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퍼시픽 실험 - 중국과 미국은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하는가
매트 시한 지음, 박영준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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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역 전쟁의 격랑 속에서 트랜스퍼시픽 실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중국과 미국, 그 혁신과 변화의 관계를 읽으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과 중국사이의 갈등은 지금으로선 화해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듯 하다. 언제부터 왜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무역전쟁' 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이 두나라의 관계를 협소하게 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취재한 저자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두 나라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을 시도하고 나아가 세계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트랜스퍼시픽실험이란 오늘날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민간 차원의 외교적 교류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골든스테이트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주,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국가 사이에 형성되는 학생, 기업가, 투자자, 이민자, 그리고 갖가지 아이디어의 역동적인 생태계를 의미한다. (p. 19)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가장 먼저 발딯게 되는 땅 캘리포니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첨예한 갈등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땅 캘리포니아, 한때 이민자들의 꿈의 장소였으나 지금은 실리콘밸리의 전초기지가 된 캘리포니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할수 있게 해주는 가장 적절한 곳이기도 하다.

저자는 먼저 중국유학생으로 넘쳐나는 대학들에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대학운영자에게는 중국 학생이 학교를 재정적인 곤경에서 건져주는 구명줄 같은 존재였을 테지만 캠퍼스에 중국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지켜본 캘리포니아의 미국 학생들은 새로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외국 학생들은 단지 우리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할 셈인가? 대학 생활을 통한 문화적 교류도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학생이 늘어나면서 이 그룹의 내부에만 안주하려는 학생들의 배타성도 함께 증가했다. (p. 36)

미국의 대학은 현지 학생들에게 대학등록금을 대폭 할인해준다고 한다. 국가의 교육지원비가 줄면서 재정난에 빠진 대학들에게 현지 학생들에 비해 세배에 달하는 수업료를 지불하고 학자금 융자도 거의 받지 않는 중국유학생들은 반가운 존재였다. 과거 유학생들은 부모의 고생을 등에지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이후 부유한 중국유학생들은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이들에게 미국대학학위는 더이상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황금티켓'이 아니었고 중국내에서 자리잡는데 필요한 스펙정도가 됐을 뿐이었다. 다른 교육제도아래 성장한 그들이 미국대학입학조건을 맞추는데 도움을 주는 중국내 교육컨설팅회사의 방법은 사기수준에 오락가락하여 미대학의 입학부서를 당황시키고 미국에 유학온 중국학생들은 중국의 문화를 전혀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는 미국인 친구들에게 큰 충격을 받게 되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늘어가는 유학생들을 정치교육의 우선 대장자로 삼아 주기적으로 관리하려 하고 미국정부는 중국유학생들을 스파이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을 찾은 중국 유학생들의 이야기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갔다. 1800년대에 미국인들은 이 땅에 도착한 중국 학생들이 새로운 빛(기독교 또는 자유민주주의)을 발견할 거라고 기대했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뽑힌 가장 똑똑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이곳 자유의 나라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거나, 중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트로이의 목가'가 되리라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미국인들은 그와 정반대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 학생들이 중국의 가치를 미국에 퍼뜨리고, 언론 통제의 수단을 도입하고, 첨단기술을 훔치는 공모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변화가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은 미·중 양국 간의 지정학적 균형이 구조적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 78, 79)

미국인들이 유학생들에 대해 가졌던 우월감은 모래성처럼 부질없던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경험하는 대학내에서의 경험은 그나마 아직 자유로워 보인다. 국가간의 갈등이 학문의 자유를 오히려 왜곡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간의 문제는 분명 개개인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더욱 심각한 수준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사이버공간을 마치 감시하고, 가꾸고, 통제해야 할 물리적 장소인 것처럼 인식했다. 수천 년 전 중국의 고대 왕조는 걸핏하면 자신들의 땅을 침범하는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디지털화된 만리장성인 '만리방화벽'을 구축했다. 이 복잡한 기술적 통제 시스템은 구글, 페이스북, 스냅챗, 트위터 등을 포함한 미국의 기술 대기업과 언론매체를 자국의 인터넷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해버렸다. (p. 85)

중국의 경제발전과 통제상황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체제이다 보니 중국이 새롭게 가는 길마다 미국으로선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통제를 위한 만리방화벽은 내부의 저항이 아닌 중국본토에서의 디지털경제를 번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자신만만하게 진출했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경쟁에 패배하거나 중국정부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런 실질적 혜책을 얻는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려운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즉 실리콘밸리로부터 아이디어와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외국 기업을 중국공산당의 완벽한 통제 아래에 두어야 했다. 미국의 기술기업은 중국 시장에 진입하면서 기업윤리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딜레마에 부딪혔다. (p. 91)

지난 수년간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중국 정부를 어떻게 바꿀지 궁금해했다. 현재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었다. 중국 정부는 과연 인터넷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p. 94)

이베이가 중국시장에서 알리바바에 의해 퇴출되고 바이두가 구글을 밀어냈을 때에도 미국의 기업가들은 그런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웨이보가 중국공산당의 검열을 흔드는듯 했지만 법으로 제재하기 시작하자 내부비판의 목소리는 어디서도 듣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 중국출신 사업가가는 '대나무 천장'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에서 성장한 중국인재를 중국이 빼가는 것인지 미국이 내모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이 중국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인터넷 지형을 바꾸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미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현금없는 결제 시스템, 그리고 통신과 상업적 거래가 완벽하게 통합된 세계를 꿈꿔왔다. 중국은 보호주의와 자생적인 혁신의 조합을 통해 바로 그런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p. 142)

인재는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는 이제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을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BAT가 앞다투어 투자에 뛰어는 것은 그들이 고국에서 벌어질 세 회사 간의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그 회사들을 인수해 앞으로 중국 시장에서 벌어질 전투의 무기로 삼고자 했다. (p. 147)

중국의 서투른 벤처투자가가 손에 현금을 쥐고 실리콘밸리로 몰려든 시기에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인터넷 통치권' 또는 '사이버 통치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외로 수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이념의 골자는 한 국가가 자국의 국경 내에서 인터넷 콘텐츠를 통제할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p. 153)

신용카드도 잘 안쓰고 현금만 쓰던 중국인들은 위챗이라는 앱을 이용해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사이버결제의 세계로 이동했다. 중국의 검열과 사전검사 조건을 거부하여 밀려났던 미국기업들은 이제 중국의 검열규정을 받아들이겠다며 다시 중국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런 기업들의 행보가 미국 정부에서 곱게 보일리 없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중국정부가 제한하는 정보만 검색되도록 하는데 동의하고라도 중국시장에 진출하려는 모습은 인터넷이 결코 자유공간이 아닐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윤리문제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사이버 통치권' 이 인정되면 그다음 AI 통치권 주행통치권 등 온갖 통치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국 거대기업의 행보가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곤란해질 것 같다...

양국 간에 벌어진 지정학적 경쟁의 세부 형태는 계속 변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바라본 갈등의 구조는 점점 뚜렷해졌다. 유라시아 그룹은 2018년 세계의 지정학적 위험 요소 중 하나로 '국제적 기술 냉전'을 꼽았다. 이 연구소는 초근 미·중 양국 간에 고조되는 긴장의 양상을 기술 생태계의 분리, 제3국에서의 경쟁, 최첨단기술의 주도권 다툼 등 세 측면으로 요약했다. (p. 172)

우리나라에 냉전은 익숙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세계대전 이후 이념전쟁으로 분단을 겪고 미국과 소련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던 냉전은 이제 총칼만 없다뿐이지 치열함은 더 가속화되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냉전 으로 여전히 중간에 끼어 험난한 길이 예고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양국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자국 기업의 기술을 보호하려 하고 있다. 양국이 직접적으로 경쟁하지 않으면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에서 대리전을 치루고 있기도 하다. 이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살길은 어디에 있을지 찾다보면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조개잡으러 던진 그물에 조개를 먹으려는 새까지 잡는 어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산업에서 헐리우드와 중국기업의 모습에 대한 한 제작자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속셈이 달랐던 겁니다. 중국은 할리우드를 꿈꿨고 할리우드는 중국을 꿈꿨어요. 중국이 원하는 것은 존중이었습니다. 세계의 관객들이 중국과 관련된 콘텐츠를 봐주길 바랐던 거예요"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을 원했을까?

"현금이죠" (p. 217)

할리우드에서 중국을 모자라고 적국으로 표현하던 때가 언제였나 싶게 이젠 중국 검열에 맞춘 중국내 상영판을 따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돈으로 밀어부치는 영화산업에서 자국의 검열 기준에 맞춘 작품으로 중국영화의 세계화는 아직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보면 문화산업에서는 우리나라가 좀더 승산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ㅎㅎ

국가대 국가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한마음한뜻으로 국가의 입장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면 다른 나라를 존중해야 해요. 하지만 미국은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더 심했죠. 이제 미국에 혜택을 주는 쪽은 아시아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들에 별로 해줄 게 없어요. 일자리가 필요한 건 우리 쪽이니까요" (p. 244)

중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 열심인 랭커스터 시장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정부의 입장과 달리 미국의 기업과 도시들은 여전히 중국의 돈을 원하고 있어 보였다. 미국정부가 무역에 있어서 지금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 처음도 아니었단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미·중 간의 지정학적 배경 아래서 벌어지는 현상은 1980년대 미국과 일본 간에 발생했던 상황과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세계무대에서 자국의 위상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한 미국은 새로 부상하는 아시아 국가에 우려를 나타내고 외국인이 미국 땅으로 몰려드는 현상에 불편함을 드러낸다. (p. 283)

저자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시간이 지나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도 괜찮아질 것이라 낙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보기엔 일본과 중국은 너무나 다른 나라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예측이 불가능하다. 여하튼 이렇게 보니 미국은 늘 굉장히 보수적인 나라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지치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겁에 질린' 이민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런데 이주해온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부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p. 296)

중국의 거부들이 미국내 주택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들은 집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현금으로 턱턱 집을 사놓고 별장처럼 이용하거나 스위스은행에 자산을 맡겨둔듯 그렇게 미국내 고급주택을 사들인다. 그러다 중국정부가 해외로의 자금유출을 제한하기 시작하자 미국내에서 중국인의 돈으로 활발하게 벌어졌던 주택관련 프로젝트들도 수렁에 빠져버렸다. 미국인들은 혼란스럽다. 새로 생긴 중국이웃은 만날 수가 없고 빈집들은 늘어간다. 평화롭던 주택가마저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아졌다.

그와중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중국계미국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상은 또다른 복잡함을 더해준다.

"제가 그 사람들에게 '차이나타운을 위해 무엇이든 기여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해요. '아니요, 나는 차이나타운과 별로 엮이고 싶지 않나요. 그곳은 옛날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고, 나는 새로운 중국인이거든요. 우리는 훨씬 수준이 높아요. 만일 내가 차이니타운에 뭔가를 투자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만드는 것일 거예요" (p. 343)

미국인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들도 각자의 입장이 반드시 중국정부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적어도 미국내 중국계미국인들 사회는 분열되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들을 여전히 소수집단으로 보고 한쪽은 자신들이 백인들과 같은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요소(인재, 스타트업, 시위대, 문화적 배합 등)는 한 올 한 올의 실이 되어 문화와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직조해내는 중이다. 그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엄청난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두 나라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긴장과 시너지를 엿볼 수 있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만들어갈 관계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p. 386)

문제는 양국 간의 교류에서 오는 비용과 혜택을 정확히 계산해내기가 어렵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상이 트랜스퍼시픽 실험의 초기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p. 387)

저자는 새옹지마 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서로가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며,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시하고 그 대상을 알게 되었을때 진정으로 기뻐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저자의 희망적 마무리와 달리 나는 이 책을 읽기전 가졌던 미국과 중국간의 관계에 대한 (남의 일이겠거니 하는)가벼운 생각이 복잡해져 버렸다. 알면 알수록 복잡다단한 그 관계가 잘 지내기 정말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걱정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나라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랐을때보다는 알고나면 그나마라도 대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도 트랜스퍼시픽 실험을 지켜보며 무역뿐만이 아닌 교육, 문화, 기술 전반에 대해 다각도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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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 외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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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탈권위 바람과 권위에 대한 맹목적 향수가 공존하는 시대,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권위'라는 해법!

 

 

전부터 느껴왔던 것이, 어느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고 '꼰대'만 넘쳐나고 있는것같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회의 어른은 왜 없어졌는가 라는 질문만 가져왔던 내게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라는 제목은 새로운 해답처럼 다가왔다. 어른이 되지 못하니 어른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왜 우리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위는 없어지고 권력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권위' 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전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권위는 권력의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려면 권위에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말하는 권력이란 정당한 권력을 의미한다. 반면 권력은 권위가 없어도 홀로 기능한다. (p. 23)

뒤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정리하면 권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권력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한 집안의 가장에게 권위가 아니라 권력만 있다고 말하는 경우 가족들은 가장을 존경하지 않고 가장이 휘두르는 권력을 폭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권위있는 가장에겐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가장의 뜻을 존중하기때문에 가장이 권력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부모 역할에 얼마나 성공했는가는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능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잘 양육되었는가는 부재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p. 30)

요즘 부모들이 자녀에게 미치는 통제력은 당연시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거칠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자녀의 뚜렷한 자기주관은, 권위자로서 부모 역할을 확실히 이행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부모의 두려움은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잘못이해된 교육방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 부모는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얼마든지 발언권을 주되 최종 결정은 언제나 부모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 양육 과정에서 권위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p. 33)

정상적인 양육 과정에서 부모는 확실한 권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린자녀가 '다수'로 자라날 때까지 서서히 독립심을 키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 순서를 인위적으로 뒤바꾸려고 한다. 젖먹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초등학교는 최소한의 규칙들로 아이들을 관리한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일으키면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협상'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참한 실패를 낳을 것이 뻔하다.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이러니 학교가 애를 먹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즘 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에게 권위를 가르쳐주길 원한다. 반면 학교는 부모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p. 34)

초반부터 시원스럽다. 솔직히 조금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친구는 밖에 나가면 마음껏 사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밖에서 만들 수 없는 존재다. 부모는 오직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책임과 역할이 있다. 친구같은 부모보다는 존경할 수 부모가 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존경할 수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여야 한다. 자녀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독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부모라는 어른의 모습을 보고자란 자녀만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다. 온통 친구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아이상태에 머물뿐 어른이 될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이렇게 자란 아이는 권위를 모른채 결국 권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권위에 뭔가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우리는 사회로서, 또 개개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어려움에 마주쳤다. 사람들은 더티해리, 로보캅, 간달프를 합쳐놓은 강력한 권위자가 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에 있을 것을 명령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실패할 것이다. 진짜 해결책을 원한다면, 우선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p. 41, 42)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권위' 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권위의 원천이 개인의 외부에 있다는 것은 권위와 권력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권력은 양변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 두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따라서 권력은 언제나 유예된 폭력이다. 반면 권위는 삼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그 권위는 제3의 요소, 즉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외부의 원천에 근거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다소간 자발적인 복종은 바로 이 외부의 원천에 의지한다. 권위는 언제나 내적 강박과 관련 있는 것이다. 권위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p. 47)

권위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 누구에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권위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얻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당연하게 인정되어 왔던 것 같은 권위는 권위가 아니었음을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면서 증명해낸다.

원초적 아버지에 대한 사이비 생물학적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지닌다. 어떤 이들은 프로이트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놀랍게도 그는 권위의 근거가 아버지에게 맞서는 최초의 폭력 행위에 있다고 보았다. 법의 정립 또한 최초의 폭력 행위를 뒤따른다. 후기 저서에서 프로이트는 이 혹력 행위 안에서 유일신 종교의 기원을 발견한다. 유일신 종교는 거의 대부분 가부장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종교들의 기원에서 자신이 '가족 로맨스'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한 과정을 발견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가장 높은 자리로 격상하고 그런 다음에 그 환상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다. 아들 예수가 자신을 희생해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교를 발흥하고 확립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발전 경로는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프로이트도 자기 주장 속 순환 논리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한다. 모든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부류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권위를 얻으며 그 원천은 한 명의 원초적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원초적 아버지의 권위는 그가 죽은 후에야 아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 55 ~ 57 발췌)

우리는 그동안 '권위' 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뿐만 아니라 사회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서는 서로 밀접히 연결된 권위의 원천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리스 고전 철학(플라톤), 고대 로마 그리고 기독교가 그것이다. 플라톤은 이성과 영원한 진리를 의미한다. 로마는 전통과 조상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합친 것에대 두려움이라는 요소를 넉넉하게 가미한다. 권위가 작동하는 방법은 아마 전 세계적으로 똑같을 것이다. 반면, 권위의 원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아렌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는 특정 시대의 맥락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 권위를 지탱하는 기반이 신뢰를 잃으면 권위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p. 72 ~ 73)

권위는 최초의 폭력을 배경으로 하며 신비로운 근거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언제나 사후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권위는 그 존재에 대한 실질적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p. 78)

우리는 권위에 대해 별 생각없이 인정해주어 왔다가 뒤늦게 그 기반을 파고들어가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니 그나마의 전통적 권위도 없어진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권위가 없어진 시대는 어른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을 겪고 있다. 약 1만년 동안 성, 사회, 종교, 정치, 경제 등 우리 인생의 모든 분야를 좌우했던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p. 80) 고. 하지만 이 사라지고 있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였으니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어떤 형태의 권위를 새로 형성해야 하는가"(p. 81) 라고 말한다.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겐 모두에게 합의되는 새로운 '권위' 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금의 사회를 진단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우월감은 서양 가부장제의 역사를 관통해왔다. 권력을 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지도 않았으면서 특정 사람들을 대신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두 가지 특성이 가부장제의 전형을 이룬다. 이러한 온정주의 특징이 천박하게 드러난 사례는 수백 년 동안 서구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장받았던 식민주의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98)

깨어 있는 독재는 환상일 뿐이고, 지각력이 결여된 로맨스는 파시즘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이런 환상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신경증적 가족 로맨스', 다시 말해 '엄격하지만 공정한' 아버지에 대한 열망과 관련 있다. 정치체제는 이 열망을 몇 년이고 이용해왔다. 정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로 내비치며 유권자들을 힘없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만들었다. (p. 100)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례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해주었던 이들은 사실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정치가들 중에서는 스스로가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인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국민이 뽑아준 정치가이건만 국민을 아이달래듯 다루려 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심리치료사는 신경증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내담자를 도울 수 있지만, 그가 일상에서 겪는 불행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은 갈수록 사회적인 것들로 바뀌고 있다. 과거 심리치료사의 목적은 내담자를 돕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내담자를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암묵적인 과업이 되었다. 정부 입장에서 심리치료는 새로운 훈육 도구이다. (p. 109, 110)

신체적 질병 못지 않게 마음의 병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에 그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음의 병이 더이상 미친정신병자가 아니라 신체적 질병처럼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체적이건 심리적이건 병의 치료 배경에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정치적 목적이 숨어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빠른 치료는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인적 원인인식에 머물게 한다는 것도... 한 마리의 여왕개미에게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위는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내는 내면화된 규범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집단이 같은 권위를 따른다는 것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이 권위가 무너지면 전반적인 불신이 생기고 규제 조치가 자기 증식하는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권력은 외부적 통제와 강압에 의해 작동하지만 반드시 저항과 반란을 일으킨다. 권력과의 충돌은 이어질 충돌의 발판이 되어 악순환을 낳는다.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하는 통제 매커니즘과 강압적 조치가 사회에 만연해진다. 하지만 결과는 완벽한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p. 134~135)

권위인줄 알았더니 권력이었음을 깨닫고 일개미들이 여왕개미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여왕개미의 권위를 다시 세울 것인가? 아니다. 저자는 공동체의 권위를 제안한다. "문제는 이 집단을 어떻게 인식되는 권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p. 141) 이 권위는 그동안의 피라미드식 권력형이 아닌 '수평적 권위' 이다.

지난 두 세대 동안 '대중'은 어느 때보다도 높은 지식 수준을 갖췄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결과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가부장제가 그 자신의 더 나은 버전으로서 '대중의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더 쉽게 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들을 놓아주지는 못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권위가 가장 낫다는 것은 자명하며 이 사실은 수평적으로 조직된 권위에도 해당한다. 객관적 지식은 그 자체로는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결정하려면 도덕적인 선택들을 내려야 한다. 집단은 완벽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정치와 경제 부문에서 그에 관한 설득력 있는 여러 사례가 나왔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전환하는 데 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고착화된 행동 패턴을 깰 수 없는 무력함이다. (p. 150)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도 교육이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제라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층위에서 수평적 권위를 세우려면 최소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 지식이 충분히 모두에게 보급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도덕적 목표는 수평적 집단이 결정해야 한다. 셋째, 그 집단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조합은, 수평적 집단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장기적 목표를 유념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습득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거나 위임하는 형태여야 할 것이다. (p. 154)

수평적 체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이의 참여를 끌어내 조직을 돕는 것이다. 이때 지도자는 '평등한 사람 중 맨 앞에 있는 자' 가 된다. 협동에 중점을 둘때 지도자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 차이를 중재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각자 해결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권위는 어떤 사람이 계층구조에서 차지한 자리로부터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올바르게 대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서 나온다. 권위는 공동 목표를 위해서라면 여러 명이 나눠 가지거나 서로에게 양도할 수 있다. (p. 156) 이 모델에서 타인은 적이 아니다. 이들은 당신이나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p. 157)

모두가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갖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인화된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국 공동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현실성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이론이 필요한 좀더 강력한 사회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다양한 실례들도 제시한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가부장제가 쇠퇴하는 중이고 성적 지향이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으로 존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에서 희망을 찾고, 양육 문제에서는 집단으로서의 부모역할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개인적으로 교육관련 입장에서 저자의 표현들에 깊이 공감하곤 했는데, 아이의 자율권을 존중해준다는 미명아래 결국 방임하고, 동기부여와 칭찬육아라는 것이 얼마나 빛좋은개살구인지 지적하고, 요즘처럼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아이가 많았던 때는 없었다며 아이의 심리에 대한 무책임을 비판하고, '부드러운' 양육법을 택한 친구같은 부모형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 이 성장이 아니었음을 밝히며 앞으로는 '공유와 협동' 모델이 중요해질 것임을 강조하고 이 모든 사회체제의 기본 바탕인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기성 정치의 몰락에는 위험한 부작용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기성 정치의 몰락을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모색하는 타당한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시효가 다 되었고, 특히 더는 민주적이지 않게 되어 그 효력을 잃은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 다른 형태의 정부에 대한 추구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즉, 권위가 아니라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p. 271)

민주화는 언제나 진행중에 있다. 다만 우리는 민주화의 최종 목표를 늘 명심해야 한다. 최종 목표는 데모스, 즉 민중의 자치다. (p. 278)

경제가 흔들리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강력한 보수주의 리더들에게 현혹되고 있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요즘에 꼭 생각해보아야 할 문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로서의 공동체가 그 권위를 쌓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핵심 질문은, 이 새로운 권위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의 다음 단계로서 어떤 형태를 갖춰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p. 287)

내가 더 선호하는 것은 숙의적 투표 방식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선거 대신에, 투명한 기준을 적용한 계산법에 근거한 비례대표제를 원칙으로 삼는다. 그 목적은 사회를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하는 대표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의 다양성이 단체를 구성하는 기준을 결정한다. 사회외 동일한 비율로 대표의 성별, 인종, 연령대, 교육 수준, 그 밖의 중요한 사항들을 고려한다. (p. 294)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는 어찌보면 우리는 왜 시민이 되지 못했는가 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너무 관람객처럼 사회를 멀리 떨어져 보아 온 것이 아닐지... 지식기반이 아니라 이런저런 소문에 휩쓸려 온 것은 아닌지... 역사적으로 그동안은 거의 늘 사회구조가 피라미드 식이었다. 왕에서 대통령으로 귀족에서 의회로 모습은 바뀌었어도 상위 몇 퍼센트에 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배·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다행히 그러는 사이에도 그런 권력이 조금씩조금씩은 아래로아래로 옮겨져왔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이제 그런 수직적 권력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권위를 나눠갖는 시대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권력을 쥐여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동안은 권력과 권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꼰대와 어른을 착각했다면 앞으로는 정말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권력을 휘두르는 꼰대가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어른이.

우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하는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친사회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면 반사회적인 행동은 학습을 통해 발현된다. 가령 어린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아서 돕는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보상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보상이 걸려 있을 때에만 다른 사람을 돕는다. 이와 같은 결과는 사회와 그것의 권위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피라미드식 권위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반면 내가 선호하는 수평적 권위는 모두가 투명하게 공유하는 지식과 더불어 새로운 두려움, 즉 사회적 통제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p. 303~304)

나는 수평적 권위가 정말로 새로운 권위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음을 굳건히 믿는다. 이 변화가 과연 이뤄질지는 더 이상 의심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이뤄지고 있는 변화를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고, 어떤 세력이 이 변화를 막으려 할지 감시하는 것이다. (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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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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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공쿠르상 수상작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꾸며지지 않은 하얀색 표지의 책을 받았다.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고 난 후 표지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매번 다르곤 한데 가제본의 표지도 그러했다. 첫장을 넘길땐 굵은 글씨의 제목에 눈이갔지만 마지막장을 덮을땐 프로펠러를 단 작은 비행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남자의 일기같은 문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을 차분이 읊조리는 한남자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평화롭지만 애잔하고 쓸쓸한듯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그런 목소리일 것 같다...

이 남자의 첫 대사는 교도소에서 시작된다. 교도소의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교도소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대번에 느껴지는 이 남자는 교도소에 있어서 그런지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다. 그렇게 교도소의 일상과 자신의 인생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동안 현재로 가까워지고 현재로 합쳐지는 순간 아마도 출소할 것이다.

2008년 수감되기 전까지 이 교도소에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 아헌트식에서 26년간을 살았다. 폴 크리스티앙 프레데릭 한센.

한센씨는 1955년 툴루즈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살의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아나 마르주리, 서른살의 훤칠한 덴마크 남자 요하네스 한센. 두사람은 자신들의 아들 폴을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너무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독립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와 척박한 환경에서 개신교 목사활동을 하는 올곧은 덴마크 남자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덴마크의 끝 시카겐에 있는 한센가를 다녀온 여행은 세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여행이 되버렸고 70년대를 전후한 사회적 격변 속에 두 사람의 인생도 격변한다.

폴은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가지 않았으나 매일같이 저녁을 차려놓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영화와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나 부족한 가족애가 안타까웠다. 그러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아버지는 캐나다에 자리잡게 되고 덴마크의 피가 흐르는 프랑스인 폴은 프랑스에서 학교를 마치고 캐나다로 건너가 캐나다 시민으로 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먹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던 아버지의 설교는 캐나다 퀘백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그의 신앙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마지막 설교에서 이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 155)

 

신자들의 축복을 빌었지만 사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마무리 문장이었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가 책의 제목이 된 것에 대해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왠지 원제는 달랐을 것 같은데 가제본이다 보니 확인할 수는 없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프랑스작가라는 것이 새삼 상기되곤 하는데, 영국에 대한 표현에서 특히 그렇다.

프랑스와 영국은 역사적으로 앙숙관계다. 저자는 은근하게 영국을 까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의 설정부터 그렇다.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 목사가 프랑스에서 무시 받다가 영국령이지만 프랑스문화가 지배적인 퀘백에서 개신교 목사로서 품위를 잃어가고 신앙이 흔들려 가는 과정, 그리고 영국인 위주의 신도들에 대한 표현과 석면을 둘러싼 환경표현을 읽다보면 저자의 은근한 프랑스인적 도취가 좀 느껴지는 듯 하다.

여하튼, 한센씨의 인생은 평탄한 듯 평탄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나의 외조부틑 DS19시트로엥을 택했다. 내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갈 날들을 촘촘한 시간 배정으로 지배해버린 그 속세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p. 171)

 

이런저런 일을 하던 저자의 경력이 쌓여 저자는 한 아파트의 관리인이 된다. 여기저기를 보수관리하고 주민들의 불편을 해결하는 만능해결사 였지만 세월의 흐름은 아파트의 분위기도 변하게 만들었다.

'렉셀시오르'건물에서 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관리비 운용, 유지보수, 보안 외에도 68가구로 이루어진 그 콘도가 차질 없이 굴러가게끔 뭐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p. 15)

어머니는 메데이아 만큼이나 불경하게, 세상의 모든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지옥으로 갔다. (p. 180)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메데이아 ... 이런 고전속 용어와 인물들을 활용하는 유럽작가들에게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외국작가들에게서 고전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하다.

여하튼, 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낼때 그 감정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일반적인 감정의 반대랄까.. 그런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도박의 우연으로 자기가 잃기로 작정한 존재들을 서로 가깝게 하는 계책을 부렸다. 그때의 계책은 노엘 알렉상드르의 친구 노바씨의 부주의였다. 그 부주의가 나를 전격적으로 돌려세워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로 이끌었다. (p. 200)

"오늘 아침에 수상비행기 기지에 다시 나타난 당신을 보고 대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 남자랑 함께이겠구나" (p. 201)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 알곤킨 인디언들은 계약이나 신성한 맹세 같은 거 없어. 함께 살고 서로를 위해 살면 다야. 같이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자, 이 경제적인 네 문장이 영국 여왕과 보통법을 그 습기 자욱한 섬나라로 반송해버렸다. (p. 203)

 

서로가 서로를 운명의 상대로 알아본다는 것, 그 특별함이 폴과 위노나에게 주어졌다. 세상 평범해보이던 폴이 알고나면 점점 더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혈통의 인디언 후손인 위노나가 알려주는 자연의 섭리는 캐나다를 지배하는 영국법지배체제를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인에게는 더 잘 통할 매력이랄까. ㅎ

폴은 위노나를 매시매순간 사랑했다. 일분일초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위노나가 구해온 유기견 누크도 그랬다. 세상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고 그 존재들 덕분에 처음으로 축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폴의 직장이자 집인 아파트는 변하고 있었다. 폴과 함께 처음을 시작했던 노엘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너무나 급속하게.

나는 그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저 사람이 당선되겠구나, 하고 알았다. 겉멋 든 자가 구비한 악덕의 일습, 속이 시커먼 위선자, 음흉한 기회주의자의 전형. 과연 에드아르 세즈윅은 친근함과 오만, 전문적 식견과 무시를 적절히 섞은 요즘 시대의 수완으로 우리 건물의 대표가 되었다. (p. 218)

2000년대와 그에 발맞춘 세상은 이제 에두아르 세즈윅의 차지였다. (p. 219)

불행은 대체로 하나의 건물이나 공동체 속에 시기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몇달을 각 층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한 집 한 집 밑밥 까는 작업을 하고, 약한 자들을 먼저 쓰러뜨리고 희망을 품은 자들을 망가뜨린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거리와 동네를 바꿔서는 집요한 장인정신으로 일을 밀어붙인다. 우리 콘도에서는 대략 일년 남짓 걸렸다. (p. 230)

"폴, 그런 장례식까지 챙기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닙니다. 업무 일과의 절반을 입주자들의 개인적인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보내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 업무는 각 가구의 문 앞까지만이에요. 입주자의 건강 문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자기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세요. 입주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 업무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p. 238, 239)

콘도는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고 일종의 불신이 전반적으로 자리잡았다. 입주자 대표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주입한 그 분위기는 모든 층으로 퍼졌다. 차츰 모두가 다른 사람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p. 247)

2000년대 초에는 누가 더 인심이 각박해질 수 있는지, 누가 더 쪼잔해질수 있는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주옥같은 일화들이 차고 넘쳤다. (p. 248)

우리는 이제 건물이 아니라 제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종의 전제 공국에서 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입주자 모두가 이 조무래기 군주의 변덕스러운 비위를 기꺼이 맞춰줬다는 것이다. (p. 260)

 

폴이 인생의 반을 바쳐 일한 아파트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것을 보며 사회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늘 '옛날이 좋았다' 고 이야기하곤 한다. 옛날이 더 너그러웠고 더 인간적이었고 더 믿을만했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적 배경때문이라기 보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현상이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분위기는 살만하거나 각박하거나 그때그때 달라졌다. 지금 우리 사는 환경이 옛날을 그립게 한다면 그것이 정말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인지 현실에 대한 무책임함인지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위노나는 매일같이 자신의 땅과 역사를 내려다보며 날아다녔지만 나는 렉셀시오르의 닳아빠진 자물쇠 아래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내게는 족했다. (p. 253)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나의 시간은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서 이 작품이 당연히 실패한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일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이 작품 속에 나왔던 '실패' 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두가 똑같이 살수 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모두가 다르게 사는 세상인데 무엇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후회없고 만족하는 삶이라면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폴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큰 파고 없이 내내 잔물결일듯 잔잔하기만 한 성격의 폴이(감옥에 가게 된 것도 그렇지만) 출소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는 '복수'는 복수임에도 읽는이에게 흡족한 웃음을 띠게 해준다. 그가 위노나와 누크와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행동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깊이 그들을 이해했던 그만의 방식이이었기에,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선택이었기에.

14세기에 반도 최북단, 도시에서 조금 떨어지 바닷가 바로 옆에 뱃사람들의 수호자들에게 바치는 교회 하나가 지어졌다. 폭이 45미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 합각머리 종탑까지의 높이는 22미터, 38열에 달하는 신자석, 위풍당당하고 독특하기로는 유틀란트 반도 전체에서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물보라를 너무 많이 맞았던 탓일까, 폭풍의 입김에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방풍벽이 없이 정면이 노출된 교회는 머지않아 땅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770년경에는 모래가 차츰 안뜨로, 그다음에는 본당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모래언덕은 밤낮도 없이 그악스럽게 교회를 갉아먹고 벽을 밀어냈다. 급기야 1775년, 무시무시한 모래폭풍이 교회의 모든 입구를 메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갱도를 파야 했다. 그들은 매주 벽과 입구에 쌓인 모래를 치워가며 이십년을 더 그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그러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모래도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던 어느날, 모래에 파묻힌 신이 항복을 선언하고 싸움을 포기했다. 성직자는 교회 세간을 모두 경매에 내놓고 교회 문을 닫았다. 지금은 모래가 건물을 완전히 뒤덮고 묻어버렸다. 종탑만 모래언덕 밖으로 18미터 남짓 드러나 있다. 아버지는 모래에 묻힌 교회당, 신앙의 잔해를 보고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p. 26)

그 교회 종탑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당시 생존해 있던 한센 일가 전원이 줄지어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땅 위에 남은 그 교회의 해골을 보고 느낀 점을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보고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 수가 있어? 암만 봐도 신과 교회의 무기력, 단념, 항복밖에 떠오르지 않던데" (p. 27)

그 시절에는 일상의 소소한 생채기가 있었을지언정 내 부모님이 함께 살며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디서 두 사람의 근원전인 공모 의식이 싹텄는지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어떤 질문들이 나오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껄끄러워진다는 것은 일찌감치 느겼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상황에서 처음 만났는지, 유사(流沙)에서 빠져나온 스카겐 토박이 청년과 예술영화라는 종교의 수녀가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1953년에 2420킬러미트의 거리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평생을 함께할 그 한판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p. 31)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똑같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살고 있기에 모두의 삶은 제각각 소중한 것이다. 제각각 다르기에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그 반짝임을 나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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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2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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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어머니와 미국 동해안의 휴양지에서 외롭게 지내던 잭 소여는, 우연히 만나게 된 스피디 파커라는 노인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현재의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세상, '테러토리'라는 곳에 대해서다. 그곳은 마법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현세 사람들의 트위너가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잭의 어머니 역시 그곳에 트위너가 있었는데, 바로 여왕이었다. 게다가 잭의 어머니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스피디는 잭에게 두 개의 세계를 넘나들며 여왕을 구하는 것만이 잭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2권 세트 소설은 역시 한번에 몰아서 읽어줘야 제맛이지만, 소설치고 상당한 두께의 1권에 이어 더 두꺼운 2권을 연달아 읽느라 눈이 장시간 혹사당했다;;;

잭과 울프는 히치하이킹을 해가며 서쪽으로의 여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로 경찰에 잡혀서 어느 종교감호시설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의 책임자인 가드너 목사는 잭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며 어디서 만났는지 추궁한다. 잭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오스먼드의 트위너라는 것을. 테러토리에서 잔혹하게 채찍질을 하던 그 냉혹한의 트위너는 이세계에서 역시나 잔혹성을 떨치고 있었다. 교묘하게.

"우린 30일이면 너희 두 인간쓰레기를 교화시켜 여기 오기 전까지 얼마나 더럽고 부도덕하며 병들고 형편없는 삶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어. 정확시 지금부터 시작한다." (p. 43)

잭과 울프가 잡혀들어간 곳은 교화시설이 아니었다. 가드너 목사의 종교적 세뇌아래 갈곳없는 청소년들을 부려먹는 불법착취시설이었다. 감옥보다 더 열악했다. 울프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힘겨워하고 잭도 어떻게든 이곳을 빨리 탈출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가드너 목사는 잭이 누구인지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한다.

" 너 말이야... 옮겨 다니는 재주는 언제 터득한거지?"

"무슨 말슴인지요?"

"언제부터 테러토리에 옮겨 올 수 있었냔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네요"

"검둥이는 어디에 있지?"

"누구요?"

"검둥이 말이야, 검둥이! 파커, 파커스, 이름이 뭐든 말이야! 그자는 어디에 있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p. 137)

잭과 울프에 대한 고문이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잭은 그사이 마법주스가 없어도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드너가 작정하고 잭을 실토하게 하려던 그밤 울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변신하기 시작한다. 피의 밤이 열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잭은 서쪽으로 이동하며 일단 친구 리처드를 찾아가기로 한다. 잭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어릴때부터 단짝친구였던 리처드에게 상담하고 기운을 얻고 싶다. 잭은 리처드의 기숙사로 향한다. 하지만 리처드는 잭의 뒤를 쫓고 있는 모건의 아들이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는 거구나"

"어쨌든 그동안 힘들게 지냈던 것 같아. 하지만 난 우리 아빠한테 전화도 걸지 않을 거고, 이대로 너를 떠나보내지도 않을 거야. 오늘 밤에는 내 침대에서 자. 헤이우드 사감이 취침 점호를 하러 오면 넌 침대 밑에 숨으면 돼" (p. 229)

리처드를 만난 잭은 그간의 일을 (일단 리처드의 아빠인 모건에 관련해서는 쏙 빼고) 들려주지만 리처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오후부터 리처드와 학교와 기숙사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모든 학생들이 사라지고 기숙사 마당에 괴이한 생명체들이 돌아다니며 리처드에게 소리친다.

"슬로트! 네 승객을 내놓으라니까!" (p. 250)

하지만 여전히 리처드는 이건 꿈이라고 자신은 열에 들떠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고 있는거라며 현실부정을 하려 든다.

"시브룩섬은 안돼. 아빠는 어디 있지? 어서 그 벽장에서 나왔으면! 제발, 부탁이야. 시브룩섬 사건 같은 건 싫어. 제바아알...." (p. 254)

리처드와 리처드의 기숙사로 잭의 발길이 향한 것에는 친구의 도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리처드의 학교는 스프링필드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서쪽으로의 여정에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잭은 깨닫는다.

"스프링필드는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미국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철도 종착역이었어. 여기는 지리적으로 사통팔달하는 곳이었거든. 스피링필드에서 출발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주요 철도 노선이 있었어. 우리 학교는 앤드루 테이어가 가능성을 알아보았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는 철도 수송으로 큰돈을 벌었지. 주로 서부 해안으로 가는 화물 수송에 치중했어. 그는 동부만이 아니라 서부로 향하는 화물 수송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이었어"

"서부해안으로 간다고?" (p. 284, 285)

온갖 학교인물들의 모습을 띤 트위너들이 리처드에게 계속 '승객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잭은 순간 알아챘다. 기차! 기차역! 학교엔 아직 기차시설이 남아있는 곳이 있었다. 두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다가오자 잭은 리처드를 데리고 테러토리로 넘어간다.

이동이 이루어지고 한쪽이 트위너의 몸으로 들어가면, 그 결과 온화한 빙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p. 297)

잭이 이처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괘씸하게도 그가 단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가 한 장소에서 순간이동을 하면, 언제나 떠난 장소와 같은 곳에 도착했다. 반면에 슬로트는 늘 오리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에 목적지에서 아주 먼곳에 떨어지곤 했다. (p. 298)

이세계와 저세계에 트위너가 있는 존재들은 서로 오갈 수 있었지만 한 세계에서 두 영혼이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잭은 트위너가 없는 단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순간이동에 있어서 유리했다. 잭은 몰랐지만 잭을 쫓는 모건을 알았다.

한편, 테러토리로 넘어간 잭과 리처드는 기차와 기차역을 발견한다. 그리고 기차역을 지키던 앤더슨에게서 기차에 관련된 사연을 듣는다. 기차가 생겨난 배경과 기차가 지나갈 길과 기차가 싣고 있는 정체모를 짐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초토화된 땅'에 관한 설명은 방사능 피폭 증상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자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서부는 첫 번째 핵실험이 진행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시제품이 탑에 매달렸다가 폭발하자, 주민이 백화점 마네킹들로 구성된 교외 지역들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군인들도 핵폭발과 그에 뒤따르는 불기둥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진짜 아메리카 테러토리의 마지막 보루인 유타주와 네바다주로 돌아가 간단하게 지하에서 핵실험을 재개해다. (p. 330)

1권의 1부와 2부 중 1부에서 스티븐 킹의 문체가 강하게 느껴졌다면 2부의 3부와 4부중에선 4부에서 스티븐 킹의 분위기가 흠씬 풍겼다. 결국 이 두꺼운 장편 소설은 스티븐 킹이 열고 피터 스트라우브 가 전개하고 스티븐 킹이 닫는 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4부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초현실들과 핵실험에 대한 경고는 여타 다른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시 스티븐 킹 다웠다. 그의 작품에선 늘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가의 강한 어조가 느껴진다. 멋있다.

블랙호텔이 이번 원정의 종착지라고 이제 잭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은 무력하고 짜증만 부리고 있지만 리처드가 이 원정에서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소여의 아들과 슬로트의 아들. 필립 소텔 왕자의 아들과 오리스의 모건의 아들. 한순간 세계의 전체 상황이 훤히 보이는가 싶더니, 블랙 호텔에서 무엇과 맞닥뜨릴지는 모르지만 리처드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p. 358)

솔직히 2권 초반에 가장 이해가 안되던 것이 잭이 왜 리처드를 굳이 찾아가려 하느냐는 점이었다. 아무리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현재 최대의 적인 모건 슬로트의 아들이 아닌가? 하지만 잭의 운명은 리처드에게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임이 점점 드러난다. 리처드는 잭의 예상과 달리 '테러토리'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부정해왔을 따름이었다.

잭은 막연하게나마 그가 하려는 일이 단순히 엄마를 구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부터 잭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일에 뛰어든 것이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제 그는 이 모든 역경이 사람을 강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p. 449)

잭은 그동안의 역경을 통해 몸도 생각도 훌쩍 자라있었다. 리처드는 현실부정의 단계를 지났음에도 머리와 달리 몸이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독이라도 퍼지고 있는 것처럼.

"너는 가도 돼, 리치. 나는 괜찮아. 그들도 너는 가게 놔둘 거야, 걱정마.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랑 상관이 있을 수도 있어"

"내가 너를 끌어들인 거야"

"아니, 아빠가 나를 끌어들인 거야. 아니면 운명이 나를 끌어들인 건지도 모르지. 아니면 신이거나, 아니면 제이슨이거나. 그게 누가되었든, 나를 떼어놓고 갈 생각은 마" (p. 467)

리처드는 바르게 자란 소년이었고 착한 심성의 소년이었다. 무엇보다 잭의 진정한 친구였다. 악의화신 모건 슬로트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리처드는 천사의 화신 같은 아이였다.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리처드가 풀어놓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잭은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전체적인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아빠는 그걸... 음... '필 소여의 망상' 이라고 불렀어"

잭이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라 머리가 어찔할 만큼 강렬한 흥분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부적이었다. (p. 475)

"어떤 것은 제거할 수 없어. 어떤 사람은 제거할 수 없어. 그것들은 ... 음... 단일한 성질을 가졌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 그것들은 부적과 같아. 단일한 성질이라고, 나도 그래. 단일한 존재야. 나도 트위너가 있었지만 그는 죽었어. 난 테러토리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제외한 모든 세계에서 단일한 존재인 거야. 난 알 수 있어. 느낄 수 있다고, 우리 아빠도 알고 있엇어. 그래서 나를 방랑자 잭 이라고 부른 거야. 내가 여기 있을 때 난 저쪽 세계에는 없어. 내가 저쪽 세계에 있을 때 난 이쪽 세계에 없어. 그건 리처드 너도 마찬가지야!" (p. 477)

잭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친구인 리처드와 함께 남은 여정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존재를 더 만나게 될까? 어떤 사건을 더 겪게 될까? 부적의 능력은 대체 무엇일까? 꺼져가는 엄마의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잭은 어쩌다 이런 운명을 타고 나게 된 것일까?

스릴러 소설에 스포는 맥빠지는 행동이므로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ㅎㅎ

4부에서 펼치지는 초현실들은 한치앞도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아마 이 소설 2권을 합쳐 가장 긴박하게 진행되는 장일 것이다. 막판에 휘몰아치는 전개 또한 스티븐 킹 다웠다. 1권이 558페이지 2권이 727페이지 라는 어마무지한 두께의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은 눈이 시려옴에도 멈출 수 없는 스토리적 강한 매력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작가다.

이쪽 세계의 존재와 비슷한 저쪽 세계의 트위너가 존재한다는 것, 두 세계를 오간다는 것, 시공간을 넘나드는 차원이동등은 근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설정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1984년에 나온 작품이다. 앞서나갔던 상상력이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혀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므로 역시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존재들과 초현실들은 여전히 미래적이었다. 어쩌면 이런 앞서나갔던 선배작가의 상상력 덕분에 지금 작가들의 상상력이 더 키워졌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잭 소여'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톰 소여 처럼 모험을 통한 소년의 성장은 해피엔딩이란 점에서 역시 스티븐 킹 다웠고 그래서 역시 좋았다. 나는 늘 해피엔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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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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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를 무대로,

소년 잭 소여의 파란만장한 모험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다크 판타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작가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와 협업하여 집필한 작품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공저자인 피터 스트라우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스티븐 킹이 선택한 작가라면 믿고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명의 작가가 함께 쓴 작품이라서인지 그동안 읽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같은 듯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잭 소여 라는 열두살이 소년이 황량한 바닷가에 서있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소년의 엄마는 한때 유명한 배우였으나 지금은 말기암 환자인 것을 숨기고 머물던 집도 다 팔아치운 채 외진 호텔로 도망치듯 내려와 아들과 단둘이 지내고 있다. 소년은 갑작스레 무너진 일상과 인적드문 비수기의 쓸쓸한 휴양지에서 홀로 이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는 중이다.

또다시 예전에 느꼈던 무엇인가에 지시당하고 조종당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이 잭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기다린 줄이 끈질기게 엄마와 잭을 바닷가 이 버려진 곳까지 끌고 온 것은 아닐까? 그들은 잭이 이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p. 26)

잭은 갑작스레 이곳에 온 이후 내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호텔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고 침실에 머물며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안색이 나빠졌지만 어디가 아픈지조차 잭은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이제 나가서 놀렴. 잭은 평소와 달리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 그래요, 엄마, 아주 잘했어요. 참 잘나셨어요. 이제 나가서 놀라고요? 누구랑요? 엄마,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왜 여기 있냐고요? 얼마나 아픈 거고요? 어째서 나한테 토미 아저씨 얘끼를안 하는 거지요? 모건 아저씨는 무슨 짓을 꾸미는 거예요? 도대체... 질문,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스피디 할아버지마저 없었더라면... (p. 29)

답답하지만 속앓이만 할뿐 차마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던 잭은 호텔옆 유원지에서 일하는 스피디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났다. 어렸을때 돌아가신 아빠 대신 후견인을 맡아 주었던 토미아저씨 마저 얼마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동업자인 모건 아저씨는 전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모건 아저씨를 피해 도피한 것처럼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의 일은 복잡해 보였다. 그럴때 만난 스피디 할아버지는 첫만남부터 포근하게 잭을 품어주었다. 하지만 스피디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스피디 할아버지는 잭이 혼란스러워 하는 백일몽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잭이 그저 꿈이라고 여겼던 환상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다.

"테러토리. 공기조차 부잣집 창고에 모셔 둔 최상급 와인 향기가 나. 보슬비도 내리지. 테러토리는 바로 그런 곳이란다, 얘야" (p. 68)

스피디 할아버지는 잭을 처음 봤을때부터 '방랑자 잭' 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가 해주는 말들이 조금 이상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잭은 마침내 기억하게 되었다. 예닐곱살 무렵 납치당할 뻔 했던 사건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이가 스피디 할아버지 였다는 것을. 잭은 깨달았다. 스피디 할아버지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잭은 스피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실컷 울어아. 마음이 풀릴테니. 가끔씩은 울 필요가 있단다. 내가 알지. 할아버지는 우리 방랑자 잭이 얼마나 멀리 왔고,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쳤는지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속이 후련해질때까지 울려무나." (p. 88)

"어쩌면, 어쩌면 넌 엄마룰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구나. 엄마와... 엄마를 닮은 한 여성을 위해 온 것 같아."

"누구를 구한다고요?"

"여왕이야. 이름은 로라 델루시안이고 테러토리의 여왕이란다" (p. 89)

잭은 스피디 할아버지의 말을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건넨 물약을 마시고 직접 그 세계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단숨에 그 세계와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기억이었음을 알게 되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조금씩 완성된 세계의 모습으로 잭에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잭에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 말만 잘 들어라, 방랑자 잭. 시간이 별로 없거든. 그 슬로트라는 작자가 이곳에 올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면 더더구나 시간이 없구나. 그자는 너희 엄마가 죽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이 없거든. 게다가 그의 트위너는 로라 여왕이 죽기를 바라고 있단다"

"트위너요?"

"이쪽 세계 사람들도 테러토리에 트위너를 두고 있단다. 많이는 아니야. 저쪽 세계는 사람 수가 아주 적거든. 여기 10만 명당 한 명 꼴이지. 하지만 트위너들은 이쪽저쪽으로 손쉽게 오갈 수 있단다" (P. 95)

"이 여왕이... 우리 엄마의... 트위너인가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아빠도... 트위너가 있었나요?"

"물론 있었지. 좋은 사람이었어"

"아빠가 이쪽 세계에서 돌아가셨을 때 저쪽 세계의 트위너도 죽었나요?"

"그랬단다. 동시에 죽은 건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었지"

"저도 트위너가 있나요? 테러토리에?"

"너한테는 없단다. 얘야. 너는 너밖에 없단다. 너는 특별한 존재니까" (p. 96)

"잭, 네가 테러토리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단다. 네가 꼭 가져와야 할 게 있거든. 그것은 강력하고 전지전능한 것이란다" (p. 113)

"왜죠? 그렇게 불쾌한 곳이라면 왜 거길 가야 하냐고요"

"왜냐하면 그곳에 부적이 있기 때문이지. 또 다른 알람브라 호텔 어딘가에 있을 거란다" (p. 116)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너는 여정을 시작할 만큼은 알고 있단다. 부적을 찾게 될 거다, 잭. 그것이 너를 끌어당길 테니까" (p. 117)

또 다른 세계 라는 테러토리, 같은 모습을 한 트위너, 이 새로운 세상과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세계를 오가며 자신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빠는 두 세계를 오가며 어떤 일을 한 것인지 등등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에 이해안가는 것 투성이였지만, 죽음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엄마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잭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신이 당분간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엄마는 어렴풋이 잭이 떠나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편이 때때로 자신이 모르는 그 어딘가에 다녀왔던 것처럼.

"자, 떠돌이 잭, 키가 너무 커서 네가 문으로 들어올 때 네 아빠인 줄 알았지 뭐냐. 가끔씩 네가 겨우 열두살 이라는 걸 잊곤 한단다" (p. 127)

"저를 보고 떠돌이 잭이라고 부르셨네요"

"아빠가 그렇게 부르셨잖니. 네가 오전 내내 나가서 안 들어오기에 문득 그 생각이 났단다"

"아빠도 저를 떠돌이 잭이라고 부르셨나요?"

"아마도 그럴걸... 아니, 확실히 그렇게 불렀어, 네가 아주 어릴 때. 방랑자 잭 이라고. 그래, 그렇게 불렀단다. 방랑자 잭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잔디바을 기어다닐 때 였지. 아주 재미있었어." (p. 128)

"저는 가야만 해요, 정말이에요" (p. 129)

"방랑자 잭이라,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나..." (p. 134)

잭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잭의 여행을 허락했다. 어쩌면 마지막 희망같은 것을 품은 것일수도 있다. 두사람 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었지만, 잭 소여는 '방랑자 잭' 이었다.

잭이 다른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믿게 되고 떠나게 되기까지의 내용이 <1부 잭 소여, 서둘러 떠나다> 이고, <2부 시련의 길>에서부터 본격적인 잭의 여행이 펼쳐진다. 1부의 내용은 특유의 속도감과 펼쳐놓는 흥미요소들과 흡입력이 스티븐 킹이 대부분 쓴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으로 여겨졌다. 개인적은 기분으론 2부의 내용은 1부와 조금 다른 문체가 느껴졌는데 아마도 2부부터가 공동저작이거나 피터 스트라우브 가 중점적으로 쓴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2부 부터는 이세계와 저세계를 오가며 현실보다 판타지적인 요소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테러토리의 여왕, 로라 델루시안의 아들은 생후 6주 만에 요람에서 숨을 거두었다.

필과 릴리 소여의 아들은 생후 6주에 요람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리고 모건 슬로트는 그 현장에 있었다. (p. 190)

잭의 아버지 동업자인 모건과 그의 트위너는 이세계에서든 저세계에서든 잭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다. 잭은 부적을 찾아 가야 하고 모건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잭을 추격한다. 이 과정에서 잭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고 모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었다.

"이쪽 세계의 물리학이 그들에겐 마법인 셈이지, 그렇지? 우린 과학 대신 마법을 이용하는 농업군주제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야" (p. 334)

"자자, 기본적으로 우리 회사의 이익은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 쪽 사람들에게 이익을 널리 나누어 주는 것은 어떻겠나? 내 생각엔 우리가 저쪽 세계와 합치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에너지와 그들의 에너지를 합치면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필." (p. 335)

"모건, 그러니까 저쪽 세계를 너무 많이 좌우하려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도 테러토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늘 영향을 받고 있네. 좀 더 놀라운 얘기를 알려 줄까?"

"말해 보게"

"다른 세계는 저쪽 세계만이 아니네" (p. 339)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1권에서는 밝혀지지 않지만 잭의 아버지 필은 두 세계를 오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모건에게 두세계를 넘나드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었고 두사람은 두 세계를 오가며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은 두 세계의 안정을 위해 적정한 선을 유지하려 했고 모건은 최대한 많은 이익을 위해 두 세계의 안정따위 관심이 없었다. 숨기고 있던 모건의 야욕은 필의 죽음이후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때 잭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잭은 고달픈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두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을. 이쪽의 죽음과 저쪽의 죽음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건들은 두세계를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점점 더 두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 잭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때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그러다 늑대인간 '울프'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잭의 아빠 필을 좋은 사람이라고 모건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잭은 친구를 얻은 듯 기뻤으나 급작스레 모건의 트위너가 나타나 목숨을 위협하고 둘은 함께 이세상으로 건너오게 된다. 울프가 늑대로 변하는 보름달이 뜬 사흘간 잭은 울프의 가축이 되어 헛간에 갇혀 있게 된다. 모건과 그의 트위너의 위협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잭은 울프와 서쪽으로 계속 여행을 해야만 한다. 잭의 여행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잭의 여행은 2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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