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테크 - 자전거부터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을 바꾼 기술 EBS CLASS ⓔ
홍성욱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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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변화시킨다

자전거, 총, 인쇄술에서 인터넷, 아이폰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익숙한 기술 뒤에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들이 큰맘 먹고 사주는 전집처럼 다채롭고 알차면서도 전권이 다 만족스럽지 않기 마련인데 최근 좋은 시리즈를 알게 되어 반갑다. 바로 EBS BOOKS에서 나오는 책들이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는 것은 결국 인간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결점 혹은 전환점에 있어 기술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미처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재밌으면서도 유익한 책이었다. 저자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문학과 엔지니어링을 이어주고 있다고나할까.

우리는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기술을 이해하는 가장 용이하면서 현실적인 방법이 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역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보자. (p. 24)

이 책은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들의 첫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편집앨범 같은 책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장면들을 통해 기술을 통해 진짜 보아야 할 것들, 빼앗아가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 기술의 양면성, 사람과 기술의 결합이 낳는 변화, 기술이 가져온 의외의 결과들, 정치에 관여하는 기술, 의도를 담고 있는 기술 등 기술이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기술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야 진정 기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818년에 독일의 귀족이었던 카를 폰 드라이스라는 사람이 선보인 드라이지네가 세계 최초의 자전거다. 드라이지네는 바퀴 두 개를 이어서 안장을 얹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도록 만들어졌다. 이 첫 자전거에는 체인은 물론 페달도 없었다. (p. 30) 페니파딩이라는 자전거 대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안전 자전거를 만들어내는 데는 여성의 역할이 컸다. 또 그런 안전 자전거가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42)

바퀴는 대략 5,000년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바퀴 두 개를 이으면 만들어질 자전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굉장히 늦게 만들어졌다. 바퀴를 단 수레나 전차 등 동물에 의해 수단으로서 사용하던 바퀴를 인간이 직접 올라타고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의 발상이 이렇게 더뎠다는 것도 새삼 의외이기도 했지만 자전거의 발달이 여성의 이동권과 그렇게 가능해진 이동의 자유를 바탕으로 진정한 자유를 주장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진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과 기술은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상호 관계 속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역사를 함께 만들어오고 있었다.

1860년대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후장식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전장식 총기를 사용하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했다. 독일 통일의 파업 뒤에 후장식 소총이라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p. 51) 기관총은 '도덕적 효과'가 있다고 간주되었는데, 몇 명의 군인이 수백 명의 원주민과 대적하면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덜 죽는 것이 절대 도덕이었고, 아프리카 '야만인'의 희생은 염두에 없었다. (p. 52)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병사는 자신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반면에 기관총을 사용할 때는 조준을 하지 않았다. 몰려오는 적을 향해 그냥 방아쇠만 누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악마 같은 총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p. 54) 아마 후장식 라이플이나 기관총이 없었더라도 유럽은 아프리카를 침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능 좋은 총기가 없었다면 그 침략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p. 56)

총의 발달을 보며 자연스럽게 '총 균 쇠' 가 생각났다. 화약의 발달은 동양이 먼저였으나 총의 발달은 서양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략이 세계의 지도를 바꾸었고 아프리카에 남겨진 총기들은 여전히 화약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중이다. 무기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죄책감은 덜어져갔다. 살상이 점점 더 쉬워져온 셈이다. 인간이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확 뒤집어질 수 있음을 총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었다.

증기기관은 이미 존재해 있었고, 와트가 한 일은 분리 콘덴서를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허와 만료 기간이 연장된 상황이었다. (p. 73) 와트의 특허가 만료되기 전에는 어떤 증기기관의 특허도 신청되지 않았고, 와트의 특허가 만료된 1800년에 리처드 트레비식이라는 발명가가 고압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를 신청한다. 나중에 열차나 기선에 사용된 증기기관은 모두 와트의 저압 증기기관이 아닌 고압 증기기관이다. (p. 74)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의 역사 아니 과학의 역사로 불리는 것들 중에선 의외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들이 상당히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가로 와트가 알려져있지만 사실 증기기관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실제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아니었다. 이런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 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명한 에디슨이나 벨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발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렇다면 그 기계장치와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락 생각했다. 프랑시니 형제보다 천 배, 만 배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일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신이 만든 기계라는 결론이 나온다. (p. 81)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동물에는 없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 즉 인간 육체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p. 82) 자동인형들은 이 기계 세상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동인형들은 이렇게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p. 88) 자동인형은 '세상은 기계다. 동물도 기계이며 인간의 몸도 기계다.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숙련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p. 92)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신기했던 것이 '자동인형' 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봇인 셈인데, 그 옛날 그 많은 톱니바퀴들로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을 읽으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철학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노동에 대한 기계와 인간의 역할은 지금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이것은 뒤에서 AI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인쇄술의 사례는 비슷한 기술이 서로 상이한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사회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p. 101)

인쇄술 혁명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인쇄술이 지식의 전달을 획기적으로 가속화하여,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소 기술결정론적인 성향을 띤 해석인데,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고,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무관하게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평민은 인쇄술 발명 이후에도 문맹이어서 신교의 교리들을 담은 인쇄물을 읽을 수 없었다. 또 16~17세기 과학혁명의 요체인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의 도입과 인쇄술의 연관을 찾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인쇄술이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낳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p. 107)

인쇄술의 발달을 보며 동양과 서양에서의 다른 변천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기존에 익숙하게 알려져 있던 인쇄술과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것도 의미있었다. 인쇄술처럼 같은 기술도 다른 사회문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수긍기 갔지만,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다' 라는 오랜 격언을 뒤집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사례들은 무척 새롭게 읽히는 부분들이었다. 카메라와 전신의 초기 모습들 그리고 뒤에 나올 포드 자동차의 확산에는 만들어낸 것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발명이라는 역발상이 숨어 있었다.

자주 붙여 사용하는 글자를 가급적 멀리 띄워 배열한 자판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쿼티 자판이었다. (p. 140) 드보락이 만든 자판이 60~70퍼센트 더 효율적이었고, 오타를 적게 낸다는 것도 발견한다. (p. 142) 처음 레일을 만들고 기차를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기차를 발명하기 전에 탄광에 마차가 다니는 레일을 깐 사람으로, 마차가 다니는 나무 레일 간 폭을 1,435미터로 만들었다. 나중에 열차가 커지고 무거워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차 레일 간 폭을 그대로 기차에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차의 레일 간 폭은 왜 1,435미터였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마차는 말 두 마리가 끌었는데 말 두 마리가 바짝 붙어서 잘 끌고 갈 수 있는 넓이가 1,435미터였던 것이다. (p. 147)

타자기의 발달이 남긴 것은 우리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쿼티 자판 이다. 타자기의 자판 배열이었던 쿼티 자판의 효율성을 높은 드보락 자판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익숙한 것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타자기도 아닌 컴퓨터 스마트폰의 시대로 넘어왔음에도 여전히 타자기시대의 비효율적인 쿼티 자판을 사용한다. 그리고 말들의 엉덩이 간격으로 시작된 레일의 역사는 기차로 운반할 수 있는 우주왕복선의 로켓부스터 폭도 넓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선택한 기술은 때론 효율성 면에서 비이성적 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그 기술을 선택하는 것인 인간인데 인간의 선택이 늘 발달적이진 않다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레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굳이 다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특허를 돌연 취소해버렸다. 하지만 벨은 취소하지 않았고, 끝까지 특허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벨은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더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벨과 그레이의 차이였다. (p. 174)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보다 전력 시스템 전체를 고안했던 시스템 디자이너 혹은 시스템 창안자로서의 역할과 의미가 더 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처음부터 그랬듯 끝까지 직류를 고수했다. (p. 201)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인 새뮤얼 랭글리도 비슷한 비행 실험을 했지만 멋지게 실패했다. 자전거 수리공이 저명한 과학자를 누른 것이다. (p. 210) 사람을 태우고 비행한 첫 비행기는 운 좋은 자전거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이트 형제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습득하고 새를 관찰해 날개의 제어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론과 현장 시험이 맞지 않자 이론을 의심했고, 새로운 계수를 구하기 위해 창의적인 자전거 실험을 고안해서 실험했으며, 이 실험에 문제가 있자 풍동을 개발해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냈고, 이런 데이터에 근거해 비행기 날개와 프로펠러 디자인을 개선했다. (p. 219)

아르파넷의 탈중심적 혹은 탈중앙집권적인 특성의 기원은 베린의 분산된 네트워크 개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핵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의미가 없듯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네트워크는 극단적으로 분산적이고 탈중앙집권적인 것이어야 했다. (p. 234)

동시에 특허신청을 했던 두 사람들 특허권을 따낸 사람은 벨이었고 그렇게 벨이 전화의 발명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레이는 당시 독보적인 기술이었던 전신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전화기의 미래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전력시스템을 회기적으로 발전시킨 에디슨이었지만 교류가 등장했을때 직류보다 나은 교류의 장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시스템은 교류를 선택했다. '랭글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비행기 연구에 몰두했던 랭글리는 실험실 안에서의 실험을 너무 믿었다. 결국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에 대한 과한 신뢰로 과학적 발견에 필수적인 새로운 의심을 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에 폐쇄적인 군조직에서 시작된 인터넷의 연구는 처음부터 개방적인 분위기였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다.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전문가들에게서만 가능하진 않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던 사례들이었다.

그전에는 기계가 단순 작업을 했지만 포드 공장에서는 사람이 하루 종일 단순 작업을 반복하고 기계는 아주 고도로 세분화된 노등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으로 느껴진다. (p. 249) 소비자의 요구가 있어서 물건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명이 되고 나니 그다음에 소비자의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량소비의 욕구가 있어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대량생산이 되어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니 대량소비라는 욕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 253)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삼으려 했던 많은 시도는 모두 컴퓨터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수학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컴퓨터의 기원이 추상적이고 심원한 수리철학적인 문제에 있었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p. 261) 베비지는 젊었을 때 천문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천문대는 가장 복잡하고 긴 계산을 했던 곳으로, 계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다. 당시부터 천문대에서 계산하는 사람들의 직종을 일컫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컴퓨터 였다. 계산하는(compute)사람(er), 그러니까 컴퓨터라는 말은 원래 사람을 지칭했다. (p. 263)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BM),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BM 컴퓨터를 만들어낸 회사가 바로 인구조사 데이터를 처리하는 도표기를 만들었던 회사에서 비롯되었다. (p. 273)

기술과 인간은 공존한다. 함께 동고동락한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인간을 단순노동의 기계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대량소비의 주체로 만들기도 했다.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보지 않고 방직기의 천공카드를 시초로 본 것을 저자는 자신의 의견이라 말하지만 천공카드를 활용한 베비지의 컴퓨터 시조로서의 역사는 다른 책에서 읽은바 있었다. 어쨌든, 컴퓨터가 계산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컴퓨터기기 그러니까 거대한 계산기계의 등장으로 수많은 컴퓨터(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을 보면서 과학기술의 발달이 없애는 직업들에 대한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구나 싶어서 그렇다면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새로운 일자리의 생성으로 서로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폰은 한 사람에 의해, 특히 스티브 잡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잡스는 애플이 전문성을 갖지 않은 휴대전화 개발에 회의적이었고, 전망을 가진 회사의 임원들은 잡스를 설득해야 했다. (p. 289)

1956년의 일이었다. 인공지능, AI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p. 297)

처음에 체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체스를 두는가를 연구해서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체스를 두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계산을 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p. 303) 컴퓨터 프로그램에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인간의 방식대로 체스를 두는 것이 아니라 높은 확률을 계산해서 체스를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대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p. 304)

역시 유명인의 이른 죽음뒤에는 신화적 허구가 덧붙여지기 마련인가 보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일화들이 그러했다. 스티브 잡스 덕에 세상에 아이폰 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스티잡스 때문에 세상에 아이폰이 등장하지 못했던 것을 거꾸로 알고 있는 현실을 보며 관계자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AI 가 최신 용어가 아니었다는 점도 새로웠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왜 인간과 같을 수 없는지 명쾌해져서 좋았다. 인공지능은 그저 아주 빠른 계산기일 뿐이었다. 확률로 결정하는 것과 인간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보통 바둑판이 가로세로 19줄이라고 하는데 승승장구 하던 인공지능에게 가로세로 20줄 바둑판을 주면 인간만큼 바둑을 두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바둑능력은 아~무 상관없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계산기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종합해서 결과를 내는 것인데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p. 306) 쉽게 말해서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자동차는 더 자율적이 되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혼자 운행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매우 많은 사람의 노력과 노동이 합쳐진 결과물인데 자동차가 자율적으로 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운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전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p. 307) 어떻게보면 인공지능의 능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편향적이면 인공지능도 편향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p. 308) 감저을 덜어냈기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더 객관적이고 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의 한계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p. 309) 기술과 인간은 항상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마치 기술이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것처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의 대표적인 예인 자율주행 자동차 또한 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인공지능 기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술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p. 310)

인공지능은 사실 자율적이지 않다.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계산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기 나름이고 인간이 준 데이터에 따라 편향적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600백만불의 사나이'의 눈이나 손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나는, 여러분은 이미 사이보그다. 스마트폰은 내 심장의 일부를 가지고 있으며, 내 몸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사이보그 관계'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과 기술의 다양한 방식의 결합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를 보이려 했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이제 사이보그 세상의 첫 '시민권'을 득한 셈이다. 새로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 (p. 314)

기술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고 때로는 의외의 결과들로 인한 새로움을 즐기며 밝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사이보그 세상의 시민으로 마무리한 마지막 문장을 보며 갑자기 섬뜩해지는 기분이다. 기술이 바꿔온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의식적으로 적응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새로운 기술의 발견 뒤엔 늘 새로운 질문이 있었다. 그 새로운 질문을 이제 우리의 삶에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삶에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때마다 인간은 그 기술의 배경과 역할 그리고 지향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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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부 다시, 학교 - 지식은 어떻게 나의 것이 되는가
EBS 다큐프라임 <다시, 학교> 제작진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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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교육 강국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변화

세계적 석학부터 현장 최고 전문가에 이르는 통찰

공부와 학교를 둘러싼 숱한 질문에 대한 놀라운 해답을 만나다

지식은 어떻게 나의 것이 되는가? 이 책은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을 학교공부에서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험부터 수업법까지 수많은 교육상식, 그렇다 상!식! 이라고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을 뒤집고 밝혀낸 학습의 메커니즘에 대해 심층 탐구한 이 프로젝트는 13개국, 5000명의 학생과 교사, 학부모 그리고 30명의 전문가를 만나며 16개월동안 진행한 대장정이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 상황이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p. 6) 기존에 우리 교육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 '우리는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라는 건 사실과 달랐다. 사교육을 제외한 공교육의 교육시간은 다른 나라보다 결코 많지 않았고, 기초학력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다. (p. 7) 학생들이 체감하지 못하고, 교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가 과연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더 현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그 현장에 대한 탐구로 찾아낸 결과가 응축된 것이다. 바로 '배움'에 대한 재정의이다. (p. 9)

공교육에 대해 만족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항상 교육제도와 교육정책엔 문제가 많아 보였다. 그래서 자주 바뀌고 변화해 왔지만 그렇다고 나아진것 같지도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제대로 파악해보지 않고 개선해온 교육정책들은 결과적으로 공교육의 효과를 약화시킨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핵심을 놓친 것이 아닐까? 교육의 핵심은 '배움' 인데 말이다. 이 책은 학교에서 어떻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인식부터 환기시킨다. 그리고 기존의 얕은 인식에서 지적되온 문제점들이 정말 문제인건지 닫시 묻는다. 예를 들자면 '시험' 같은 것.

시험이 정말 나쁜가? 아이들은 시험을 통해 성장한다. 시험점수가 몇 점 이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함으로써 아이들은 배우고 자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략)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서열을 매김으로써 발생하는 차별이 문제인데, 이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등수를 매기는 것이 교육적이지 못하고 객관식 문제가 충분히 앎을 측정할 수 없다고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교육적이지 않다.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정확히 확인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착각이다. 이를 충분히 확인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교육적인 자세이다. 부모와 교사가 시험의 효과를 정확하게 인지할 때 아이는 성장할 수 있고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공교육의 변화는 그런 수많은 착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p. 10)

제도가 문제라기 보다는 적용방법이 문제였고 적용방법이 문제라기 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러한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그리고 생생하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교육격차가 심화된 지금 더욱 중요하게 읽어봄직한 내용들이었다.

새 교육과정에서는 많은 양의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을 지양한다. 대신 '학생이 주도하는 활동형 교육'이 강조된다. 또한 학생들이 느끼는 학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배워야 할 교과내용과 수업시수도 줄었다. (중략) 그결과 한국은 세계 주요국 평균보다 100시간 가까이 적게 배운다. 기초 과목의 수업시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가 되었다. (p. 18)

적게 배우는데 스스로 활동해야 할 것은 늘어났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겉핥기로 지나간 교육진도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는 상태의 학생을 양산했고 기초학력 저하로 이어졌다. 아는게 없으니 수업은 점점 더 재미없어지고 학교교육이 교육적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이 사교육만 활성화되면서 교육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 활동형 학습, 학생주도 학습이 과연 좋다고 할 수 있을지 점점 회의스러워지는 현상태에서 이 책이 알려주는 내용들은 무척 반가운 것들이었다.

배우는 입장에서 활동형 수업이나 과제가 충분히 만족스러우려면 그저 주입식 강의에서 벗어나거나 연필과 종이로 문제를 푸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부담은 덜 되면서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방식의 수업이나 과제를 더 많이 개발하면 되는 걸까.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아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학력 격차에 따라 활동형 수업이나 과제에서 소외되는 학생들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아이들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사들이 느끼는 학생 주도 활동형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p. 27)

대입제도에서 학종관련 금수저 논란이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문제는 대입관련 학종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이 없어지고 활동형 주업과 학생주도 수업 방식을 도입하면서 일상적인 학교수업에서조차 계층격차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강의식 교육이 주입식 교육과 동의어도 아닐 뿐더러 강의식 교육에서는 이렇게까지 드러나지 않던 문제점들이었다. 이런 격차문제가 아니어도 '배움' 그 자체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활동을 통해 스스로 배운다는 믿음과는 배치되는 결과였다. 학업성취도에서도 세 집단은 큰 차이를 보였다. 교사의 개입이 없었던 활동형 수업집단이 나머지 수업집단에 비해 가장 낮은 성취도를 기록했다. (p. 31) 활동형 수업이 가장 신나고 재밌다고 느꼈지만 자기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수업은 강의형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중략) 학생들은 강의형 수업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p. 33) 성적하위집단일수록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기를 기대하는 활동형 수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34)

학생중심 활동형 교육이 과연 학생을 생각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본적은 있는지? 스스로 배운다는 주장은 사실상 교육의 의무를 학생들에게 던져놓고 교육기관은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것과 달라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선진국 교육제도에서 배워왔다고 말하려나?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진국에서 먼저 시도했던 그런 미래학교와 활동들은 처절한 실패를 맞고 문을 닫고 있었다. 그 나라들의 시도를 통해 배워야 할 우리는 그 실패의 길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중이다.

수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는다. 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재 나타나는 결과들은 좋지 않다. (p. 41)

당연히 암기만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은 좋은 게 아닙니다. (중략) 지금까지 주입식 교육이 강의형으로 이뤄지다 보니 강의형 교육이 그 오명을 뒤집어쓴 것뿐이에요. 학습자의 이해수준에 맞춰 지식을 구조화해 전달하는 강의형 수업, 실감나는 사례와 끊임없는 피드백이 오가는 강의형 수업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낙관론으로 학생 스스로 수업을 주도하라고 방임하는 건 우리가 경멸했던 주입식 교육에 대한 대안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p. 44)

학교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며,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독립성을 기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립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가정은 틀리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자기 주도적인 학습자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교사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p. 45)

스스로 배운다는 것에 대한 오해와 환상으로 '공부'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p. 46)

시험을 안 보고 학생들이 조를 짜서 ppt를 만들던 ucc를 만들던 하는 활동형 수업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재미삼아 하는 활동들은 놀이수준에 그칠뿐 교육적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는 말이다. 주입식이 나쁘다고 모든 강의형 수업이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 됐든 간에 학생들을 누구하나 빠트리지 않고 아울러 기초지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교육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배워야 하고 교사는 가르쳐야 한다. 이 기본을 흔들리게 만든 것은 문제가 크다.

더 많은 지식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장된 지식을 자주 꺼내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출'이라고 부른다. (p. 55) 아이들이 시험을 싫어하는 것은,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으로 시험을 피하지만, '진짜 공부'는 틀리고 실패하는 경험과 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p. 63)

'창의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그건 세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발달에 대해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겁니다. (p. 83) '창의성이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식'과 '몰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문제에 몰입할 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p. 85) 창의성은 수업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p. 87) 우리가 창의성 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배우는 사람이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활동 중심 수업만 생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은 배우는 사람이 주어진 것을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잘 길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p. 101)

활동형 학생주도형 수업에서 가장 크게 내세우는 점이 아마 창의성 발효 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상식임을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적 발명을 생각해봐도 이는 확인이 된다. 발명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앞선 선배들의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쌓이고 쌓였을때 그 시행착오들을 통해 배운 후배가 발명을 해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발견이나 발명은 없는 법이다. 창의성도 마찬가지였다.

수학과 같이 어렵고 정보를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집행 기능이 중요한 공부일수록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재미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생각이 확장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부의 효용성을 스스로 느끼게 되면 좀 불안하더라도 기꺼이 이겨내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공부일수록 심리적 요소의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학습'과 '교육'이란 이 부분의 관리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p. 144)

글을 읽고 쓸 수 있기에 '문맹'은 아니지만 지식과 정보가 담긴 글을 이해하는 '문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실질적 문맹' 상태라는 것이다. 교육 방침으로 학생들의 사고력 확장을 위해 수학문제를 서술형으로 낸다고 하는데, 문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수리 능력이 있어도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p. 146)

정보화 시대 좋은 자료들이 온라인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 혜택은 문해력이 좋은 사람만 받을 수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다. (p. 157)

'문해력을 키우는 것'은 학습능력의 핵심인 동시에 교육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작점이자 지름길이다. 문해력을 통해 아이들은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자기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며, 자기 삶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p. 173)

수포자가 늘고 있는 것은 수학 자체가 어려운 학문이어서일수도 있고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할 수리능력이 부족해서일수도 있지만 문해력 또한 그 배경의 중요한 한 요소일 것이다. 어떤 특정한 이슈가 있을때 실검1위를 차지한 단어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세뱃돈과 세벳돈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임에도 그 뜻을 몰라 검색어상위에 랭크된 것을 보면 문맹아닌 문맹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보화 시대면 무엇하나? 검색으로 다 나온다고 한들 무엇하나? 무엇이 정말 맞는 건지 구분할 수 없다면 말이다. 문해력이 키워지는 것은 성장과 발달단계에서 적절한 때가 있다. 그때에 맞춰 공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교육이 문해력이다.

00이는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자기처럼 학교만 의지하는 학생들이 공교육만으로도 탄탄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교사들 역시 변화의 거센 파도 앞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래에는 학교 교육이 '학생 중심 수업'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강렬한 목소리에 공감하며 수업방식을 '학생중심'으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을 위해 시작한 학생 중심 수업이 외려 부실한 교육을 낳고 있는 현실에 대해 교사들 역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p. 183)

교사의 역할이 줄어든 대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배움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학업 부담이 늘어날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p. 188)

학업성취도 세계1위를 자랑하던 핀란드의 성적이 흔들리고 있다. 전체 학업성쉬도는 물론 수학의 하락폭이 커 핀란드 내에서도 걱정이 많다. 더욱 중요한 건 교육 불평등 수치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핀란드는 한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자 빠른 속도로 교육 불평등 수치가 증가하고 있는 나라다. (p. 191)

교육 선진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던 나라가 핀란드 아니었던가, 그랬던 핀란드가, 한국보다 먼저 활동형 학생중심형 수업을 적극 도입했던 핀란드의 교육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뒤를 한국이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핀란드의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학습저하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코로나사태 이후 한국의 교육현실도 학습저하와 학력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그 심각성이 드러났다.

핀란드나 우리의 학생 중심 수업이 놓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크리스토둘루는 '무의미한 암기학습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를 교사 주도 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과민반응'이라며 '무의미한 암기학습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은 교사의 지도활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암기가 아닌 방식으로 교사의 수업지도를 내실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p. 195)

'궁극적으로 기술 자체는 교육이 해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개인화될수록 더 맞춤화된 교육을 아이들이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이들이 각자의 커리큘럼을 가지면서 자기만의 섬에 갇히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배워야 할 것을 컴퓨터로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대화나 소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잃어버렸죠. 게다가 흥미있는 분야만 배우게 되니까 아이들이 아주 협소한 분야만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 성인이 되어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나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어려워질 게 분명했죠. (중략) 아이들이 영상을 보며 무언가를 배워나가긴 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교실의 문화와 학습환경, 그리고 어른으로서 선생님이 교실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떠한 경험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 어른에게 의존하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p. 196)

현실을 감안하지 못하고 취지의 방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그저 방법적으로만 활동형 학생중심형 수업으로 급하게 바꾼 결과 교실에서 교사의 자리는 축소되었고 그 불이익은 고스란히 학생들이 학업부담과 학력저하로 떠안게 되었다. 시대에도 어른이 필요하고 교실에도 어른이 필요한 법이다. 미국과 핀란드를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의 실패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 한가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여 개선책을 실천하고 있는 사례가 영국에 있었다.

리치아카데미에서는 수업의 질적 수준을 교사의 개별 책임으로 맡겨두지 않고 교사 코칭을 통해 교수법을 통일한 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p. 202)

교육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지식 중심 수업으로 방향을 바꾼 영국은 현재, 더하거나 덜함 없이 학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배움을 얻길 바라고 있다. 또 이를 위해 교사와 학교, 국가가 한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치 아카데미는 왜 우리가 공교육을 실시하는지, 공교육 시스템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게 한다. 교육은 결국 '기회'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포기하지 않고 낙오하지 않도록 기회를 줘서 성장하게 하는것, 그것이 교육의 소명이고, 교사의 소명이다. 그런 소명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효과는 사교육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리치아카데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 204)

지식 중심 수업! 누구나 같은 배움! 그렇게 동일하게 얻어지는 기회!

지식 중심 수업이라고 해서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인 교수 중심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 수업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최근 강의식 수업이라고 해도 가급적이면 학습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지들을 제공하죠. 하지만 활동중심 수업에 비해서 다소 지식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식 중심 수업'으로, 또 이에 비해서 훨씬 더 학습자의 주도성을 강조하면서 활동을 위주로 지식을 조금 더 약화시키고 학습자의 자율성이나 확산적 사고를 드러내어 활용했다는 점에서 '활동 중심 수업'으로, 이렇게 두 반의 특징을 구분지어 볼 수 있습니다. (p. 214) 결국 어느 한 가지 수업으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경험을 줄 수 없다. 역량과 지식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수업은 활동 중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식 중심이어야 하는가, 이제 이런 이분법을 지양해야 한다. (p. 219)

결국 중요한 건 정말 학생을 위핸 교육, 정말 학생이 알아야 할 배움 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지금의 형식적인 활동형 수업엔 문제가 있다. 수행평가도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낸 결과물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면 그것을 대체 왜 해야 하는 건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것도 '전이'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고 새로운 지식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활동' 과 '지식'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p. 231)

전문지식과 전이를 가르치되 기능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만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실제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하죠. 이게 바로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육입니다. (p. 232)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한 학생의 경험도 고려해야 해요. 이 모든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결국 '무엇' 과 '어떻게' 의 문제입니다. 교육과정은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게 할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p. 236)

암기식 주입식 교육이 나쁘다고 활동형 학생주도형 교육으로 바꿨다. 하지만 내실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불평등의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고 교실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방식만 바꾼다고 교육의 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제야 말고 진짜 교육의 '질'에 대해 좀 제대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현재 제도 자체가 수업 중에 자는 것을 교사가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손발이 묶여 있는데 싸우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 현장이 지금 소극 행정이 만연된 시절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p. 246)

학원에서 배우고 학교에선 잔다. 주요교과목만 공부하고 비주요과목은 내신도 신경쓰지 않는다. 수능에 중점을 둔 학생이라면 더더욱 학교교육은 의미없어진지 오래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는 걸 눈앞에 보고도 수업을 해야 하고 그런 수업은 그나마 안자고 있던 학생까지 지치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변화하면 아이들도 변화한다' 는 것을 책속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희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더불어 교육 자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 에도 중요성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었다. 교육은 총체적인 것이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하물며 그 아이들이 모인 학교란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

이 책은 활동형 수업, 자기주도 학습, 시험과 평가, 창의성, 수포자, 학습불안, 문해력, 수업법, 학교공간 등 이 시대의 공부와 관련된 가장 민감한 9가지 주제를 다루며, 이러한 주제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함으로써 학습 메커니즘의 본질이 무엇이고 인간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지혜가 생기기까지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학교란 다양한 기초지식을 모든 아이들이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다.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지식을 습득했을때 이 사회를 바르게 끌어갈 지혜로운 어른들이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공교육의 힘을 믿고 싶다.

우리는 왜 학교에 가는 걸까. 학교에서 배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학교는 아이들이 숨 쉬고, 성장하는 최소한의 교두보이다. 이곳에서 어떻게 배우고 성장하느냐가, 개인의 인생은 물론, 우리 사회의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는가. 이 책을 출간하며 다시금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과 교사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다시, 학교> 제작진 일동 (p. 12)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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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느낌 2024-05-2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공감 많이 하고 갑니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그림을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들

작품 구석구석 숨겨진 디테일을 만나다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현대미술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저 감상자의 입장에서 쉽고 간단하게 좋네vs별로네 정도로 그냥 가볍게 보아 넘겨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림을 보다보면 더구나 봐도 당췌 이해가 안되는 현대미술을 보다보면 감상자로서의 내 입장이 무척 초라해지기 일쑤다. 지금 고전이네 명화네 하는 그림들도 당대엔 그리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허니 지금 내가 도저히 모르겠는 현대미술작품들도 언젠가는 그런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함께 당대를 살고 있는 내가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길잡이책으로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다.

많은현대 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나 감정,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식견 등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75점의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p. 6) 양식이나 작가와 후원자들의 포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르네상스부터 사실주의까지 거의 모든 미술의 공통점은 주체의 이상화였다. (중략) 미술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사건 중 하나는 1839년 사진의 발명이었다. (중략) 19세기 중반에 들어 화가들이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일상적인 상황을 자주 그리기 시작했다. (p. 8) 20세기에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종류의 양식과 접근법에 대한 변화가 있었고 그렇게 미술 역사상 아주 많은 미술 운동들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로 오면서 작가들의 접근법과 재료 사용이 더욱 다양해졌으며 용인되는 기준도 자유로워졌다. 결과적으로 작가들을 미술 운동이라는 분류로 나누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중략) 이 책은 약120년에걸친 변화와 성장 속에서 예술적 표현과 시도에 대한 개요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개념들에 대한 최고의 안내서이며 75명의 최첨단 작가들의 사고와 표현을 상세하게 탐구한다. (p. 9) - 서문 中 -

이 책은 19세기 후반 부터 21세기 현재까지 다루며 75명의 작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이 영향을 받았을 다른 작품들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사이즈가 큰 책으로 올컬러라서 그림책으로는 좋은 조건의 책이다. 그림의 분석도 펼쳐진 페이지에서 장을 넘기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기에 편하다. 본문을 읽다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여 이해가 어렵기도 했지만 책의 뒤편에 <용어해설>, <작품 인덱스>, <인덱스>, <도판 저작권> 이 정리되어 있으므로 막힐때마다 참고해가며 보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보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백년 동안 작가들이 고수했던 엄격한 아카데미의 전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의 마지막 몇 십년 동안에는 여러 새로운 형태와 양식의 미술이 개발되었다. 사실주의는 평민을 소재로 자유분방한 붓질과 거친 표면이 특징이며, 과장과 이상화를 피했고, 인상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곧 이어진 신·후기인상주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미술 양식과 접근법으로 이뤄졌고, 자주 현대적인 인조 안료를 사용해서 눈부신 색상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p. 11)

<19세기 후반> 에서 처음 다루는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 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던 시대에 유럽 화가들이 일본문화의 영향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 읽은적 있었지만 고흐의 그림에서 그 흔적을 이렇게나 많이 찾게될 줄은 몰랐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을 통해 19세기 후반을 간략히 다루고 이 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20세기 초반>으로 넘어간다.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뒤이어 20세기 초반에는 획기적인 기술 개발과 발견들이 출현하며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중략)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들이 연이어 신속하게 나타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다. (중략) 사상 최초로 미술은 순수한 구상에서 멀어지고, 일단 처음으로 추상 작품들이 창조되자 더 많은 작가들이 그 개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p. 26)

<20세기 초반> 에서 폴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구스타프 클림트의 <나무 아래에 피어난 장미 덤불>, 앙리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까지는 그래도 화가 이름을 들어보도 화가의 다른 작품들도 봤던지라 한층 더 심도깊은 내용을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움베르토 보초니의 <도시의 성장>, 조르주 브라크의 <포르투갈인(이민자)>, 페르낭 레제의 <파랑 옷을 입은 여인>, 프란츠 마르크의 <동물들의 운명>,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거리의 다섯 여인>, 후안 그리스의 <바이올린과 기타>,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역동적 절대주의>, 장 아르프의 <트리스탕 차라의 초상>,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쿠르트 슈비터스의 <그리고 그림>,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파울 클레의 <빨간 풍선>,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 호안 미로의 <경작지>, 오토딕스의 <신문기자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 헨리 무어의 <누워 있는 사람>, 조지아 오키프의 <흰독말풀>, 알렉산더 칼더의 <꽃잎의 호>, 막스 에른스트의 <안티포프>, 조셉 코텔의 <약국> 등의 작품은 역시 현대미술에 대한 어려움을 절감케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갖고 본 작품들이 있었다.

소니아 들로네의 <일렉트릭 프리즘> 에서 "회화는 시의 다른 형태로 색채는 단어고, 그 관계는 리듬이며, 완성된 작품은 완성된 시다"(p. 70)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협곡>에서 "그는 회화를 세 종류루 정의내렸는데 인상, 즉흥, 그리고 구성이라고 불렀다. 인상은 외적인 현실에 기초하는 반면, 즉흥과 구성은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p. 78)

마르크 샤갈의 <생일> 에서 "그가 얼마나 벨라를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 보여주는 샤갈만의 방법이었다" (p. 84)

에곤 실레의 <초록 스타킹을 신은 여인>에서 "실레의 텅 빈 배경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만들어서 대상을 고립시켜, 감상자가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선으로 처리한 그의 작품은 즉흥성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p. 101)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잔 에비테른, 작가 아내의 초상>에서 "모딜리아니가 활동할 당시는 작가들이 부족미술을 탐구하던 시기였다. 그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상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이집트 흉상 같은 모델의 모양에 반영되어 있다" (p. 105)

한나 회흐의 <독일 최후의 바이마르 맥주 배불뚝이 문화 시대를 다다의 부엌칼로 절개하기>에서 "이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실패를 엄중하게 꾸짖고 있다" (p. 112)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에서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가 가득한 나라,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국가의 모습이었다" (p. 140)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서 "그는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을 비롯해서 자신의 기법에 대해 '감상자를 마비시키는 흔한 눈속임의 수법들'이라고 설명했다" (p. 145)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 에서 "당시 신체적·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낙담한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p. 150)

에드워드 포허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서 "주변 마을과 도시에서 발견한 고독감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독감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p. 163)

피에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미술이 우주의 영성을 나타낸다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림의 모든 요소를 감축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수직과 수평의 직선, 그리고 원색, 흰색, 검은색, 회색만 사용했다. 그는 이것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p. 166)

위의 작품들은 기존에 알던 화가들이라서인지 작품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아서 그 미술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몰고 온 그림자가 드리운 채 진행된 20세기는 그 예술적 표현에서 내향적이고, 분노에 차고, 심지어 난폭한 성향을 보였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중대한 변화로는 주요 미술 운동들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중략) 미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미술사조로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뒤를 이은 팝아트, 그다음에 미니멀리즘이 있었고, 곧 다양한 미술 양식들이 유럽과 북미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p. 176)

20세기 초반과 후반 사이에 <제2차세계대전이후> 라는 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20세기 에서도 특별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핵심은 미국이었는데 잭슨폴록과 앤디워홀로 알 수 있는 미국문화의 뒤에 어떤 영향력(정치)이 있었는지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광장Ⅱ> 에서 "단절과 대중속의 고독"(p. 179)을, 잭슨 폴록의 <파란 막대기들>에서 "정신과 신체 혹은 현대 사회에 얽매인 감정들을 표현"(p. 194)을,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서 "나의 작업 방식을 저술가와 비교한다면 가장 단순한 어조를 찾아서 문체의 어떤 멋도 부리지 않고, 독자에게 오로지 글쓴이가 표현하려는 생각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p. 203)는 것을, 마크 로스코의 <빨강의 4색>에서 "색채의 힘과 더불어 로스코는 자기가 만든 형태가 가지는 표현의 잠재력을 믿었으며, 영적인 존재를 포착한다고 여겼다"(p. 218)는 것을,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캔>에서 "반응은 경악과 웃음이었으며 판매는 평편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작가로서 출세했으며 미국 서부에 팝아트를 소개했다"(p. 232) "미국이 가장 위대한 이유는 가장 돈이 많은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물건을 사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이다"(p. 235) 는 것을 깨달은 점은 좋았지만,

위프레도 람의 <대지의 소리>, 윌렘 드 쿠닝의 <여인Ⅰ>, 데이비드 스미스의 <허드슨강 풍경>, 루이즈 부르주아의 <포레(밤 정원)>, 나움 가보의 <구축된 머리 No.2>, 리처드 해밀턴의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있게 만드는가?>, 바바라 헵워스의 <줄이 있는 형상(마도요새)1번>, 루이즈 네벨슨의 <하늘의 성당>, 헨리 다거의 <무제(어린이들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 이브 클랭의 <청색 시대의 인체 측정학(ANT82)>,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레트로액티브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음-어쩌면> 등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이해에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개념미술은 주로 뒤샹의 아이디어들과 보다 일반적으로 다다,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미술 사조로 발전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다. 개념주의란 재료나 기법보다 아이디어가 더 중요한 모든 미술을 말하며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재료와 방법론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이후 창조되는 막대한 양의 미술에 대한 선례가 되었다. (중략) 그 사조들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개념을 이어 나갔다. (p. 249)

<20세기 후반> 부터는 본격적으로 개념미술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난해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제까지는 작품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직접적 힌트가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온통 개념들이라 설명을 읽고 작품을 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에바 헤세의 <접근Ⅱ>, 요제프 보이스의 <썰매>,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 아나 멘디에타의 <돌 심장과 피>, 루시언 프로이트의 <반사된 상이 있는 벌거벗은 초상화>, 안젤름 키퍼의 <마르가레테>,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신디 서면의 <무제#213> 에서는 이제 회화를 넘어 소재도 주제도 워낙 천차만별인데다가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에서 작가가 "대체품이 애초의 작품과 같은 것이냐는 논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배경은 개념미술 출신이기 때문에 의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동일한 작품이다'"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작품 자체보다 그 의도를 중시하는 것까지 미술의 개념이 확장되고 보니 무엇이 진짜 예술인건지 더욱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TV첼로> 의 파격적 퍼포먼스 일화와 작품분석을 통해 기존에 유명세만큼 이해하지 못했던 백남준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기도 하고

주디 시카고의 <저녁 만찬> 에서 "작품에는 39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13명씩 3개의 그룹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성서 속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숫자로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중략) 거기에 더해 여성 999명의 이름이 흰색 타일 바닥에 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모두 합쳐서 이 설치 작품은 1,038명의 여성을 기념하고 있다."(p. 268) " 의 경우는 개념에 대해 그나마 접근해볼 수 있었으며

척 클로스의 <자화상> 에서 "각 칸은 추상적인 색채 연구 같지만 멀리서 보면 서로 혼합되어 특정한 색채와 톤을 만들어낸다"(p. 297) 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보며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그나마 내가 그림을 통해 '멋지다'고 즉각적으로 감탄할만한 작품이 있기는 있구나 싶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크든 작든, 지속력이 있든 수명이 짧든, 미술은 계속해서 경계와 전통을 허물고 있다. 세계화 현상으로 인간의 상호작용과 소통이 더 신속히 이뤄지면서 예술적 성향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정체성, 젠더, 계급, 관계에 대해 가지는 견해자 사회적·정치적 의미 그리고 가치관이 과거 세대의 대다수 작가들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어떤 예술적 접근법과 사고방식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p. 299)

< 21세기 > 에서는 잉카 쇼니바례의 <머리통 두 개를 동시에 날리는 방법(여성)>, 쿠사마 야요이의 <점에 대한 강박-무한 거울의 방>, 모나 하툼의 <작은 덫>, 빌 비올라의 <순교자들(흙, 공기, 불, 물)>, 파울라 레고의 <환영> 이라는 작품들(설치미술 작품들과 사실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림한점)을 통해 앞선 장에서 폭이 광범위하게 넓어진 현대미술의 맛보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구획을 나눠서 때로는 색채와 작업방법을 때로는 배경과 팔레트를 때로는 리듬과 상징등 그 작품 해석에 필요한 요소별로 다각도로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이토록 머리아프게 해석해야 하는 미술을 굳이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감상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여전히 나는 그저 내눈에 아름다워보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미술감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현대미술에 대해 다양한 깨우침을 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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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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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의 세계적 석학 피터 골든이 쓰고

<몽골제국의 후예들>의 저자 이주엽이 옮기다

"우리는 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세계사지식의 완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 中-

 

세계사 역사의 중심은 서양사였다. 그래서 세계사 책을 읽을 때면 늘 서양사의 역사를 읽게 되곤 했다. 하지만 역사는 서양사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세계사와 서양사는 동의어가 될 수 없었다. 세계사라고 쓰여진 서양사를 읽으며 중간중간 벽에 부딪히거나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는 부분들이 느껴지곤 했다. 역사를 온전하게 읽으려면 세계사를 진정한 세계사로 이해하려면 유목사 다시말하자면 '중앙아시아사'를 읽어야 했다. 이 책은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의 한계를 낮춰주고 구멍을 메꿔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새 옥스퍼스 세계사' 시리즈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저는 3000년이 넘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중앙아시아(또는 중앙유라시아)는 헝가리대평원에서 만주의 삼림 지대와 한국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민족들은 유라시아 즉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역사와 문화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앙아시아는 여러 문명, 종교, 그리고 근대 세계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 집단들이 만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현대의 글로벌화 현상의 초기 요소들은 과거 중앙아시아의 제국들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9) -한국어판 서문 中-

저자는 중앙아시아사 연구에서 원전 사료를 원어 그대로 연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자중 한 사람이다. 역자는 유목제국사와 몽골제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다. 전문가의 책을 전문가가 번역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중앙아시아사 책 중에서 이렇게 믿을만한 책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지역 혹은 민족을 이룬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은 씨족, 부족, 신분, 지역, 종교에 기반을 두었고, 이것들은 보통 서로 중첩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정치적 경계선은 큰 의미가 없었다. 유목국가는 영토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수천년 동안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해온 중앙아시아는 중국, 인도, 이란, 지중해지역, 보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아시아는 샤머니즘,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적, 언어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선은 늘 유동적이었는데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근본적으로 상이했던 두 생활양식을 포괄했다. (p. 15) 고대와 중세 시기의 외부 관찰자들은 중앙아시아를 '문명 세계'의 주변부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근대 이전 시기의 가장 큰 제국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를 유라시아 역사의 '심장부' 또는 '중심축'으로 여긴다. (p. 16) 유목민은 일생 동안 경작지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사는 농경민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한 삶을 산다고 행각했다. (p. 21) 중아아시아의 역사가 상세히 보여주듯,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p. 23)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 (p. 24) -서문 中-

서양중심적 그리고 기독교중심적 역사에서 소아시아를 비롯한 이슬람 문화권의 역사는 폄하되곤 했다. 하지만 이슬람 역사의 입장에선 중세 서양을 미개하다고 무시했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나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투라는 입장에서 서양과 소아시아근방 동양은 서로 직접적으로 맞부디히곤 했다. 그에 비해 중앙아시아에 기반을 둔 유목민들은 서양에서도 근동에서도 이방인이고 따라서 야만인이라 무시되곤 했다. 어쩌면 아예 유목민들의 역사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훈족이 몰려오고 어느날 갑자기 몽골족이 몰려온 것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끊임없이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역사의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모르면 무시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무시하면 결국 제대로 알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통찰할 수 있다. 역사는 어느 한곳에서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선사 시대의 중앙아시아 민족들, 이들과 인도 아대륙 및 중동 사이의 초기 관계는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다. (p. 28)

우리의 인식은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들과 새로우면서도 종종 상호 모순적인 해석들로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사실 아무도 정확히 어디에서 혹은 왜 완전한 형태의 유목 생활 양식이 처음 출현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p. 30)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은 유목민의 가정생활에 대해 거의 알려주는 것이 없다. (p. 35)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의 역사일수록 유목사 연구는 더딘 속도임을 드러낸다. 자료의 부족과 연구자의 부족 및 왜곡되고 폄하된 인식으로 인해 초기 유목사의 연구는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분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이 알려주는 역사의 흐름은 의미를 더해갔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p. 31)

외부인들은 유목민들이 목적지 없이 물과 풀을 찾아 방랑한다고 기록했지만 사실 유목민들은 신중하게 계획되고 방어된 경로와 목초지를 따라 이동했다. (p. 33)

정착 생활은 신분의 추락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은 유목민들은 자발적으로 지역 족장이 이끄는 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p. 35)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군사적 침공 혹은 주변 국가들의 획책으로 초래된 내부 위기에 대응해 형성된 유목민의 정치 조직은 유목제국 아니면 다양한 비국가적 부족연합의 형태를 띠었다. (p. 38)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유목민들이 정주 지역을 정복하는 경우에는 강력한 지배왕조들을 탄생시켰다. (p. 39)

유목민들은 중간 상인과 문화 전파자로서 더 넓은 세계에 장거리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중략) 유목 세계에서는 여성들도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p. 41)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우위를 따지는 태도는 불필요하다. 역사를 발달이나 발전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제각각의 인격을 존중받아야 하듯이 모든 역사는 다 제각각의 의미를 존중해야 한다. 유목민들이 야만적이라거나 미개하다는 식의 편견은 버려야 한다. 달랐을 뿐이다. 그 다름은 주변의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농경생활 중심이 되면서 노동력과 힘 중심으로 재편된 정주지역의 역사보다 오히려 유목민들의 역사에서는 권력의 불평등이 덜 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사회의 시작은 서양세계와 마찬가지로 도시국가에서부터였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략)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은 영속성 있는 도시들을 거의 건설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대도시들은 주로 이란계 민족들이 건설했다. (p. 43) 오아시스 도시들은 실크로드의 거점이었거니와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품들의 주요 공급지이기도 했다. (p. 47) 인도-이란계 주민들의 이동으로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p. 52) 유목 세계의 경계 지대에 거주하며 유목민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박트리아인, 화라즘인, 특히 소그드인들은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p. 58)

기원이 불분명한 흉노는 기원전 3세기에 출현했다. (p. 61) 흉노의 정복 활동은 중국의 변경 지대에서 서방으로의 민족 이동을 수차례 촉발시켰다. 월지와 이란계 유목민들은 초원을 가로질러 박트리아와 이란까지 이주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이들에 의해 멸망했고 그 소식은 중국과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이처럼 중국 북방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변은 서방의 민족들과 국가들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p. 65)

초기 도시국가들의 발달과정은 고대그리스시대의 폴리스발달과정과 무척 비슷해 보였다. 작은 농업기반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물이 있는 곳에 정착촌이 생기고 그 정착촌들을 기점으로 하는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상업이 발달하게 되고 그 상업을 바탕으로 도시국가가 커지는 흐름은 지중해연안의 도시국가의 발달과 다를게 없어보였다. 거기만 발달하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제각각 발달하고 있었다. 그러다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동서양은 서로 연결되게 된다. 따로따로가 아니었다. 그러니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었다.

당시 서부에서는 유목민들이 세운 쿠샨제국과 훈이 부상중이었다. 쿠샨 왕조는 그리스-박트리아를 멸망시켰던 월지 출신의 쿠줄라 카드피세스에 의해 기원후 1세기에 세워졌다. (중략) 쿠샨 제국은 당대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그 정치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화들과 고고학적 발굴물들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p. 69) 쿠샨제국은 실크로드 모피교역, 보석의 거래에서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중략) 교역과 순례 루트들이 서로 얽혀있음으로 해서 쿠샨 제국은 불교 순례활동과 국제무역 활동을 동시에 장려했다. 쿠샨제국은 이란의 새 지배자인 사산 왕조에 의해 십중팔구 230년대부터 약270년경가지 지속된 대결 끝에 멸망당했다. (중략) 이후 '흉노'라는 명칭은 유럽에서 '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p. 73) 훈은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부족들의 이동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375년에 볼가강을 건너 알란과 그들의 이웃인 고트 부족연합을 격파했다. (p. 74) 흉노의 멸망은 유목민들의 서방 이동을 처음으로 촉발시켰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처음으로 가까이 접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실제의 영향보다 훨씬 더 과장된 기억과 전설을 만들어냈다. 훈은 난폭한 야만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흉포한 이미지와는 달리 동양의 훈(흉노)와 서양의 훈은 중국 혹은 로마 제국의 존립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았다. (p. 75)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으며 은근 자주 접하게 된 이민족이 흉노족 혹은 훈족이었다. 그들의 이미지는 말을 타고 약탈하는 야만인 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가 더 야만적이었을까? 제국의 권력자들과 그 지배층들이 과연 이들보다 덜 야만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은 제국의 존립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저자의 표현에서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대의 커다란 제국인 로마와 중국에게 유목민들의 침략은 존폐를 걸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엔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일지도.

중국 사가들이 기록한 돌궐의 기원 신화에 따르길, 아시나 돌궐인들은 암늑대와 적에게 전멸당한 한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 사이의 교합을 통해 탄생했다. 늑대 혹은 늑대에게 양육된 자를 시조로 둔 기원 신화들은 유라시아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p. 84)

'투르크 룬 문자'는 그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여러 게르만 민족이 사용했던 룬 문자와 형태가 비슷하다고 붙은 이름이다. 돌궐 눔자, 오르콘 문자라고도 한다. (p. 94)

아바르 제국, 헤프탈 왕조, 돌궐 제국, 위그르 제국, 키르기즈, 거란제국으로 이어지는 유목사를 읽며 중앙아시아에서는 그저 유목민들이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기만 했을 뿐 어떤 왕조가 연이어 있었다는 생각을 그동안 못했음에 부끄러웠다.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제국들이 일어서고 번성하고 망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양이나 동양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도 말이다. 게다가 신화나 문자 등의 연결성을 통해 외따로 떨어진 역사도 아니었다. 문화는 서로 연결되고 역사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우리는 왜 그동안 이 역사를 몰라왔던 것일까...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p. 126)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중략) 사마르칸트로 끌려간 중국인 포로들 중에는 제지 기술자가 있었고, 이들로부터 종이가 더 넓은 지중해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오랫동안 주장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을 보면, 중국은 이르면 3세기 초부터 종이를 수출해왔고 종이는 이슬람 이전 시기에 상인들과 불교 순례자들을 통해 신장과 소그디아에 전파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지술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중동의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을 수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751년 탈라스전투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p. 130)

이슬람교는 초기에는 정복 엘리트 집단이 믿는 종교였다.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중략) 이란은 정복지들 중 가장 먼저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이 되었지만 자신의 고유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고유 문화는 상실하지 않았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중략)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외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p. 131)

소그디아, 박트리아, 호탄, 쿠차, 아그니, 코초, 부하라 등의 실크로드 중심지들을 통해 '트란스옥시아나'지역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역사는 이미 고정된 학문같지만 사실은 자꾸 새로운 학설이 나올 수 있는 살아있는 학문분야라는 것도 또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전파는 상업이 중시되었던 중앙아시아에서 그 어떤 종교보다 빠르고 자발적인 개종으로 속도를 더해갈 수 있었다. 종교는 결국 믿음만의 문제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독교 세계에서나 이슬람교 세계에서나.

10세기에 서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세계는 이슬람화되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대규모 이슬람교 개종이 이루어졌음에도, 샤머니즘 및 여타 종교적 관습은 살아남았다. (p. 151) 카라한 왕조의 통치하에서 이슬람 색채를 지닌 독창적 문학 작품들이 투르크어로 쓰였다. (중략) 이란 세계 뿐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군주들을 위한 거울'이라는 오래된 문학 장르에 속하는 이 작품은 군주와 그의 조언자들은 군주에게 위대한 사람이거나 하찮은 사람 모두를 정의롭게, 동정심을 가지고, 공평하게 대하라고 요구한다.(주석-'군주들을 위한 거울'은 군주들에게 윤리적, 정치적 조언을 제공하는 문학장르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서 인기를 끌었다.) (p. 155)

자 이제 본격적으로 초원에 초승달이 뜬 시대가 되었다.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이 중앙아시아사의 주역이 되면서 서양세계와 접촉했던 그들은 폭넓은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낸다. 이슬람교로 개종했더라도 좁은 지역의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넓은 지역 각각에서 자체적인 샤머니즘은 여전히 존속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더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군주들을 위한 거울' 이라는 책을 보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12년에 '군주론'을 집필한 마키아벨리는 과연 먼저 있었던 이 '군주들을 위한 거울'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궁금해진다.

몽골인들은 12세기 후반의 몽골과 몽골의 인접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연합의 하나였다. (p. 168)

<몽골비사>에 따르면, 알란 코아는 자신의 남편이 사망한 후 '천막의 연기 구멍 혹은 천장의 문을 통해 들어온 빛나는 노란 남자'를 통해 기적적으로 수태를 했다. 이 노란 남자는 그녀의 배를 문지리렀고 그의 빛이 그녀의 자궁에 들어왔다. (p. 170)

칭기스 칸과 그의 후예들은 유목 세계의 전통적 권력과 주권의 상징들을 활용했다. 예컨대 유목민들이 신성시하는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고, 칸 혹은 카간 과 같은 황실 존칭을 사용했으며, 국가 통치를 위해 새로운 법을 선포했다. (p. 173)

중앙아시아 안에서도 동쪽과 서쪽은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슬람제국과 맞닿은 서쪽과 중국과 맞닿은 동쪽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칭기스 칸의 집안에 내려오는 '수태신화' 가 낯설지 않다. 이 수태신화의 주인공 알란 코아는 칭기스 칸의 조상이다. 몽골제국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칭기스 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제국이 아니었다. 유럽땅에 들어섰던 왕조들처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했고 칭기스 칸 사후에도 오래도록 중앙아시아에 제국의 맥을 잇는 후손나라들에 영향을 끼쳤다.

유목민 전사들은 계속해서 혜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군 지도자 곁에는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유목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나라를 세운 지도자들은 부하들을 계속 휘하에 두기 위해 새로운 군사적 성공과 전리품을 그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칭기스 칸도 정복 계획을 수립했다. (p. 175)

몽골 제국의 방대한 크기와 여러 칭기스 가문 및 울루스 간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로 몽골 제국의 통일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p. 182)

13세기 후반에 몽골 제국은 고려, 중국, 만주 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까지 이어졌다. (중략) 정복활 동을 끝낸 뒤 몽골인들은 현지 출신과 외국인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정복지의 재건에 나섰다. 몽골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p. 185)

몽골 제국은 정주 세계를 정복한 가장 큰 유목제국이었다. 그리고 유라시아의 초원지역, 삼림지대, 다수의 인근 국가들을 하나의 광대한 세계 국가로 통합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세계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 (p. 193)

로마제국쇠망사를 읽는 기분이었다. 제국의 흥망성쇠는 너무나 닮아있었다. 로마에서도 용병들의 전리품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정복전을 벌여야 했고 현지주민들을 활용했으며 포용적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제국은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권력에 균열이 생겼으나 쇠망의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로마제국이 그렇게 중세이전 세계의 선구자였다면 몽골제국은 그 뒤를 잇는 세계의 선구자인 셈이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이 '근대세계의 선구자' 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언급될 뿐이다.

티무르는 차가다이 울루스의 극심한 부족 간, 씨족 간 대립 관계를 아주 잘 이용하여 1370년 무렵 차카타이 울루스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p. 205)

로마제국도 그랬다. 황제라고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 황제의 권력을 차지할 때면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을뿐 황제의 권력을 모두 가졌고 그 정당성을 위해 황제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제국의 영위는 다 비슷한 모습이었던 셈이다.

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회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중략)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율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전쟁 기술이 수천 년 동안 우위를 차지해온 기동성을 갖춘 기마궁사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p. 225)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화약이 중국에서 발명된 만큼 서양보다 중앙아시아에 화약이 먼저 유래됐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화약무기는 말을 탄 궁사보다 전투에서 효과가 없었다. 그사이 유럽에선 화약무기가 엄청난 진화를 하게 된다. 유목민족이 실력이 떨어져서 라고 생각이 모자라서 라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수천년동안 어딜 가든 효과적으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 기마궁기 였다. 이제 막 시작된 화약무기를 어찌 믿을 수 있었을까. 화약을 믿고 활과 말을 버리기엔 그동안 너무 오랜 세월 전투에서 승리해왔다. 그에비해 오로지 인력으로 전투를 치뤘던 서양에서는 무기의 발달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역사는 한쪽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16세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1547년 이후 '러시아')이 중앙아시아의 서부 변경 지역으로 침투해 오기 시작했다. 정교회와 몽골 지배자들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 공국들을 복속시켰다. (p. 234) 이반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 시키려 했다. (p. 235) 1500년부터 190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팽창하는 국가 중 하나였던 러시아는 하루에 약 50제곱마일(13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획득해 나갔다. (p. 236) 러시아의 전진은 만주인의 청 제국과 충돌한 뒤에야 멈추었다. (p. 237)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p. 239)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면 작은 공국들이 난립하기 마련이다. 유럽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했을때 엄청난 분열과 작은 국가들이 이합집산했다. 몽골제국이 무너진 중앙아시아의 상황도 비슷했다. 그 난립된 작은 나라들을 빠르게 복속시킨 것이 러시아였다. 유럽을 건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유럽보다 늦게 발달한 러시아가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은 동쪽과 남쪽이었고 때마침 몽골제국이 망한 후라 혼돈과 난립속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영역확장을 할 수 있었다. 유럽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의 대립속에 이 두 세력은 중앙아시아까지 넘볼 여력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몽골제국의 가장 큰 잔존세력도 중국과 대립하느라 러시아를 막기는 커녕 지원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그렇게 순식간에 커졌다.

17세기 중반, 이슬람권 투르크-페르시아 세계는 동쪽에서는 불교도 몽골인들에게, 남쪽에서는 무굴인들에게, 남서쪽에서는 시아파의 사파비왕조에, 북서쪽에서는 그리스도국가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반 왕조의 우즈벡 칸국은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던 점에서 몽골과 유사했다. (p. 245)

중앙아시아사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고 있었다. 주변 모두에게 조금씩 먹혀가고 있는 막바지 같아 보이는 시기였다. 부족연합국의 한계는 늘 유목국가의 통일성을 방해했다. 지금까지 중앙아시아라고 볼 수 있던 곳은 대부분 이제 러시아 와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6세기에 유럽인들이 동양과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해양 노선을 개척하고 17세기에는 기후변화(소빙기),기근, 경제침체, 인구감소, 끝없는 정치적 혼란 등의 글로벌한 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세계무역의 패턴이 바뀌었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변화들은 중앙아시아가 경제적으로 주변부화되고, 지적으로 정체된 원인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와 같은 시각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p. 249) 중앙아시아는 세계무역 체제의 일부로 남아 있었고 바뀐 것은 교역 물품들과 루트들이었다. 그 흐름은 동-서 방향 보다는 남-북 방향이 더 주를 이루었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주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p. 250)

동서교류의 폭이 좁아졌다고 해서 동쪽의 역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방향이 남북으로 바뀌면서 유럽과의 교류가 줄었다고 해서 세계의 주변부로 칭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세계사는 늘 함께 역동하고 있었다. 어느 한곳 멈춰있는 곳은 없었다.

19세기 초,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앙아시아는 쇠퇴하는 청 제국 및 급속히 팽창하는 러시아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알려진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과 관련해 중앙아시아를 방문했던 영국인들은 중앙아시아를 빈곤한 지역으로 묘사했다. (p. 267) 영국은 이 나라(아프가니스탄)를 인도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에 대한 완충물로 여겼따. (p. 269)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중앙아시아 영토에 대한 종합적 통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독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현지인)지배층을 통해 주민들을 다스렸다. 러시아 당국은 통치 비용을 줄이고 토착민의 이슬람 정서를 해치지 않으려 되도록 원거리에서 통치를 했다. (p. 275)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중략)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중략)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p. 276) 러시아 정부는 유목민들을 안정적인 납세자로 만들기 위해 유목민들의 정착을 장려하는 한편, 유목민들의 가장 훌륭한 목초지들을 꾸준히 잠식해갔다. (p. 277)

러시아의 세력확장과 식민지배는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를 빠른 속도로 뒤처지게 했다. 분열된 식민지는 빠르게 발달하는 서양사의 속도를 점점 더 따라잡기 힘들게 했다. 유목민으로서의 삶의 방식마저 점점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거대한 부를 이루었던 제국은 이제 다시 세워지기 힘들어졌다.

중앙아시아에서 개혁과 일신은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그리고 유럽의 위협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종교와 문화의 일신, 교육개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족의식 즉 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등장이라는 단계들을 거치며 이루어졌다. (p. 279)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촉발했다. 러일전쟁은 근대화된 비유럽 민족이 유럽의 강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여, 당시 한 세기 넘게 러시아에 영토를 빼앗기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서 혁명 운동들을 부추겼다. (p. 283) 러시아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붕괴되었다. (p. 284)

러시아 제국은 빠르게 쇠망할 듯 보였다. 그러나 급부상한 '공산주의' 로 인해 연합국으로 다시 우뚝 서게된다. 가장 늦게까지 존속했던 전제주의 국가가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연합으로 변신하다니 의외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자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 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p. 288)

'민족'의 개념을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경우 워낙 지리적 위치상 타 민족과 섞일 일이 거의 없어서 민족에 대한 개념이 오래 유지되왔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유럽처럼 아프리카를 자대고 선을 긋진 않았으니 소련이 정한 국경선은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탄생한 '민족'의 개념은 또다른 분열의 씨앗이 되었기에 꼭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후 소비에트 체제의 말기에 집권했던 다양한 수준의 권위주의 정권들의 통치하에 있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은 현재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오염은 질병과 생태적 재앙의 유산을 남겼다. 막대한 부(석유, 가스, 여러 천연자원)가 눈앞에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소련에 의해 확립된 민족 정체성들은 여전히 중앙아시아의 민족 정체성들을 규정하고 있지만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지고 있다.(중략) 중앙아시아에서 국민들, 민족들, 지역들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P 294)

중국공산당은 위그르 민족주의를 탄압하고 신장의 역사를 다시 쓰며 신장이 고대로부터 중국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p. 297) 내몽골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일부로 남았다. (p. 298) 몽골인들은 현재 경제적 저개발이라는 막대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따. 목초지는 육지의 75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몽골의 지배적 산업인 유목은 현대 세계경제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 300)

세계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재편되었다. 지금의 국경선은 그때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심어진 각 민족들의 정체성은 국경의 문제를 벗어나 있곤 하다. 그 분쟁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우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오랜세월 유지되어 왔기에 그런 분쟁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어쩌면 과거보다 더 강력하게 한반도의 역사를 지우고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세계사 지식의 완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중략) 역사가들은 중앙아시아를 '역사의 중심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사 지식에는 큰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335) 이책이 국내외를 통틀어 '중앙아시아사 전문가'가 쓴 가장 최신의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엄밀하고 완성도가 높은 중앙아시아 통사라는 점이다. (p. 336) 요컨대 옮긴이에게 국내외에서 출간된 중앙아시아 통사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한 책, 가장 학술적으로 신뢰할 만한 책, 일반 독자들도 읽기 어렵지 않은 책, 균형적인 시각을 갖춘 책을 고르라 한다면 주저없이 <중앙아시아사>를 선택할 것이다. 중앙아시아사를 비롯해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과 초학자들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권한다. (p. 337) - 옮긴이의 말 中 -

역사를 읽는 다는 것을 시대를 이어오는 통찰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을 때가 많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를 넘어 세계의 역사를 읽어옴에 있어 늘 부족하고 궁금했던 부분이 유목사였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역사통사이다 보니 적절한 지도자료나 연표등이 함께 있었더라면 내용이해에 훨씬 큰 도움을 받았을 텐데 그런 시각적 자료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그동안의 세계사 지식에는 큰 공백이 있어왔기에 이 책이 그 구멍을 메꾸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역사를 읽고 세계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읽혔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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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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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이 바른번역이길.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가 준 막막한 먹먹함이 고전의 참맛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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