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의 부와 빈곤부터 지속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교류가 이끌어갈 미래를 예측한 대작

인문대중서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읽었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는 그야말로 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을 준 책이었다. 역사에서 '지리'의 중요성을 그토록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알려준 책은 처음이었다. 그러한 명저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찬사에 가까운 추천문장을 달고 나온 이 책을 보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7만 년의 변화를 관통한 단 한 권의 책!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만을 탁월하게 정리해놓았다' 라니, 그런데 그 방대한 역사를 담았다는 책 치고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이라니 대체 어떤 책일까...

원제가 <The Ages of Globalization 세계화의 시대>라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저자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7번의 세계화시대로 구분지어 인류 역사를 '세계화'라는 주제에 맞춰 정리하고 있다. 왜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지 1장에서 '세계화의 역사' 개요를 설명하고 각 7 시대를 풀어낸 다음 마지막 9장에서 '21세기 세계화를 위한 조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러니까 '미래를 예측했다' 기 보다는 저자가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조언' 을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이러한 해악이나 위협에 대하여 간명한 해답이나 처방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세계화의 역사는 인류의 영광스러운 업적, 잔인함, 스스로 가한 해악 등의 역사이고, 동시에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발전을 성취해온 아주 복잡한 역사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세계화는 자연지리, 인간의 제도, 기술적 노하우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중략) 나는 이 책이 전 지구적 상호연계썽의 오랜 체험을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생활과 사회를 형성해온 세계화의 역할을 더 잘 알게 해주는 밝은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 (p. 23 -머리말 中-)

지금의 시대가 불운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만큼 역설적으로 저자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세계화' 라는 이슈에 맞춰 더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의 본업이 경제학자인만큼 '세계화' 라는 주제로 풀어내는 인류의 역사는 경제 그중에서도 세계경제의 중심인 '무역'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원시적 무역에서부터 현대의 무역까지 그 중심에는 지리, 기술, 제도 가 있었음을 논증하여 7만년의 역사를 굉장히 압축적으로 간결하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지리, 기술, 제도의 상호작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21세기에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를 잘 헤쳐나가는 기본적인 길잡이가 되어준다. 우리는 세계화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현재 사회와 우리 시대의 경제를 위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p. 27)

세계화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저자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일곱 시대로 뚜렷하게 구분지어 설정한다.

첫째는 구석기 시대로 인류가 아직도 수렵채집자로 살아가던 선사시대이다.

둘째는 신선기 시대로 인류는 이 시대에 처음으로 농업을 시작했다.

셋째는 기마 시대로 야생 말을 순치(길들이기)시켰고 원시문자가 개발되어 장거리 교역과 통신이 가능해졌다.

넷째는 고전 시대로 이 시기에 대규모 제국이 처음 생겨났다.

다섯째는 해양 시대로 제국들이 최초로 본국의 생태적 지역을 넘어서서 5대양으로 뻗어나갔다.

여섯째는 산업 시대로 대영제국이 선도하는 소수의 사회들이 산업 경제를 부흥시킨 시대이다.

일곱째는 디지털 시대로 온 세상이 디지털에 의해 즉시 연결되는 시대, 즉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이다.

위와 같은 시대구분과 간략한 특징들을 저자는 깔끔하게 하나의 표로 보여주기도 하는데 아주 정리가 잘 된 표였다.

인류의 체험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살펴볼 때, 대부분의 경제·인구·통계적 변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 변화는 지난 200년 동안 발생했는데, 이 정도의 시간은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존재해온 30만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잠깐 사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인 전 지구적 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은 최근 200년 동안 벌어진 대대적 변화들이 초기하급수적으로, 즉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p. 35)

'초기하급수적 성장을 보인 이 세가지 사례는 아주 극적인 것이다. 이 사례들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음을 상기시킨다. (p. 39)' 인류의 총인구수, 도시화비율, 1인당 전세계 생산량으로 살펴본 최근 200년간의 초초초기하급수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경제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의 역사는 곧 일련의 규모 확대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p. 40)' 그러므로 글로벌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세계화'의 시대로 역사를 정리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 앞의 유한한 날들을 영원한 기록으로 잇는 나 자신과의 대화

서른 다섯살의 젊은 소설가가 있다. 그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 라는 제목을 붙인 글을 일기처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 '설정' 이다.

아무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전적 에세이인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뒷표지에 쓰여있는 추천사에서 이다혜 작가의 '사고실험' 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던 독자에게 주는 유일한 힌트라면 힌트이다. 출판사의 포스팅 글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픽셔널 에세이 fictional essay. 논픽션은 아니지만 소설이라 볼 수 있고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책을 '픽셔널 에세이'로 칭하고 있었다. '서른 다섯, 젊은 소설가가 남긴 죽음과 삶의 이야기, 끝에 이르러서야 닿을 수 있었던 진정한 내면의 기록들'이란 표현은 사실 허구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가족은 어머니 한명 뿐인 외동아들인 '나'는 혼자 사는 소설가 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괴팍하다 싶은 시니컬한 성격의 나는 늘 자신의 자아와 대화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그런 '나'가 어느날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이전과 똑같은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내가 언제나 해왔던 일들을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 (p. 19)

원래 성격이 그러했기에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 유형이다. 이점은 나와 굉장히 흡사하다. 나도 어느날 갑자기 암진단을 받는다고 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렇게 되고나서야 진정 나만을 생각하며 조금은 욕심내서 남은 시간을 즐기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암진단을 시한부삶이라는 것을 좀 선망하는 타입이다.

시간은 돈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쓰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소비했을 때만 중요하다. 시간이든 돈이든 쓰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시간은 시간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교환할 때만 가치가 있다. 돈과 시간의 뚜렷하고 확고한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 잠재적으로 상당한 양의 시간을 부여받는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생득권 혹은 탄생 선물처럼 시간을 일시불로 받는다. 또 시간만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매분 매초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금도 아껴두었다가 쓸 수 없고 저축할 수도 없다. 물론 주어진 분량 이상으로 차지할 수도 없다. 쓰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으며 소유를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시간을 쓰고 있다. (p. 34)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는 한 사람의 화자가 내밀한 자신의 시한부 삶을 받아들이며 생각해봄직한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도 없고 주인공도 없고 그저 '생각'뿐인데 누가 이 글을 읽으며 소설인줄 알겠는가?! 더구나 그 생각 깊이가 좀 남다르다. 얇은 두께에 많지 않은 글밥인데도 한페이지한페이지 힘겹게 넘어간다. 그 무게감이 시한부 라는 설정 때문인지 다루고 있는 철학적 주제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진 않는다.

가족이란 개념은 정말 이상하다. 임의적인 혈연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도 없고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평생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 마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친구의 친구들 같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줄 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p. 61)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고, 이 또한 지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처럼 힘들지는 않다. 이제까지 내가 했던 최고의 대화는 나와의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p. 64) 내게 남은 시간이 한 줌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내가 다시는 이 사람들 얼굴을 볼 수 없고, 그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남길 기회가 없다면, 그동안의 인연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내가 가장 오래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였다. (p. 72)

'나' 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줄곧 고독을 원했기에 고독하게 살았고 그 고독을 즐겼다. 그러니 시한부 삶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자신과 대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거리감을 유지한채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고독을 원했다. '나' 의 인간관계는 이 한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 한 명의 좋은 친구는 백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그리고 평화로운 고독은 천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p. 75) ] '나' 에게는 한 명의 친구 도 없고 그저 평화로운 고독 뿐이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이 책이 하고 있는 '사고실험'은 일반적 캐릭터로 볼수 없어 보인다.

나의 건강이 섣부른 위로는 의도와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어 정당화하고 어떻게든 개입하려고 했다. 잔인하고 부당하고 까닭없는 나의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p. 11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억지로라도 이유를 찾아내어 정서적인 안정을 구하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중 가장 최악은, 분명 신의 부재가 가장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이 시기에 나에게 신을 설교하려는 사람들이다. (중략)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신이 아마도 나의 이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앞뒤가 맞는 말이며 어떻게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 해도, 그 신을 사랑하거나 믿거나 아는 일은 나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p. 112)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를 말하면서,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 신실하고 순수한 신앙만 있으면 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나는 바로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곧 이유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위한 이유다. 만약 필요해서 만든 이유에 지나지 않고 그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신앙이란 부조리와 무의미로 붕괴되는 타락과 후퇴의 순환일 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엇을, 그저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믿는다는 것은 희망이나 신실한 신앙의 표시가 아니라 절망의 증거일 뿐이다. (p. 116)

'나' 는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긴 하나 그렇기에 '나' 만의 시니컬한 철학적 논리가 내게는 잘 맞았다. 이 책이 허구적 소설형식 에세이이고 일종의 '사고실험'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그 실험이 어느정도 가능했다는 말이다. [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그래왔기에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나마도 최소한이길 바란다. (p. 185) ] 나에게 책속의 '나' 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한 가정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던져주는 '사고실험'은 내게 충분히 실험적이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인생이라는 조건과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만약 해답이라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의도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해답은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해답 찾기를 멈추었을 때 비로소 떠오른다. 인생의 해답은 어쩌면 해답이 아니라, 해답의 필요성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166)

만약 이 책이 허구 인줄 모르고 '나' 의 상황이 '소설적 설정'인줄 모르고 읽은 독자라면 젊은 소설가의 시한부 삶을 애도하며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읽고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이 책 어디에도 이 책이 소설이라는 안내가 없는 것은 아마 의도적으로 이 책을 진짜 어떤 소설가의 이야기로 읽히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드러냈어야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사고실험'이 더 제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산다면, 당신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죽을 수 있지만 아마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종종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든다. (중략) 우리가 하루하루를 온전하고 충실히 산다는 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07)

이 책속의 '나'에게 닥친 것처럼 갑자기 내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가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태어난 이상 내내 갖고 다니는 숙제같은 화두다. 그 화두가 시한부 삶으로 구체적으로 던져졌을때 글을 쓴다면 우리는 무엇을 쓰게 될까? 이 책은 그러한 '사고실험'을 아주 진지하고 철학적으로 고민해본 누군가의 내면의 기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 탐정의 눈으로 추적한 푸아로와 마플의 시대를 읽는 16가지 단서

'범죄의 여왕' 혹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애거서 크리스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다. 66권의 장편 소설과 14권의 단편집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흔히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왔고 실제로 2018년에는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역사상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다. (p. 7) 그런데 작가 애거서의 화려한 프로필보다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인간 애거서의 삶이었다. 참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굳건하게 견뎌내며 간호사와 약제사로 열심히 일앴던 여성, 정규학교 교육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독학으로 풍부한 지식을 쌓았고 평생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자신을 연마했던 성실한 사람,애거서 말이다. (p. 8)

저자에게 이 책은 코로나패데믹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영국사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코로나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다시 읽게된 애거서 크리스트의 소설에서 어릴 때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생긴 의문들을 풀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거서의 생애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쓴 작품을 읽다 보니 개인의 경험과 창작의 결과물 사이의 접점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원 사료와 2차 사료를 병렬해 살펴보는 것 같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p. 8)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새로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 그녀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 영국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트 전집과 자서전을 읽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16개의 주제로 담아보았다. (중략)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이 책의 의미를 찾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작은 노력이라는 점일 것이다. 애거서의 소설은 100년 동안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지만, 학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신기하리만치 애거서 작품들에 냉담했다. (p. 10)

저자는 어렸을 때 애거서 전집을 읽었다는데 이상하리만치 나는 애거서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 홈즈 시리즈는 다 읽었었고 루팡 시리즈도 몇 권 본 것 같은데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이름은 알았어도 그녀의 작품을 그 많다는 작품을 나는 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이상할 정도다;;; 작품을 읽은 것도 없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작품 내용을 전혀 모를지라도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새삼스레 불러일으켰다.

최근에 두툼한 역사책을 읽고 나서 그런지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영국 근현대사로 읽히는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여성 추리 소설가의 삶에 그가 그려낸 작품 속에 세계1,2차 대전을 전후한 영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애거서는 18세 때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작품은 단편 <아름다움의 집>이었고, 이후 장편에 도전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소설 <사막에 내리는 눈> 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작품을 모노실라바 라는 다소 생뚱맞은 필명으로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상심한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마침 이웃에 살던 유명한 소설가 이든 필포츠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둠의 소리>, <빨강 머리 레드 메인즈> 등 다트무어를 무대로 삼은 기괴하고 으스스한 소설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p. 20)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애거서가 정규학교교육과정을 받지 못하고 간호사등 이런저런 직업을 가지며 자수성가한 인물처럼 소개했지만 아니었다. 본문에서 저자가 알려주는 애거서의 삶은 나름 풍요로운 영국 중산층 가정이었다. 학교교육을 못받았다기 보다는 다닐만한 적절한 학교가 없었고 학교교육이 아니었어도 이런저런 충분한 예술사교육을 받았으며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이웃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만한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애거서는 바로 다른 장으로 전환했고 당시 유행하던 추리소설이 그것이었다.

애거서는 원래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국에서 추리소설은 '읽을 거리'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18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약800종의 주간지가 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려 240종에 달하는 잡지들이 다양한 형태의 '추리물'을 싣고 있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p. 21)

애거서 크리스티가 홈즈 시즈와 코난 도일과 뤼팽 시리즈의 모리스 르블랑 과 동시대 사람이었다니, 그때 추리소설이 그렇게 붐이었다는 것도 그 시리즈를 여전히 우리가 읽고 있다는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고, 뚱뚱하고, 달걀 모양의 머리에 거대한 콧수염을 기른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략) 어느 순간부터 푸아로는 스스로 나서서 셜록 홈스를 언급하고, 심지어 자신이 셜론 홈스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p. 25) 마플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결혼을 원하거나 심지어 로맨스를 꿈꾸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여성적 직관과 감정'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상황을 꿰뚫어 본다. (p. 29)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셜록 홈스 라면 애거서의 추리 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푸아로 와 마플 인가 보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인 사립탐정이고 마플은 이른바 노처녀 이다. 이 두 캐릭터는 함께 나오는 캐릭터 라기 보다는 애거서 가 쓴 작품 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탐정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코난 도일은 홈스 한명을 창조했다면 애거서는 두명 이었달까. 여하튼, 다른 무엇보다 푸아로의 외모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국신사적인 홈스와 너무너무 달랐다고 한다. 애거서 가 내세운 탐정 캐릭터는 기존 추리 소설들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무척 달랐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전간기를 '추리 소설의 황금기'로 보는데, 이 황금기를 이끌었떤 대표주자로 세 명의 여성 작가, 즉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 도러시 세이어스 를 꼽는다. 앨링엄은 캠피언이라는 탐정을 내세웠고, 세이어스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거서는 이미 푸아로와 마플 이라는 두 명의 대표선수를 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성 작가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곧 '셜록 홈스와 결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남성들에게서 셜록 홈스같은 완벽한 영웅상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p. 30) 이 시대의 추리물은 전쟁 후 피폐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환상을 주었다. (중략) 악인을 찾아 처벌하는 결말은 혼탁한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애거서 작품은 영국의 사법체계를 옹호한다. (p. 31)

애거서 크리스티는 세계1차대전, 세계2차대전을 모두 겪은 세대다. 그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야 했던 시절 속 추리소설은 그 이전 시대의 추리소설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거서의 작품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사립탐정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늘 경찰이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체제안정적인 결과로 독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고 한다. 심리스릴러적 추리소설을 읽으며 깔끔한 추론을 통한 카타르시스 를 주면서 권선징악적 엔딩이라... 그런데 B급 소설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은 작가가 여성이었기 때문인 것일까...

영국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집에 대한 집착이 또 있다. 자기들이 발 딛는 곳 어디에나 집부터 짓고 보는 독특한 습성이 그것이다. (중략) 이런 특성 때문에 영국은 대항해 시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p. 41)

전쟁이 끝나자 군대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 투입되었던 여성들은 모조리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p. 71) 그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여성 참정권이다. (p. 72)

애거서 처럼 단호하게 뛰어난 외모와 성적 매력을 전혀 별개의 카테고리로 취급하는 작가는 아주 드물다. (p. 79) 그렇다면 남성들은 어떠한가. 애거서 작품 속의 남성들은 단순히 여성의 외모에 현혹되어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에서 출발한다. (p. 80)

퍼블릭 스쿨은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본산이다. 그것의 핵심에는 지독하게도 배타적인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중략) 사립학교 출신들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합쳐 부르는 말)를 거쳐 영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핵심부로 진출했다. (p. 115)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정치, 군 수뇌부, 법률, 언론, 금융 등은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지배하는 분야로 굳건하게 남아있다. (중략) 이튼은 아직도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p. 117)

애거서의 삶과 작품 속 캐릭터들로 보는 당시의 영국사회 읽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소설 줄거리를 몰라도 저자가 알려주는 캐릭터적 특성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주제풀이였다. 그렇게 읽은 영국사회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 작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뒤에도 애거서는 '나는 여전히 작가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에 휩싸여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을 사랑하지도,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답을 한 적이 없다. (p. 130)

애거서는 부유했고 박학다식했고 활동범위도 넓었고 지적욕구도 높았다. 해외여행도 자주 한만큼 다양한 경험이 있었고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엄청난 다작을 써낸 작가였다. 그런데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후대의 문학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홈스시리즈만큼 대우해주지 않았다. 왜였을까...

영국은 아직도 U and Non-U (상류층과 비상류층)을 구별하는 '분명한 분별 기준'이 있는 나라다. 냅킨은 상류층의 용어이고, 중하류층은 냅킨을 서비엣이라고 부른다. 중하류층은 후식을 디저트나 스위트라고 부르지만, 상류층은 푸딩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 중상류층이 2~3인용 안락의자를 소파라고 부르는 데 비해 그 아래 계층은 세티 혹은 카우치라고 부른다. (p. 199)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쳤고, 이성을 앞세운 근대성이 완성되었다고 여겨진 시대, 도대체 왜 그렇게 미신적인 내용이 많단 말인가. (p. 203)

영국에 계층간 사다리는 없다. 막강한 선진국이고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대국이지만 영국은 여전히 귀족문화가 지배적인 나라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이고 과학과 계몽주의를 일으킨 나라이지만 마녀, 마술, 심령술, 관상 등 다양한 미신이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연스레 존재하고 있는 나라다. 애거서 시대의 영국은 현재의 영국을 다시보게 한다.

애거서의 소설은 주로 20세기에 집필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19세기 말 제국의 영광과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20세기 후반 그 소설에 열광했던 시간은 영제국의 헤게모니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애거서의 콘텐츠는 끊임없아 재생산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제국주의를 문화적 현상으로 보자면 '식민'과 '탈식민'의 시간적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정치적 종속이 아니라 '식민 세력이 타자의 몸과 공간에 스스로를 새겨 넣는 순간'인 것이다. 애거서가 소설 속에 녹여 넣은 '영원한 영국'을 이제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p. 244)

다분히 영국제국주의적 시각이 들어간 애거서의 작품들을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홈스 캐릭터처럼 국가의 대표 문학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은근히 드라마로 영화로 새로운 번역으로 유통시키는 것엔 여전한 제국주의적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일까? 문학은 가볍게 소비하기 쉬운 분야인만큼 무의식중에 내재화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학과 문화를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국은 참 여전히 늘 흥미로운 나라인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 순간, 이런 클래식 - 바이올리니스트의 인생 플레이리스트
김수연 지음 / 가디언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의 모든 순간'과 어울리는 클래식을 찾는다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껴왔던 클래식 리스트를 당신에게만 알려 드립니다.

몇달 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이자 대중강연자인 저자의 첫 책 <Fun한 클래식 이야기>를 읽었었다.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어렵게 느껴졌던 클래식에 쉽게 다가가고 음악적 상식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책의 반응이 꽤 좋았었나 보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두번째 책이 나왔다. 어쩌다보니 그 두번째 책을 내가 또 연이어 읽게 됐다. ^^

저자는 오랜 세월 클래식에 몸담아 온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방송이나 강연장등 다양한 매체에서 클래식을 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인지 교수님 처럼 어렵지 않고 전문가 처럼 티내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언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클래식을 이야기를 짧은 에세이글과 함께 소박하게 전달한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하듯이 '살다 보면 음악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어떤 순간 들었던 음악이기에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 어떤 순간을 문득 떠올리게 하는 것이 음악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저 기분에 따라 알맞은 음악을 찾기도 하고 거리나 카페에서 우연찮게 들린 음악에 위로받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하루종일 음악을 단 한번도 듣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을까?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공간에서 음악은 매일매일 일상과 함께 해왔다. 하지만 좀더 내게 맞는 음악, 내가 찾고 싶은 음악, 그런 음악이 필요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들으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연주곡을 틀어놓고 이런저런 일을 하곤 한다. 기왕이면 클랙식 음악이 왠지 더 고급스러운 듯 느껴지지만 딱히 아는 것도 없고 유명한 작곡가들의 연주곡을 들어봐도 그닥 감흥이 없어서 그냥그냥 유투브에서 이런저런 검색어로 얻어걸린 음악들을 틀어놓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책에는 유투브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있다. 매 곡 마다 제목 옆에 위치한 QR코드를 스캔하면 저자가 직접 고른 유투브 연주영상으로 연결된다. 같은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전문가가 골라준 영상이니 그야말로 믿고 들을 수 있는 영상인 셈이다. 그렇게 저자의 곡 소개를 읽고 연주 영상을 틀어보기도 하고 곡에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를 읽고 연주 영상을 틀어 보기도 하면서 생각보다 에너지 넘치게 책장을 넘기게 됐다. 다음엔 또 어떤 곡이 나올까 하면서.

일단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다 읽긴 했는데 내용이 중요한 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말로 클래식 리스트로서 도움될 책이었다. 그래서 다 읽었어도 가끔씩 문득문득 책장을 들춰보며 QR코드를 스캔하게 될 것 같다. 저자가 그 음악을 들으며 느낀 것과 내게 느껴지는 것은 같을 수 없다. 저자가 아무리 강력하게 추천했어도 나에겐 별로 일 수 있고 저자가 스치듯 소개했는데 나에겐 맞춤한 곡일 수도 있다. 그렇게 가끔씩 책 속의 QR코드를 스캔하다 보면 나만의 클래식 리스트가 만들어지려나 ㅎㅎ

오늘은 비가 오고 흐린 날이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알게 된 '프레데리크 쇼팽 : 왈츠 작품번호 34번 '화려한 대활츠' 중 3번 '고양이 왈츠' (p. 54) 가 마음에 들었다. 새끼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 잘못 올라가 건반이 눌려 그 소리에 놀라며 당황하는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라는데 사실 고양이가 놀라면 바로 팔짝 뛰어오르기 때문에 이런 곡이 나올 순 없다. 하지만 고양이 발로 눌러지는 건반을 상상하며 들으니 재미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골라 들을 수 있는 96개의 클래식 리스트를 얻은 것 같고, 그 자리에서 바로 QR코드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손쉬운 즐거움이 클래식을 좀더 가깝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런 순간? 이런 클래식!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 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손원호 지음 / 부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당신이 몰랐던 아랍, 아랍인 이야기를 만나 보시죠.

'아랍'은 우리에게 멀게 느껴지는 단어다. 어떻게 보면 '이슬람' 보다도 더 낯선 단어 같다. 서구식 문명과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중앙아시아라던가 아랍지역 혹은 이슬람지역으로 통칭되는 곳들은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는 비행길의 중간지일뿐 도착지인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역사책을 좀 읽다보니 이 지역들에 대해 무수한 질문과 관심이 생겨났다. 이 책은 아랍의 역사를 다룬 책은 아니고 아랍의 '현재'를 알려주는 책이지만, 일단 지금 모습 그대로의 현실감 현재감 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좀더 친근한 접근 아니겠는가?!

저자는 아마도 아랍어를 전공한 것 같다. 이집트에서의 어학연수와 한국석유공사에서의 이라크 생활 등 아랍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궁금해졌고 지금은 두바이에서 아랍의 역사에 대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현지어로 소통하며 장시간을 함께 지내온 만큼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인들의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친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이야기는 크게 5개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집트,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랍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고 공부하자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막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뉴스에서 접하는 단편적인 뉴스만으로 아랍 세계를 단정짓고 이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지리적으로 광대할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깊이로 인해 아랍 세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아랍인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이 만들어 온 매혹적인 역사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여행하며 아랍 세계에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란다. (p. 9 -프롤로그 中-)

저자는 아랍지역에서의 정서에 진심으로 매혹된 것 같다. '술도 없이 남자들이 밤새도록 수다를 떠는 풍경은 언제 봐도 낯설다. (p. 18)' 고 느꼈던 저자가 고대이집트에서의 술 문화가 이어진 이집트 맥주회사의 '사카라 맥주'를 즐겨 마시면서 표면적으로만 알던 아랍문화에 풍덩 빠져드는 과정은 사이사이 등장하는 역사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나또한 그 기분에 동화되게 만드는 진정성이 전달됐다.

아랍의 문화와 역사를 알게 될수록 유럽세계와 기독교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72명의 유대인 번역자가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일은 유명하다. 이렇게 번역된 구약 성경을 70인 역이라고 부르는데 유럽어판 구약 성경들은 모두 이것을 원전으로 삼고 있다. (p. 47) 예수의 가족이 석 달간 머물렀다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성 세르기우스 바쿠스 교회는 한국인 순례객들 사이에서 '예수 피난 교회'라고도 불린다. (p. 56)

이집트에 남아있는 기독교인들과 그 문화의 소수성과 예외성이 우리네 인식 속에서 아랍인들의 소수성 및 예외성과 다를바 없는 것 같아서 상식아닌상식이 고착화되기 전에 좀더 제대로 잘 알아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기독교지역이었다고는 하나 이슬람화 된 이집트 외에 처음부터 이슬람문화권이었던 아랍지역에서의 이야기들은 더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많았다.

아랍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극도의 차별은 오히려 7세기 이슬람 교리를 통해 개선되었다. (p. 80) 지금도 예멘 여성들은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역사를 통해 만들어 온 어두운 문화적 프레임이다. (p. 82) 많은 아랍인이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켜 회의의 방향을 본인 위주로 끌어가려고 고집한다. 사실만 근거로 해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p. 97) 아랍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과 음성, 몸짓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아랍에서 수사학인 발라가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p. 101)

아랍, 이슬람, 코란 하면 남녀차별 문제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코란에서 오히려 남녀평등을 이야기 했음에도 예멘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극도의 차별적 억압문화가 바뀌지 않고 있고 그런 모습과 상반되는 것 같은 열정적인 아랍인의 표현방법은 체험해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 또한 '아랍인과 가까워지는 법,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해결의 열쇠는 있다. 이성을 총동원하여 전략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그들과 얼마나 감정적인 유대감을 조성하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 이것이 키다. (p. 105)' 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마도 이 열쇠를 획득했기에 그토록 깊은 애정을 품고 아랍을 공부하며 살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인 역사 이야기가 나올때면 더욱 눈길이 확 쏠리곤 했는데

무함마드가 신의 특별한 예언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알라의 예증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이야기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연옥-천국 여행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계 이슬람·아랍 언어학자 미겔 아신 팔라시오스는 무함마드의 승천이 단체의 <신곡> 구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p. 141) 요르단 왕가는 아랍 국가 중 유일하게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이 다르시는 국가로 남아 있다. (p. 162)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교를 시아 이슬람으로 공포한 페르시아 왕조면서 현재 이란이 시아 종주국이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p. 221)

무함마드의 '하룻밤의 기적?!' 이나 왕조들의 이야같은 신선한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지금의 아랍국가들의 형성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무척 유용했다. '현재 중동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사람들은 자꾸 종교와 엮으려고 하는데... 이건 유대-아랍 민족 간의 영토 분쟁이야. 종교 싸움이 아니라고. (p. 149)' 라는 현지인의 말은 지금 우리가 얼마나 그들을 모르는가를 가장 직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아랍과 중동 지역들의 갈등을 종교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은 민족간 영토분쟁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서구열강들이 뿔려놓은 것이었다.

현재 중동 국가들 대부분의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직선 안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정해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국가'란 개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인해 같은 민족, 같은 부족이 다른 국가로 갈라졌다. 특히 쿠르드민족의 경우, 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민족과 문화가 전혀 다른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네 국가에 찢어져 살게 되면서 세계 최대의 유랑 민족이 되고 말았다. (p. 160) 쿠르드족은 아랍인이 아니라 언어, 문화 자체가 아예 다른 민족이었다. (p. 222)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종파와 민족들로 구성된 모자이크 국가 이라크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p. 225)

'국가'개념이 없이 민족과 부족단위로 살던 지역에 서구 열강이 도입한 국가라는 틀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문화와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쿠르드족과 이라크 라는 나라가 왜 지금까지 그토록 서로 갈등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이 무척 안타깝게 다가왔다. 더구나 지금의 그 처참함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그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금할길 없어진다.

알만수르가 2대 칼리파가 되면서 이슬람 세계에는 본격적인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자 갈 데가 없어진 세속 그리스 및 헬레니즘 학문이 이슬람 세계의 문을 두드렸다. (p. 271) 왕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다재다능한 천재 학자들은 경제적 장애물 없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중략) 17세기 부터는 이런 사람을 폴리매스 라고 불렀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학자라면 으레 폴리매스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중세 시대 바그다드에는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폴리매스 학자들이 넘쳐났다. (p. 274)

이라크에 비해서 아랍에미리트 는 무척 현명한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였다.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각 토후국에는 통치자가 존재하는데 한마디로 해당 토후국의 '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p. 287) 정작 이들에게는 선조들을 기억할 만한 유형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에미리트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고난의 삶을 통한 인내와 끈기'라는 정서적 유산 뿐이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를 위해 두바이의 통치자 세이크 무함마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무형의 자산을 형상화해 현대 건축물에 반영하는 것이다. (p. 308)

지도를 보면 그닥 크지 않은 땅덩어리를 지녔고 역사적으로 다른 아랍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랍에미리트가 연방국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쪼개지고 갈라진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런 연방체제를 잘 형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따지고 보면 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연방국가이거나 연방국가가 아닐지라도 각 주나 도시들이 강한 권한을 지닌 체제들이다. 유럽의 역사를 읽을 때도 느꼈던 건데, 현대를 국가사회라기 보다는 부족사회로 이해할 때 더 많은 것들이 파악되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사적인 시간을 즉흥적으로 또 기꺼이 할애하는 유연성이 있다. (p. 319) 한국인들은 대부분 크로노스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p. 321) 반면 카이로스는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중요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질적' 시간이다. 우리가 걸프 아랍 지역에서 만나는 아랍인들은 이러한 주관적인 시간에 익숙하다. 이들의 시간 관념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곗바늘에 얽매이지 않는다. (p. 322)

아랍과 우리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건 '시간' 개념 일 것 같다. 저자는 익숙해져서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시간개념을 맞닥뜨렸을때 무척 당황스러울 것 같다. ^^;;; 여하튼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인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친근하고 생각보다 거부감없이 그들의 문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의 현재가 어떠한지 들여다보는 시간은 무척 의미있었다. 저자만큼 아랍에 황홀경을 느끼진 못하겠지만 저자가 18년 동안 5개국의 아랍문화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이 부러워지는 것을 보면 아랍엔 분명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긴 있는 것 같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