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테크 - 자전거부터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을 바꾼 기술 EBS CLASS ⓔ
홍성욱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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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변화시킨다

자전거, 총, 인쇄술에서 인터넷, 아이폰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익숙한 기술 뒤에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들이 큰맘 먹고 사주는 전집처럼 다채롭고 알차면서도 전권이 다 만족스럽지 않기 마련인데 최근 좋은 시리즈를 알게 되어 반갑다. 바로 EBS BOOKS에서 나오는 책들이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는 것은 결국 인간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결점 혹은 전환점에 있어 기술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미처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재밌으면서도 유익한 책이었다. 저자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문학과 엔지니어링을 이어주고 있다고나할까.

우리는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기술을 이해하는 가장 용이하면서 현실적인 방법이 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역사의 장을 하나씩 열어보자. (p. 24)

이 책은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들의 첫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편집앨범 같은 책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장면들을 통해 기술을 통해 진짜 보아야 할 것들, 빼앗아가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 기술의 양면성, 사람과 기술의 결합이 낳는 변화, 기술이 가져온 의외의 결과들, 정치에 관여하는 기술, 의도를 담고 있는 기술 등 기술이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기술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야 진정 기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818년에 독일의 귀족이었던 카를 폰 드라이스라는 사람이 선보인 드라이지네가 세계 최초의 자전거다. 드라이지네는 바퀴 두 개를 이어서 안장을 얹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도록 만들어졌다. 이 첫 자전거에는 체인은 물론 페달도 없었다. (p. 30) 페니파딩이라는 자전거 대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안전 자전거를 만들어내는 데는 여성의 역할이 컸다. 또 그런 안전 자전거가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42)

바퀴는 대략 5,000년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바퀴 두 개를 이으면 만들어질 자전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굉장히 늦게 만들어졌다. 바퀴를 단 수레나 전차 등 동물에 의해 수단으로서 사용하던 바퀴를 인간이 직접 올라타고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의 발상이 이렇게 더뎠다는 것도 새삼 의외이기도 했지만 자전거의 발달이 여성의 이동권과 그렇게 가능해진 이동의 자유를 바탕으로 진정한 자유를 주장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진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과 기술은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상호 관계 속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역사를 함께 만들어오고 있었다.

1860년대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후장식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전장식 총기를 사용하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했다. 독일 통일의 파업 뒤에 후장식 소총이라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p. 51) 기관총은 '도덕적 효과'가 있다고 간주되었는데, 몇 명의 군인이 수백 명의 원주민과 대적하면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덜 죽는 것이 절대 도덕이었고, 아프리카 '야만인'의 희생은 염두에 없었다. (p. 52)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병사는 자신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반면에 기관총을 사용할 때는 조준을 하지 않았다. 몰려오는 적을 향해 그냥 방아쇠만 누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악마 같은 총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p. 54) 아마 후장식 라이플이나 기관총이 없었더라도 유럽은 아프리카를 침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능 좋은 총기가 없었다면 그 침략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p. 56)

총의 발달을 보며 자연스럽게 '총 균 쇠' 가 생각났다. 화약의 발달은 동양이 먼저였으나 총의 발달은 서양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략이 세계의 지도를 바꾸었고 아프리카에 남겨진 총기들은 여전히 화약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중이다. 무기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죄책감은 덜어져갔다. 살상이 점점 더 쉬워져온 셈이다. 인간이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확 뒤집어질 수 있음을 총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었다.

증기기관은 이미 존재해 있었고, 와트가 한 일은 분리 콘덴서를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허와 만료 기간이 연장된 상황이었다. (p. 73) 와트의 특허가 만료되기 전에는 어떤 증기기관의 특허도 신청되지 않았고, 와트의 특허가 만료된 1800년에 리처드 트레비식이라는 발명가가 고압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를 신청한다. 나중에 열차나 기선에 사용된 증기기관은 모두 와트의 저압 증기기관이 아닌 고압 증기기관이다. (p. 74)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의 역사 아니 과학의 역사로 불리는 것들 중에선 의외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들이 상당히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가로 와트가 알려져있지만 사실 증기기관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실제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아니었다. 이런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 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명한 에디슨이나 벨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발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렇다면 그 기계장치와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락 생각했다. 프랑시니 형제보다 천 배, 만 배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일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신이 만든 기계라는 결론이 나온다. (p. 81)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동물에는 없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 즉 인간 육체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p. 82) 자동인형들은 이 기계 세상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동인형들은 이렇게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p. 88) 자동인형은 '세상은 기계다. 동물도 기계이며 인간의 몸도 기계다.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숙련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p. 92)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신기했던 것이 '자동인형' 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봇인 셈인데, 그 옛날 그 많은 톱니바퀴들로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을 읽으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철학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노동에 대한 기계와 인간의 역할은 지금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이것은 뒤에서 AI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인쇄술의 사례는 비슷한 기술이 서로 상이한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사회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p. 101)

인쇄술 혁명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인쇄술이 지식의 전달을 획기적으로 가속화하여,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소 기술결정론적인 성향을 띤 해석인데,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고,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무관하게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평민은 인쇄술 발명 이후에도 문맹이어서 신교의 교리들을 담은 인쇄물을 읽을 수 없었다. 또 16~17세기 과학혁명의 요체인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의 도입과 인쇄술의 연관을 찾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인쇄술이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낳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p. 107)

인쇄술의 발달을 보며 동양과 서양에서의 다른 변천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기존에 익숙하게 알려져 있던 인쇄술과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것도 의미있었다. 인쇄술처럼 같은 기술도 다른 사회문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수긍기 갔지만,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다' 라는 오랜 격언을 뒤집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사례들은 무척 새롭게 읽히는 부분들이었다. 카메라와 전신의 초기 모습들 그리고 뒤에 나올 포드 자동차의 확산에는 만들어낸 것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발명이라는 역발상이 숨어 있었다.

자주 붙여 사용하는 글자를 가급적 멀리 띄워 배열한 자판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쿼티 자판이었다. (p. 140) 드보락이 만든 자판이 60~70퍼센트 더 효율적이었고, 오타를 적게 낸다는 것도 발견한다. (p. 142) 처음 레일을 만들고 기차를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기차를 발명하기 전에 탄광에 마차가 다니는 레일을 깐 사람으로, 마차가 다니는 나무 레일 간 폭을 1,435미터로 만들었다. 나중에 열차가 커지고 무거워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차 레일 간 폭을 그대로 기차에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차의 레일 간 폭은 왜 1,435미터였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마차는 말 두 마리가 끌었는데 말 두 마리가 바짝 붙어서 잘 끌고 갈 수 있는 넓이가 1,435미터였던 것이다. (p. 147)

타자기의 발달이 남긴 것은 우리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쿼티 자판 이다. 타자기의 자판 배열이었던 쿼티 자판의 효율성을 높은 드보락 자판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익숙한 것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타자기도 아닌 컴퓨터 스마트폰의 시대로 넘어왔음에도 여전히 타자기시대의 비효율적인 쿼티 자판을 사용한다. 그리고 말들의 엉덩이 간격으로 시작된 레일의 역사는 기차로 운반할 수 있는 우주왕복선의 로켓부스터 폭도 넓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선택한 기술은 때론 효율성 면에서 비이성적 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그 기술을 선택하는 것인 인간인데 인간의 선택이 늘 발달적이진 않다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레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굳이 다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특허를 돌연 취소해버렸다. 하지만 벨은 취소하지 않았고, 끝까지 특허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벨은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더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벨과 그레이의 차이였다. (p. 174)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보다 전력 시스템 전체를 고안했던 시스템 디자이너 혹은 시스템 창안자로서의 역할과 의미가 더 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처음부터 그랬듯 끝까지 직류를 고수했다. (p. 201)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인 새뮤얼 랭글리도 비슷한 비행 실험을 했지만 멋지게 실패했다. 자전거 수리공이 저명한 과학자를 누른 것이다. (p. 210) 사람을 태우고 비행한 첫 비행기는 운 좋은 자전거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이트 형제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습득하고 새를 관찰해 날개의 제어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론과 현장 시험이 맞지 않자 이론을 의심했고, 새로운 계수를 구하기 위해 창의적인 자전거 실험을 고안해서 실험했으며, 이 실험에 문제가 있자 풍동을 개발해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냈고, 이런 데이터에 근거해 비행기 날개와 프로펠러 디자인을 개선했다. (p. 219)

아르파넷의 탈중심적 혹은 탈중앙집권적인 특성의 기원은 베린의 분산된 네트워크 개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핵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의미가 없듯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네트워크는 극단적으로 분산적이고 탈중앙집권적인 것이어야 했다. (p. 234)

동시에 특허신청을 했던 두 사람들 특허권을 따낸 사람은 벨이었고 그렇게 벨이 전화의 발명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레이는 당시 독보적인 기술이었던 전신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전화기의 미래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전력시스템을 회기적으로 발전시킨 에디슨이었지만 교류가 등장했을때 직류보다 나은 교류의 장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시스템은 교류를 선택했다. '랭글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비행기 연구에 몰두했던 랭글리는 실험실 안에서의 실험을 너무 믿었다. 결국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에 대한 과한 신뢰로 과학적 발견에 필수적인 새로운 의심을 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에 폐쇄적인 군조직에서 시작된 인터넷의 연구는 처음부터 개방적인 분위기였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다.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전문가들에게서만 가능하진 않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던 사례들이었다.

그전에는 기계가 단순 작업을 했지만 포드 공장에서는 사람이 하루 종일 단순 작업을 반복하고 기계는 아주 고도로 세분화된 노등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으로 느껴진다. (p. 249) 소비자의 요구가 있어서 물건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명이 되고 나니 그다음에 소비자의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량소비의 욕구가 있어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대량생산이 되어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니 대량소비라는 욕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 253)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삼으려 했던 많은 시도는 모두 컴퓨터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수학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컴퓨터의 기원이 추상적이고 심원한 수리철학적인 문제에 있었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p. 261) 베비지는 젊었을 때 천문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천문대는 가장 복잡하고 긴 계산을 했던 곳으로, 계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다. 당시부터 천문대에서 계산하는 사람들의 직종을 일컫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컴퓨터 였다. 계산하는(compute)사람(er), 그러니까 컴퓨터라는 말은 원래 사람을 지칭했다. (p. 263)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BM),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BM 컴퓨터를 만들어낸 회사가 바로 인구조사 데이터를 처리하는 도표기를 만들었던 회사에서 비롯되었다. (p. 273)

기술과 인간은 공존한다. 함께 동고동락한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인간을 단순노동의 기계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대량소비의 주체로 만들기도 했다. 튜링을 컴퓨터의 시조로 보지 않고 방직기의 천공카드를 시초로 본 것을 저자는 자신의 의견이라 말하지만 천공카드를 활용한 베비지의 컴퓨터 시조로서의 역사는 다른 책에서 읽은바 있었다. 어쨌든, 컴퓨터가 계산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컴퓨터기기 그러니까 거대한 계산기계의 등장으로 수많은 컴퓨터(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을 보면서 과학기술의 발달이 없애는 직업들에 대한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구나 싶어서 그렇다면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새로운 일자리의 생성으로 서로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폰은 한 사람에 의해, 특히 스티브 잡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잡스는 애플이 전문성을 갖지 않은 휴대전화 개발에 회의적이었고, 전망을 가진 회사의 임원들은 잡스를 설득해야 했다. (p. 289)

1956년의 일이었다. 인공지능, AI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p. 297)

처음에 체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체스를 두는가를 연구해서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체스를 두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계산을 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p. 303) 컴퓨터 프로그램에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인간의 방식대로 체스를 두는 것이 아니라 높은 확률을 계산해서 체스를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대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p. 304)

역시 유명인의 이른 죽음뒤에는 신화적 허구가 덧붙여지기 마련인가 보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일화들이 그러했다. 스티브 잡스 덕에 세상에 아이폰 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스티잡스 때문에 세상에 아이폰이 등장하지 못했던 것을 거꾸로 알고 있는 현실을 보며 관계자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AI 가 최신 용어가 아니었다는 점도 새로웠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왜 인간과 같을 수 없는지 명쾌해져서 좋았다. 인공지능은 그저 아주 빠른 계산기일 뿐이었다. 확률로 결정하는 것과 인간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보통 바둑판이 가로세로 19줄이라고 하는데 승승장구 하던 인공지능에게 가로세로 20줄 바둑판을 주면 인간만큼 바둑을 두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바둑능력은 아~무 상관없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계산기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종합해서 결과를 내는 것인데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p. 306) 쉽게 말해서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할수록 자동차는 더 자율적이 되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혼자 운행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매우 많은 사람의 노력과 노동이 합쳐진 결과물인데 자동차가 자율적으로 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운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전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p. 307) 어떻게보면 인공지능의 능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편향적이면 인공지능도 편향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p. 308) 감저을 덜어냈기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더 객관적이고 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의 한계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p. 309) 기술과 인간은 항상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마치 기술이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것처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의 대표적인 예인 자율주행 자동차 또한 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인공지능 기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술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p. 310)

인공지능은 사실 자율적이지 않다.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계산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기 나름이고 인간이 준 데이터에 따라 편향적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600백만불의 사나이'의 눈이나 손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나는, 여러분은 이미 사이보그다. 스마트폰은 내 심장의 일부를 가지고 있으며, 내 몸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사이보그 관계'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과 기술의 다양한 방식의 결합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를 보이려 했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이제 사이보그 세상의 첫 '시민권'을 득한 셈이다. 새로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 (p. 314)

기술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고 때로는 의외의 결과들로 인한 새로움을 즐기며 밝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사이보그 세상의 시민으로 마무리한 마지막 문장을 보며 갑자기 섬뜩해지는 기분이다. 기술이 바꿔온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의식적으로 적응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새로운 기술의 발견 뒤엔 늘 새로운 질문이 있었다. 그 새로운 질문을 이제 우리의 삶에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삶에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때마다 인간은 그 기술의 배경과 역할 그리고 지향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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