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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평점 :
Verzeihen 죄송합니다
vom umgang mit schuld 누구의 탓으로 돌리다
라는 독일어 원제에 대한 번역기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
본문중에 나오는 Verzeihen 는 '용서'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인터넷 번역기는 왜 '죄송합니다'라고 뜻을 알려주느냔 말이다. 용서는 용서를 하는 주체가 하는 말이고 죄송합니다는 용서를 받는 주체가 하는 말인데... 여하튼 이 책은 '용서' 에 대한 저자 개인의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열네 살때 저자의 모친은 딸을 자신의 두번째 남편이자 딸의 새아버지 곁에 남겨두고 세번째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갔다. 그리고 철저하게 연락을 끊었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저자는 모친과 연락을 하긴 하지만 내면의 갈등은 끊임없이 저자를 고뇌에 빠뜨린다. 자신의 엄마를 용서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답을 할수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모친이 과거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고 자신도 그 시간들에 대해 묻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답을 구하고 싶었고 철학자들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을 만나가며 탐구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끝까지 추적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용서하는 행위는 정의롭지도, 경제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용서는 말 그대로 하자면 복수와 보상의 포기다. 용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용구하지 않는다. 단념하고, 중지하며, 꾸짖기를 멈춘다. 상처를 가리키는 손이, 타인을 향한 책망이 용서와 더불어 끝난다. 그렇기에 용서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법의 저 너머에서 이루어진다. (p. 16) 용서는 선물이다.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관용의 미덕에,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겸양의 미덕에 의지하는 행위가 용서다. (p. 18) 용서하는 사람은 복수의 갈망이나 씁쓸한 보상의 욕구에 지지 않고 자제를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정확히 계산하여 되갚아주겠다는 마음의 포기가 바로 그의 선물이다. (p. 19) 용서가 현실적일 수 있으려면, 용서의 개념이 애당초 배제시킨 그 조건들을 통해 용서의 순수성이 '더럽혀져야'한다. 다시 말해 조건적일 때만 용서는 현실적이 될 수 있다. (p. 28) 이 책은 수많은 자기계발서들과 달리 성공적인 용서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용서의 중요한 조건들을 비행위의 무목적적 핵심과 연결시키고자 하며, 조언 대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__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__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__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p. 29)
답을 알려주는 책들은 차라리 읽기 쉽다. 정말 읽기 어려운 책은 질문하는 책이다. 다 읽었음에도 답은 없고 질문만 남는 책이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필요한 질문을 독자에게도 함께 묻는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한 고민을 '용서'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함께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과정은 저자에게도 읽는이에게도 무척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이 주제가 어려움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이 철학적 고민은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아이히만의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 어떤 행위의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한 인간을 미혹하여 살인을 저지르도록 만든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때문에 그 행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해가 결코 용서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p. 40)
무기력과 쇼크의 단계까 지나가 적나라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알고 싶었어요. 어떻게 했기에 한 인간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p. 78) "이해를 하면 무조건 감수해야 할 때보다 견디기가 수월하죠" (p. 81) "나는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아요.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지도 않아요. 용서란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p. 83)
저자의 첫번째 질문,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이해하는 것이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해는 이해고 용서는 용서다. 이해해야 좀더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라면 '왜' 그랬는지 이해의 기반을 쌓아야 하고 이해하면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 성격이라면 이해의 여지 없이 그냥 미워하면 된다. 다만, '용서'는 이해 이후에 가능한 범주이다.
저자는 총기난사로 갑작스레 딸을 잃는 한 어머니를 만난다. 그녀는 범인을 조사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 이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용서는 할 수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일단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저자에게 용서는 아직 닿을 수 없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용서는 사건이 아닌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부정을 용서한다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부정이 부정하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p. 96)
용서는 말 그대로 신뢰를 바탕으로 주어진 선불인 것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의 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주체와 죄의 이런 분리는 신뢰의 표현이며, 주체의 개선 가능성을 믿고 지급한 신용 대출의 표현이다. 용서의 하늘 아래에서는 죄인도 자신의 위법이나 과실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이렇듯 죄인을 해방시키는 이 단어를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시킨다면 이러할 것이다. '너는 너의 행위보다 나은 존재다'" (p. 100)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철저히 종교적 사랑이 바탕에 깔린 표현이다. '용서'를 할 수 있다면 그 용서가 이해는 할 수 없어도 행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신은 자기희생을 통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책감을 인간에게 심었지만 그리스의 신들은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락하면서 모든 죄를 스스로 떠안았다. "이 그리스인들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가책'을 떼어버리기 위해, 영혼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오랫동안 그들의 신들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독교가 자신의 신을 이용해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분별력을 보인 것이다" (p. 113)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으며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그리스의 신들은 신이라서 존경할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니까 그나마 용인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파렴치하다.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들의 이용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해 책속의 저 문장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도덕적 죄 역시 갚을 수 없을 때가 있다. 흔히들 말하는 배상을 통해서도, 위자료를 통해서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회의 고백을 통해서도 갚을 수가 없다. 바로 그렇게 근본적으로 절대 갚을 수 없는 죄야말로 용서의 대상이라고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말했다. 경제적 부채 삭감과 도덕적 죄의 사면은 이 점에서 비슷하다. 용서할 수 없는 죄만이 배상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용서할 수 있는 죄는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p. 116)
저자는 한나 아렌트와 자크 데리다의 문장을 자주 인용하고 있어서 인용된 문장들을 좀더 깊이 알려면 이 두 철학자의 책들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 독일 사회에서는 쉽게 읽힐지도 대중적으로 많이 읽힐지도 모를 이 철학자들의 철학이 내게는 익숙치 않다.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다.
여하튼, 무조건적인 용서는 결국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자신의 연인을 살해하고 종신형을 살고 있는 수감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노인이 된 이 수감자는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을 용서했어도 자기자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두번째 질문,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용서에 사랑이 필요한것 같긴 하다. 사랑이 있어야 용서를 시도해볼 수라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단순히 표현할수 없는 복잡미묘한 과정이다. 여전히 용서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망각'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필수 생존 전략으로 선언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망각이란 "하나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억제력은 우리의 생각을 해방시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치르는 싸움을 이겨내고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고 했다. "망각은 마치 문지기처럼 정신의 질서, 안정, 예법을 관리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 즐거움, 희망, 긍지도 없고, '현재'도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억제장치(망각)가 손상되거나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교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한다" (p. 150, 151)
용서하는 사람은 일어났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며, 결코 건망증을 앓는 것이 아니다. 일어났던 일은 흔적으로 기억에 고이 보관된다. 용서를 통해 변하는 것은 이 흔적의 심리적 배역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무거운 죄나 어쩔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그 흔적은 역사적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는다. (p. 166)
트라우마라는 것은 어찌보면 망각하고 싶은 것을 망각하지 못해서 겪는 고통이다. 나이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하는 나이지만 사람에게 불완전한 기억은 생존에 필요한 측면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 여기' 에 집중하며 살라는 불교적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 못할바에는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지금, 여기' 에만 집중해야 그나마 살 수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괴롭다면 의미를 없애는 수밖에 없다. 용서를 하건 안하건 때때로 망각은 필요하다.
"죄책감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죄를 씌웁니다.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죄책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짓눌려 살지요. 자식들에게 그 죄책감을 물려줘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었답니다. 우리 과거는 우리끼리 간직하고 싶었어요" (p. 225, 226)
저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개인의 과오가 아니라 세계적 과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용서'의 의미는 일생을 관통하는 화두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가족이다. 자신의 후손들이다. 자식들에게 좋지않은 과거는 굳이 물려주고 싶지 않다. 용서는 생존 다음의 문제다.
저자의 세번째 질문,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이해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사랑에는 감정이필요하지만 망각은 저절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런면에서 '용서' 가 가장 필요한 것은 '망각'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용서에는 긴___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는 오랜만의 가족파티에 엄마를 초대한다. 자신의 두 자녀를 비롯한 가족과 새아빠 친아빠가 함께한 그 파티에.
여동생이 몇 년 전에 내게 던졌던 질문을 곱씹었다. "엄마를 용서했어?"
용서했을까? 정말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용서했어, 완전히' 나는 생각했다. 그 반대가 진실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엄마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용서했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 나의 비유가 어떤 부분에서는 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은 대충 '나 담배 끊었어' 같은 말과 비슷한 정도의 진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담배를 끊었다는 말이 두 번 다시 담배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말일까? (p. 229)
나는 내 입으로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엄마를 용서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상상할 수도 없다. 진짜 용서는 언어 행위와 결합되지 않는다. 용서는 침묵하며 일어나고, 행동으로 드러난다. (p. 230)
저자의 엄마는 파티에 왔고 저자는 그런 엄마를 환영하며 맞았다.
저자의 엄마는 저자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당연히 사과한 적도 없다. '용서'는 오직 저자만의 고민이다.
저자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용서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엄마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받고 싶었고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 현재에 충실하려고 노력중이기에 언어로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행동으로 그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저자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단 한번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저자의 '용서'에 대한 고민이 아직 계속되고 있을 것 같다. 그 개인적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보며 스스로 치유해가는 모습같아 마음 한켠이 짠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짠한 마음으로만 읽기엔 좀 어려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