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주는 사회학자의 생존형 과학 특강
윤석만 지음 / 타인의사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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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슈가 되는 과학적 지식들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법

방대한 과학의 흐름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아우른, 나의 첫 교양 과학수업

표지 中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과학적 이슈가 낯설지 않은 뉴스로 회자되는 세상이다. 과학적 지식들을 일반 대중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상식서처럼 쓰여진 책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뉴스로 접하든 상식으로 접하든 그때의 과학은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떨어져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는 일상에 필요한 시대가 되었으며 과학적 지식들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시기에 사회와 과학의 적절한 통섭을 경험할 수 있는 책으로 유용한 책이다.

현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기자로서, 문명과 역사를 인과 관계로 설명하는 사회학자로서 제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지식' 과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 7) 자연의 원리를 이론화한 과학과 이를 현실에 적용한 기술은 그 자체로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과학이 해석되고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죠. (p. 11) 과학 이론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그 과정에서 굳건히 방어에 성공한 이론은 정설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 왕좌를 차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이론은 반박할 수 있어야만(반증가능성) 제대로 된 이론입니다. 반박이 불가능한 것은 신의 뜻이거나 종교적 교리인 것이죠. 반증될 수 없는 의견, 절대적인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린 사고를 갖고 '지적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의 시작입니다. (p. 12)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의 발자취는 과학적 발견과 함께 이루어져 왔고 범위가 확대된 것은 시장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지금은 비행기로든 배로든 세계 어느곳 마음만 먹는다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마다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소통법이 발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수는 있으나 이해하진 못한채 엮어진 세계는 사실 서로 더 불통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보일때도 있다. 그럴때 필요한 것이 '과학적 사고' 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고방식의 기저에 '지적 겸손' 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15가지 과학적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한 이 책은 그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종교와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신념과 실증의 차이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종교는 '믿고 보는 것'이며, 과학은 '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신념을 재판대에 올리고, 과학은 실증적 근거로 판결을 내립니다. 칼 포퍼는 과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새로운 증거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어야만 과학'이라는 게 포퍼의 설명이죠. 절대 불변의 진리는 종교적 신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 26)

저자의 쉽게 풀어쓰는 방식에는 영화의 활용도 두드러지는데 책을 읽다말고 저자가 말한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를 봤다. '다빈치 코드'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영화를 보면서 과학과 종교의 입장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덕분에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볼 영화도 찜해놓았다. '천사와악마' 다음편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 '인페르노' ㅎㅎ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총량은 그들보다 훨씬 많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우린 여전히 독선과 맹목으로 진리를 추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악용하는 것은 주로 정치인이거나 그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SNS에서 대중적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 '셀럽'들일수록 그렇습니다. 논란이 될 만한 발언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다른 생각'을 '틀린 사실'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나서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심판하죠. 진리의 독선은 폭력으로 쉽게 전이돼 신념의 제단 앞에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요? 애초 자신을 선과 정의의 편이라고 주장했던 주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선을 가장해 대중을 홀리며, 독선적 주장으로 시민들의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맹신하게 만듭니다. (p. 28~29)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열린 사고' 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 천동설과 지동설로 대비되는 중세에만 있었던것 같은가? 지금의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이성적인가? 라는 저자의 질문에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홀릴 때가 많다.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과학적 사고가 꼭 필요한 이유다.

아주 단순히 생각해보면 빛보다 빠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이죠. 설령 빛보다 빠른 무언가 있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학의 큰 원칙을 위배합니다. 바로 '인과율'입니다. 모든 자연 법칙의 근본 원리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쳐 지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과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인과율을 깰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설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p. 63)

예전보다 판타지적 요소를 가진 드라마들이나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판타지적 요소 중 하나가 시간여행이다.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과학적 사고에선 불가능하다. '인과율' 에 대해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상상했을때 항상 뭔가 특별한 발견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여전히 '시간여행' 에 대한 상상이 접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과학적 사고 방식을 습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ㅎ 그리고 인과율을 설명하는 저자또한 마무리는 SF였다.

결국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상상력'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그리느냐에 따라 내일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SF는 'Science Fiction' 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Social Fiction'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비단 기술의 발달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전체를 바꿔놓기 때문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SF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p.65~66)

과학적으로 상상하는 것, 사회적으로 과학하는 것, Social Future 가 Science Future 와의 간극을 너무 벌리지 않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그런 SF를 나는 꿈꾸고 싶다.

'양자(量子)'의 '量'은 '헤아리거나 짐작한다'는 뜻이다.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연속적인 값을 갖지 않기 때문에 '양자'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p. 71)

'양자역학'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굉장히 어렵게만 느꼈었는데, '양자' 라는 단어를 들어도 뭔가 숫자적이고 양적인 그런 의미인줄 알았는데, '헤아릴 양' 이라는 한자로 썼구나를 알고 나니 뭔가 철학적으로 다가온다. 과학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낄때마다 과학이 결국 삶과 닿아있구나를 생각하게 되곤 한다.

특이점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 역시 모릅니다. 그저 특이점이란 것에서 빅뱅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우주의 역사가 시작됐을 뿐입니다. 사실 빅뱅이라는 어감과 달리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현상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보니 빅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빅뱅이 있고 38만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빛이 생겨났습니다. (p. 99)

1949년 우주 팽창을 부정하던 프레드 호일이라는 천문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주가 한 점에서부터 시작됐고 점점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을 비판할 목적으로 빅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주가 한 순간에 펑 하고 터졌다'는게 말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빅뱅이란 말로 우주 팽창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p 102)

최근 특이점에 대한 SF소설을 읽었었다. 소설 속 특이점은 미래의 한 시점이었다. 지금의 당연한 것들이 사라진 그 어느 시점.

하지만 저자가 알려준 특이점은 우주기원 속 과거의 한 시점이었다. 처음과 끝 같았다. 특이점에서 시작해서 특이점으로 끝나는... 우주의 역사란 참... 상상 그 이상이다;;; 한순간에 펑 하고 이해되는 때가 올 수 있을까...

북극성 역할을 하는 별은 늘 변합니다. 약1만2000년 후에는 직녀성의 별이 북극성이 될 예정입니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씩 틀어지기 때문인데요, 빙글빙글 도는 팽이의 축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구의 자전축은 2만~2만5000년 주기로 변합니다. 작은 곰자리의 북극성 임기가 절반 가량 지난 셈이죠. (p. 118)

하늘을 보며 길을 찾던 사람들은 늘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북극성은 늘 기준점 같은 별이었다. 하지만 수메르 이전 역사를 다룬 책에서 북극성 이전의 기준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고대의 역사가 외계인과 연결지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구의 운동과 별의 움직임이 있었다. 북극성이 북극성이 아니게 되는 때 인류는 아직 생존해 있을까? 별의 기준이 바뀐 그 시대에...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와 이를 통한 '협업' 때문입니다. '공동체'라는 경쟁력을 만들어낸 거죠. 집단에서 나오는 협동의 힘이 다른 종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가지게 했고 결국엔 지구의 주인 노릇까지 할 수 있던 겁니다. 자연에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어린 맹수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할 만큼 약하지만, '공동체'란 경쟁력을 만들어내면서 지금은 지구 밖까지 우주선을 쏘아올릴 수 있는 존재로 우뚝 섰습니다. (p. 145)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지금 현생의 인류보다 컸다고 한다. 뇌용량의 크기는 똑똑함의 크기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봤자 집단을 이기지 못한다고나 할까. 진화관련 책을 읽으면 늘 확인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의 개체로서는 오히려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어떠한가? 공동체의 붕괴는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인 것일까...

오늘날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무지의 영역을 좁히고, 그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무지의 영역을 극복해왔던 과학이 이제는 종교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려 합니다. (p. 152)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든 과학이든 변화될 미래의 모습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p. 154) 결국 해답은 다시 인간입니다. 우리가 무슨 신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우리도 그런 관념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을까요. (p. 156)

종교를 믿건 안믿건을 떠나 여하튼 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신은 결국 인간의 상상속에 존재한다. 종교도 과학도 인간의 상상력속에서 발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는 시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신의 영역에 과학이 침범할 수 없다는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결국 돌고돌아 답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 있음에 동의한다. 4차산업혁명을 단순히 산업혁명의 연장으로 봐서는 곤란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저자의 말마따나 4차산업혁명이라기 보다는 4차혁명이라고 써야할 만큼 미래는 산업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류가 첫 출현한 이후에도 지구는 소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했고 1만2000년 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간빙기은 '홀로세'Holocene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완전하고 조화로운Holo' '시대cene'라는 뜻입니다. (p. 167)

'홀로세'라는 말이 그동안 외롭게 들리기만 했었는데;;;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 라는 의미를 들으니 왠지 더 안타깝게 들리는;;; 이 완전하고 조화로운 시대를 인류는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기후변화는 점점 더 체감되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녹이는 빙하가 해수면을 높이는 것보다 해류의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빙하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과학적 예견이 왜 널리 회자되지 않는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약화된 기원전 8세기부터 진의 통일(기원전221년)까지, 약 500여년의 기간을 춘추전국시대라 부릅니다. 보통 우리는 춘추와 전국을 합쳐서 부르지만 두 시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춘추시대의 전투는 2~3일이면 끝났고 상대가 항복하면 군사를 물려 목숨을 살려줬습니다. 명분을 중시해 적장도 인격적으로 대했고요. 춘추의 정신이 막을 내린 건 마지막 패자인 월왕 구천 때입니다. 와신상담 이후 전국시대는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싸움이 수백 년간 계속됐습니다. 춘추의 명분과 예법은 사라졌고요. 학문 대신 병법이 활개치며 손빈,방연 같은 전략가들이 출세를 했죠. 전국에 춘추의 정신이 무용(無用)이듯,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정의, 명분과 이상이 설 자리는 부족해 보입니다. 비전과 철학을 보여주는 리더보다 승리의 술수만 논하는 책사들이 인기입니다. (p. 229, 230 발췌)

고대 동서양의 역사는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 트로이전쟁을 위시한 호메로스 서사시 시대에 중국땅은 춘추전국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일리아스 속 영웅들이 예의를 갖춰 마치 스포츠경기하듯 전투를 치뤘듯이 춘추시대 속 장수들또한 예의를 갖춰 전쟁을 치뤘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이 무너졌을때 인간들의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그러고 보면 인류사는 늘 비슷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철학이 있는가? 좀 뜬금없는 결론일수도 있지만, 온갖 실용적 문구만 모아놓은 고전짜깁기 책보다 고전원전 그 자체를 읽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남녀의 성별을 가르는 Y염색체는 남성의 고환을 만듭니다. Y가 없으면 난소가 생겨 여성이 된다는 이야기죠. 다시말해 이 유전자가 없으면 생식 기관은 난소가 돼 여성이 되지만, 이 유전자가 있으면 고환을 만들어 남성이 됩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Y가 들어간 남성은 여성의 변형이란 뜻입니다. (p. 241) Y는 X에 비해 돌연변이가 나올 확률이 큽니다. 이는 유전적으로 Y가 불안정하다는 뜼이죠. 반대로 X는 돌연변이 가능성이 낮고 자가 치유의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p. 242)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전능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을 질투했던 것은 불완전한 한계 속에서 나오는 인간만의 도전과 불굴의 의지 대문이었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고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가 가진 최고의 DNA일 것입니다. (p. 244)

유전자 이야기가 나오면 늘 미래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되기 마련이다. 유전자의 기본 베이스가 여성형이라는 문장에서 '가이아' '어머니'의 의미가 새로운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진화의 한 측면은 어쩌면 돌연변이의 발달사였다. Y염색체의 불안정성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해진다. 발달일지 소멸일지...

이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처럼 되는 것입니다. (p. 266)

우리는 어떻게 해야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더욱 높은 시민의 교양과 지혜를 갖춰야만, 인간을 따라 배우는 인공 지능 역시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본인 생각만 옳다고 강조하는 지나친 '자기확신'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마치 '적'을 대하듯 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거짓'으로 모는 행태는 타인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습니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서 물려줘야 할 유일한 유산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품격 있는 언어 입니다. (p. 282,283)

AI 가 어쩌구 4차산업혁명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늘상 기계에게 생존을 위협받는 인간을 생각하곤 한다.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는 기계를 두려워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빅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에게 인터넷에서 알아서 배우도록 했더니 편견과 욕설로 난무한 지능을 얻게 되서 인터넷을 통한 습득을 정지시켰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내뱉고 있는 언어들로 인공지능을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인공지능의 빠른 속도보다 더 위험한 것이 아닐까? 인간만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 그것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그 뒤에 숨은 진짜 원인을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과학적으로 생각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드러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이성적으로 가설을 세운 뒤에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사회학은 일련의 사건과 현상에서 경향성을 찾아내 일반화하고, 그 뒤에 숨은 구조적 요인을 밝혀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과학과 사회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앞으로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적 겸손' 을 갖는 일입니다.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 몸에 한층 더 스며들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책을 마칩니다. (p. 300,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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