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 앞의 유한한 날들을 영원한 기록으로 잇는 나 자신과의 대화

서른 다섯살의 젊은 소설가가 있다. 그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 라는 제목을 붙인 글을 일기처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 '설정' 이다.

아무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전적 에세이인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뒷표지에 쓰여있는 추천사에서 이다혜 작가의 '사고실험' 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던 독자에게 주는 유일한 힌트라면 힌트이다. 출판사의 포스팅 글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픽셔널 에세이 fictional essay. 논픽션은 아니지만 소설이라 볼 수 있고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제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책을 '픽셔널 에세이'로 칭하고 있었다. '서른 다섯, 젊은 소설가가 남긴 죽음과 삶의 이야기, 끝에 이르러서야 닿을 수 있었던 진정한 내면의 기록들'이란 표현은 사실 허구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가족은 어머니 한명 뿐인 외동아들인 '나'는 혼자 사는 소설가 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괴팍하다 싶은 시니컬한 성격의 나는 늘 자신의 자아와 대화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그런 '나'가 어느날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이전과 똑같은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내가 언제나 해왔던 일들을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 (p. 19)

원래 성격이 그러했기에 갑자기 악성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는 유형이다. 이점은 나와 굉장히 흡사하다. 나도 어느날 갑자기 암진단을 받는다고 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렇게 되고나서야 진정 나만을 생각하며 조금은 욕심내서 남은 시간을 즐기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암진단을 시한부삶이라는 것을 좀 선망하는 타입이다.

시간은 돈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쓰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소비했을 때만 중요하다. 시간이든 돈이든 쓰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시간은 시간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교환할 때만 가치가 있다. 돈과 시간의 뚜렷하고 확고한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 잠재적으로 상당한 양의 시간을 부여받는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생득권 혹은 탄생 선물처럼 시간을 일시불로 받는다. 또 시간만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매분 매초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금도 아껴두었다가 쓸 수 없고 저축할 수도 없다. 물론 주어진 분량 이상으로 차지할 수도 없다. 쓰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으며 소유를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시간을 쓰고 있다. (p. 34)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는 한 사람의 화자가 내밀한 자신의 시한부 삶을 받아들이며 생각해봄직한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도 없고 주인공도 없고 그저 '생각'뿐인데 누가 이 글을 읽으며 소설인줄 알겠는가?! 더구나 그 생각 깊이가 좀 남다르다. 얇은 두께에 많지 않은 글밥인데도 한페이지한페이지 힘겹게 넘어간다. 그 무게감이 시한부 라는 설정 때문인지 다루고 있는 철학적 주제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진 않는다.

가족이란 개념은 정말 이상하다. 임의적인 혈연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도 없고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평생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 마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친구의 친구들 같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줄 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p. 61)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고, 이 또한 지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처럼 힘들지는 않다. 이제까지 내가 했던 최고의 대화는 나와의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p. 64) 내게 남은 시간이 한 줌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내가 다시는 이 사람들 얼굴을 볼 수 없고, 그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남길 기회가 없다면, 그동안의 인연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내가 가장 오래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였다. (p. 72)

'나' 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줄곧 고독을 원했기에 고독하게 살았고 그 고독을 즐겼다. 그러니 시한부 삶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자신과 대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거리감을 유지한채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고독을 원했다. '나' 의 인간관계는 이 한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 한 명의 좋은 친구는 백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그리고 평화로운 고독은 천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p. 75) ] '나' 에게는 한 명의 친구 도 없고 그저 평화로운 고독 뿐이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이 책이 하고 있는 '사고실험'은 일반적 캐릭터로 볼수 없어 보인다.

나의 건강이 섣부른 위로는 의도와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어 정당화하고 어떻게든 개입하려고 했다. 잔인하고 부당하고 까닭없는 나의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p. 11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억지로라도 이유를 찾아내어 정서적인 안정을 구하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중 가장 최악은, 분명 신의 부재가 가장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이 시기에 나에게 신을 설교하려는 사람들이다. (중략)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신이 아마도 나의 이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앞뒤가 맞는 말이며 어떻게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 해도, 그 신을 사랑하거나 믿거나 아는 일은 나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p. 112)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를 말하면서,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 신실하고 순수한 신앙만 있으면 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나는 바로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곧 이유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위한 이유다. 만약 필요해서 만든 이유에 지나지 않고 그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신앙이란 부조리와 무의미로 붕괴되는 타락과 후퇴의 순환일 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엇을, 그저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믿는다는 것은 희망이나 신실한 신앙의 표시가 아니라 절망의 증거일 뿐이다. (p. 116)

'나' 는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긴 하나 그렇기에 '나' 만의 시니컬한 철학적 논리가 내게는 잘 맞았다. 이 책이 허구적 소설형식 에세이이고 일종의 '사고실험'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그 실험이 어느정도 가능했다는 말이다. [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그래왔기에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나마도 최소한이길 바란다. (p. 185) ] 나에게 책속의 '나' 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한 가정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던져주는 '사고실험'은 내게 충분히 실험적이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인생이라는 조건과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만약 해답이라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의도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해답은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해답 찾기를 멈추었을 때 비로소 떠오른다. 인생의 해답은 어쩌면 해답이 아니라, 해답의 필요성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166)

만약 이 책이 허구 인줄 모르고 '나' 의 상황이 '소설적 설정'인줄 모르고 읽은 독자라면 젊은 소설가의 시한부 삶을 애도하며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읽고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이 책 어디에도 이 책이 소설이라는 안내가 없는 것은 아마 의도적으로 이 책을 진짜 어떤 소설가의 이야기로 읽히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드러냈어야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사고실험'이 더 제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산다면, 당신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죽을 수 있지만 아마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종종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든다. (중략) 우리가 하루하루를 온전하고 충실히 산다는 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07)

이 책속의 '나'에게 닥친 것처럼 갑자기 내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가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가? 오늘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까?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태어난 이상 내내 갖고 다니는 숙제같은 화두다. 그 화두가 시한부 삶으로 구체적으로 던져졌을때 글을 쓴다면 우리는 무엇을 쓰게 될까? 이 책은 그러한 '사고실험'을 아주 진지하고 철학적으로 고민해본 누군가의 내면의 기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