가며 볼때마다 기분좋게 즐길 수 있는 그런 그림이길 원한다. 그런점에서 저자가 샤르댕의 정물화에 끌리듯이 나는 '클라라 페테르스'의 정물화에 끌린다. 클라라 페테르스 의 정물화는 실물보다 더 멋져 보여서 정말이지 내가 본 정물화 들 중에는 최고다. 내가 그림을 살 수 있다면 나는 클라라 페테르스의 정물화를 사서 집에 걸어두고 싶다.

본문에서 언급된 그림들이 다 수록된 것이 아니라 아쉽기는 했지만 책을 읽다가 그림 검색해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그림관련 책은 역시 그림보는 맛이 있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림하나하나들이 모두 반가웠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보고 저자가 풀어내는 생각을 읽어보며 내게 어떤 쓸모가 있나 찾아보는, 가볍고 쉽고 재밌는 유용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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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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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zeihen 죄송합니다

vom umgang mit schuld 누구의 탓으로 돌리다

라는 독일어 원제에 대한 번역기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

본문중에 나오는 Verzeihen 는 '용서'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인터넷 번역기는 왜 '죄송합니다'라고 뜻을 알려주느냔 말이다. 용서는 용서를 하는 주체가 하는 말이고 죄송합니다는 용서를 받는 주체가 하는 말인데... 여하튼 이 책은 '용서' 에 대한 저자 개인의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열네 살때 저자의 모친은 딸을 자신의 두번째 남편이자 딸의 새아버지 곁에 남겨두고 세번째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갔다. 그리고 철저하게 연락을 끊었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저자는 모친과 연락을 하긴 하지만 내면의 갈등은 끊임없이 저자를 고뇌에 빠뜨린다. 자신의 엄마를 용서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답을 할수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모친이 과거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고 자신도 그 시간들에 대해 묻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답을 구하고 싶었고 철학자들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을 만나가며 탐구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끝까지 추적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용서하는 행위는 정의롭지도, 경제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용서는 말 그대로 하자면 복수와 보상의 포기다. 용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용구하지 않는다. 단념하고, 중지하며, 꾸짖기를 멈춘다. 상처를 가리키는 손이, 타인을 향한 책망이 용서와 더불어 끝난다. 그렇기에 용서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법의 저 너머에서 이루어진다. (p. 16) 용서는 선물이다.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관용의 미덕에,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겸양의 미덕에 의지하는 행위가 용서다. (p. 18) 용서하는 사람은 복수의 갈망이나 씁쓸한 보상의 욕구에 지지 않고 자제를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정확히 계산하여 되갚아주겠다는 마음의 포기가 바로 그의 선물이다. (p. 19) 용서가 현실적일 수 있으려면, 용서의 개념이 애당초 배제시킨 그 조건들을 통해 용서의 순수성이 '더럽혀져야'한다. 다시 말해 조건적일 때만 용서는 현실적이 될 수 있다. (p. 28) 이 책은 수많은 자기계발서들과 달리 성공적인 용서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용서의 중요한 조건들을 비행위의 무목적적 핵심과 연결시키고자 하며, 조언 대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__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__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__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p. 29)

답을 알려주는 책들은 차라리 읽기 쉽다. 정말 읽기 어려운 책은 질문하는 책이다. 다 읽었음에도 답은 없고 질문만 남는 책이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필요한 질문을 독자에게도 함께 묻는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한 고민을 '용서'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함께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과정은 저자에게도 읽는이에게도 무척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이 주제가 어려움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이 철학적 고민은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아이히만의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 어떤 행위의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한 인간을 미혹하여 살인을 저지르도록 만든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때문에 그 행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해가 결코 용서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p. 40)

무기력과 쇼크의 단계까 지나가 적나라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알고 싶었어요. 어떻게 했기에 한 인간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p. 78) "이해를 하면 무조건 감수해야 할 때보다 견디기가 수월하죠" (p. 81) "나는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아요.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지도 않아요. 용서란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p. 83)

저자의 첫번째 질문,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이해하는 것이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해는 이해고 용서는 용서다. 이해해야 좀더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라면 '왜' 그랬는지 이해의 기반을 쌓아야 하고 이해하면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 성격이라면 이해의 여지 없이 그냥 미워하면 된다. 다만, '용서'는 이해 이후에 가능한 범주이다.

저자는 총기난사로 갑작스레 딸을 잃는 한 어머니를 만난다. 그녀는 범인을 조사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 이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용서는 할 수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일단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저자에게 용서는 아직 닿을 수 없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용서는 사건이 아닌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부정을 용서한다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부정이 부정하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p. 96)

용서는 말 그대로 신뢰를 바탕으로 주어진 선불인 것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의 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주체와 죄의 이런 분리는 신뢰의 표현이며, 주체의 개선 가능성을 믿고 지급한 신용 대출의 표현이다. 용서의 하늘 아래에서는 죄인도 자신의 위법이나 과실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이렇듯 죄인을 해방시키는 이 단어를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시킨다면 이러할 것이다. '너는 너의 행위보다 나은 존재다'" (p. 100)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철저히 종교적 사랑이 바탕에 깔린 표현이다. '용서'를 할 수 있다면 그 용서가 이해는 할 수 없어도 행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신은 자기희생을 통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책감을 인간에게 심었지만 그리스의 신들은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락하면서 모든 죄를 스스로 떠안았다. "이 그리스인들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가책'을 떼어버리기 위해, 영혼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오랫동안 그들의 신들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독교가 자신의 신을 이용해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분별력을 보인 것이다" (p. 113)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으며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그리스의 신들은 신이라서 존경할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니까 그나마 용인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파렴치하다.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들의 이용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해 책속의 저 문장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도덕적 죄 역시 갚을 수 없을 때가 있다. 흔히들 말하는 배상을 통해서도, 위자료를 통해서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회의 고백을 통해서도 갚을 수가 없다. 바로 그렇게 근본적으로 절대 갚을 수 없는 죄야말로 용서의 대상이라고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말했다. 경제적 부채 삭감과 도덕적 죄의 사면은 이 점에서 비슷하다. 용서할 수 없는 죄만이 배상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용서할 수 있는 죄는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p. 116)

저자는 한나 아렌트와 자크 데리다의 문장을 자주 인용하고 있어서 인용된 문장들을 좀더 깊이 알려면 이 두 철학자의 책들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 독일 사회에서는 쉽게 읽힐지도 대중적으로 많이 읽힐지도 모를 이 철학자들의 철학이 내게는 익숙치 않다.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다.

여하튼, 무조건적인 용서는 결국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자신의 연인을 살해하고 종신형을 살고 있는 수감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노인이 된 이 수감자는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을 용서했어도 자기자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두번째 질문,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용서에 사랑이 필요한것 같긴 하다. 사랑이 있어야 용서를 시도해볼 수라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단순히 표현할수 없는 복잡미묘한 과정이다. 여전히 용서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망각'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필수 생존 전략으로 선언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망각이란 "하나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억제력은 우리의 생각을 해방시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치르는 싸움을 이겨내고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고 했다. "망각은 마치 문지기처럼 정신의 질서, 안정, 예법을 관리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 즐거움, 희망, 긍지도 없고, '현재'도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억제장치(망각)가 손상되거나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교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한다" (p. 150, 151)

용서하는 사람은 일어났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며, 결코 건망증을 앓는 것이 아니다. 일어났던 일은 흔적으로 기억에 고이 보관된다. 용서를 통해 변하는 것은 이 흔적의 심리적 배역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무거운 죄나 어쩔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그 흔적은 역사적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는다. (p. 166)

트라우마라는 것은 어찌보면 망각하고 싶은 것을 망각하지 못해서 겪는 고통이다. 나이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하는 나이지만 사람에게 불완전한 기억은 생존에 필요한 측면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 여기' 에 집중하며 살라는 불교적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 못할바에는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지금, 여기' 에만 집중해야 그나마 살 수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괴롭다면 의미를 없애는 수밖에 없다. 용서를 하건 안하건 때때로 망각은 필요하다.

"죄책감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죄를 씌웁니다.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죄책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짓눌려 살지요. 자식들에게 그 죄책감을 물려줘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었답니다. 우리 과거는 우리끼리 간직하고 싶었어요" (p. 225, 226)

저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개인의 과오가 아니라 세계적 과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용서'의 의미는 일생을 관통하는 화두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가족이다. 자신의 후손들이다. 자식들에게 좋지않은 과거는 굳이 물려주고 싶지 않다. 용서는 생존 다음의 문제다.

저자의 세번째 질문,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이해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사랑에는 감정이필요하지만 망각은 저절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런면에서 '용서' 가 가장 필요한 것은 '망각'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용서에는 긴___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는 오랜만의 가족파티에 엄마를 초대한다. 자신의 두 자녀를 비롯한 가족과 새아빠 친아빠가 함께한 그 파티에.

여동생이 몇 년 전에 내게 던졌던 질문을 곱씹었다. "엄마를 용서했어?"

용서했을까? 정말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용서했어, 완전히' 나는 생각했다. 그 반대가 진실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엄마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용서했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 나의 비유가 어떤 부분에서는 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은 대충 '나 담배 끊었어' 같은 말과 비슷한 정도의 진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담배를 끊었다는 말이 두 번 다시 담배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말일까? (p. 229)

나는 내 입으로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엄마를 용서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상상할 수도 없다. 진짜 용서는 언어 행위와 결합되지 않는다. 용서는 침묵하며 일어나고, 행동으로 드러난다. (p. 230)

저자의 엄마는 파티에 왔고 저자는 그런 엄마를 환영하며 맞았다.

저자의 엄마는 저자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당연히 사과한 적도 없다. '용서'는 오직 저자만의 고민이다.

저자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용서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엄마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받고 싶었고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 현재에 충실하려고 노력중이기에 언어로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행동으로 그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저자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단 한번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저자의 '용서'에 대한 고민이 아직 계속되고 있을 것 같다. 그 개인적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보며 스스로 치유해가는 모습같아 마음 한켠이 짠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짠한 마음으로만 읽기엔 좀 어려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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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주는 사회학자의 생존형 과학 특강
윤석만 지음 / 타인의사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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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슈가 되는 과학적 지식들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법

방대한 과학의 흐름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아우른, 나의 첫 교양 과학수업

표지 中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과학적 이슈가 낯설지 않은 뉴스로 회자되는 세상이다. 과학적 지식들을 일반 대중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상식서처럼 쓰여진 책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뉴스로 접하든 상식으로 접하든 그때의 과학은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떨어져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는 일상에 필요한 시대가 되었으며 과학적 지식들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시기에 사회와 과학의 적절한 통섭을 경험할 수 있는 책으로 유용한 책이다.

현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기자로서, 문명과 역사를 인과 관계로 설명하는 사회학자로서 제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지식' 과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 7) 자연의 원리를 이론화한 과학과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은 그 자체로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과학이 해석되고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죠. (p. 11) 과학 이론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그 과정에서 굳건히 방어에 성공한 이론은 정설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 왕좌를 차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이론은 반박할 수 있어야만(반증가능성) 제대로 된 이론입니다. 반박이 불가능한 것은 신의 뜻이거나 종교적 교리인 것이죠. 반증될 수 없는 의견, 절대적인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린 사고를 갖고 '지적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의 시작입니다. (p. 12)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의 발자취는 과학적 발견과 함께 이루어져 왔고 범위가 확대된 것은 시장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지금은 비행기로든 배로든 세계 어느곳 마음만 먹는다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마다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소통법이 발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수는 있으나 이해하진 못한채 엮어진 세계는 사실 서로 더 불통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보일때도 있다. 그럴때 필요한 것이 '과학적 사고' 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고방식의 기저에 '지적 겸손' 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15가지 과학적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한 이 책은 그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종교와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신념과 실증의 차이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종교는 '믿고 보는 것'이며, 과학은 '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신념을 재판대에 올리고, 과학은 실증적 근거로 판결을 내립니다. 칼 포퍼는 과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새로운 증거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어야만 과학'이라는 게 포퍼의 설명이죠. 절대 불변의 진리는 종교적 신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 26)

저자의 쉽게 풀어쓰는 방식에는 영화의 활용도 두드러지는데 책을 읽다말고 저자가 말한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를 봤다. '다빈치 코드'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영화를 보면서 과학과 종교의 입장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덕분에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볼 영화도 찜해놓았다. '천사와악마'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 '인페르노' ㅎㅎ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총량은 그들보다 훨씬 많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우린 여전히 독선과 맹목으로 진리를 추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악용하는 것은 주로 정치인이거나 그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SNS에서 대중적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 '셀럽'들일수록 그렇습니다. 논란이 될 만한 발언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다른 생각'을 '틀린 사실'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나서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심판하죠. 진리의 독선은 폭력으로 쉽게 전이돼 신념의 제단 앞에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요? 애초 자신을 선과 정의의 편이라고 주장했던 주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선을 가장해 대중을 홀리며, 독선적 주장으로 시민들의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맹신하게 만듭니다. (p. 28~29)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열린 사고' 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 천동설과 지동설로 대비되는 중세에만 있었던것 같은가? 지금의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이성적인가? 라는 저자의 질문에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홀릴 때가 많다.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과학적 사고가 꼭 필요한 이유다.

아주 단순히 생각해보면 빛보다 빠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이죠. 설령 빛보다 빠른 무언가 있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학의 큰 원칙을 위배합니다. 바로 '인과율'입니다. 모든 자연 법칙의 근본 원리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쳐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과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인과율을 깰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설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p. 63)

예전보다 판타지적 요소를 가진 드라마들이나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판타지적 요소 중 하나가 시간여행이다.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과학적 사고에선 불가능하다. '인과율' 에 대해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상상했을때 항상 뭔가 특별한 발견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여전히 '시간여행' 에 대한 상상이 접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과학적 사고 방식을 습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ㅎ 그리고 인과율을 설명하는 저자또한 마무리는 SF였다.

결국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상상력'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그리느냐에 따라 내일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SF는 'Science Fiction' 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Social Fiction'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비단 기술의 발달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전체를 바꿔놓기 때문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SF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p.65~66)

과학적으로 상상하는 것, 사회적으로 과학하는 것, Social Future 가 Science Future 와의 간극을 너무 벌리지 않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그런 SF를 나는 꿈꾸고 싶다.

'양자(量子)'의 '量'은 '헤아리거나 짐작한다'는 뜻이다.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연속적인 값을 갖지 않기 때문에 '양자'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p. 71)

'양자역학'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굉장히 어렵게만 느꼈었는데, '양자' 라는 단어를 들어도 뭔가 숫자적이고 양적인 그런 의미인줄 알았는데, '헤아릴 양' 이라는 한자로 썼구나를 알고 나니 뭔가 철학적으로 다가온다. 과학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낄때마다 과학이 결국 삶과 닿아있구나를 생각하게 되곤 한다.

특이점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 역시 모릅니다. 그저 특이점이란 것에서 빅뱅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우주의 역사가 시작됐을 뿐입니다. 사실 빅뱅이라는 어감과 달리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현상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보니 빅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빅뱅이 있고 38만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빛이 생겨났습니다. (p. 99)

1949년 우주 팽창을 부정하던 프레드 호일이라는 천문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주가 한 점에서부터 시작됐고 점점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을 비판할 목적으로 빅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주가 한 순간에 펑 하고 터졌다'는게 말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빅뱅이란 말로 우주 팽창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p 102)

최근 특이점에 대한 SF소설을 읽었었다. 소설 속 특이점은 미래의 한 시점이었다. 지금의 당연한 것들이 사라진 그 어느 시점.

하지만 저자가 알려준 특이점은 우주기원 속 과거의 한 시점이었다. 처음과 끝 같았다. 특이점에서 시작해서 특이점으로 끝나는... 우주의 역사란 참... 상상 그 이상이다;;; 한순간에 펑 하고 이해되는 때가 올 수 있을까...

북극성 역할을 하는 별은 늘 변합니다. 약1만2000년 후에는 직녀성의 별이 북극성이 될 예정입니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씩 틀어지기 때문인데요, 빙글빙글 도는 팽이의 축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구의 자전축은 2만~2만5000년 주기로 변합니다. 작은 곰자리의 북극성 임기가 절반 가량 지난 셈이죠. (p. 118)

하늘을 보며 길을 찾던 사람들은 늘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북극성은 늘 기준점 같은 별이었다. 하지만 수메르 이전 역사를 다룬 책에서 북극성 이전의 기준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고대의 역사가 외계인과 연결지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구의 운동과 별의 움직임이 있었다. 북극성이 북극성이 아니게 되는 때 인류는 아직 생존해 있을까? 별의 기준이 바뀐 그 시대에...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와 이를 통한 '협업' 때문입니다. '공동체'라는 경쟁력을 만들어낸 거죠. 집단에서 나오는 협동의 힘이 다른 종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가지게 했고 결국엔 지구의 주인 노릇까지 할 수 있던 겁니다. 자연에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어린 맹수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할 만큼 약하지만, '공동체'란 경쟁력을 만들어내면서 지금은 지구 밖까지 우주선을 쏘아올릴 수 있는 존재로 우뚝 섰습니다. (p. 145)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지금 현생의 인류보다 컸다고 한다. 뇌용량의 크기는 똑똑함의 크기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봤자 집단을 이기지 못한다고나 할까. 진화관련 책을 읽으면 늘 확인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의 개체로서는 오히려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어떠한가? 공동체의 붕괴는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 것일까...

오늘날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무지의 영역을 좁히고, 그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무지의 영역을 극복해왔던 과학이 이제는 종교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려 합니다. (p. 152)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든 과학이든 변화될 미래의 모습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p. 154) 결국 해답은 다시 인간입니다. 우리가 무슨 신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우리도 그런 관념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을까요. (p. 156)

종교를 믿건 안믿건을 떠나 여하튼 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신은 결국 인간의 상상속에 존재한다. 종교도 과학도 인간의 상상력속에서 발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는 시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신의 영역에 과학이 침범할 수 없다는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결국 돌고돌아 답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 있음에 동의한다. 4차산업혁명을 단순히 산업혁명의 연장으로 봐서는 곤란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저자의 말마따나 4차산업혁명이라기 보다는 4차혁명이라고 써야할 만큼 미래는 산업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류가 첫 출현한 이후에도 지구는 소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했고 1만2000년 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간빙기은 '홀로세'Holocen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완전하고 조화로운Holo' '시대cene'라는 뜻입니다. (p. 167)

'홀로세'라는 말이 그동안 외롭게 들리기만 했었는데;;;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 라는 의미를 들으니 왠지 더 안타깝게 들리는;;; 이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를 인류는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기후변화는 점점 더 체감되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녹이는 빙하가 해수면을 높이는 것보다 해류의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빙하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과학적 예견이 왜 널리 회자되지 않는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약화된 기원전 8세기부터 진의 통일(기원전221년)까지, 약 500여년의 기간을 춘추전국시대라 부릅니다. 보통 우리는 춘추와 전국을 합쳐서 부르지만 두 시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춘추시대의 전투는 2~3일이면 끝났고 상대가 항복하면 군사를 물려 목숨을 살려줬습니다. 명분을 중시해 적장도 인격적으로 대했고요. 춘추의 정신이 막을 내린 건 마지막 패자인 월왕 구천 때입니다. 와신상담 이후 전국시대는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싸움이 수백 년간 계속됐습니다. 춘추의 명분과 예법은 사라졌고요. 학문 대신 병법이 활개치며 손빈,방연 같은 전략가들이 출세를 했죠. 전국에 춘추의 정신이 무용(無用)이듯,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정의, 명분과 이상이 설 자리는 부족해 보입니다. 비전과 철학을 보여주는 리더보다 승리의 술수만 논하는 책사들이 인기입니다. (p. 229, 230 발췌)

고대 동서양의 역사는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 트로이전쟁을 위시한 호메로스 서사시 시대에 중국땅은 춘추전국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일리아스 속 영웅들이 예의를 갖춰 마치 스포츠경기하듯 전투를 치뤘듯이 춘추시대 속 장수들또한 예의를 갖춰 전쟁을 치뤘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이 무너졌을때 인간들의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그러고 보면 인류사는 늘 비슷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철학이 있는가? 좀 뜬금없는 결론일수도 있지만, 온갖 실용적 문구만 모아놓은 고전짜깁기 책보다 고전원전 그 자체를 읽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남녀의 성별을 가르는 Y염색체는 남성의 고환을 만듭니다. Y가 없으면 난소가 생겨 여성이 된다는 이야기죠. 다시말해 이 유전자가 없으면 생식 기관은 난소가 돼 여성이 되지만, 이 유전자가 있으면 고환을 만들어 남성이 됩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Y가 들어간 남성은 여성의 변형이란 뜻입니다. (p. 241) Y는 X에 비해 돌연변이가 나올 확률이 큽니다. 이는 유전적으로 Y가 불안정하다는 뜼이죠. 반대로 X는 돌연변이 가능성이 낮고 자가 치유의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p. 242)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전능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을 질투했던 것은 불완전한 한계 속에서 나오는 인간만의 도전과 불굴의 의지 대문이었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고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가 가진 최고의 DNA일 것입니다. (p. 244)

유전자 이야기가 나오면 늘 미래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되기 마련이다. 유전자의 기본 베이스가 여성형이라는 문장에서 '가이아' '어머니'의 의미가 새로운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진화의 한 측면은 어쩌면 돌연변이의 발달사였다. Y염색체의 불안정성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해진다. 발달일지 소멸일지...

이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처럼 되는 것입니다. (p. 266)

우리는 어떻게 해야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더욱 높은 시민의 교양과 지혜를 갖춰야만, 인간을 따라 배우는 인공 지능 역시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본인 생각만 옳다고 강조하는 지나친 '자기확신'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마치 '적'을 대하듯 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거짓'으로 모는 행태는 타인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습니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서 물려줘야 할 유일한 유산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품격 있는 언어 입니다. (p. 282,283)

AI 가 어쩌구 4차산업혁명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늘상 기계에게 생존을 위협받는 인간을 생각하곤 한다.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는 기계를 두려워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빅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에게 인터넷에서 알아서 배우도록 했더니 편견과 욕설로 난무한 지능을 얻게 되서 인터넷을 통한 습득을 정지시켰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내뱉고 있는 언어들로 인공지능을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인공지능의 빠른 속도보다 더 위험한 것이 아닐까? 인간만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 그것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그 뒤에 숨은 진짜 원인을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과학적으로 생각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드러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이성적으로 가설을 세운 뒤에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사회학은 일련의 사건과 현상에서 경향성을 찾아내 일반화하고, 그 뒤에 숨은 구조적 요인을 밝혀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과학과 사회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앞으로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적 겸손' 을 갖는 일입니다.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 몸에 한층 더 스며들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책을 마칩니다. (p. 300,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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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밥 버먼 지음, 엄성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지구는 언제 사라질까?

과학자가 제대로 알려주는 우주적 차원의 종말 시나리오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는 앞표지 보다 뒤표지에서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도 그런 경우다.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의 역사' 라는 부제에서 내가 꽂혔던 부분은 '역사' 였다. 지구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재앙'과 '종말'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읽을 수 있을 책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진 않았다.

이 책의 원제는 'EARTH - SHATTERING 세상이 깜짝 놀랄' 이라는 숙어적 표현이던데... '지구종말'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 하다. '거의 모든 것의 종말' 이라기 보다는 천문학 전문 작가가 생각해본 우주적 시점의 지구 격변 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전 지구적인 대격변 내지 재앙들을 사실에 입각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p. 10)

대격변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결과 지구와 그 생명체들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대격변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지, 이런 것들이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p. 18)

우주는 너무 멀고 거대하고 체감되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구는 우주 속의 작은 행성이고 지구의 생애는 인간의 시간보다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과학적이긴 하다. 이 경우 과학적 설명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저자는 우주의 대격변들 속에서 지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지구와 태양은 바로 이 밀키웨이 은하계, 즉 은하수 안에서 태어났고, 둘 다 초기에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지구가 생겨나고 처음 10억 년간은 허구헌 날 일어나는 대혼란 속에서도 고통받는 생명체가 없었다. 그러다 최초의 생명이 신비스럽게 나타나기 직전에 지구는 아카데미 최우수 격변상을 받을 만한 대충격을 받는다. 화성처럼 지름이 약 6,400킬로미터나 되는 행성과 충돌했기 때문에 화성과의 충돌이란 말을 쓸 수도 있으리라. 그 행성은 초속 12킬러미터 속도로 정면충돌해 지구를 완전히 파괴시켰으며, 그 후에 테이아Theia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 지구는 궤멸을 면치 못했다. 우리 지구의 가장 두껍고 가장 중요한 층인 맨틀이 테이아 전체와 충돌하면서 산산조각난 것이다. 테이아 잔헤들이 지구 잔해들과 뒤섞이면서 녹아내린 지구의 핵 속으로 내려앉았고, 오늘날까지도 거기에 남아있다. 그렇게 지구는 사실 테이아와 합쳐진 혼혈 행성이 되었다. (p. 38~39 발췌)

지구가 혼혈행성이었다는 것은 처음 읽어보는 내용이었다. 우리 은하 안에서 태양계 행성들이 생겨나던 초기 지구도 그냥 생겨난 것인줄 알았는데 지구는 지구 테이아 라고 이름붙인 커다란 행성과의 혼혈행성이었다. 그때 충돌이 없었다면 아마도 태양계 안에 테이아 라는 행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화성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구와 함께 태양주변을 돌고 있었을지도... 여하튼, 산산조각난 지구가 지구와 관련된 '최초의 대격변'이라 할만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산 증거를 우리는 매일 보고 있다고. 바로 '달' 이다. 달은 그냥 지구의 위성이라고만 여겼었다.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달'의 특성은 굉장히 독특했고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스스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달과 태양까지의 대략적인 거리도 계산해냈다. 이는 천문학 역사상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 1세기 후 그리스인 히파르코스가 850개의 별의 지도를 만들었고, 다시 약400년 후에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지도에 170개의 별을 보탰다. 1,000개 이상의 별이 담긴 그 지도들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귀한 자료가 되었으며, 1725년까지는 더 나은 지도가 나오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의 밝기 분류법을 만들었다. 그의 밝기 분류법은 현대 천체물리학자들도 아직 사용 중이다. (p. 55)

기원전 200년 경부터 세계의 전혀 다른 지역에서 하늘을 관찰하던 사람들이 하늘의 변화를 연대순으로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었다. 히브리인처럼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 언어를 가졌던 초기의 주요 문명권 사람들이 천체 현상 기록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다른 문명권 사람들이 천체 현상을 집요하게 기록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히브리인의 경우 종교심이 워낙 강해 천체 현상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던데 데 반해, 중국인은 지구와 천체 간에 연관성 같은 걸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57)

불가능해 보일 만큼 밝은 이런 새로운 별이 1,500년 전에 나타났다면, 탐구심에 불타는 그리스인들이 많은 기록을 하고 별의 특성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11세기의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별이 무려 1년 넘게 밤하늘을 지배했는데도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유는 뻔했다. 하늘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천국의 영역'이며, 기독교 고리에 다르면 천국의 영역은 변치 않는 불변의 영역이었다. 어쨌든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그 어떤 연대기도 우주의 이 무례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중동 지역에서는 모든게 달랐다. 두 지역의 필경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새로운 별에 대해 자세히 적었다. (p. 78)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인은 이미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밝혀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음에도 저자는 고대 히브리인들을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언어를 가졌다고 이후 기독교시대에 천문관측은 의미가 없었을 뿐이라고 간단히 넘기면서 중국인들의 기록에는 흥미롭다고 한다. 서양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고대인들도 고도로 체계적인 문화와 문자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종교관을 가졌기에 천체 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이라고 표현해 줄 수는 없었을까... 서양중세시대에 뻥 뚫려 비어있는 천문학 자료들을 중국과 중동지역에서 얻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노학자에게 그건 어려운 관점인 것일까... 어쨌든, 우주의 대격돌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저자가 본격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양중세시대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므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묘한 일이지만, 이 특별한 폭발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타이밍 때문이다. 1572년 첫 번째 초신성 폭발이 있었을 때, 유럽은 이제 막 암흑기를 대체할 새로운 과학 탐구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폭발을 계기로 이 같은 새로운 계몽 시대로의 변화는 더욱 공고해졌다. 두 차례의 폭발은 공식적으로 sn초신성1572와 sn1604로 기록되고있으나, 그들의 유명한 이름인 '티코의 별' 과 '케플러의 별'은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P. 89~90)

우주... 신성... 초신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척 천문학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멀고먼 저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만 여길것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우주대격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우주이야기를 어느정도 마무리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지구의 대격변들' 이야기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 챕터에서 주로 다루어진 내용은 천문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핵'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유감스럽게도 20세기에는 세계 인구의 1퍼센트(이는 우리가 설정한 대재앙의 또 다른 기준이지만)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세 차례나 있었다. 이제부터 잠시 1918년의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이다. (P. 216)

1918년은 세계1차대전시기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재앙은 '독감' 전염성이다. 그리고 2차대전 마지막으로 핵(폭탄 과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다. 이 책의 본문이랄 수 있는 '지구의 대격변들' 에서 앞서서 풍기던 천문학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지구를 종말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핵' 이다. 하지만 저자는 천문학자이고 이 책의 주요 소재는 우주적 격변이기에 마무리는 다시 천문학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탐구해온 재앙들 중 일부는 지구에서 일어났다. 또 어떤 재앙들은 우리 지구와 가까운 우주 공간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데서 일어나 그 주변을 파괴시키는 재앙은 우리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꼭 그렇지는 않다. (P. 311)

마무리장은 3부는 '내일의 대격변들' 이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마련이고 따라서 섣부른 예측은 위험하기에 가장 적은 분량일 수밖에 없을 터.

두 은하계는 초당 약96킬로미터씩 거리가 줄고 있어, 수십 년에 걸쳐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2012년에 나온 NASA의 연구를 통해 이런저런 의문들이 다 사라졌다. NASA는 두 은하계는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그야말로 완전히 정면충돌하게 될 거라고 결론내렸다. 앞으로 약 40억년 후면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p. 328)

우주 전체에서 흔힌 있는 일이지만, 은하계들은 보통 그 은하계 너비의 20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 상호작용하지만, 서로 충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은하계들 속의 별들은 별 직경의 평균 100만 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래서 별들끼리의 충돌 또한 아주 드물며, 충돌이 일어날 경우에 관한 연구논문들까지 나왔다.

두 은하계가 충돌한다 해도 그 안에 있는 별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충돌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일부 별들은 중력에 의해 한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끌려갈 것이고, 언젠가 은하계를 바꿔 우리 은하계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합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충돌이 일어나면, 은하계를 바꾼다는 개념은 별 의미가 없다. 두 은하계가 합쳐져 전혀 새로운 한 은하계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 329)

지구와 태양이 속한 우리의 은하계는 안드로메다은하계와 충돌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지구의 종말 시나리오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 하나하나의 은하계는 굉장히 광활하고 은하계와 은하계가 충돌한다는 것은 교통사고처럼 물체적인 것이 아니다. 은하계가 충돌한다고 해서 그에 속한 별들이 하나씩 짝지어져 충돌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초속 96킬로미터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계도 아니고 '홀로세 절멸' 이라며 폭발적 인구증가로 인한 지구자원소멸도 아닌 바로, '태양' 이다.

궁극적인 대재앙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리 생물권, 즉 생물이 살 수 있는 지구 표면과 대기권의 완전한 파괴일 것이다. 이론의 여지없이 지구 생물권을 완전히 파괴해버릴 수 있는 재앙이 딱 하나 있다. 그 무서운 아마겟돈은 다행히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100퍼센트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태양 얘기를 하고 있다. 만일 태양의 내부 온도 조절 장치가 작동돼 방출 에너지가 2퍼센트 떨어지면, 무시해도 좋을 것 같은 그 감소로 지구는 곧바로 '눈덩이 지구' 상태로 변한다. 다시말해 육지는 물론 어쩌면 바다의 생물까지 모조리 죽는다는 의미이다. (p. 348~349 발췌)

태양의 흑점 폭발이 있었을 때 그 부근에서 가까운 지구의 지역은 전력이 나가고 자기장이 흔들리는 혼돈에 빠졌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인 태양은 사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태양은 별이고 우리는 별이 태어났다가 소멸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양은 언젠가 빛이 꺼질것이고 지구는 그저 검은 암석덩어리가 될 것이다.

'최종 결정권은 태양이 쥐고 있다' 는 저자의 마지막 멘트가 '거의 모든 것의 종말' 을 설명하는 단하나의 답변인지도 모르겠다. 크게는 우주를 연구하고 작게는 핵분열을 연구하는 것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태양' 연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구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그 마지막에 대해 우리의 과학계 연구가 어디까지 다가갔는지 궁금해지지만 나의 짧은 인생 동안에는 지구종말이 오지 않으리라는 확신하에 이 시나리오는 그만 잊기로 맘먹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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