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연 제작자들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평점 :
오늘 아침 지연된 열차, 국지성 호우, 품절된 메뉴, 손을 삐끗해 깨뜨려버린 커피 잔...
당신은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이런 우연이 사실 더 '큰 그림'의 일부라면?
이런 우연이 사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사건이라면?
그리고 그 우연의 배경에,
'우연 제작자'라는 알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면?
우연이 모여 인연이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보면 사실 우연 자체가 인연의 시작인 것이 아닐까... 그런 우연은 결국 운명인 것은 아닐까... 여기 이 소설 속에서 그런 운명같은 우연, 인연의 연결고리같은 우연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완벽한 로맨스로 멋지게 구현되었다.
연인을 맺어주는 것에서부터 누군가의 세계관을 바꾼다든가 가족을 한데 모으거나, 원수들을 화해시키고 예술 작품이나 새로운 통찰력·혁신적인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질 영감의 씨앗을 뿌리는 임무같은 것들을 수행하는 우연 제작자 라는 존재가 있다면?
늘상 가던 카페에서 어느날 우연히 커피를 쏟게 된 그 작은 사건이, 그 커피를 쏟게 한 카페직원이 해고당하고 그 해고당한 직원과 한 차에 타게 되고 한밤중에 바닷가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게되기까지 그 모든 동선과 시간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들의 심리까지 파악한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면?
그런 일들을 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우연제작자인 에릭, 가이, 에밀리는 이제 막 초급을 벗어난 우연제작자들로 동기생 사이다. 더 등급이 높은 우연제작자들이 있고 상관도 있고 아직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임무들을 하는 존재들이 있다. 판타지적인 임무들이지만 겉모습은 일단 사람이다. ㅎㅎ
보통 임무전달은 아침에 눈을 뜨면 현관앞에 상세한 정보들과 함께 봉투에 담겨 놓여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이에게 전달된 봉투에는 딱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딱 한 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쪽 머리 좀 걷어차면 안 되는 겁니까? (p. 51)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이 문장이, 그저 암호였다고 생각되던 이 문장이 엄청난 반전을 암시하는 문장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에 깨닫는 순간 이 작품의 묘미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기막힌 반전이었을 수도 있고 엄청나게 '큰 그림' 이었울 수도 있을 저 하나의 문장이 전해주는 독특한 온기란!!!
가이는 우연제작자로 발령받기 전에 '상상 속 친구' 였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신에게만 보이는 상상 속 친구의 역할은 결국 외로움을 견디게 해주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 사람들은 더 이상 상상 속 친구를 생각지 않게 되고 그러면 또 누군가가 상상하는 다른 모습으로 친구가 되어주는 일을 하다가... 커샌드라를 만났다. 그리고 어떤 사건 이후 우연제작자가 되었다. 일종의 진급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같은날 발령받은 에릭, 가이, 에밀리는 함께 우연제작자 과정을 수업받으며 돈독해진다.
"앞으로 16개월간 나는 여러분에게 우연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러분은 우연 제작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 너희들은 비밀요원이다. 너희들의 존재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 일상적이고 계속적이다. 이 과정을 통해 획득할 도구를 활용하면, 너희들은 이 세상의 인과관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 그 지식을 활용해 사소하고 거의 인지할 수도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인생을 변화시킬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p. 91)
"세상에는 우연을 만든다는 것이 곧 운명을 결정하는 것, 사건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새로운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선견지명도 없고, 오만함으로 가득한 유치한 시각이다. 우리의 역할은 경계선에 정확히 서는 것이다.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회색지대에 서서, 그곳에서 탁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큰불을 내지 않고,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능성의 창조자, 은밀한 암시를 주는자, 매력적은 눈짓을 하는 자, 선택지를 발견하는 자다. (p. 92)
"이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그중 압도적 다수는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리고 맥락이 그런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의미가 그 사건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는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 대중에게 고용된 일꾼이다. (p. 93)
우연제작자 교육과정을 읽다보면 세상의 우연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있을 법한 일이다! 판타지는 현실가능성이 구체적일때 오히려 더 판타스틱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그랬다. 신묘한 판타지!!
"인연 맺기 우연 제작자로는 저 녀석이 정통이야. 저 녀석은 완벽한 여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여자 말고는 아무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아. 저 녀석은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진짜 낭만주의자야. 지나치게 안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맺어주고 싶어하는 제작자한테는 바로 이런 조합이 어울리지. 넌 아냐. 네 우연을 직접 제작하려고 하지 마. 문제가 아주 심각해질 수 있어" (p. 125)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진짜 낭만주의자' 가이에게 사랑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 커샌드라 뿐이다. 하지만 커샌드라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가이에게 에밀리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다. 에릭은 그런 에밀리의 감정을 눈치채고 조언해보지만 글쎄... 감정이란 원래 다른 사람의 조언이 먹히는 분야는 아니지 않을까? ㅎㅎ 그래서 우연이라는 극적 요소가 필요한 것일지도.
그는 자기 몫의 사랑을 맛봤고, 그 맛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하지만 가이는 이미 자기 몫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생이라는 책의 그 장은 이미 다 읽고 덮어버린 뒤였다. 실망스럽지만, 그는 이 점을 오래전에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차례였다. 그래서 가이에게는 인연맺기 임무가 중요했다. 어쩌면, 자신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을 다른 사람이 누리도록 도움을 줄 때마다 가이 역시 그 행복의 작은 조각을 받는 것일지 몰랐다. 그 행복이 가이의 이름 아래 기록되는 것이다. (p. 130)
이들이 사람들의 우연 제작을 하는 동안, 우연제작들의 삶에도 우연을 제작해넣는 존재들이 있을까? 우연제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우연들과 우연제작자들이 엮이는 우연을 통해 큰그림을 향한 퍼즐들은 멀찍이서 하나씩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완성된 그 큰그림은 마치 스릴러처럼 예상치 못했던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중간중간에 '우연제작자 교육과정' 교재?! 가 끼어있는데, 정말 실제로 있는 교과서 처럼 읽혀져서 소설과는 또다른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H = pm² 이라는 공식을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저자의 본업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구나 싶어서 ㅎㅎ
판타지소설작가 중에는 은근 과학전공자들이 꽤 많은데 저자도 그런듯 하다. E = mc² 이라는 아인슈타인 공삭을 이렇게 활용하다니, 센스 good~!
(H 는 일반적 행복 또는 개인적 만족감, p는 개인의 행복 잠재력, m은 보람)
너는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사람, 가느다란 연관 관계를 발견하는 사람이어야 해. 이 봉투가 너에게 할당됐다는 건, 너처럼 훈련받은 사람만이 볼 수 있을 만한 뭔가가 정해진 시간에, 여기에서 일어나리라는 뜻이야. (p. 189)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현실을 보는 데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게 분명했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면 큰 것도 작아 보였다. (p. 200)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여하튼, 가이는 본업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는 인연맺기를 성공시킨 이후 전달받았던 다음 임무봉투에 적혀있는 문장 하나, 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우연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인연과 연결될 것임을 알아챌 수 있지만 그렇게 현실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제작자인 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에밀리도.
뭔가 하나를 꼭 집어 인생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로 바꿔놓고, 그게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믿어버릴 수 있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에밀리는 생각했다. 그것과 반대되는 생각에 아주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고. (p. 243)
에밀리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주의 성향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갑자기 전혀 생각지 않았던 행동을 순식간에 해버리고 만다. 충동이란 사실 그런거니까. 그리고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모두에게 혹은 두 사람에게.
"날 상상해. 내가 계속 여기 있게 해줘"
"하지만 어떻게?"
"난 우리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상상해"
"하지만 난 네 존재를 결정하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 있게 해줘"
"행동이 아니라, 그냥 존재. 네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했어. 그냥 네가 여기 있다고 상상했어. 너 하고 싶은 건 다해" (p. 300)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따온 말인데 기대하는데로 이루어진다 는 의미. 사랑도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을까?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른 결과가 오는 것일까?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다음 역이 어딘데요?"
"삶이요"
"삶이요?"
"삶이요, 진짜 삶이요. 모든 직업 중 최고지요. 정규직에, 풀타임에, 다른 것도 전부 포함이고. 자유의지, 모순적인 감정, 기억, 건망증, 성공, 실망, 그 모든 정신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p. 317)
"사람이요?"
"네, 사람이요"
"인간, 필멸의 존재, 우연의 고객. 그 모든 말로 정의되는 진짜 사람 말인가요?" (p. 372)
모든 직업 중의 최고가 삶이라... 그런가? 정규직에 풀타임에 다른 것도 전부 포함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기도 ㅎㅎ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엔 삶이 너무 버거울때가 많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지만;;;
영겁의 시간 속에 사는 존재와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 중에서 결국은 무한보다 유한이 좋아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끝이 없다는 것보다는 끝이 있다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처한 삶속의 함정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닥쳐요! 영혼을 잃고 세상을 당신처럼 보게 되느니, '작고 무의미한' 존재로 남는 게 낫겠습니다. 우연을 만들 방법은 선택하는 거예요. 선택하는 거라고요. 알아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우연을 만들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포함되지 않을 겁니다" (p. 341)
수동적인 가이가 첫번째로 했던 선택때문에 가이는 커샌드라를 잃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한 이 선택으로 인해 가이는 무엇을 또 잃을 것인가? 아니면 얻을 것인가?
"모든 우연 제작자가 사람인 건 아닐지 몰라도, 모든 사람은 우연 제작자이기도 하거든요" (p. 398)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거기서 김고은이 성인이 되던날 포장마차에서 공유에게 한 대사에 이런 말이 있었다.
"흐릿한 불빛, 소박한 안주, 쓴 소주, 비정한 정서. 도처에 낭만이 가득. 딱 하나만 더 있으면 완벽한데"
그리고 첫 키스 후 한 대사가, 그 꾸며질 것도 없는 짧은 한마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완벽하다"
이 한마디가 왜 그렇게 완.벽.하.게. 들렸을까 ㅎㅎ 그리고 많고 많은 명장면중에서 왜 하필 이 장면이 이 소설을 다 읽어갈즈음 떠올랐을까?
아마도 이 작품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완벽한 '낭만'을 느꼈기 때문이려나~ ^^
살면서 겪은 많고 많은 우연들이 모두 다 그냥 우연이 아니라면 그 우연들이 나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고 나의 인연들을 좌우했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내 인생의 우연을 제작했을 우연제작자들에게 딱히 화가 나지 않는 건 이 소설 속 우연제작자들이 참 따듯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우연제작자들이 내게 계획한 우연이었다면 나름 괜찮았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의도에서만큼은;;;
판타지 소설인줄 알고 읽었던 이 소설은,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원이 되고 원이 공간이 되는 확장처럼 작은 우연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인연들이 전해주는 결국 사랑이야기였다. 그 로맨스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판타스틱했다. 한마디로 완벽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