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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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공쿠르상 수상작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꾸며지지 않은 하얀색 표지의 책을 받았다.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고 난 후 표지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매번 다르곤 한데 가제본의 표지도 그러했다. 첫장을 넘길땐 굵은 글씨의 제목에 눈이갔지만 마지막장을 덮을땐 프로펠러를 단 작은 비행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남자의 일기같은 문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을 차분이 읊조리는 한남자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평화롭지만 애잔하고 쓸쓸한듯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그런 목소리일 것 같다...

이 남자의 첫 대사는 교도소에서 시작된다. 교도소의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교도소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대번에 느껴지는 이 남자는 교도소에 있어서 그런지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다. 그렇게 교도소의 일상과 자신의 인생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동안 현재로 가까워지고 현재로 합쳐지는 순간 아마도 출소할 것이다.

2008년 수감되기 전까지 이 교도소에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 아헌트식에서 26년간을 살았다. 폴 크리스티앙 프레데릭 한센.

한센씨는 1955년 툴루즈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살의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아나 마르주리, 서른살의 훤칠한 덴마크 남자 요하네스 한센. 두사람은 자신들의 아들 폴을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너무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독립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와 척박한 환경에서 개신교 목사활동을 하는 올곧은 덴마크 남자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덴마크의 끝 시카겐에 있는 한센가를 다녀온 여행은 세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여행이 되버렸고 70년대를 전후한 사회적 격변 속에 두 사람의 인생도 격변한다.

폴은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가지 않았으나 매일같이 저녁을 차려놓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영화와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나 부족한 가족애가 안타까웠다. 그러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아버지는 캐나다에 자리잡게 되고 덴마크의 피가 흐르는 프랑스인 폴은 프랑스에서 학교를 마치고 캐나다로 건너가 캐나다 시민으로 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먹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던 아버지의 설교는 캐나다 퀘백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그의 신앙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마지막 설교에서 이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 155)

 

신자들의 축복을 빌었지만 사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마무리 문장이었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가 책의 제목이 된 것에 대해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왠지 원제는 달랐을 것 같은데 가제본이다 보니 확인할 수는 없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프랑스작가라는 것이 새삼 상기되곤 하는데, 영국에 대한 표현에서 특히 그렇다.

프랑스와 영국은 역사적으로 앙숙관계다. 저자는 은근하게 영국을 까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의 설정부터 그렇다.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 목사가 프랑스에서 무시 받다가 영국령이지만 프랑스문화가 지배적인 퀘백에서 개신교 목사로서 품위를 잃어가고 신앙이 흔들려 가는 과정, 그리고 영국인 위주의 신도들에 대한 표현과 석면을 둘러싼 환경표현을 읽다보면 저자의 은근한 프랑스인적 도취가 좀 느껴지는 듯 하다.

여하튼, 한센씨의 인생은 평탄한 듯 평탄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나의 외조부틑 DS19시트로엥을 택했다. 내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갈 날들을 촘촘한 시간 배정으로 지배해버린 그 속세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p. 171)

 

이런저런 일을 하던 저자의 경력이 쌓여 저자는 한 아파트의 관리인이 된다. 여기저기를 보수관리하고 주민들의 불편을 해결하는 만능해결사 였지만 세월의 흐름은 아파트의 분위기도 변하게 만들었다.

'렉셀시오르'건물에서 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관리비 운용, 유지보수, 보안 외에도 68가구로 이루어진 그 콘도가 차질 없이 굴러가게끔 뭐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p. 15)

어머니는 메데이아 만큼이나 불경하게, 세상의 모든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지옥으로 갔다. (p. 180)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메데이아 ... 이런 고전속 용어와 인물들을 활용하는 유럽작가들에게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외국작가들에게서 고전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하다.

여하튼, 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낼때 그 감정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일반적인 감정의 반대랄까.. 그런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도박의 우연으로 자기가 잃기로 작정한 존재들을 서로 가깝게 하는 계책을 부렸다. 그때의 계책은 노엘 알렉상드르의 친구 노바씨의 부주의였다. 그 부주의가 나를 전격적으로 돌려세워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로 이끌었다. (p. 200)

"오늘 아침에 수상비행기 기지에 다시 나타난 당신을 보고 대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 남자랑 함께이겠구나" (p. 201)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 알곤킨 인디언들은 계약이나 신성한 맹세 같은 거 없어. 함께 살고 서로를 위해 살면 다야. 같이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자, 이 경제적인 네 문장이 영국 여왕과 보통법을 그 습기 자욱한 섬나라로 반송해버렸다. (p. 203)

 

서로가 서로를 운명의 상대로 알아본다는 것, 그 특별함이 폴과 위노나에게 주어졌다. 세상 평범해보이던 폴이 알고나면 점점 더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혈통의 인디언 후손인 위노나가 알려주는 자연의 섭리는 캐나다를 지배하는 영국법지배체제를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인에게는 더 잘 통할 매력이랄까. ㅎ

폴은 위노나를 매시매순간 사랑했다. 일분일초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위노나가 구해온 유기견 누크도 그랬다. 세상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고 그 존재들 덕분에 처음으로 축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폴의 직장이자 집인 아파트는 변하고 있었다. 폴과 함께 처음을 시작했던 노엘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너무나 급속하게.

나는 그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저 사람이 당선되겠구나, 하고 알았다. 겉멋 든 자가 구비한 악덕의 일습, 속이 시커먼 위선자, 음흉한 기회주의자의 전형. 과연 에드아르 세즈윅은 친근함과 오만, 전문적 식견과 무시를 적절히 섞은 요즘 시대의 수완으로 우리 건물의 대표가 되었다. (p. 218)

2000년대와 그에 발맞춘 세상은 이제 에두아르 세즈윅의 차지였다. (p. 219)

불행은 대체로 하나의 건물이나 공동체 속에 시기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몇달을 각 층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한 집 한 집 밑밥 까는 작업을 하고, 약한 자들을 먼저 쓰러뜨리고 희망을 품은 자들을 망가뜨린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거리와 동네를 바꿔서는 집요한 장인정신으로 일을 밀어붙인다. 우리 콘도에서는 대략 일년 남짓 걸렸다. (p. 230)

"폴, 그런 장례식까지 챙기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닙니다. 업무 일과의 절반을 입주자들의 개인적인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보내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 업무는 각 가구의 문 앞까지만이에요. 입주자의 건강 문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자기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세요. 입주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건 당신 업무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p. 238, 239)

콘도는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고 일종의 불신이 전반적으로 자리잡았다. 입주자 대표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주입한 그 분위기는 모든 층으로 퍼졌다. 차츰 모두가 다른 사람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p. 247)

2000년대 초에는 누가 더 인심이 각박해질 수 있는지, 누가 더 쪼잔해질수 있는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주옥같은 일화들이 차고 넘쳤다. (p. 248)

우리는 이제 건물이 아니라 제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종의 전제 공국에서 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입주자 모두가 이 조무래기 군주의 변덕스러운 비위를 기꺼이 맞춰줬다는 것이다. (p. 260)

 

폴이 인생의 반을 바쳐 일한 아파트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것을 보며 사회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늘 '옛날이 좋았다' 고 이야기하곤 한다. 옛날이 더 너그러웠고 더 인간적이었고 더 믿을만했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적 배경때문이라기 보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현상이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분위기는 살만하거나 각박하거나 그때그때 달라졌다. 지금 우리 사는 환경이 옛날을 그립게 한다면 그것이 정말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인지 현실에 대한 무책임함인지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위노나는 매일같이 자신의 땅과 역사를 내려다보며 날아다녔지만 나는 렉셀시오르의 닳아빠진 자물쇠 아래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내게는 족했다. (p. 253)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나의 시간은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서 이 작품이 당연히 실패한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일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이 작품 속에 나왔던 '실패' 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민에 빠지게 된다. 모두가 똑같이 살수 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모두가 다르게 사는 세상인데 무엇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대단찮은 삶이었으나' 후회없고 만족하는 삶이라면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폴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큰 파고 없이 내내 잔물결일듯 잔잔하기만 한 성격의 폴이(감옥에 가게 된 것도 그렇지만) 출소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는 '복수'는 복수임에도 읽는이에게 흡족한 웃음을 띠게 해준다. 그가 위노나와 누크와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행동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깊이 그들을 이해했던 그만의 방식이이었기에,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선택이었기에.

14세기에 반도 최북단, 도시에서 조금 떨어지 바닷가 바로 옆에 뱃사람들의 수호자들에게 바치는 교회 하나가 지어졌다. 폭이 45미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 합각머리 종탑까지의 높이는 22미터, 38열에 달하는 신자석, 위풍당당하고 독특하기로는 유틀란트 반도 전체에서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물보라를 너무 많이 맞았던 탓일까, 폭풍의 입김에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방풍벽이 없이 정면이 노출된 교회는 머지않아 땅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770년경에는 모래가 차츰 안뜨로, 그다음에는 본당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모래언덕은 밤낮도 없이 그악스럽게 교회를 갉아먹고 벽을 밀어냈다. 급기야 1775년, 무시무시한 모래폭풍이 교회의 모든 입구를 메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갱도를 파야 했다. 그들은 매주 벽과 입구에 쌓인 모래를 치워가며 이십년을 더 그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그러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모래도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던 어느날, 모래에 파묻힌 신이 항복을 선언하고 싸움을 포기했다. 성직자는 교회 세간을 모두 경매에 내놓고 교회 문을 닫았다. 지금은 모래가 건물을 완전히 뒤덮고 묻어버렸다. 종탑만 모래언덕 밖으로 18미터 남짓 드러나 있다. 아버지는 모래에 묻힌 교회당, 신앙의 잔해를 보고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p. 26)

그 교회 종탑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당시 생존해 있던 한센 일가 전원이 줄지어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땅 위에 남은 그 교회의 해골을 보고 느낀 점을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보고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 수가 있어? 암만 봐도 신과 교회의 무기력, 단념, 항복밖에 떠오르지 않던데" (p. 27)

그 시절에는 일상의 소소한 생채기가 있었을지언정 내 부모님이 함께 살며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디서 두 사람의 근원전인 공모 의식이 싹텄는지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어떤 질문들이 나오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껄끄러워진다는 것은 일찌감치 느겼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상황에서 처음 만났는지, 유사(流沙)에서 빠져나온 스카겐 토박이 청년과 예술영화라는 종교의 수녀가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1953년에 2420킬러미트의 거리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평생을 함께할 그 한판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p. 31)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똑같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살고 있기에 모두의 삶은 제각각 소중한 것이다. 제각각 다르기에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두에게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 그 반짝임을 나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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