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서를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작년에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3>을 읽고나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중국의 변두리 역사(오아시스 , 신장 지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아있다. <중화명승> 이라는 제목을 봤을때 중국엔 워낙 유명한 곳이 많으니 그 명소들을 소개한 책이겠거니 싶으면서도 [소소의 책]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깊이가 좀 다를 것이다 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였다.
이 책은 중국소설을 전공하거나 연구하고 있는 학회연구자 21명의 글을 모은 책이다. 중국의 각 지역에 얽힌 사연을 '명승'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낸 것인데 문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필력이 좋으셨다. 저자들이 알려주는 장소들은 하나같이 새롭고 멋졌다.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지만 여행할 수 있는 시기라 해도 중국여행엔 그닥 관심없던 내게 가보고 싶은 중국의 곳곳을 리스트업 해두게 만들정도로 이 책속의 중국은 달랐다.
하얼빈에서 이효석의 거리를 떠올린 글에서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라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어로 외쳐야 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런 시대에서 구라파를 동경한 '모던 보이'로서의 이효석을 알게 해주는 첫 글부터 포옥 빠져들었다.
거대한 자금성이 아니라 그 곁의 습례정이라는 작은 전각에서의 일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치욕의 역사로 알려진 '삼궤구고두례'가 치욕이 아니었음을 그 인사법보다 정말 치욕으로 생각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는 내용처럼 우리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지만,
칭다오 맥주가 독일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나 난징이라는 곳이 명당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역설, 원래 만주족 여인들의 옷이었던 치파오가 상하이에서 사교의상으로 변신하고, 마르코폴로가 방문했던 항저우에 3,000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거나, 토루를 만들어 살던 변방의 '객가'족이 어떻게 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게 된건지 등등 중국 자체의 역사적인 이야기들도 무척 재미있었다.
오래전 역사들보다 근대의 이야기들이 많아 더 가깝게 읽혀지기도 했는데, 신채호가 체포된 지룽항 근처 지우펀에 '조선루'와 같은 조석유곽이 어떤 착취를 벌였었는지, 광둥의 비혼주의자 '자소녀' 집단이나 마카오에서의 김대건 신부의 삶,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신해혁명, 북벌전쟁, 국공합작 같은 중요한 사건마다 우한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 소림사 승려들의 사탑인 '탑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등등은 소설과 영화를 넘나들며 서술되는 내용들이 재미를 더했다.
고대역사 이야기들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었는데, 북위왕조때 대대적인 석굴이 만들어졌던 이유, 진시황의 진나라가 천대받던 이민족인 유목 민족 계통이라는 것이나 진시황이 나라를 점령할때마다 그곳의 궁궐을 그대로 복제해 함양에 똑같이 지었다는 것, 당나라 공주가 티베트의 여신이 되었던 문성공주 이야기나 둔황의 장경동 문헌이 유출된 과정등 모든 이야기들이 다 흥미롭고 새로웠다.
대부분 가슴아픈 역사 이야기이고 대부분 유명 관광지로서의 명승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서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때로는 역사로 때로는 문학으로 때로는 여행기로 때로는 에세이로 이 책에 실린 21개의 글을 모두 읽고 나면 '그곳에 관해 쓰다 보니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가지 못하는 그곳이 머리에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느낌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p. 8)' 라는 [서문]속 문장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중화' 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나 '명승'이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중국 곳곳에 깃든 이 사연들을 읽어보라, 나만의 명승이 분명 찾아질 것이다.
ps. 나는 중국다운 중국 보다 중국아닌 중국을 느낄 수 있는 '하얼빈의 성 소피아 성당' 과 '칭다오 팔대관' 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