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 미술품을 치료하는 보존과학의 세계
김은진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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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보존에는 과학이 숨어 있다!

창작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마법 같은 보존과학

 

미술을 잘 모르지만 그림 보는 걸 좋아한다. 때로는 한줄의 문장보다 한장의 그림이 훨씬 많은 것을 전해주기 마련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들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림속에서 찾아내는 역사가 재밌을때가 많다. 그런데... 그 옛날의 그림이 어떻게 지금도 이렇게 멀쩡해 보일 수 있을까? 다 보존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보여지는 모든 멋진것들 뒤에는 숨어있는 노고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가끔 뉴스에서 예술작품들의 보존관련 소식을 볼때마다 그 속이야기가 궁금하곤 했다. 그림을 어떻게 깨끗이 닦아낼 수 있는걸까? 조각을 어떻게 티안나게 붙일 수 있는걸까? 작품의 진위는 어떻게 판별하는 것일까? 등의 평범한 질문들에 대해 저자는 과학적 답변을 명료하게 해주고 있다. 나아가 예술품에 있어 보존의 의미와 보존가의 마음가짐에 대해서까지 질문을 던져보는 진지함을 배울 수 있기도 했다.

과학고와 카이스트에서 과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많았고, 정통 이과생이 어떻게 미술품 복원의 매력에 빠져들었는지 그 감성을 느껴보는 것도 이 책을 읽어가며 얻을 수 있는 재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보존과학의 위치가 그러하듯 이 책의 분야도 예술과 과학 그 사이 어디에선가 읽히고 있었다.

보존에는 크게 세가지로 그 활동을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예방보존, 치료보조, 복원 이다.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던 것은 복원 이었는데, 보존이 곧 복원인것처럼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보존 이라는 커다란 프레임으로 확장시켜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저자의 진정성이었다. 저자는 조심스럽고도 애정어린 마음으로 보존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그 허와실을 담담하고도 차분하게 이야기해준다.

작품의 복원에 앞서 세 가지 측면에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 복원해야 하는가,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 (p. 20) 미래에 더 좋은 재료와 기술이 개발되면 다시 처리할 수 있도록 지금의 처리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한 일은 사진과 문서로 꼭 기록을 남겨서 작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늘 기록해야 한다. 보존가들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최신 기술과 과학적 연구 결과에 늘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한 부단한 자기계발의 노력은 물론이고 다른 영역과의 소통에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보존가들이 더 이상 음지에서 숨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양지로 나와야 하는 이유이다. (p. 21)

이미 알고 있는 예술품들에 대한 뒷이야기가 나올때면 더 흥미진진하게 읽히곤 했다. 렘브란트의 '야간순찰' 이라는 그림이 최소 25회 정도나 복원됐었다는 것,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밝아진 색이 불러일으킨 논란, 제2차세계대전당시 폭격이 퍼부어졌던 런던의 예술품들이 어떻게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는지 등에서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었지만 과학이 어떻게 예술과 접목되는지 보존과학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보존과 복원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장 안타까웠던 사례는 1935년 구본웅이 소설가 이상을 그렸던 '친구의 초상' 이라는 그림이었다. 복원전후의 그림이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서 되돌릴 수 없는 복원이 얼마나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이 되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최신기법으로 최선을 다해 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실패한 복원이었다.

흥미로운 사례들로 시작한 이 책은 갈수록 복원과 보존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주목한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 갈라지고 있는 것과 고흐의 '침실' 그림의 변색된 색에서 현재 보존과학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로스코의 '하버드 벽화' 와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보며 복원과 보존을 위해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할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고, 환경파괴의 주요인중 하나인 플라스틱을 예술작품 소재로 활용했을때나 뭉크 가 자신의 작품을 천장도 없는 장소에 방치하다시피 보관하려했던 식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보존가의 고민을 공감하게 되기도 하면서 예술품의 보존이라는 것이 정말 쉬운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고전작품들에 대해서는 복원과 보존이라는 것이 고민이 아니라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문제는 현대미술로 올수록 복잡해져 보였다. 예를들어, 마우리치오 카텔란 이라는 작가가 벽에 바나나 한개를 테이프로 붙여 놓고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이 있었다. 그 작품에 무려 12만달러가 넘는 가격이 매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그 바나나를 먹어버리고는 행위예술이라고 인터뷰했고 미술관측은 바나나를 새로 사다가 테이프로 붙였다. 이런 작품에서 보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나나? 의미? 아니 보존을 하긴 해야하는 것일까? 어떤 작품을 보존해야 하는 것인가?

1장이 '그림이 들려주는 복원 이야기' 라서 흥미진진하면서도 다양한 고민점들을 던져주었다면 2장 '미술관으로 간 과학자' 와 3장 '미술관의 비밀' 에서는 여전히 고민은 되지만 다양한 해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공유되는 세상이 되었다. 사실 미술관은 단지 아름다운 작품을 잘 보관하고 보여 주는 장소일 뿐 작품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는 미술관이 물리적인 작품의 보존뿐 아니라 함께 생산되는 모든 지식의 저장고가 되었다. 개방형 수장고의 유행은 단순히 닫혀 있던 수장고의 문을 열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을 넘어 누구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잘 지키면서도 잘 활용하는 두 가지 숙제를 모두 해결해야 한다. (p. 273)

보존과학도 예술품보존가도 생소하고 낯선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한번 들으면 바로 호기심이 생기는 궁금한 분야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고, 그런 세월의 흔적은 때론 주름살이 되기도 하고 때론 추억이 되기도 하고 때론 작품이 되기도 한다.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기 바쁜 우리에게 예술품의 가치와 보존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이 책은 뛰기만 사람을 차분히 쉬어가게 해주는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생각꺼리들을 남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겁다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마라톤 주자에게 페이스메이커가 있고 마라톤이라는게 꼭 1등을 못하더라도 완주의 의미가 있듯이 저자가 남긴 질문에 내가 해답을 찾으려 노력한다기보다는 저자의 고민을 나도 한번 생각해보고 멀게만 느껴지는 예술품을 좀더 가깝게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독자들이 많아질때 보존과학이라는 마라톤을 뛰고 있는 저자에게 물마시는 타임이 주는 에너지충전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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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제작자들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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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지연된 열차, 국지성 호우, 품절된 메뉴, 손을 삐끗해 깨뜨려버린 커피 잔...

당신은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이런 우연이 사실 더 '큰 그림'의 일부라면?

이런 우연이 사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사건이라면?

그리고 그 우연의 배경에,

'우연 제작자'라는 알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면?

 

우연이 모여 인연이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보면 사실 우연 자체가 인연의 시작인 것이 아닐까... 그런 우연은 결국 운명인 것은 아닐까... 여기 이 소설 속에서 그런 운명같은 우연, 인연의 연결고리같은 우연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완벽한 로맨스로 멋지게 구현되었다.

연인을 맺어주는 것에서부터 누군가의 세계관을 바꾼다든가 가족을 한데 모으거나, 원수들을 화해시키고 예술 작품이나 새로운 통찰력·혁신적인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질 영감의 씨앗을 뿌리는 임무같은 것들을 수행하는 우연 제작자 라는 존재가 있다면?

늘상 가던 카페에서 어느날 우연히 커피를 쏟게 된 그 작은 사건이, 그 커피를 쏟게 한 카페직원이 해고당하고 그 해고당한 직원과 한 차에 타게 되고 한밤중에 바닷가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게되기까지 그 모든 동선과 시간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들의 심리까지 파악한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면?

그런 일들을 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우연제작자인 에릭, 가이, 에밀리는 이제 막 초급을 벗어난 우연제작자들로 동기생 사이다. 더 등급이 높은 우연제작자들이 있고 상관도 있고 아직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임무들을 하는 존재들이 있다. 판타지적인 임무들이지만 겉모습은 일단 사람이다. ㅎㅎ

보통 임무전달은 아침에 눈을 뜨면 현관앞에 상세한 정보들과 함께 봉투에 담겨 놓여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이에게 전달된 봉투에는 딱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딱 한 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쪽 머리 좀 걷어차면 안 되는 겁니까? (p. 51)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이 문장이, 그저 암호였다고 생각되던 이 문장이 엄청난 반전을 암시하는 문장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에 깨닫는 순간 이 작품의 묘미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기막힌 반전이었을 수도 있고 엄청나게 '큰 그림' 이었울 수도 있을 저 하나의 문장이 전해주는 독특한 온기란!!!

가이는 우연제작자로 발령받기 전에 '상상 속 친구' 였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신에게만 보이는 상상 속 친구의 역할은 결국 외로움을 견디게 해주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 사람들은 더 이상 상상 속 친구를 생각지 않게 되고 그러면 또 누군가가 상상하는 다른 모습으로 친구가 되어주는 일을 하다가... 커샌드라를 만났다. 그리고 어떤 사건 이후 우연제작자가 되었다. 일종의 진급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같은날 발령받은 에릭, 가이, 에밀리는 함께 우연제작자 과정을 수업받으며 돈독해진다.

"앞으로 16개월간 나는 여러분에게 우연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러분은 우연 제작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 너희들은 비밀요원이다. 너희들의 존재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 일상적이고 계속적이다. 이 과정을 통해 획득할 도구를 활용하면, 너희들은 이 세상의 인과관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 그 지식을 활용해 사소하고 거의 인지할 수도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인생을 변화시킬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p. 91)

"세상에는 우연을 만든다는 것이 곧 운명을 결정하는 것, 사건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새로운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선견지명도 없고, 오만함으로 가득한 유치한 시각이다. 우리의 역할은 경계선에 정확히 서는 것이다.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회색지대에 서서, 그곳에서 탁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큰불을 내지 않고,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능성의 창조자, 은밀한 암시를 주는자, 매력적은 눈짓을 하는 자, 선택지를 발견하는 자다. (p. 92)

"이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그중 압도적 다수는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리고 맥락이 그런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의미가 그 사건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는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 대중에게 고용된 일꾼이다. (p. 93)

우연제작자 교육과정을 읽다보면 세상의 우연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있을 법한 일이다! 판타지는 현실가능성이 구체적일때 오히려 더 판타스틱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그랬다. 신묘한 판타지!!

"인연 맺기 우연 제작자로는 저 녀석이 정통이야. 저 녀석은 완벽한 여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여자 말고는 아무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아. 저 녀석은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진짜 낭만주의자야. 지나치게 안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맺어주고 싶어하는 제작자한테는 바로 이런 조합이 어울리지. 넌 아냐. 네 우연을 직접 제작하려고 하지 마. 문제가 아주 심각해질 수 있어" (p. 125)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진짜 낭만주의자' 가이에게 사랑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 커샌드라 뿐이다. 하지만 커샌드라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가이에게 에밀리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다. 에릭은 그런 에밀리의 감정을 눈치채고 조언해보지만 글쎄... 감정이란 원래 다른 사람의 조언이 먹히는 분야는 아니지 않을까? ㅎㅎ 그래서 우연이라는 극적 요소가 필요한 것일지도.

그는 자기 몫의 사랑을 맛봤고, 그 맛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하지만 가이는 이미 자기 몫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생이라는 책의 그 장은 이미 다 읽고 덮어버린 뒤였다. 실망스럽지만, 그는 이 점을 오래전에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차례였다. 그래서 가이에게는 인연맺기 임무가 중요했다. 어쩌면, 자신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을 다른 사람이 누리도록 도움을 줄 때마다 가이 역시 그 행복의 작은 조각을 받는 것일지 몰랐다. 그 행복이 가이의 이름 아래 기록되는 것이다. (p. 130)

이들이 사람들의 우연 제작을 하는 동안, 우연제작들의 삶에도 우연을 제작해넣는 존재들이 있을까? 우연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우연들과 우연제작자들이 엮이는 우연을 통해 큰그림을 향한 퍼즐들은 멀찍이서 하나씩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완성된 그 큰그림은 마치 스릴러처럼 예상치 못했던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중간중간에 '우연제작자 교육과정' 교재?! 가 끼어있는데, 정말 실제로 있는 교과서 처럼 읽혀져서 소설과는 또다른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H = pm² 이라는 공식을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저자의 본업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구나 싶어서 ㅎㅎ

판타지소설작가 중에는 은근 과학전공자들이 꽤 많은데 저자도 그런듯 하다. E = mc² 이라는 아인슈타인 공삭을 이렇게 활용하다니, 센스 good~!

(H 는 일반적 행복 또는 개인적 만족감, p는 개인의 행복 잠재력, m은 보람)

너는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사람, 가느다란 연관 관계를 발견하는 사람이어야 해. 이 봉투가 너에게 할당됐다는 건, 너처럼 훈련받은 사람만이 볼 수 있을 만한 뭔가가 정해진 시간에, 여기에서 일어나리라는 뜻이야. (p. 189)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현실을 보는 데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게 분명했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면 큰 것도 작아 보였다. (p. 200)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여하튼, 가이는 본업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는 인연맺기를 성공시킨 이후 전달받았던 다음 임무봉투에 적혀있는 문장 하나, 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우연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인연과 연결될 것임을 알아챌 수 있지만 그렇게 현실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제작자인 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에밀리도.

뭔가 하나를 꼭 집어 인생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로 바꿔놓고, 그게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믿어버릴 수 있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에밀리는 생각했다. 그것과 반대되는 생각에 아주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고. (p. 243)

에밀리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주의 성향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갑자기 전혀 생각지 않았던 행동을 순식간에 해버리고 만다. 충동이란 사실 그런거니까. 그리고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모두에게 혹은 두 사람에게.

"날 상상해. 내가 계속 여기 있게 해줘"

"하지만 어떻게?"

"난 우리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상상해"

"하지만 난 네 존재를 결정하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 있게 해줘"

"행동이 아니라, 그냥 존재. 네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했어. 그냥 네가 여기 있다고 상상했어. 너 하고 싶은 건 다해" (p. 300)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따온 말인데 기대하는데로 이루어진다 는 의미. 사랑도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을까?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른 결과가 오는 것일까?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다음 역이 어딘데요?"

"삶이요"

"삶이요?"

"삶이요, 진짜 삶이요. 모든 직업 중 최고지요. 정규직에, 풀타임에, 다른 것도 전부 포함이고. 자유의지, 모순적인 감정, 기억, 건망증, 성공, 실망, 그 모든 정신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p. 317)

"사람이요?"

"네, 사람이요"

"인간, 필멸의 존재, 우연의 고객. 그 모든 말로 정의되는 진짜 사람 말인가요?" (p. 372)

모든 직업 중의 최고가 삶이라... 그런가? 정규직에 풀타임에 다른 것도 전부 포함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기도 ㅎㅎ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엔 삶이 너무 버거울때가 많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지만;;;

영겁의 시간 속에 사는 존재와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 중에서 결국은 무한보다 유한이 좋아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끝이 없다는 것보다는 끝이 있다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처한 삶속의 함정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닥쳐요! 영혼을 잃고 세상을 당신처럼 보게 되느니, '작고 무의미한' 존재로 남는 게 낫겠습니다. 우연을 만들 방법은 선택하는 거예요. 선택하는 거라고요. 알아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우연을 만들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포함되지 않을 겁니다" (p. 341)

수동적인 가이가 첫번째로 했던 선택때문에 가이는 커샌드라를 잃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한 이 선택으로 인해 가이는 무엇을 또 잃을 것인가? 아니면 얻을 것인가?

"모든 우연 제작자가 사람인 건 아닐지 몰라도, 모든 사람은 우연 제작자이기도 하거든요" (p. 398)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거기서 김고은이 성인이 되던날 포장마차에서 공유에게 한 대사에 이런 말이 있었다.

"흐릿한 불빛, 소박한 안주, 쓴 소주, 비정한 정서. 도처에 낭만이 가득. 딱 하나만 더 있으면 완벽한데"

그리고 첫 키스 후 한 대사가, 그 꾸며질 것도 없는 짧은 한마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완벽하다"

이 한마디가 왜 그렇게 완.벽.하.게. 들렸을까 ㅎㅎ 그리고 많고 많은 명장면중에서 왜 하필 이 장면이 이 소설을 다 읽어갈즈음 떠올랐을까?

아마도 이 작품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완벽한 '낭만'을 느꼈기 때문이려나~ ^^

살면서 겪은 많고 많은 우연들이 모두 다 그냥 우연이 아니라면 그 우연들이 나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고 나의 인연들을 좌우했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내 인생의 우연을 제작했을 우연제작자들에게 딱히 화가 나지 않는 건 이 소설 속 우연제작자들이 참 따듯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우연제작자들이 내게 계획한 우연이었다면 나름 괜찮았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의도에서만큼은;;;

판타지 소설인줄 알고 읽었던 이 소설은,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원이 되고 원이 공간이 되는 확장처럼 작은 우연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인연들이 전해주는 결국 사랑이야기였다. 그 로맨스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판타스틱했다. 한마디로 완벽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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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 × 기억하는 인간 EBS 지식채널e 시리즈
지식채널ⓔ 제작팀 지음 / EBS BOOKS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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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MEMORIS

기억은 기록을 통해 살아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기록은 희망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삶의 자취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EBS 채널을 즐겨 보던 때가 있었는데... 상업적 광고가 없어서 좋았고 '지식채널 e' 라는 짧은 프로그램이 무척 좋았었다. 인상적인 문구와 사진, 짧은 시간속에 전달되는 긴 생각... 반짝하는 벨소리 같던 e 소리가 나면 티비를 끄려다가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곤 했다. 지식채널e 를 알리던 그 소리... 긴 다큐가 아니어도 짧으나마 굵직하게 전해져오던 지식채널의 메시지들이 책이 되어 나왔다. 주제가 다양했기에 한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이번 책의 주제는 '기억' 이다. 혹은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하는 내내 아우슈비츠의 폭력과 고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당연한 분노와 증오조차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오로지 야만에 맞서는 품위로 일관했고,

'가장 믿을 만한 홀로코스트의 증언자' 가 되었다. (p. 19)

"기억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의 신성한 의무가 되었습니다"

증언자의 기억뿐이 아니다. 증언자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p. 24)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고 기록은 누군가의 기억의 산물이다. 모든 기억이 기록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기록이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시간들이 있고 기록해야 할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어렵게 털어놓은 기억을 그렇게 소중해야 할 기록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죽을 각오로 진실을 쫓으며 청년은 여든의 노작가가 되었다. 암과 싸우며 손에 펜을 쥘 힘마저 잃었다. 그러나 테이프로 칭칭 감아 묶고서라도 쓴다. 아직 '사명'을 마치지 못했다. (p. 35)

가혹한 노동의 대가로 겨우 받았을 최저임금의 전부일지도 몰랐다. 차마 잊을 수도, 꺼내어 쓸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삶이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었다. 조선인의 마음이 새겨준 평생의 사명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리라.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p. 36)

그의 묘비에는 생전의 당부대로 이런 문장이 새겨졌다.

"역사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p. 38)

독립된 기록도 따로 뚝 떼어진 기억도 불가능하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다른 곳과 이어진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고 그들의 잘못은 모두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깨달음을 애써 생각하려는 이가 많지 않을 뿐이다.

오늘날 르포는 평온한 일상에 감춰진 사회의 민낯을 예리하게 발견하는 온갖 기록들이다. '나'를 '우리'로 확장하는 시선을 지녔다면, 누구라도 시대의 증언자다. (p. 45)

뒷조사가 아니라 르포, 함정이 아니라 르포,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르포, 우리는 아니 나는 시대의 증언자는 못될지언정 관찰자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선택 + 무시 + 강조 = 프레임 (p. 66)

언론참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일어나 왔다. 공식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매번 비슷하게. 책 속에 질문이 씌여 있다. "감시자가 되시겠습니까?" (p. 66)

영어 사전에도 일반명사 'dazibao'로 올라 있다. 한국에서는 저항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화장실에 반정부 낙서만 써도 문제가 되던 유신 시대를 지나 언론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80년대, 대자보는 속보 전달부터 선전운동까지 두루 담당하는 유일무이한 매체였다. (p. 87)

클릭이 전부인 게으른 손가락 행동은 더 큰 현실 앞에서 무지하거나 무력해지기도 한다. 현실 행동으로 이어졌다 해도 단번의 클릭으로 성취를 이루어내기는 힘들다. (p. 90) 해시태그 행동은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을까? 판단하기는 이르다. SNS 해시태그가 등장한 지 10여년, 해시태그 행동주의는 이제 시작이다. (p. 91)

대자보가 일반명사로 영어사전에 올라 있는 줄은 몰랐다. 대자보가 벽을 빼곡하게 덮던 때가 있었다. 지금 대학가의 벽에는 무엇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많은 것들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요즘 시대는 어떻게 목소리를 모을 수 있을까?

"모든 역사는 제멋대로다. 역사학자들이 완벽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인 역사서를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p. 99)

역사를 즐겨 읽는 나는 위 문장의 의미가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역사를 읽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역사를 읽어야 하는 건데... 한권의 책 한방향의 책이 아니라 여러권 여러방향 을 두루 읽어야 그나마 제멋대로인 역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건데... 지금 역사를 읽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특무대(1950~1960) - 방첩대(1960~1968) - 보안사(1968~1991) - 기무사(1991~2018) - 안보지원사

개명이 범죄 전과를 은폐하거나 법령상 제한을 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질 때 법원은 이를 불허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 잦은 개명도 불가하다. 개인의 경우 그렇다. 공적 영역에서는 바로 그 이유로 개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잦은 개명에서 정당을 따를 곳은 없다. (p. 146)

은폐와 희석, 이미지와 홍보라는 속셈이 만든 허울 좋은 이름들, 언제 또 바뀔지 모를 이름들이 역사를 어지럽게 스칠 때, 초래할 혼선과 행정비용 때문에 시도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개명도 있다. 엄밀히는 본명 찾기다. 1914년 일제가 시행한 폐합 정리, 일명 창지개명으로 고유한 이름을 잃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행정구역명들이다. 추정치로만 전국50퍼센트다. (p. 149)

일제가 남긴 잔재는 여전히 이나라의 생활 곳곳에서 수시로 발견된다. 너무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할뿐... 자신들의 집단 이름을 바꾸고 명패를 바꾸고 명함을 바꾸는데 수십수백억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그돈으로 정말 바꿔야 할 이름들을 바꿨더라면...

기록의 역사적 가치는 영구 보존해 후대에 전승할 필요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며, 기록물의 역사적 가치는 현재와 미래에 이용 가능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p. 188)

기록 과 기록물...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겨진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한데... 얼마나 보고 있는가?

201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종이책 절판 선언이 '사건'이었던 이유는 위키백과에 추월당한 정보량과 갱신 속도가 아니다. 막강한 지성과 불특정 다수, 익명의 아마추어들이 경쟁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서였다. 이른바 집단지성의 힘이다. (p. 229)

모든 집단지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 속도가 느려질수록 소수의 영향력이 커지는 지식의 독점화가 점점 심해지며, 이것이 가짜 뉴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구조를 낳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p. 230)

위키백과가 인류에게 선물한 위대한 지식은 참여하기를 멈추지않는 집단지성만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이다. (p. 231)

개인의 기억부터 한 시대의 한 국가의 기록까지 굵직한 사건부터 소소한 일상까지 다양하게 'HOMO MEMORIS'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요즈음 이렇게 간결하지만 강렬한 울림을 줄 수 있는 감각적인 책들이라도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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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페의 음악
장자크 상페 지음, 양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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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이 넘치는 삽화가,

장자크 상페가 사랑한 음악과 음악가들

장자크 상페 의 삽화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승부> 라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의 책을 보면서 부터였다. 예쁘게 새로 편집되어 나온 책을 읽으며 오래전 읽은 <좀머씨 이야기> 도 생각나고, 세월이 지나서인지 전에는 그림보다 글이 눈에 들어왔던 책이 지금은 글보다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글이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의미와 또다르게 삽화가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의미에 더 풍성한 여운을 느끼며 상페의 그림책들을 몇 권 찾아 읽어보기도 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 마르크 르카르팡티에와 '음악'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엮은 책이다. 상페는 어렸을때 여건이 허락했다면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삽화일이 직업이 되고 안정을 마련한 이후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에 본격적으로 심취한 것 같다. 상페가 사랑하는 다양한 음악의 경쾌함을 스윙으로 압축시켜 말해본다면 그의 흐르는 듯한 필체의 그림은 분명 스윙이 넘쳐나고 있다.

상페의 그림이 좋아서 그림책인줄 알고 선택했던 이 책이 그림책이 아니라 인터뷰책이었음을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림과 짧은 문장들이 어우러지면서 전해주던 유머와 감동이 있는 기존에 읽었던 그런 상페의 책은 아니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상페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은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가 걸어온 예술가로서의 궤적을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까? 스스로를 기꺼이 <그림 그리는 문필가>로 정의하곤 했던 사울 스타인버그의 말을 빌려 이 질문에 감히 대답해 보자면, 상페는 <그림 그리는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윙이 넘치는 삽화가이다. -마르크 르카르팡티에- (p. 9)

상페를 인터뷰했던 마르크 르카르팡티에는 그를 '그림 그리는 음악가' 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읽어온 상페의 책을 바탕으로 생각했을때 내게 상페는 <음악을 그리는 삽화가> 였다. 어느 책에서건 상페의 책 속엔 늘 음악에 관련된 그림이 빠지지 않았고 그림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음악이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상페는 너무나 열렬하게 음악을 숭상하고 음악가에 대한 꿈이 있었다지만, 나는 음악을 그릴 줄 아는 삽화가로서의 상페가 훨씬 좋다. 그의 그림엔 늘 음악이 흐른다.

당신은 음악에 미쳐 있으면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합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마련하기가 피아노 한 대를 장만하기보다는 훨씬 쉽기 때문이지요. (p. 14)

 

상페가 음악을 했어도 아마 잘 했을 것이다. 인터뷰 내용을 읽다보니 음악적 능력도 출중한 것 같다. 하지만 음악을 했다면 상페 특유의 그림을 통한 유머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는 상페가 삽화를 그려서 다행이다.

 

상페의 그림은 쉽게 대충 그린것 같은데 너무 잘 그렸다는 점이 놀랍곤 하다. 선 몇개 그은 것 만으로도 그의 삽화는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쉬워보이는 그림도 내가 그리면 당연히 이렇게 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상페자신도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 무수한 노력이 필요했음을 말하고 있다.

음악이니 연주니 하는 건 무엇보다도 기술의 문제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언제나 영감을 말하지만, 사실 연습과 노력의 문제인 거죠. (p. 20)

 

상페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그가 품어온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정말 놀랍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순수한 것이 느껴진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들은 내겐 너무 옛날의 오래된 음악들이지만 그가 음악을 대하는 마음 만큼은 어렸을 때의 그마음 거의 그대로라는 것이 전달되어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상페는 작사,작곡도 틈틈이 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당신의 작사가이자 작곡가, 요컨대 창작가로서의 지위에 대해서 말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내가 보관하고 있는 어느 상자 속엔가 책이 한 권 들어 있는데, 아마도 나는 그걸 절대 못 끝내지 싶어요. <올리브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고양이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책입니다. (p. 45) 엄청 많이 썼죠. 모두 곡을 붙인 건 아닙니다. 곡과 노랫말 때문에 내 머리가 너무나 복잡하죠. (p. 46)

그래도 암튼 머릿속엔 있다는 말이죠?

엄청 많이 들어 있죠. (p. 46)

상페가 작사, 작곡 하고 무대의상과 무대연출까지 한, 고양이들이 등장하는 코미디 뮤지컬이 개막되기를 기다려봐야 하려나 ㅎㅎㅎ

당신은 유쾌한 존재입니까? 유쾌하기보다는 위로가 불가능한 쪽입니까, 아니면 위로가 불가능하기보다는 유쾌한 쪽입니까?

내가 보기엔 유쾌한 쪽입니다. 어렸을 땐 늘 유쾌했어요.

여러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 덕분에! 내가 몹시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나의 삶을 구원해 줬죠. 그래요, 그 사람들은 유쾌한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비록 이따금씩 비극적인 짓을 한다고 해도, 대체로 유쾌한 사람들입니다. (p. 96, 97)

상페가 말하는 유쾌함은 그저 밝다거나 가볍다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멜랑꼴리가 함께 하는 유쾌함이랄 수도 있는데... '웃픈'의 반대라고나 할까....

경쾌함은 어리석음과 정반대죠.

시대가 유머러스한 그림마저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에요!

그리고 보니 당신은 화석 같은 존재로군요.

솔직히 나도 몹시 불안합니다.

사실 프랑스엔 더 이상 유머러스한 삽화라는 장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해도 아주 드물고요. (p. 100, 101)

상페의 그림은 경쾌하고 유머러스 하다. 서양식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상페가 사랑해마지않는 유머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것 같다. 하지만 상페도 인정하듯이 시대가 많이 변했다. 장자크 상페는 1932년생이다. 그의 전성기와 지금은 달라도 정말 너무나 다르다.

 

드뷔시, 라벨, 사티... 이들이 당신의 3인방인가요?

나에게 제일 위대한 3인은 드뷔시, 라벨 듀크 엘링턴 이죠.

그리니가 난 클래식 음악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클래식 음악이다, 아니다 같은 구분은 없습니다.!

아, 그래요?

네, 없어요. 드뷔시는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그냥 음악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링턴과 라벨 사이엔 아무런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p. 134)

상페는 음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했지만, 사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의 분야는 특정적인 분야로 보였다. 클래식, 재즈, 샹송.

그의 그림엔 클랙식 연주장이자 클래식 악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피아노도 꼭 그랜드 피아노이다. 항상 스탠드 마이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은 댄스홀에서 왈츠를 추는 것으로 보인다. 상페가 좋아하는 음악은 아마도 느낌이 찐~한 그런 류인것 같다. 모짜르트도 바흐도 그는 즐기지 않는다. 그의 음악적 감성은 프랑스식 유머 혹은 프랑스식 경쾌함 이라고나 할까... 1950~70년대의 벨 에포크 라고 할만한 그런 분위기의 곡들이라고나 할까...

혹시 최초로 뮤지션들을 그렸을 때를 기억하나요?

뮤지션들에 대한 그림이라고요?

아니면 음악에 대한 그림이라도 좋고......

내가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었는데, 결국 분실했어요. 악기를 팔던 상점 앞을 고양이가 지나가는 그림이었죠. 내용이라곤 그게 전부였어요. (p. 153)

왜 다시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궁금한데...

당신은 현실을 그대로 복사해서 그리기보다는 암시하는 편을 선호하나요?

네, 내 클라리넷들은 정확하지 않고, 내 자전거들은 굴러가지 못합니다! 나라고 그런 게 자랑스럽진 않지만, 어쨌거나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입니다. 그건 확실해요! (p. 161)

책의 뒷부분 1/3 정도는 음악과 관련한 상페의 삽화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런 멘트 없이 악기와 함께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들이 담긴 그림을 보다보면 음악적 삶에 대한 희노애락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어린아이때부터 노년까지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상페의 시간들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하여튼,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 한다는 말이 음악이 되어 깔려있는 듯 각양각색의 음악하는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 보였다. 이 책을 통해 상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삽화 속 암시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상페의 그림책들이 훨씬 재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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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한국신화
이경덕 지음 / 원더박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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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별왕과 소별왕, 삼승할망과 저승할망, 성주신, 조왕신, 자청비, 바리공주, 강림...

익숙하지만 낯선 한국 신화의 주인공

이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다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언급하듯이 '신화' 라고 하면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신화가 없다고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신화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있었다, 신화가. 부분적으로 전래동화 혹은 옛이야기 로 읽혀지던 것들이 알고보니 신화였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신화란 것이 원래 그랬다.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로 전해오던 것이 신화가 아닌가? 그저 동화라고 얄팍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첫장부터 깨우침을 주는 책이었다.

20세기에 한반도로 유입된 문화는 우리의 바람을 토대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유입이라기보다는 강압적인 측면이 강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 문화와 서양 문화가 우리의 상상계에 침투해서 그 영역을 확장해 오는 사이에 우리 문화에서는 큰 변형이 발생했다. 예부터 문화의 교류와 변화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상징을 만들어 내고 의미는 상징으로만 축적되고 발현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상징을 모두 모아 놓은 것이 바로 문화다. 즉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상징의 총체가 바로 그 지역의 문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신화를 토대로 의미를 축적해왔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리며 사는 문화는 우리의 이야기, 즉 한국 신화로부터 유래한 것들이다. 이 책은 한국 신화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정신적 토대가 되는 신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 걸음 나아가 그것이 지닌 문화적 성격이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하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p. 6~10 '시작하며' 中 발췌요약)

저자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사회와 문화를 신화를 통해 분석하는 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해본 사람이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한국의 신화이야기들은 흥미로운 분석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특히 서양의 신화들과 비교해주는 부분들이 정말 의미있게 다가왔다. 국뽕스럽지 않으면서도 주체성과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점이 좋았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모자란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이다. 문화에 굳이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옛 이야기인 신화에 있어서는 더더욱.

한국에는 두 개의 창조 신화가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하나는 남쪽 끝인 제주도, 다른 하나는 북쪽 끝인 함경도에서 전해진다. 제주도의 창조신화는 <천지왕본풀이>에 들어 있다. 본풀이는 근본을 풀어낸다는 뜻으로 신화의 우리말이다. 두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하늘과 땅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붙어 있다는 신화는 그리스, 이집트, 남태평양 등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늘과 땅이 붙어 있다는 것은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p. 17)

그리스와 남태평양 신화의 특징은 갈등이다. 그러나 갈등이나 대립보다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신화는 좀 다르다. (p. 18)

신화는 대부분 세상의 창조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한국에 신화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는 아마도 창세신화가 없다고 알았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의 대표적 신화인 '단군신화'에서는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신화에서 '단군신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옛이야기 속에도 세상을 창조하는 신화가 있었고, 조선건국에 국한된 단군신화가 아니어도 전통적 가치를 품은 다른 신화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저자가 신화를 알려줄때면 소설처럼 술술 읽히고 그 신화를 해석해줄 때면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오곤 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나 북유럽 신화의 <신들의 황홍(라그나로크)>등의 불 심판, 또는 불에 의한 종말 이미지와 수명장자의 최후는 다르지 않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는 불을 매개로 한 종말과 심판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평화로운 질서에 대한 인류의 갈망이며 간절한 요청이다. (p. 24)

거인에 의한 창조는 다양한 신화에서 관찰된다. 북유럽 신황서는 추운 지방답게 눈과 얼음 속에서 태어난 이미르 라는 거인이 등장한다. 중국에서도 혼돈에서 태어난 반고라는 거인이 죽고 난 후 그의 머리와 팔다리는 산이 되고 피와 눈물은 강과 하천이 되었으며 두 눈은 해와 달, 털은 풀과 나무, 입김은 비바람, 목소리는 천둥, 눈빛은 번개와 벼락이 되었다고 전한다. (p. 37)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다양한 거인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한국의 신화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서양의 신화를 골고루 섭렵하고 있는 학자이기에 알려줄 수 있는 식견들을 발견할 때마다 참 반가웠다.

그 어느 신화에도 세상을 놓고 신들이 내기를 벌이는 예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신화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발생한다. 전쟁과 다툼을 통해서 이승을 차지할 신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전쟁과 다툼을 통해서 종교만큼 또렷하지는 않지만 선과 악의 경계가 생겨난다. 그런데 한국 신화에서는 전쟁과 다툼 대신에 내기가 벌어지고, 그 내기의 끝은 어김없이 꽃 피우기 내기로 흐른다. 꽃 피우기 내기는 창조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연 꽃을 피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p. 30)

인류가 노래에서 태어난 사례는 세계 어느 신화에도 없다. 하늘을 향해 부르는 아름다운노래, 그것이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기원이다. 금쟁반과 은쟁반은 남녀 차별이 아니라 모두 귀한 것임을 의미한다. (p. 39)

집단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는 환대다. 환대는 찾아온 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다. 고대 여러 지역에서는 누군가 찾아오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이익을 따지지 않고 환대해야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유숙을 청하면 재워주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p. 85)

한국의 신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대부분 참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신화는 전쟁사이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리스신들도 전쟁을 치뤘고 북유럽신들도 전쟁이 결말에 다다르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신화에는 전쟁이 없다. 거창하지 않은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세계관이 좁아서 그런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쟁취보다는 평화를 숭상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세계 모든 신화에서 '환대'는 공통적이라는 것도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세상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세계 공통의 가장 큰 가치였던 것일까. 고대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사랑방'의 존재는 그런 환대의 문화가 오래도록 이어졌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한국 신화에서 다른 신화에 없는 꽃 피우기 내기나 꽃밭이 매번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꽃이 만발한 언덕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p. 112)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그러나 힘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킨다면 이후로도 계속 그 힘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함께 공존하고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삼승할망의 세계관과 다른 모습이다. (p. 128)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처럼 버려진 아이가 세상을 바꾼다.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는 훗날 노예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고, 오이디푸스는 괴물 스핑크스를 몰아내고 테배의 왕이 되었다. (p. 140)

바리공주의 행동은 '이시시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연상케 한다. (p. 149)

레테강을 비롯하여 그리스신화에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여러 강이 있다. 그 강들을 건네주는 것은 카론이라는 뱃사공으로 뱃삯을 주지 않으면 건네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뱃삯으로 쓰라는 의미로 이빨 사이에 동전을 꽂아 주었다. 이런 풍습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저승 갈때 쓰라며 관에 노잣돈이라는 것을 넣어 준다. 이런 관념은 저승에서의 생활이 이승과 다르지 않고 그대로 적용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p. 161)

한국신화는 다른 나라의 신화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소소하지만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한국신화에도 버려진 아이가 큰 일을 해낸다. 동화로 읽던 바리데기 이야기가 신화로 읽으니 또 다르게 다가왔다. 세계에 그토록 다양한 환경에서 그토록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임에도 공통의 문화를 발견할 때면 사람은 참 다 비슷하구나 싶기도 하다. 인류는 굉장히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 모두 같은 '종' 이다.

처용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가장 그럴듯한 것은 처용의 용모와 행태에서 볼 때 무슬림이라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신라를 찾아와 교역했다는 증거가 여러 문헌에 남아 있고 생긴 모양이 영락없이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p. 225)

신라의 문화에서 외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듯이 아라비아의 고대 문헌들에도 신라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고 한다. 이럴때면 역사는 참 신비롭게 다가온다. 신화가 곧 역사는 아니지만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에는 분명 역사적 배경이 깃들이 있다.

한국 신화에는 집의 신들, 즉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나 문을 지키는 문신의 도움을 받는 이야기가 많다. (p. 236)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화로와 불의 신인 헤스티아나 베스타가 있으나 여러 문의 신이나 화장실의 신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한국 신화가 생활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p. 273)

미다스는 그나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시빌레는 아폴론으로부터 한 주먹의 모래알만큼 긴 수명을 얻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동방삭이나 미다스, 시빌레와 달리 소사만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소사만은 상대가 굴러들어 온 해골일지라도 진심을 다해 정성껏 상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p. 290)

많음을 의미하는 숫자는 문화마다 다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8을 쓰고 문화권에 따라 아라비아 숫자의 마지막인 9를 쓰기도 한다. 한국 신화에서는 7이 많음을 의미하는 숫자다. (p. 296)

염라대왕의 출신지는 인도다. 인도 신화에서 죽음의 신이었던 야마가 중국으로 건너와 염라왕이 되었다. (p. 317)

'신과 함께' 라는 만화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조왕신 과 성주신은 많이 알려진 우리네 조상신이 되었다. 그런데 그 밖에 집안 생활처 곳곳의 신들이 제각기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가정과 관련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헤스티아 나 헤라가 그리 큰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리스신화를 거의 그대로 흡수한 로마신화에서 살아남은 로마 고유의 신들은 가정의 신 라레스, 찬장의 신 페나테스, 경계의 신 테르미누스, 문의 신 야누스가 있는데, 로마의 신들이 우리네 조왕신 성주신 문신들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가정의 신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문의 신은 크게 달라서 비슷한듯 다른 신화의 비교가 문화의 비교로 자연스레 연결되어 새삼 역사가 더 재미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장수에 관련된 신화나 문화마다 다른 숫자선호도도 재미있고 신화에서 서로서로 영향을 받아 신들이 오고간 흔적들이 보여지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이야기란 역시 참 재미있는 것이다.

김치원님의 아내도 그렇고 강림의 본부인도 그렇고, 궁지에 몰린 남편을 다독이고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은 여자들이다. 이럴 때 연상되는 것은 강인하 생명력을 가진 대지의 여신이다. 사회문화적으로 한국 신화에서 여성들이 크게 활약하는 것은 당시 사회를 주도했던 것이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바꾸는 것은 남자 스스로 할 수없다. 그것은 상대가 되는 여성의 몫이다. 동화의 주인공이 대체로 여성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p. 320)

그러고보니 '엣날 엣적에~' 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주손녀를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우리 문화에서 이야기의 전승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렇게 옛이야기로나마 자신들의 바램을 후대에게 전했던 마음이 애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신화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대부분 영웅에 가깝다는 점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진작부터 자각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림의 신화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엮여 있음을 보여 준다. 이승과 저승이 가로막혀 있어 서로 왕래하지 못하는 일본이나 서구의 신화들과 달리 강림의 신화에서 보듯 한국 신화는 이승과 저승이 순환적인 구조를 가진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인식이 오랜 세월 우리에게 있었다. (p. 333)

익숙한 신화들에서 접할 수 있는 저승세계는 그저 죽음의 세계이다. 때론 저승은 거의 지옥에 가깝게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신화에서 저승엔 꽅밫이 존재하고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꽃들이 존재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윤회와도 상관없이 이승과 저승은 단절된 세상이 아니라 오고갈 수 있는 그렇게 생활과 연결된 곳으로 표현된다. 한국신화에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엔 같은듯 다른 한국신화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대별왕, 소별왕, 오늘이, 가믄장아기, 삼승할망, 바리데기, 자청비, 철현도령, 황우양, 소사만, 강림 등 대부분 낯설게 느껴지는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한국신화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우리 신화의 소중함과 가치를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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