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읽는 시간
이유진 지음 / 오티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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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가가된 최초의 한국인 정신과의사,

천 번의 죽음과 천 번의 삶을 기록하다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당신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삶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책을 종종 읽는다. 인간은 모두 필멸의 존재인데 그것을 잊고 불멸을 원하면 파멸하고 그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면 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나이가 들면서 준비하고 삶에 대한 기본 자세로 장착할 때 생은 더 의미있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이다. 죽음을 관조한 철학가의 책부터 호스피스 병동의 이야기나 죽음을 처리하는 사람의 이야기등 죽음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읽어봤는데 '정신종양학'이라는 단어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죽은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이 책은 서른네 가지의 각기 다른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부분은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몇몇은 한국과 미국의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이며, 나머지 조금은 나의 이야기다. (p. 6) 조금 덜 고통스러운 삶과 조금 덜 두려운 죽음은 어떻게 준비되는 것인지 생각해보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고, 한줄을 읽더라도 건조한 지식보다는 촉촉한 온기가 전해지기를 바랐다. (p. 7)

저자는 한국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되는 모든 수련을 마쳤으나 정신종양학 전문의가 되기 위해 미국에 가서 다시 수련과정을 받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세부 전문의가 되었다. '꿈이 분명하다면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금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기에 마음이 급했다. (중략) 그래도 해야만 했다. 아니, 하고 싶었다. (p. 19)' 한번도 하기 힘든 과정을 각기 다른 나라에서 두번을 수련한 정신과 의사이니만큼 어렵고 힘든 과정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죽어가는 과정도 삶의 일부다. 그러니 죽어가는 과정도 살 만해야 한다. (p. 24)

경험이 없었던 만큼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나 또는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을 때, '아무 도움도 없이 집으로 돌려보내진 환자와 가족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p. 24)' 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며 이것이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존재 이유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가 시작되면 환자를 포기하는 것이고,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고, 환자가 더 빨리 사망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p. 24)' 저자가 말한 그런 오해를 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해서 죽은 것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과정이 살 만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여태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다. 이 생각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잘못 이해한건가 의아했다. 두리번거리며 옆자리에 앉은 다른 의사들의 반응을 둘러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감을 표하기만 할 뿐 누구도 나처럼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모두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담담한 모습이었기에 금세 민망해졌다. (p. 49)

저자가 수련받던 지도교수 중 한 사람이 환자들에 대한 세미나를 하던 중 자신이 오래전부터 조울증을 앓고 있으며 증상이 심각하여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고 그때문에 정신과에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말하는 모습과 주변반응을 보고 저자는 무척 놀랐었다고 말한다. 독자로서 읽는 나도 놀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니 외국 의사들의 에세이에서는 이런 고백이 심심찮게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폴라와의 여행>이라는 책처럼 치료자는 완벽하지 않았다. 의사도 사람이라는 것,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의 생각들은 환자가 하기 어려운 생각들이 아닐까. 하지만 정신과 의사들 중에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치료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매일같이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건강하게 생각하며 지내는 것이 쉬울리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에 대한 질문을 받는 우리는 꿈꾸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신의 꿈을 생각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과거 어린이들의 장래희망은 부모들이 대신 채워놓는 일이 흔했다. (중략) 아무것도 적어내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 하는 걱정을 듣기도 했다. (p. 67) 꿈이 없는 이들을 향해 혀를 차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삶에서 꿈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되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뒤에 미국 의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실현된 꿈은 다시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 그토록 꿈꿔왔던 일이지만 막상 이루어진 뒤에는 달려갈 목표를 잃은 것처럼 허무해졌다. 꿈이 없는 삶이 불편했고 허전했다. 안주하는 내가 누군가의 눈에는 게을러 보일까 봐 다시 무언가를 꿈꿔야 하나 조바심이 났다. (p. 70)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꿈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는다. 돌잡이 상에서 미래의 직업을 고르는 것부터가 어쩌면 그 질문의 시작인것도 같다. 꿈은 일단 커야 하고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꿈을 이룬 저자는 꿈을 이루고 나서 또다시 새로운 꿈을 이루고 나서 계속 꿈을 현실화하는 삶을 살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렇게 삶의 의미가 자리 잡았다. (p. 70)' 라고 말한다. 항상 거창한 꿈을 장래희망란에 기재하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현실적인 선택이 코앞에 닥쳤을때 우리 아이들의 꿈은 어떤 의미가 되어 있을까?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능동적으로 자신이 배울 과목을 선택해야 하고 모두가 다 현실적인 꿈을 가진것처럼 진행되는 현재의 교육과정에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능동적인 아이들보다는 수동적인 아이들이 많다. 꿈이 있는 아이보다는 꿈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 그렇게 고등학교때부터 없는 꿈을 만들어내느라 지쳐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꼭 꿈이 있어야 하냐고. 꿈이 없어도 그냥 좀 삶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곳이 학교일 수는 없느냐고. '꿈이 손가락 마디만 한 비좁은 칸에 장래희망을 적는 것이라면, 의미는 커다란 종이 한 장에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여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넉넉하게 적어보는 것이다. (p. 72)' 라는 저자의 문장을 읽으며 못내 씁쓸해지는 이 현실이 너무... 슬펐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없는 이들은 노화가 빨리 진행되었으며 기억력도 더 젊은 나이에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고 신체 건강도 좋지 않았으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했고 결과적으로 수명도 짧았다.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역치도 높았다. 이에 반해 외로운 사람들은 통증도 더 쉽게 느꼈고 더 오래 아파했다. (p. 89)

죽을 사람이건 살 사람이건 살아있는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관계'였다.

대부분의 병원과 의사들은 이 표준 치료에 따라 진료 계획을 세우고 환자를 돕는다. 그러나 고통 완화의 측면에서는 표준이라고 할 만한 치료 방식이 없다. 고통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p. 122)

차라리 어떤 정확한 병명을 가진 질병에 대한 처방전은 '표준 치료'에 따라 똑같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다르다. 같은 질병을 가진 환자라도 죽음의 시한은 다르며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의 심리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르므로. 암이라는 질병이 종양이라는 질병이 왜 '정신'에도 확장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것도 같았다.

미국에서의 존엄사, 안락사는 한국에서의 존엄사, 안락사와 그 개념이 매우 다르다. 한국에서 존엄사는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뜻하며, 미국에서 말하는 좋은 죽음에 해당한다. 여기서 좋은 죽음이란 연명 의료 중단 이외에도 VSED, 즉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음식과 물을 중단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것은 미국 전역에서 좋은 죽음의 한 형태로 인식되며 윤리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한국의 안락사는 미국에서의 존엄사와 그 개념이 같다. 존엄사는 병으로 인해 여명이 6개월 이내로 예상되는 환자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로부터 자발적으로 삶을 중단시킬 수 있는 약을 처방받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와 환경에서 스스로 약을 입으로 가져가 삼키는 것이다. 2021년 7월 현재 미국에서 존엄사가 합법화된 곳은 50개 주 중 10개 주와 미국 중앙정부가 위치한 워싱턴DC이며 점점 더 많은 주들이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는 추세다. 유럽 국가 중에서 스위스가 오리건보다 먼저 존엄사를 허용하였고 현재는 독일 역시 존엄사를 허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며 행해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안락사의 뜻은 타인이 정맥 주사를 통해 나에게 약을 주입하는 것이다. (중략) 안락사가 합법인 주는 미국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p. 158 ~159 中 발췌)

시한부 삶을 진단받은 환자에게 한국에서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국에서 존엄사는 불법이고 안락사는 의식이 없을 때 환자의 가족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 미국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죽음이나 존엄사가 그 방법이다. 타인에 의한 안락사는 미국에선 오히려 불법이다. 살날이 몇개월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은 날을 병원에서 보내느냐 가족의 곁에서 보내느냐 만 선택할 수 있는 경우 죽음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고통이다. 하지만 내가 원할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의 의지' 적 면에서 '삶의 질'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 인생을 통제하고 조절하여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인식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죽음이 주는 무기력감을 극복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멈추기로 결정하는 것, 존엄사는 바로 이런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다. (p. 166)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결국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후회없이 살다가 언제일지 모를 그 끝을 끌어안아야 하는 운명이다. (p. 185)

죽음을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삶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할 것이다. 죽음 그 자체보다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삶을 우리는 더 두려워해야 한다. (p. 200)

'크지 않은 통증이라도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훨씬 더 큰 고통이 찾아온다. (p. 234)' 시한부 삶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주고 약을 주면 바로 먹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끝나지 않은 고통에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하고 질낮은 삶을 꾸역꾸역 영위하는 사람과 자신이 죽을 시간과 환경을 정할 수 있는 약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끝없는 통증으로 무기력하게 죽음에 내몰리는 것과 좀더 참아보고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것 중 무엇이 더 인간다운 삶이고 죽음일까?

내가 만난 정신과 의사가 내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좌절하지 말고 나와 합이 더 잘 맞는 의사를 다시 찾아보길 권한다. 소문난 명의라 할지라도 나의 어려움을 들여다보지 못할 수 있다. 이름난 의사보다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의상게 도움받는 것이, 똑같은 약을 처방받아도 효과가 더 좋다. 위약효과는 실제 약의 효과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p. 243)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조언이 아니라 아픔을 공감해주는 마음과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존재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터널 바깥에서 이래라저래라 소리치기보다는 터널 안으로 들어가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것이 낫다. 그게 안된다면 터널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존재감을 묵직하게 전달해주는 것도 좋다. (p. 259)' 정신과 의사가 모두 저자와 같은 태도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상담보다 처방에 집중한다. 따라서 환자의 넋두리를 들어줄 시간보다는 정확한 증상을 듣기를 원한다. 자신에게 맞는 또다른 정신과의사를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런 에너지가 없지 않을까? 크게 결심하고 처음 찾아간 정신과의사에게서 따뜻한 눈길대신 20분 땡 하면 나가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우울증의 많은 증상들이 약물 치료를 통해서 나아질 수 있지만 약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증상이 있다. 첫 번째는 외로움이고, 두 번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다. 외로움은 '연결'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누군가와의 진실한 연결을 통해서 외로움을 이겨낸다. (중략) 좋은 삶 없이는 좋은 죽음도 없다. (p. 323) 현실에서 더 이상 어떤 삶의 의미도 찾기 어려울 때,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길 바란다. 내가 살아낸 시간들이 때로는 현재의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p. 327)

결국 질병보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이었다. 아픈 사람의 병에 집중하기 보다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죽을 날이 길던 짧던 살아있는 시간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저자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삶을 더 사랑하자. (p. 332)' 라고 말한다. 내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그에 대한 공포감이 별로 없는 것은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삶을 더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죽음을 공포스럽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읽어나가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므로 어차피 읽어야 한다면 좀더 잘 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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