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 내 마음의 빛을 찾아주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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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빛을 찾아주는 인생의 문장들

가까운 지인이 '책 읽어주는 남자'의 소식을 받아보는 데 가끔 내게도 그가 간추린 문장들을 전해주곤 했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라는 작가의 책까지 읽게 됐었는데 가려뽑은 문장들과 느낌들을 모은 그 에세이는 이모저모 예쁜 책이라 선물하기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다 읽은 후 선물했다. ㅎㅎ)

나는 개인적으로 맥락이나 과정을 중요시여기는 편이라 흐름에 대한 정보 없이 부분적인 문장만 읽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작가의 전작인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에서는 아는 책들도 종종 나오고 감상보다는 인용문장들에 초점을 두고 읽으니 soso하게 읽었더랬다. 하지만 두번째는 무리였나 보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많은 사람들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저자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며 그 작품이 자신에게 건네는 느낌을 중요시 여긴다. 그 작품들이 마치 작가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그 작품들은 작가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그 순간과 그 의미들에 대한 감상을 모은 것이 이 에세이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이다.

그러나 책을 온전히 읽지 않고 그림을 제대로 보지 않고 남의 감상만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내것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감상은 그저 그 개인의 감상일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나만의 작품이 될순 없는게 아닐까... 나는 본래의 작품을 모른채 남의 감상만 읽는 것이 적응되지 않고, 게다가 그 감상이 위로와 힐링으로 점철되는 오글거림이 가득한 문장들일때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임을 다시금 느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이 시대에, 소설 한권 온전히 다 읽어내는 것이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이 시대에, 누군가 좋은 문장을 골라주고 소개해주는 것을 읽는 게 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생각거리를 느낄 거리를 전해주는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저자의 전작 처럼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권해주기 좋은 책이다. 누가 알겠는가, 저자가 읽은 책 속에서 저자에게 꽃이 되어 남은 문장들이 그 문장들만으로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을 부르고 꽃이되는 문장들이 될수 있을런지도. (그래서 나는 이번 책도 기꺼이 선물로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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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책세상 세계문학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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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젊은 목소리로 말해지는 가혹한 어른들의 삶이자 세계의 이야기다. 지금 읽어도 조금도 감각이 낡게 느껴지지 않으며, 이번 번역은 요즘 나온 젊은 작가의 신작 소설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세계명작소설들은 참 많다. 유명한 작품들도 있고 그닥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위대한 개츠비> 정도면 굉장히 유명한 작품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내가 공감하지 못한다해도 세계명작이 되는데 아무 지장은 없지만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 명작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읽게 된 이유는 백민석 소설가의 독후감이 실려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백민석 소설가의 소설을 읽진 못했지만 최근에 그가 쓴 미학에세이를 읽고나서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시각에 무척 공감했었기에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을 독후감을 통해서나마 깨닫게 되려나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의외로 독후감을 읽기전에 소설 자체에 빠져들어 읽었으니 독후감 때문이 아니라도 망작이 명작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의 제목을 정할 때,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쓰레기 계곡의 백만장자들',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 등 몇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피츠제럴드가 인용한 시는 사실 인용문이 아니라 자작시인데 그 시의 제목 '위대한 개츠비' 에 붙어 있는 주석에 따르면 소설의 제목을 짓기까지 이런 후보들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새삼 알수 있었고 흥미로웠다. 트리말키오가 뭔가 검색해보니 '서기 1세기 고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가 쓴 소설 『사티리콘(Satiricon)』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이 책은 방탕한 한 로마의 젊은이가 보여주는 허세와 방랑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자소설이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트리말키오는 자신의 친구와 아첨꾼들을 초대해 초호화 연회와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식사를 베풀며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 그는 벼락부자가 되어 가짜 미식가 행세를 하던 당시 일부 로마인들의 도를 넘은 허영과 경박함을 보여 주는 풍자적인 인물이 되었다.' 라고 나오는 것이나 쓰레기, 백만장자, 황금모자 등등의 표현들로 봤을때 이 소설은 애초에 제목부터 내용을 뻔히 드러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가 되는 순간 명작으로 남을 운명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한 가지 충고를 했다.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면 이 점을 꼭 명심하도록 해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p. 13)

닉 캐러웨이 라는 인물의 회상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은 제3자의 관찰자적 시점이기때문에 서사의 주요 주인공들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읽어 알 수 없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주인공들의 소설은 늘 조금은 이해가 어렵기 마련인 것 같다. 제3자의 시선을 읽고있는 나는 제4자 정도 되기 때문에 도저히 주인공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닉은 자신의 아버지가 알려준 교훈을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 교훈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충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개츠비만은 예외다. 내가 대놓고 경멸해 마지않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보여준 개츠비. 한 인간의 성격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몸짓으로 잘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무언가 대단한 면이 있었다. (중략) 결국 개츠비가 옳았다. 인간의 덧없는 슬픔과 짧은 희열에 내가 잠시나마 흥미를 잃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개츠비를 먹이로 삼은 것들, 그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p. 14~ 15)

고개 끄덕여지는 충고로 시작한 이 소설은 바로 뒷장에서 그 충고를 정면 부정한다. 적어도 개츠비 한 사람만큼은 예외적 경우라고.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닉에게만큼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자수성가한 개츠비, 그 성공만 보자면 개츠비는 위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공의 목적과 과정과 말로를 보자면 내게는 여전히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으니 개츠비의 '유명한 무명성'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파티가 열리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주인부터 찾아 나섰다. 두어 사람에게 주인의 소재를 묻자 그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p. 70)

거의 매일 화려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의 저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정작 파티의 주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러쿵저러쿵 수근거리길 멈추지 않는다. '개츠비가 그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낭만적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증거였다. (p. 74)' 하지만 낭만적인 추측 치고는 살인자라느니 범법자라느니 소문들은 흉악했다. 닉 또한 초대장을 받고 참석했으나 '내게는 좀 별난 파티입니다. 아직 집주인도 만나지 못했어요' "내가 개츠비인데요' (p. 79)' 에서 알 수 있듯이 얼굴을 마주하고도 개츠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초대를 받던 받지 않았던 수많은 손님들도 '개츠비 쪽으로 쓰러지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중략) 누구도 개츠비의 어깨에는 머리를 얹지 않았다. 여럿이 모여 노래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개츠비와 노래하는 무리도 없었다. (p. 83)' 닉은 개츠비와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주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날 닉은 개츠비의 손님들 명단을 적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이름들은 개츠비의 환대를 받고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알쏭달쏭한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에 대해 내가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뚜렷한 인상을 줄 것이다. (p. 97)' 라며 풀어놓은 손님들의 면면은 개츠비가 대체 왜 이 사람들에게 이런 파티를 열어주는지 더욱 알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닉에게도 개츠비는 '그저 이웃의 호화로운 호텔 주인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p. 101)' 그러다 개츠비가 닉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나는 주로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지내는데, 내게 일어난 슬픈 일들을 잊으려고 이곳저곳 떠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p. 105)' 라며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또한 직접이 아니라 조던 이라는 (닉과 자주 만나는) 여성을 통해 건넨다. 그러니까 개츠비 라는 인물은 부의 성공을 이룩했는지는 몰라도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줄은 몰랐던 인물인 것이다. 개츠비는 부유했으나 외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

너무나 소박하고 겸손한 부탁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이나 기다려서 대저택을 구입하고는 우연히 날아드는 부나방때에게 별빛을 보도록 한 것이 고작 어느 날 오후 잘 모르는 이웃에게 '초대받아 건너가기'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p. 123)

개츠비는 서툴다. 재산을 모으는 데는 능력자였는지 모르지만 사회적 관계에서의 처세술에는 능했지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것에는 초짜중의 초짜였다. 여하튼 닉을 통해 드디어 오매불망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

개츠비의 감정은 분명히 두 번째 단계를 지나서 이제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모르다가 방금 기뻐하는 단계를 지나서 지금은 데이지가 눈앞에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넋을 잃은 것 같았다. 개츠비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이 순간만을 꿈꾸어왔다. 말하자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이를 악물고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놓은 시계태엽처럼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p. 143)

어렸을때 테엽을 감아 사용하는 커다란 벽시계가 있었다. 열쇠모양의 키를 꼽아 태엽을 끝까지 돌리려면 아주 빡빡해지는 느낌이 들때까지 돌려야 한다. 그렇게 많이 감아놓으면 천천히 풀렸던가... 오르골은 태엽을 많이 감아놓으면 처음엔 빠르게 소리를 내다가 점점 느려지는데 시계는 어땠더라.... 결국 시간은 같은 속도인데 태엽은 달랐던가... 아주아주 더 느렸던가...

자그마치 5년에 가까운 세월! 눈앞에서 데이지를 보면서도 개츠비에게는 그날 오후도 그동안 꾸어왔던 꿈에 비하면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데이지의 잘못이라기보다 개츠비가 오랫동안 집요하게 품어온 환상때문이리라. 그 환상의 힘은 데이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초월했다. 개츠비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줄곧 그것을 부풀리고 주변에 떠도는 온갖 빛나는 깃털을 남김없이 사용해서 화려하게 장식했다. 아무리 열정이 대단하고 순수하다고 해도 한 남자의 영혼 속 깊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에는 견줄 수 없으리라. (p. 148~149)

'제임스 개츠, 이것이 개츠비의 진짜 이름, 아니면 적어도 법률상의 이름이었다. (중략) 사실을 말하자면,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에 사는 제이 개츠비는 자신의 상상력이 빚은 이상적인 모습에서 탄생한 인물이었다. (p. 151)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이 말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일', 즉 방대하고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을 위해 전력을 쏟아야 했다. 그래서 개츠비는 열일곱살 소션이 지어낼 법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을 꾸며내고, 최선을 다해서 그 이미지에 충실했다. (p. 152)' 나는 기독교적 비유나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작가가 '신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 이라고 표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제임스 개츠가 제이 개츠비로 변모한 순간, 데이지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의 환상은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바라는 건 딱 한가지였다. 톰에게 가서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p. 169)' 개츠비에게 자신의 환상은 순결무구 그 자체여야 했다. 그래서 부를 쌓고도 직접적으로 데이지에게 가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낸 이상은 '아뇨, 난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어요! (p. 170)' 라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환상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 현실을 자각할 수록 개츠비의 꿈은 환상임이 분명해질 따름이었다. '오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맥없이 스러진 개츠비의 꿈만이 홀로 싸움을 계속했다. 이제 더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불행하지만 끝내 절망하지 않은 채 방 저편의 사라진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p. 208)' 5년 동안 홀로 기다렸지만 만나고 나서도 홀로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개츠비는. '어느 틈엔가 그 자신이 온마음으로 취하려고 한 것이 다름 아닌 성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228)' 성배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개츠비의 환상은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썩어 빠진 족속이에요"

나는 잔디밭 너머로 계속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인간들 몽땅 합쳐놓아도 당신이 훨씬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기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츠비를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만큼 그때 그 말이 그에게 해준 유일한 칭찬이 아니었나 싶다. (p. 234 ~ 235)

개츠비의 짧은 생애는 비극적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수백 명이나 그 집에 드나들었는데 말이야. 더럽게 불쌍한 사람이군" (p. 264)'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 쾌락이 넘치던 파티 들끓던 손님들 그리고 생애 유일한 사랑... 그 모두가 결국은 다 허상이었다. 개츠비는 여름내내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수영장에 혼자 에어매트를 낑낑대고 끌고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장에 둥둥 떠다녔다. 자신의 삶이 둥둥 떠다녔듯이.

개츠비는 그 녹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아련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더 멀리 두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해맑게 갠 아침에...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떠밀리고 떠밀려가면서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p. 271)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거야' 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엔딩처럼 마무리된 마지막 문장들이 이질적으로 남는다. 이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문장 '하지만 개츠비는 알지 못했다. 그 꿈이 이미 자기의 등 뒤로, 저 도시 너머의 광막한 어둠 속으로, 밤의 장막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합중국의 어두운 벌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p. 271)' 이 더 마지막문장 다웠다. 여하튼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 는 분명 과거에 읽은 것과 달랐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다시 읽었기 때문인지 새번역이기 때문인지 하여튼 이번에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내게 명작이었다.

명작이 다 그러하듯 이 작품도 출판 당시에는 그닥 주목받지 못했었다고 한다. '1940년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난 때만 해도 그의 명성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가 쓴 작품은 대부분 절판되었고, 그의 이름도 점점 잊혀가는 듯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뒤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위대한 개츠비> 덕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위대한 개츠비>를 진중문고로 15만부나 구매했다. 그 바람에 <위대한 개츠비>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피츠제럴드는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위대한 개츠비>는 21세기에도 매년 30만부씩 팔리는 스테디 셀러로 자리매김했으며, 피츠제럴드는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가 반열에 올랐다. (p. 278~279)' 미군은 왜 이 소설을 대량 구매했을까? 군인 출신 청년의 자수성가 스토리로 이해했던 것일까? 목숨이 오가는 전장 속에서 군인들에게 세상 현실은 더 전쟁터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여하튼 개츠비라는 인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결국 개츠비는 위대하다기보다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톰의 계략에 의해 비극으로 끝난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측은 마음 지울 길 없다. 어쩌면 피츠제럴드도 개츠비가 가엾다 못해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여준 것은 아닐까 싶다. (p. 283)' 라는 백민석 소설가의 작품해설에서 이 작품을 다시 읽은 나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소설에서의 전문가인 작가가 개츠비를 위대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는데 하물며 나같은 일개 평범한 독자가 개츠비의 위대함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ㅎㅎㅎ

한때 이 소설의 신드롬에 편승해 개츠비스크란 말이 유행했다. 일부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데, 대체로 꿈과 이상을 좇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꿈과 이상을 좇되 결과적으로는 개츠비처럼 측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하면 좋겠다. (p. 283)

내가 처음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그 찌질함에 혀를 내두르며 '위대한' 이란 표현에 강한 반발감이 일었었다. 하지만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그 허망함에 '위대한'이란 표현조차 짠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피츠제럴드의 작품들 가운데 진심으로 슬프고 삶의 피곤함에 절어 질척거리는 유일한 작품은 그의 진짜 인생을 회고하는 자전 에세이들이다. (p. 299)' 라며 피츠제럴드의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삶이 피곤에 쩔어 있는데 굳이 백여년전 소설가의 질척거리는 삶까지 읽어보고 싶진 않다. 나는 그저 개츠비의 헛된 꿈을 측은하고 여기고 개츠비 못지 않게 허상을 좇으며 살았던 것 같은 피츠제럴드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위대한 작가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자 한다면 다른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명작에 대한 평론가의 난해한 해설보다 백민석 소설가의 진솔한 해설과 독후감이 깔끔하게 책을 덮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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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 유광수의 고전 살롱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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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아끼는 일, 옹졸함이 가져온 궁색함, 염치와 아량의 상관관계...

지식과 교양에 '복'을 더한 우리 고전의 재발견

고전읽기를 좋아한다고 할때의 고전은 대부분 서양고전인 경우가 많다. 나또한 그러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고전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꽤 여러권 읽어왔지만 대부분 서양고전들이었다. 그런 내게 한국고전의 진미를 알려준 책이 있었으니 유광수 교수의 <문제적 고전 살롱-가족 기담> 이었다. 전래동화라고만 여겼던 옛이야기를 고전으로 접근하고 그 고전 속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참의미를 깨닫고 나니 우리의 고전과 옛이야기들에 새롭게 개안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네 고전에서 '복'을 찾아 읽어주겠다니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았을까. ㅎㅎㅎ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며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지었는데, 좀 잘못됐다. '호모 암울스'나 '호모 두근스'가 맞다. 정확하게는 '호모 쫄보스'다. 생각은 쫄보니까 한 거다. 생각해서 쫄보가 된 게 아니고. 인간들이 희극보다 비극에 더 끌리는 이유도 간단하다. 호모 쫄보스라서 그렇다. (p. 9)

저자 특유의 가볍지만 날카로운 표현은 시작부터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고 고민하며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쫄보 유전자의 본능(p. 9)' 덕분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쉬이 공감이 갔다. 힘세고 덩치큰 존재들을 보면 두근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울한 미래 앞에 잔뜩 쫄아든 인간은 그러나 살아남았고 그 어떤 존재보다 번성했다. 그러한 삶의 흔적이 인간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다. 고전이란 그런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책은 성인용 전래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지만 새롭게 무엇보다 재밌게 호로록 읽혀진다.

'서양의 행운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알고 잡으려 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우리 복은 복이란 걸 잡을 생각도 없이 자기 할 일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어 복이 찾아올 거란 생각이다. (p. 31)' 첫번째 이야기 [복돼지와 김 진사] 이야기 속 김 진사는 크고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늘 하던 작고 보잘것 없는 사소한 일을 그저 꾸준히 열심히 했다. 그 사소함에 복돼지가 찾아왔다. 저자는 이야기 하나하나 마다 간결한 교훈으로 마무리한다. '사소함이 전부다. 그 사소함에 복이 깃든다. (p. 35)'

[구복 여행] 에서는 총각이 복을 찾으려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때가 '탄다'라는 말은 때가 '묻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떡볶이 국물이 떨어져서 얼룩지는 것은 더러워졌다고는 해도 때가 탔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들러붙어 묻어나는 것을 '탄다'고 한다. 때가 그러면 때가 탄다고 하고, 복이 그러면 복이 탄다고 한다.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묻어나는 것을 '복이 탄다'고 한다. 복울 움켜쥐려는 것은 복을 타는 행위가 아니다. 과정에서 복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고 배어들어야 복을 타는 것이다. (p. 51)' 복은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고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다. 그 과정 속에 복이 저절로 묻어나 복을 타게 되는 것이었다.

'남을 보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남을 보고 주눅들 것도 없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멍청해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감당할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p. 63)' [차복이와 석숭이] 에서는 복을 갖고 태어나지 않아도 남의 복을 빌려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차복이는 석숭이의 복을 빌려 쓴 것을 알았기에 행복하게 사용하고 다시 그 복을 돌려주었다.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빌려 쓴 것을 알고 다시 돌려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복을 찾고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복을 조금은 때론 많이 빌려 쓰고 있다고. '행복의 지혜는 고마움이었고, 행복의 열망은 고마움으로 남에게 되돌려주는 거였다. (p. 69)'

[세종에서 세조로] 는 옛이야기 까지는 아니지만 태종과 세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의 시대 속 공물납부에 관련된 비교를 통해 염치와 아량에 대해 풀어낸다. '아량과 염치는 닭과 달걀이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나 서로가 먼저여야 하는 관계다. (p. 87)' 가진자가 아량을 베풀줄 알고 얻은자가 염치를 생각할 줄 알면 세상사 다툼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이 염치와 아량을 아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염치와 아량을 모른다면 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박복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옹고집은 도플갱어 가짜에게 시달리는 정도(?)로 곤욕을 당하다가 뉘우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벼락 맞아 죽은 부자도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옹고집전>의 핵심이 숨어있다. 정답은 옹고집이 뉘우친 것의 실체가 뭐냐에 있다. 그러니까, 옹고집은 대체 뭘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뉘우쳤느냐는 거다. (p. 94)' 저자의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일 때마다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흥부전의 놀부는 탈탈 털렸고 <장자못 전설>의 부자는 벼락맞아 죽었다는데 [옹고집전] 의 옹고집은 고생은 좀 했을지언정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다 찾았다. 왜였을까? 옹골참과 옹졸함의 한끗 차이를 알려주는 저자의 해석에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

저자의 옛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늘 매력적인데 [혹부리 영감] 이야기도 그러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노래를 불러라'다. '진심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생이다' 라는 이야기다. (p. 113)' 가난한 혹부리 영감의 노래와 욕심낸 혹부리 영감의 노래가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은 도깨비들이 한번 속지 두번 속냐의 버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가? 이것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후로도 재미난 옛 이야기와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교훈으로 마무리되는 어른용 전래동화 다시 읽기는 계속된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속 공주의 선택, [자린고비] 가 자식에게 알려주는 마음을 아끼는 법, [두더지의 결혼] 에서의 자신감, [내 복에 먹지] 의 자존감, [신선, 감사, 구렁이 친구] 가 알려주는 욕망과 욕심의 차이, [수박씨 먹던 때를 기억한 재상] 이 알려주는 배은망덕, [학동과 구렁이] 속 나쁜 습관의 결과는 모두 익숙하게 알아왔던 전래동화를 삶의 지혜가 가득한 고전으로 새로 읽게 만들어준다.

서양고전이라 불리는 그리스로마고전이니 북유럽이야기는 '신화'라고 고전의 격을 높이는 듯 하면서 우리네 고전은 '전래동화'라고 어리고 미숙하게 보는 것 같은 시각은 나만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 이야기든 옛이야기들은 어차피 인간들의 이야기였고 조상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허구적 현실들이었다는 점에서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서양신화를 즐겨 읽는 이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내복을 짓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ㅎㅎ

ps. 우리네 고전의 진수를 새롭게 깨달으려면 저자의 전작 <문제적 고전 살롱>을 먼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순한 에세이보다 더 파격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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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CLASS ⓔ
노명우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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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자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지식을 완성해가는 즐거운 기획

사회학이란게 뭘까? 얼핏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학문같으면서도 막상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는 것이 사회학인것 같다. 호모사피엔스가 동물로 남지 않고 인간으로 특화된 것은 특유의 사회성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문장만큼이나 굉장히 당위적 문장이다. 그러니 한번쯤 제대로 사회학적 사고를 해보고 싶었다. 사회학자가 한줄로 사회학을 정리해줄 것 같은 이 책을 펼치게 된 이유다.

속담은 사회학자보다 세상 경험을 더 많이 했고, 그래서 사회를 구석구석 더 잘 알고 있고,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생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만들어냈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전수된 지식 체계라는 점이 장점입니다. 속담은 학문적 언어가 아니라 민중의 언어로 표현된 사실상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26)

가깝고도 먼 학문인 사회학을 가깝고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자가 골라낸 것은 '속담'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 줄 사회학' 은 곧 '속담'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12개의 속담을 사회학적으로 풀어낸다.

저는 사회학자로서의 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과의 만남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학교 안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캠퍼스를 벗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생한 해석을 들을 수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발길이 닿은 서울시 은평구 연신내 골목길에 '니은 서점'이라는 작은 서점을 차렸습니다. 니은 서점은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하는 사회학자의 공간이자 사회학자가 토속민의 언어, 골목길의 언어를 익히며 세상 사람과 교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p. 31)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해외유학까지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엘리트코스를 밟아야 가능하다. 저자는 그러한 코스를 거쳐 사회학 교수가 되었으나 학문이 학문인만큼 자신을 학교안이라는 울타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세상으로 나와 사회를 보려고 노력한 것 같다. 사회학자가 운영하는 서점이라... 가보고 싶다. 나는 서점을 참 좋아하는데... 여건만 된다면 작은 서점 하나 차려놓고 내가 읽었던 책을 추천해주며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인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라서... 저자의 서점이 무척 부러울 따름이다...

사회학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출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도 아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뒤 보다 인간이고 싶을 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싶을 때, 어떻게 살아야 내가 올바르게 살 수 있을지 궁리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속담을 통해 저에게 도움을 주시고, 저는 사회학의 렌즈를 통해 세상에 대한 더 풍부한 해석을 여러분에게 제공하면서 우리가 함께 <한 줄 사회학>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p. 35)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면서도 본인이 학문으로만 접하는 사회학에 대해서 스스로를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며 첫번째 속담풀이를 시작한다. 뒤이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서울 가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개도 텃세한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개천에서 용 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 는 속담들을 사회적으로 풀이한다.

사회학자도 잘 모른다는 사회에 대해 우리도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지만

'자리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부패와 위선을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고

도시 사람들만의 사회적 분위기와 예의가 어떻게 깍쟁이처럼 혹은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는지 모르지 않다가도

SNS 세상에서 '발 없는 말이 천리' 가 아니라 만리 억리를 순식간에 가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회 안전과 안정의 상실에 대해 무뎌지고

데이터는 내가 쌓아주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것이 남의 얘기인줄로만 알며

둘 만 모여도 느껴지는 '텃세' 를 체감하면서도

'친구 따라' 기꺼이 강남뿐만 아니라 그 어디든 따라하고 따라하기도 한다.

비교가 흔해진 시대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티를 못내는 사회가 되었고

'개천에서 용이'나는 시대도 시대도 지났는데

온 세상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지 못해 오늘도 우리는 비오 안오는데 바짓단을 흙탕물로 적시며 걸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쉽게 말해온 '속담'에 대해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어쩌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상상력은 우리를 무지와 무력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사회학은 개인의 무능력과 무지함이 결합해서 빚어지는 체념에 개입하는 공적인 시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원하는 미래 사회를 생각하는 상상력입니다. (p. 333)' 라며 저자는 사회학적 사고를 시도해볼 것을 권유한다.

읽다보면 철학과 심리학을 오가는 사고실험이나 사회분석들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적 경계를 더 모르겠는 안개속으로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사회학의 범주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이 생각할 수 있는 성찰의 논리적 정점의 학문들을 엮어서 개인이 아닌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아오는 내내 축적된 그 지혜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그것이 '속담'이었다. 쉬운 속담을 사회학적으로 어렵게 풀어내는 시도는 해봐도 좋고 안해봐도 사는데 아무 지장은 없다. 다만 한낱 속담이 '지혜'라는 것 그 지혜가 사회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새삼 느껴보고 싶다면 저자의 사회학적 속담풀이를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사회적 지혜(=속담)'를 수월히 사용하는 사회학적 사고방식을 이미 하고 있음에 사회를 이루고 사는 개인 한명한명이 모두 사회학자인 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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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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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의 새로운 스타일과 감각

[침입자들] 정혁용 신작 장편소설

<침입자들> 이라는 소설을 재밌게 읽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파괴자들>을 주저없이 선택했다. 의문의 택배기사 K를 주인공으로 하는 <침입자들>은 K라는 캐릭터에 대한 예고편이었다면 이번 <파괴자들>은 본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K의 본업과 과거가 드러나면서 <침입자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어쩌면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자잘한 소제목들을 꼼꼼이 달아놓는 것으로 보아 연재물로 쓰는 방식을 택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하튼 80년대 홍콩누아르를 생각나게 하는, 폭력 속 인간미가 돋보이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인공K시리즈는.

기억이란 묘한 것이다. 가까운 것이 흐릴 때도 있고, 먼 것이 선명할 때도 있다. 대개의 기억은 왜곡되거나 굴절된 채로 남고, 동료와의 기억은 선명한 쪽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묻었다. 지우지는 못했다. 잊히는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에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묻는다. 애써 묻을 뿐이다. 아마, 동료도 그랬을 것이다. 그날 카페에서 헤어지면서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p. 10)

동료가 있었다. 많은 전쟁이 있었고 많은 죽음이 있었다. 동료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제 한 명 남아 있다. 서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 만큼 특별한 동료. 그 사람이 안나였다. 그런 안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탁이 있다고 했다. 거두절미하고 K는 안나가 보내준 주소로 출발했다.

우리는 동료였지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는 대개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언제 잃을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부분의 일에 익숙해진다. 설령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친구를 잃는 일이다. 우리는 신참이 아닌 베테랑이었고 친구를 사귀기엔 그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p. 34)

친구가 아니라면서도 K는 동료를 잃는 일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용병. K와 안나는 용병으로 한 팀이었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있었다. '안나는 1티어와 동급의 알파였지만, 러시아 출신이었고 팀원은 한국인,중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파키스탄인, 구르카족 출신이었다. 고위험의 허드렛일은 대개 우리 팀 몫이었다. 팀의 정식 명칭은 시그마였지만 별명은 '안나의 애새끼들' 이었다. (p. 39)' 읽다보면 많은 장면들이 왠지 익숙하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작가 스스로도 '이 소설에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오마주가 있습니다. 알아보는 재미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p. 318)' 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 유행했던 주윤발식 홍콩누아르 까지 가지 않아도 <태양의 후예>라던가 <더K2> 라는 드라마 또는 용병과 군인 이나 재야의 능력자가 활약을 펼치는 영화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식상하진 않다. 그런 분야 특유의 긴박함과 몰입감에 빠져서 호로록 읽히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마리라는 아이를 부탁해" (p. 40)

이유는 묻지 않았다. 들어줄 거라면 물을 필요가 없다. (p. 41)

<침입자들>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K의 대화법은 독특하다. 심드렁하게 툭툭 내뱉으면서도 사람을 안심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K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OK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갈 뿐이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도 안 하던 짓을 했다. 악수의 손을 내민 것이다. 젠장, 더럽게 어색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케이" 안나가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p. 46)' 서로에게 목숨빚이 있는 사이이고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이번일 또한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인데 악수조차 더럽게 어색한 사이, ㅋㅋ 그게 딱 K이고 그것이 딱 이 소설의 분위기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잔인한 장면 사이에서 묘하게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ㅎㅎㅎ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방에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6층 맨 끝 방입니다"

"6층 맨 끝 방이요?"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방에 초대 받으신 분은 아주 오랜만이라서요" (p. 52, 53)

안나가 K를 불러들인 곳은 묘한 저택이었다. 동네 자체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저택에 모여 있는 사람들... 서로의 직업도 나이도 본명도 모르는 사이이지만 '6층 맨 끝방'이라는 것만으로 K의 이미지가 정리되는 곳, 정작 K 본인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전쟁터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내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친구란 만드는 게 아니었다. 만들어지게 되는 곳이었다. 아무리 철칙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곳이 거기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갈수록 자신의 내면도 조금식 죽어간다. 전쟁의 진짜 무서움은 죽음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은 나을지 모르겠다. 서서히 죽어가면서 계속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무서움이다. 때로 먼저 간 전우들을 부러워 하는 건 그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잠들기는 했으니까. (p. 65)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며 끊임없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차라리 편한 K는 이 이상한 저택에서 안나를 통해 동료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이제 안나의 부탁 말고도 K가 이 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어제 만난 장이라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 여기는 재미있는 곳이라고, 지옥치고는 말이야"

"그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놈에게는 아니야. 인터넷도 전화도 안 되는 고립된 저택, 고립된 마을. 경찰도 절대 오지 않는 곳"

"맞아. 놈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린 거야" (p. 95)

'넌 아무리 궁금해도 상대가 말해주기 전에는 결코 묻지 않는 사람이잖아. 사람이란 이상한 거야. 묻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해주고 싶거든. 그래서 동료들도 너에게 많은 얘기를 한거겠지. 아마 동료들의 개인사는 네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걸. 묻지 않는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안심을 하는 게 사람인가 봐. 새어 나갈 일이 없을 것 같거든. (p. 108)' K의 묻지 않는 이런 성격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사람들은 K에게 이야기를 하고 K는 그들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낸다. 이곳은 지옥이고 따라서 K가 있을 만한 곳인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저택에서 하루하루 보낼 수록 의문은 쌓여가고 마침내 K도 물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얘기는 묻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물어야겠군. 도대체 너의 계약이란 게 뭐지?" (p. 116)

저택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 갈등이 펼쳐지면서 K의 과거도 설명되어지는데 "아버지가 특수부대 출신이었죠. 조기교육이랍시고 일곱살때부터 가르쳤고, 절 완성한 건 교관이었던 티모센코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칼이 일품이라고요? 케이의 의미가 나이프(Knife)의 K라더군요" (p. 197) 라는 문장을 통해 전작 <침입자들> 과 확실히 같은 K임이 밝혀진다. <침입자들> 에서는 티모센코의 전화로 시작되고 끝났다면 <파괴자들>에서는 안나의 전화로 시작되고 끝이 나는 셈인데, 거기에 마리 라는 새로운 인물까지 늘어났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서는 K의 이 확장된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사건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처럼 다양한 영상매체들이 있기 전 비디오세대로서 홍콩누아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라면 정혁용 작가의 K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 시리즈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시리즈가 아닐수도 있고 따로따로 읽어도 즐기는데 아~무 지장이 없긴 하지만 시리즈로 K라는 인물을 계속 만나게 되길 기대해본다. 침입자들 에서 파괴자들이었으니 다음은 수호자들? 해방자들? 이런건 어떨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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