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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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유럽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36가지 중세 이야기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겨하다보니 이런저런 책을 꽤많이 읽게 됐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전읽기로 연결됐었더랬다. 고전을 읽으려다보니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이런저런 인문학 책들을 읽게 됐고 그러다보니 고대문명-고대그리스-고대로마 관련 책들을 다수 읽게 됐다. 그렇게 서양사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책들로 또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중인데 '중세'관련 책을 읽어야 할 시점인 요즘, 마치 내맘을 읽은 것처럼 딱 필요한 '중세' 이야기 책이 나와서 반가웠다. 이건 반드시 읽어야 해~! 하는 느낌이 팍!! ㅎㅎ

문화사는 언뜻 소프트한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분야다. 인문학의 각 영역을 어느 정도 총괄하는 지식과 안목이 없이는 주제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역사책에서도 자주 만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게 가장 흥미롭고 소프트한 역사의 이야기는 보통의 역사책에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좋은 역사책도 이 부분은 그냥 건드리다 말고 지나가곤 했다. (p. 8~90 -들어가며 中-

인문학자이자 도이치어권 번역자라는 저자는 서양의 다양한 인문학 책들과 문학작품을 읽고 번역하고 강의도 해오며 자신의 성향에 맞는 중세책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사'적으로 중세를 살펴보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그동안의 공부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긴 하지만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라는 학자의 책을 만나 큰 깨달음을 얻었기에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으며 느꼈던 점이지만, 역사서들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향은 꽤 다양하다. 사건중심, 사람중심, 정치중심, 경제중심 등등 어느 방향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풀이되는 이야기들은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통사로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런 책들은 대개 벽돌책이라 사실 시작하기가 쉽진 않다. 읽는 재미로 따지자면 아마도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책의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다.

476~1000 의 중세 초기, 1000~13000 의 중세 전성기, 1300~1492 의 중세 말기, 이렇게 3부 다.

간단히 말하자면 중세는 서로마의 멸망부터 동로마의 멸망까지 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서양사책들에서 서로마의 멸망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간주하고 동로마만 존속했던 시대를 '중세 암흑기'라 지칭하며 무시하곤 하는데, 저자는 '암흑기'라는 표현에 반대입장을 취한다. 최근 읽었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도 있어서 나또한 저자의 기본 입장에 공감하며 책을 시작했다. 이 책의 핵심은 책뒤표지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중세란?

유럽 대륙 전체가 역사의 무대로 펼쳐진 "진정한 유럽 역사의 시작"

이교 신들과의 싸움, 기독교 내분, 교황과 황제, 교황과 교황의 싸움이 벌어진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적 전설과 기적, 기사들의 모험을 둘러싼 "환상의 시대"

인간중심, 이성중심 사유로 돌아오는 합리화 과정 "르네상스"

지중해 중심 사유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토대로 세계로 나아간 중세의 끝 "제국주의의 출발 지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중세가 암흑기가 아니라 '진정한 유럽 역사의 시작' 이라는 점이다. 시간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건너뛰며가는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바다처럼 쉬지않고 출렁이는 것이 시간이고 역사이기에, 중세라고 불리는 시간들도 결코 고대와 근대 사이의 구멍난 시간일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의 유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세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저자의 시각은 굉장히 바람직해 보인다.

중세초기 부분에서는 일단 고대부터 시작한다. 중세로 접어들기 전 앞선 시대에 대한 간략한 개요가 있으니 중세시대로 연결되는데 있어 흐름적으로 자연스러워져서 좋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바로 이 중세 시대를 다룬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시대가 가고 암흑기처럼 보이기도 한 시대였다. 하지만 중세는 1,000년이나 계속되는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대에 온갖 재미있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중세 암흑시대'라는 말로는 절대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매우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시대였다. 지중해 세계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유럽'이 등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p. 31)

라는 중세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중세가 없었다면 근대도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를 '암흑기'리고 부르던 것을 지금도 그렇게 부를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을 사는 이는 늘 어제의 시절에서 과오를 찾기 마련이므로 르네상스 인들에게는 앞선 시대가 암흑기였을지 몰라도, 지금 세계사를 보는 데 있어 중세를 여전히 '암흑기'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근대의 모든 부흥은 중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의 유럽국가들이 대부분 중세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중세는 세계사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이렇게 종족과 문화와 종교와 언어가 계속(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뒤섞이므로 문활르 말할 때 '민족 문화'란 말은 별 의미가 없다. 대체 '민족'이란 게 뭐냐는 의문도 있다. 혈통이나 민족만으로 문화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일이 되었다. 따라서 최근 연구자들은 주로 언어를 기준으로 문화를 가르고 있다. '프랑스문화'란 '프랑스어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p. 45)

1부인 중세초기 에서는 연대기적 역사서술로 가장 역사책 처럼 읽히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에서는 지도가 굉장히 중요한데, 사이사이 적절한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유럽의 역사는 그야말로 섞이고섞이고 또 섞이는 혼란의 혼합사다.

중세에는 교황이 세속의 영토를 지녔고, 황제나 왕도 자기 영토에 속하는 교구의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권한이 겹치는 부분에서 황제와 교황 사이의 다툼은 피할 길이 없었다. (p. 155)

2부인 중세전성기 에서의 핵심은 '종교' 다. 지금의 유럽대륙이라 일컬어지는 곳은 로마제국시대의 서로마지역에 해당하므로 동로마는 차치하고 서로마지역에서 난립하는 신흥세력들의 권력다툼 속에 '교황'의 존재는 다양한 역사적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엄연히 콘스탄니노플에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쪽지역의 황제옹립과 콘스탄티노플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한 로마교황의 권력은 서로마역사의 다양한 변주를 이끌고 이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이때문에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세문학은 그 어느때보다 환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자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이 '문학사적'인 중세이야기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두 가지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나침반을 이용해서 먼 바다에서 오랜 기간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나침반은 11세기 중국에서 맨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아랍을 거쳐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이어서 유럽에서 더욱 개선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제노바 상인들이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p. 325)

3부 중세말기 에서는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를 연 배경이 서술된다. 페스트로 인구가 줄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과 콘스탄니노플의 함락등 여전히 유럽대륙엔 전운이 가득했지만, 무역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갔고 그덕에 생겨난 경제적 윤택함은 르네상스를 경제적 필요성은 신대륙탐험을 주도했다. 이제 유럽은 유럽대륙을 벗어나 지구전체를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근대의 시작이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적절한 시각적 자료와 술술 읽히는 이야기체는 중세를 역사가 아닌 이야기로 접근하게 해줌으로써 쉽고 재밌게 중세를 경험하게 해준다. 역사전체를 아우르는 통사도 아니고 문화사라고 하기보단 (부분적)문학사에 가까운 책이었지만 중세역사를 시작하는 막막함을 가볍게 해준 이 책을 읽고나니 한결 마음편하게 중세의 또다른 책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읽었던 책에서 '읽기의 목표는 하나의 작품을 소진하는 데 있지 않고, 또 다른 읽기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데 있다' 라는 문장을 인상깊게 봤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중세역사 읽기의 마중물로 제역할을 다하지 않았나 싶다. 쉽고 재밌는 역사이야기책은 늘 두팔벌려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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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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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은 우리 시대의 공적 지식인

도정일이 던지는 '뜨거운 실천이성'의 인문 에세이

이 책의 특징은 표지와 띠지 문구에 거의 다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문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하며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설립,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및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등을 주도해온 저자의 '실천이성'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은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다시말해 '만인의 인문학'이었다.

삶의 시학은 '산다는 것의 예술'에 주목한다. 산다는 것의 예술은 예술을 하면서 사는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학의 눈으로 인간을 보고 삶을 말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생살이 자체의 예술, 혹은 삶이 가진 예술적·시적 차원을 중히 여기는 일이다. 테크네의 존재이기보다는 '아르스(예술)'의 존재일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p. 15)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만인의 시학' '만인의 인문학'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로 묶어 놓은 일종의 칼럼집이다. 책의 뒤에 보면 '수록 원고 발표 지면 및 연도' 가 정리되어 있는데, 주제별로 묶느라 그랬는지 글쓴 순서는 제각각이다. 이렇게 다른 시기에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책일 경우 글의 주제가 비슷하면 반복되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고, 때론 왜 이런 주제의 글을 썼는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필요할 수도 있는지라, 그저 묶어놓기만 한 구성에서 끊어지는 맥락은 어쩔수 없다 하겠다.

저자에게 인문학의 핵심은 아마도 '독서'와 '미학적 삶'인듯 하다. '읽기의 목표는 하나의 작품을 소진하는 데 있지 않고, 또 다른 읽기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데 있다.(p. 14)'는 저자의 책읽는 방식에 공감하면서도 삶이 그렇게 예술적이기만 할순 없는건데 싶어서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 아레테, 테크네 등의 고대그리스 단어들을 접할때마다 인문학 책은 왜 항상 고대그리스를 소환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 강좌라던가 고전읽기 같은 경우도 늘 고대그리스에서 출발하곤 한다. 저자는 '테크네의 존재이기보다는 'ars'(예술)의 존재일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p. 30)'며 인문학의 시학을 펼친다. '시학'자체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키는 단어이기는 하다. 도대체 인문학은 왜 고대그리스적이어야 하는가...

인간과 세계의 상상적 연결방식이라는 점 때문에 '뮈토스(신화)'는 고전철학 시대에는 세계에 대한 합리적·이성적 설명으로서 '로고스'와 충돌하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과학'에 밀려난다. 근대는 신화가 빛을 잃었던 시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방식이 근원적으로 신화적이라 여기는 점,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 짓기가 근본적으로 상상적이라는 점, 역사 자체가 '뮈토스'의 범주라는 점 등이 인식되면서 신화는 현대에 들어와 비상한 학문적·대중적 관심 영역이 된다. (중략) 그것은 인간세계의 제도, 풍습, 관행, 가치, 사회적 위계구조, 현상질서 등을 정당화하고 현실모순을 상상적으로 해소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치이다. (p. 95) 현대는 인간의 어느 시대 못지않게 이데올로기로 뒤덮이고 이데올로기로 지탱되는 '신화의 시대'이다. 신화의 작동은 살아있다. (p. 96)

신화의 작동이 살아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여전히 인문학 책에 즐겨 담기는 소재가 고대의 신화 들인 것을 보면... '공상과학소설장르를 품격있는 소설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 미국작가 어슐러 르 귄(p. 104)' 의 판타지도 신화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저자의 언급을 보며 가장 미래적인 소설이라 불리는 판타지 SF 소설에서 고대신화가 얼마나 자주 이용되는지 문득 생각해본다. 이데올로기는 그렇다쳐도 소설에서 '신화의 작동'이 살아있음은 분명하다.

브루노 프레이의 진단은 '돈보다 민주주의가 행복에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체를 함께 일구고, 운명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자율성'이다. (중략) 로버트 퍼트넘은 '웰빙'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적 덕목, 연결망, 공동체의 안전 같은 무형의 '사회자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이런 주장과 경제학자들의 진단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p. 161)

서양은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강한 텍스트인 기독교 경전에다 2000년 넘게 유지되고 부단히 생산되어 온 각종의 세속적 텍스트(고전)들을 갖고 있다. (p. 175) 우리는 말하자면 텍스트가 없는 사회에 속한다. 한 사회가 반드시 강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강력한 텍스트는 변화의 개입통로를 차단함으로써 오히려 닫힌 사회를 가져올 수 있고 배타성, 독선, 진리 독점주의로 인한 폭력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양적 근대화는 모든 신성한 텍스트들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세속적 고전들에서도 그 진리성을 박탈하는 이른바 '탈신성화와 해체'의 충동을 갖고 있다. 이 근대적 충동이 보편화되면서 세계의 여러 전통적 텍스트사회들은 텍스트 없는 사회로 이행하고, '텍스트 없음'이 오히려 근대화를 성취한 열린 사회의 미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근대화의 본고장인 서양에서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강한 텍스트들이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는 반면, 그 근대화를 제대로 성취하지도 못한 나라들(대표적으로 한국)에서는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실종되고 그로 인한 가치 혼란과 정신적 고통은 또 그것대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 176) 어떤 점에서, 전통적 텍스트 사회들을 와해시키고 '열린 사회'론의 이데올로기적 동원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쪽은 서양이다. (p. 177)

민주주의의 태동을 고대그리스사회에서 찾곤 한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는 도시국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잘한 도시국가들은 지금처럼 대형국가체제로 통합되지 못했다. 그 민주주의가 지금의 거대국가에 맞는 민주주의라고 할순 없을 것이다. 텍스트! 중요하다. 하지만 그 텍스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성화화 탈신성화 양쪽 모두에게 이용되어 왔다. 결국 핵심은 민주주의건 고전이건 간에 '서양중심주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인문학은 서양인문학을 논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고대그리스를 소환하곤 하는 것인가 보다.

텍스트를 가진 사회가 되기 위해선 우선 텍스트의 선정, 선정을 위한 토론, 현대적 읽기를 안내할 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 (p. 178)

심심하면 인문학 열풍이 불곤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아쉽곤 했다. 인문학에 우리것 남의것 굳이 따질 필요야 없겠지만, 그래도 한쪽으로만 편중되는 것은 좀... 우리에게 고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의 국경선은 세계2차대전 이후 정해진 것이고 한 곳에서 5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탱해온 나라는 거의 없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우리의 인문학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후마니타스'라는 말은 로마 시대의 키케로가 '문명을 만드는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인간이 문명을 만든다는 것은 굉징히 인간중심주의적이다. 인간이 문명도 만들고 다른 것도 만들고 그렇게 인간이 모든 것을 만들수 있는 것 처럼 시대는 변화해 왔다. 인문학이란 어쩌면 이러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식의 안경'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을 만들기도 했다. 인문학의 질문은 이제 어쩌면 탈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인문학적 안경'을 쓰고도 인문학을 제대로 못 읽겠는데 때로는 그 안경을 벗고 다른 관점으로도 봐야하니 여전히 인문학은 어려운 것 같다. 이 어려운 인문학을 자연스러운 흐름을 잡아 한권의 완결된 책으로 새로 써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만인을 위한위한 인문학 이라는 커다란 얼개에 숭숭 뚫린 구멍을 메꾸려면 또다른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할것 같다. 하긴 뭐 한권으로 인문학을 어찌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인문학도 인간도 평생 공부해야할 숙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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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마음이 단단한 사람 - 융처럼 살아보기 : 아홉 가지 인생 문제를 분석하다 매일 읽는 철학 4
류쑤핑 지음, 원녕경 옮김 / 오렌지연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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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처럼 살아보기:아홉가지 인생 문제를 분석하다

얼마전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나서 융에 대한 관심이 커졌었다. 하지만 융의 저서를 바로 읽기엔 어려울 것 같아서 간접적으로 융에 대해 알수 있는 책을 찾고 싶었다. '매일 읽는 철학 04'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철학시리즈 중 한권인가 싶었고 '융처럼 살아보기' 라고 해서 융에 대한 간접체험용으로 괜찮으려나 싶어 고른 책이었다. 책날개에 쓰여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중국인 '작가'였다. 작가의 글이니만큼 학문적으로 어렵진 않겠구나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융은 자신이 이중인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융의 일생은 제1인격과 제2인격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p. 79) 하지만 이는 의학에서 정신질환이라고 말하는 '인격분열'이나 '정신분열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어쨌든 융의 인생을 통틀어 제2의 인격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p. 80)

융은 <파우스트>를 읽으며 이러한 두가지 인격에 대한 생각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한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고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으며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천당과 지옥 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인간에게 익숙한 생각법이었으니 융이 자신의 인격에 대해 이중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발견이 그러하듯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미처 알아차라지 못하는 사람과 통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융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 책은 융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내용이 소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쉽게 읽히는 것은 좋은데 읽고나면 딱히 남는게 없다. 그래서 어쩌다 나오는 융의 이론 관련 내용은 무척 반가웠다.

크라프트에빙의 책 서문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정신의학>의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신의학 분야의 교과서가 어느 정도 주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아마도 이 과목의 특수성과 학문으로서의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융은 서둘러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인격의 병'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컬었다. '아, 인격의 병!' 순간 융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p. 114)

크라프트에빙의 책은 융을 당시 전도유망한 외과나 내과가 아닌 생소하고도 무시당하는 정신분석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했다. '인격의 병' 융에게 정신분석은 이 한단어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위인전처럼 융의 인생을 읽고있노라니 융은 어렸을때부터 스스로에게 '인격의 병'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것 같다. 융이 정신의학적 환자라기 보다는 뭐랄까.. 여하튼 평범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정신분석학에 끌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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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이트를 융과 적대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둘이 함께 연구하다가 갈라섰다고 해서 꼭 그렇게 볼 건 없지 않나 싶다. 프로이트를 전적으로 지지할 순 없었지만 융은 프로이트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이 두 사람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플라톤이 하나의 이론을 세우고 현실에서 떠나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백과전서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프로이트도 자신의 이론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하고자 하면서 현실에서 멀어져갔다면 융은 하나의 방법이 아닌 사람마다 다 다른 개별적인 방법을 추구하면서 현실속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나 프로이트와 그의 후배격인 융의 관계는 결국 모든 발전사와 맥을 같이 한다. 앞선 것을 뛰어넘고자 하고 앞서 밝혀낸 것 이외의 것을 밝히고자 하느 것은 뒤따르는 사람들의 운명이자 목표가되곤 한다. 늘.

'맙소사! 설마 어제 꿈에서 봤던 그 아가씨가 이 아가씨인가?' (p. 194)

책을 읽을수록 참 신기했던 것이 융은 꿈을 참 자주 많이 정확하게 꾼다는 것이다. 때로는 '영매'인가 싶을 정도로 영적인 예시를 꿈으로 전달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방향이 뒤로 갈수록 '영'적인 심령적인 무언가로 향했던 것일까... 융의 영적 스승도 그의 꿈에 나타난다. 융은 자신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그의 꿈은 거의 예언자가 받을 법한 계시에 가까웠다. 다만 예언자가 세상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면 융은 정신분석학적 계시를 받는 달까... 하지만 관심분야가 집단무의식과 원시적 종교로 나아간 것을 보면 종교적 계시와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를 교조주의라 비판했던 것과 융의 종교성이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하고...

융은 환자에게 분석치료를 할 때 그 어떤 시스템도 따르지 않았다. 모든 환자에게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는 아들러의 언어를, 다음에는 프로이트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 한 가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심리요법의 본질이 아니라면 정신의학적인 분석만으로는부족하다. 정신과의사는 환자를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p. 276)

모든 환자에게 다 다른 방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맞는 것도 같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어떤 환자에게 어떤 방법을 적용할지 의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시스템이나 매뉴얼의 필요성은 결국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융의 진단방식은 아무나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결국 융의 학설도 어떤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융의 학설이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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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일대기처럼 쓰여졌으나 전체 일생을 다룬 것도 아니고 융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교훈을 주는 것처렴 쓰여졌으나 그 교훈이 와 닿지는 않고 융의 학문을 설명하는 것도 같았지만 결국 에세이로 마무리된 이 책을 왜 '매일 마음이 단단해지는 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홍보문구를 선택했는지 이유는 알수 없다. 하지만 융을 개인적으로 접근하면서 융이론의 화두를 엿볼 수 있도록 쉽게 서술한 점은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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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즐겁게 -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박호순 지음 / 비엠케이(BM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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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로 학교에서 오래 재직하신 교장 선생님의 옛이야기를 곁들인 훈화말씀 모음집 혹은 우리말의 민속적 유래를 (저자 본인이) 개인적으로 유추해보는 책으로 에세이로 여기고 읽으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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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즐겁게 -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박호순 지음 / 비엠케이(BM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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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민속연구가 박호순 지음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에 대한 책인 줄 알고 너무너무 기대했더랬다. 근래에 책을 펴내고 편집하는 일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 '국어'에 대한 관심도 평소보다 더 높아진 상태여서 더 그랬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국어에 대한 책은 아니고... 더더군다나 우리말의 어원에 대한 책도 아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교사를 두루 거쳐 교감/교장을 지나 장학사/장학관으로 오랜 교직생활을 하신 분이었다. 본문 속에 나오는 70년대 교직생활 에피소드를 읽으려니 나이가 얼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여하튼 오랜 교직생활을 하신 경험때문인지 책은 전반적으로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모음집 같았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는 우리말을 모아 그 어원과 유래를 찾으므로써 우리 학생들이 우리말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며 나아가 책을 가까이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p. 6 - 머리말 中-)'인 이 책은 자칭 민속연구가인 본인의 개인적 추론을 담고 있어서 '~되지 않았나 유추해 본 것'이라는 표현이 많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문적 근거는 미약하다는 말이다. 물론 일선 학교현장에서 국어교육을 오래 하신 분이니 아주 얼토당토한 추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원학적으로 민속학적으로 학문적 결과를 모은 책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 하듯이 혹은 자신의 추억담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듯이 그냥 그렇게 친근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차례에서는 '언어' '민속' '역사' '식물과 지명' '교훈' 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연대기적 역사도 아니고 학문적 갈래도 아닌 저자가 그동안 관심가지고 찾아보았던 이런저런 '유래'들을 '~이지 않을까' 라고 풀어내는 내용들이다.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묶어주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머리말'에서 나왔듯이 청소년들은 바른 언어를 써야한다는 '교훈'이다.

이 책을 읽고서 국어를 즐겁게 느낄 만한 단 한가지 이야깃거리라도 찾게 된다면 이 책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잡다한 이야기 속에서 역사도 맥락도 뿌리도 찾지 못하여 느끼는 아쉬움은 내 개인적 성향 탓일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민속적 유래를 가볍게 읽어보고 싶은 이라면, 우리 민속에 관심이 많은 퇴직한 국어쌤의 에세이다 라고 여기며 읽을만한 책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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