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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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의 새로운 스타일과 감각

[침입자들] 정혁용 신작 장편소설

<침입자들> 이라는 소설을 재밌게 읽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파괴자들>을 주저없이 선택했다. 의문의 택배기사 K를 주인공으로 하는 <침입자들>은 K라는 캐릭터에 대한 예고편이었다면 이번 <파괴자들>은 본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K의 본업과 과거가 드러나면서 <침입자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어쩌면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자잘한 소제목들을 꼼꼼이 달아놓는 것으로 보아 연재물로 쓰는 방식을 택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하튼 80년대 홍콩누아르를 생각나게 하는, 폭력 속 인간미가 돋보이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인공K시리즈는.

기억이란 묘한 것이다. 가까운 것이 흐릴 때도 있고, 먼 것이 선명할 때도 있다. 대개의 기억은 왜곡되거나 굴절된 채로 남고, 동료와의 기억은 선명한 쪽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묻었다. 지우지는 못했다. 잊히는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에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묻는다. 애써 묻을 뿐이다. 아마, 동료도 그랬을 것이다. 그날 카페에서 헤어지면서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p. 10)

동료가 있었다. 많은 전쟁이 있었고 많은 죽음이 있었다. 동료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제 한 명 남아 있다. 서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 만큼 특별한 동료. 그 사람이 안나였다. 그런 안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탁이 있다고 했다. 거두절미하고 K는 안나가 보내준 주소로 출발했다.

우리는 동료였지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는 대개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언제 잃을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부분의 일에 익숙해진다. 설령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친구를 잃는 일이다. 우리는 신참이 아닌 베테랑이었고 친구를 사귀기엔 그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p. 34)

친구가 아니라면서도 K는 동료를 잃는 일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용병. K와 안나는 용병으로 한 팀이었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있었다. '안나는 1티어와 동급의 알파였지만, 러시아 출신이었고 팀원은 한국인,중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파키스탄인, 구르카족 출신이었다. 고위험의 허드렛일은 대개 우리 팀 몫이었다. 팀의 정식 명칭은 시그마였지만 별명은 '안나의 애새끼들' 이었다. (p. 39)' 읽다보면 많은 장면들이 왠지 익숙하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작가 스스로도 '이 소설에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오마주가 있습니다. 알아보는 재미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p. 318)' 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 유행했던 주윤발식 홍콩누아르 까지 가지 않아도 <태양의 후예>라던가 <더K2> 라는 드라마 또는 용병과 군인 이나 재야의 능력자가 활약을 펼치는 영화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식상하진 않다. 그런 분야 특유의 긴박함과 몰입감에 빠져서 호로록 읽히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마리라는 아이를 부탁해" (p. 40)

이유는 묻지 않았다. 들어줄 거라면 물을 필요가 없다. (p. 41)

<침입자들>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K의 대화법은 독특하다. 심드렁하게 툭툭 내뱉으면서도 사람을 안심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K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OK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갈 뿐이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도 안 하던 짓을 했다. 악수의 손을 내민 것이다. 젠장, 더럽게 어색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케이" 안나가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p. 46)' 서로에게 목숨빚이 있는 사이이고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이번일 또한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인데 악수조차 더럽게 어색한 사이, ㅋㅋ 그게 딱 K이고 그것이 딱 이 소설의 분위기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잔인한 장면 사이에서 묘하게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ㅎㅎㅎ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방에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6층 맨 끝 방입니다"

"6층 맨 끝 방이요?"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방에 초대 받으신 분은 아주 오랜만이라서요" (p. 52, 53)

안나가 K를 불러들인 곳은 묘한 저택이었다. 동네 자체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저택에 모여 있는 사람들... 서로의 직업도 나이도 본명도 모르는 사이이지만 '6층 맨 끝방'이라는 것만으로 K의 이미지가 정리되는 곳, 정작 K 본인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전쟁터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내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친구란 만드는 게 아니었다. 만들어지게 되는 곳이었다. 아무리 철칙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곳이 거기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갈수록 자신의 내면도 조금식 죽어간다. 전쟁의 진짜 무서움은 죽음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은 나을지 모르겠다. 서서히 죽어가면서 계속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무서움이다. 때로 먼저 간 전우들을 부러워 하는 건 그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잠들기는 했으니까. (p. 65)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며 끊임없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차라리 편한 K는 이 이상한 저택에서 안나를 통해 동료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이제 안나의 부탁 말고도 K가 이 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어제 만난 장이라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 여기는 재미있는 곳이라고, 지옥치고는 말이야"

"그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놈에게는 아니야. 인터넷도 전화도 안 되는 고립된 저택, 고립된 마을. 경찰도 절대 오지 않는 곳"

"맞아. 놈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린 거야" (p. 95)

'넌 아무리 궁금해도 상대가 말해주기 전에는 결코 묻지 않는 사람이잖아. 사람이란 이상한 거야. 묻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해주고 싶거든. 그래서 동료들도 너에게 많은 얘기를 한거겠지. 아마 동료들의 개인사는 네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걸. 묻지 않는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안심을 하는 게 사람인가 봐. 새어 나갈 일이 없을 것 같거든. (p. 108)' K의 묻지 않는 이런 성격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사람들은 K에게 이야기를 하고 K는 그들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낸다. 이곳은 지옥이고 따라서 K가 있을 만한 곳인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저택에서 하루하루 보낼 수록 의문은 쌓여가고 마침내 K도 물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얘기는 묻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물어야겠군. 도대체 너의 계약이란 게 뭐지?" (p. 116)

저택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 갈등이 펼쳐지면서 K의 과거도 설명되어지는데 "아버지가 특수부대 출신이었죠. 조기교육이랍시고 일곱살때부터 가르쳤고, 절 완성한 건 교관이었던 티모센코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칼이 일품이라고요? 케이의 의미가 나이프(Knife)의 K라더군요" (p. 197) 라는 문장을 통해 전작 <침입자들> 과 확실히 같은 K임이 밝혀진다. <침입자들> 에서는 티모센코의 전화로 시작되고 끝났다면 <파괴자들>에서는 안나의 전화로 시작되고 끝이 나는 셈인데, 거기에 마리 라는 새로운 인물까지 늘어났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서는 K의 이 확장된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사건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처럼 다양한 영상매체들이 있기 전 비디오세대로서 홍콩누아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라면 정혁용 작가의 K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 시리즈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시리즈가 아닐수도 있고 따로따로 읽어도 즐기는데 아~무 지장이 없긴 하지만 시리즈로 K라는 인물을 계속 만나게 되길 기대해본다. 침입자들 에서 파괴자들이었으니 다음은 수호자들? 해방자들? 이런건 어떨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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