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알고 싶은 영어책 : 순한 맛 - 수백만 영포자가 믿고 배우는 유진쌤 기초 영문법 바른독학영어(바독영) 시리즈 1
피유진 지음 / 서사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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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 영포자가 믿고 배우는 유진쌤 기초 영문법

"다시 시작해보세요.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영문법 책을 찾는 사람들, '왕기초' 나 '영포자' 용 책도 너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하지만 '아이용' 이 아닌 '어른용' 으로 나온 영문법 학습서 라고 해서, 그렇다면 나도 가능할까??? 싶은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영어울렁증에 거의 영포자에 가까워서, 언젠가 외국인이 질문하나 했다고 비오듯 땀을 흘리는 티비광고속 인물에게 깊은 공감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책을 펼치면 이 책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명사 / 관사 / 형용사 / 전치사 / 동사 로 크게 나뉘어 지며, 각 장마다 사용법이 또 상세히 설명되어 있고, 대단원 사이사이 소단원 끝날 때마다 Q&A 를 정리해놓아서 정말 상세하게 친절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명사로 시작하는데

 

 

그림과 옆에 단어 들이 써있다. 음? 뒷장으로 넘어가 본다. 계속계속계속 그림과 단어들이 써있다. 아~! 적으라는 거구나. 그랬다. 내가 사용편을 대충 읽은 거다.;;; 그리고 쓰여진 단어들을 죽 훑어보는데 자꾸 웃음이 난다. 아는 단어가 많은데? 내가 영어를 잘했나? 그럴리가!!! 그렇게 이 책의 절반 이상이 명사에 할애되어 있고, 그 명사들을 읽고 쓰다보면 영어자신감이 절로 생겨난다. 영어 단어 많이 알고 있었네?!

다음은 관사 다.

 

 

 

앞에서 배운 명사들을 바탕으로 단수와 복수 그리고 관사를 붙인 것을 숙어처럼 읽고 쓰다보면 반복적임이 금새 눈에 띈다.

다음은 형용사

 

 

 

익숙해진 명사들 앞에 관사까지 붙은채 사이에 형용사가 자연스레 끼어들어 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 슬슬 끝이 보이는데도 문법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근자감만 자꾸 커진다. ㅎㅎ

그리고 전치사

 

 

 

이제 문장형태가 나온다. 명사 다음으로는 전치사 부분의 분량이 꽤 두터운 편이다. 문장의 형태도 반복적이다 보니 어렵지 않은 문장 몇개쯤은 그냥 외워진다.

마지막으로 동사

 

 

 

많이 쓰이는 동사 몇개를 이용하여 기본형의 문장들이 동사별로 반복되고 내용은 몇장되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새 한 권이 끝나고 나면 '진도가 끝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라는 다음 공부에 대한 안내가 나온다.

 

 

 

원서를 읽어도 좋고,미드를 봐도 좋고, 다른 영문법 책을 봐도 좋다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은 일단 영포자에게 영어가 이렇게 쉬웠나 싶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어 해볼만 하겠는데? 싶은 마음으로 다음 방법들을 좀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도전해볼 수 있게 한다. 영문법책을 백퍼 이해해본 적 없는 내가 정말 영문법 책을 이렇게 쉽게 끝까지 다 본 것이 맞는가~? ㅍ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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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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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역사와 유물을 바라보는 색다른 패러다임,

삶과죽음, 과거와 현재를 종횡하는 새로운 지성의 세계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분야가 고고학이다. 하지만, 역사해설서는 많아도 원전 역사서는 많지 않듯이 고고학적 자료 인용은 많아도 고고학에 대한 책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얼마전 읽은 '고고학의 역사'라는 책이 고고학을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고고학의 매력을 한층 더 느끼게 됐었는데, 국내 저자가 쓴 고고학 책 또한 고고학을 인간의 삶을 헤아리는 학문이라고 서술해나가는 면면의 따스함과 통찰력이 느껴져서 반갑고 고맙고 좋았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되어 버린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과 더 가깝게 만나보고자 합니다. 미지의 땅을 찾아가 수많은 유물과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 느낀 감동을 여러분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발굴 현장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혹은 흐릿한 등불 아래에서 메모했던 저만의 노트를 이제 꺼네 보이겠습니다. ( 서문 中)


번역서 중에는 그래도 고고학 책이 좀 있던데 국내학자의 고고학책은 잘 없어서 국내 학계에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있기는 있나 하며 의아해했었다. 고고학은 국내의 역사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주제에 따라 세계 곳곳의 학문과 연결되는 학문이다. 하지만 서양고고학 대비 국내에 기반을 둔 고고학에 대해서는 너무 알려진 것이 없다고 느껴지던 차에 저자의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그리고 저자가 고고학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우리의 생은 철길을 달리는 기차에 비유되곤 한다. 그 철길 끝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차하는 종착역이 바로 우리가 죽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고작 무덤이라는 걸 상상해보면, 씁쓸해하면서도 슬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 분명한 건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과정이 없다면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재가 없다면 미래도 없을 것이다. (p. 44,45)


고고학의 발견은 대개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이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어도 죽어서 가는 곳은 무덤 뿐이다. 물론, 무덤에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한 무덤들이 알려주는 과거는 현재를 다시 알게 하고 그렇게 인식하는 현재는 미래를 만들어 간다. 고고학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옛스러움이 의외로 어울리지 않는 학문일수도 있겠다 싶다.


조로아스터교가 가지고 있는 고고학적 의미 그리고 거기에 담긴 불의 상징은 이제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교주 자라투스트라를 세상에 널리 알려준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때문이다. 실제로 니체의 이 책은 조로아스터교나 자라투스트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p. 50)


서양의 역사를 고대그리스로마로 시작해서 알아나가다 보면 근동이라 불리는 터키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연결될 수 밖에 없고 다시 메소포타미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그 흐름을 이어가다 보면 중간중간 자꾸 만나게 되는 지점이 페르시아문명이다. 페르시아의 종교로 조로아스터교를 알게 되었으나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느끼면서 궁금해진 종교였으나 자세히 파고드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의도적이지 않았던 니체와 의도적이었던 히틀러로 인해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알려진 이름대비 제대로 알려진 부분은 거의 없다는 저자의 아쉬움에 공감이 되었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에 있는 성황당의 일종인 오보라 불리는 제사터에서는 음복을 하고 그릇을 깬다. 이런 풍습을 '훼기(그릇을 훼손함)' 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저승을 이승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데에서 비로된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온전한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깨거나 구멍을 뚫어서 저승의 용도로 바꾸는 것이다.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을 발굴하면 산산조각이 나 있는 토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수천년의 제사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p. 63)


이 책은 고고학적 발견을 중심으로 한 책이 아니라 고고학의 가치를 통해 삶을 반추하는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위 내용처럼 고고학적 재미를 쏠쏠히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토기의 파편들은 오래되어 깨진것이 많겠지만 일부러 깨트린 것도 많다는 사실이, 그렇게 이승과 저승을 구분짓는 사고방식이, 그렇게 오래되어온 제사 풍습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승의 용도와 저승의 용도를 달리 한다는 것, 고고학이란 그 중간을 연결해주는 학문인가 싶기도 하고 ㅎㅎ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인류 이름이 루시 인것은 역사관련 책에서 종종 들었던 이름이었는데, 이 이름이 당시 고고학자들이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할 때 듣던 노래인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에서 연유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으나 아프리카 이름을 갖지 못한 그 여인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인류의 역사가 마약들과 함께 했지만,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지혜 때문이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과 다르다. 지혜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라는 것에 사유, 성찰, 그리고 자기의 절제가 더해져야만 지혜는 생겨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삶일까? 오늘도 나는 그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p. 87)


'루시' 라는 이름을 준 비틀즈의 노래는 줄여서 LSD 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마약의 이름이기도 하다고 한다. 비틀즈가 그 약의 환각을 경험한 후 지은 노래라고 하는데, 마약은 사실 예로부터 계속 있어왔다고 한다. 그것을 약으로 쓰던 때와 환락으로 쓰던 때의 차이가 고고학적으로도 드러난다. 저자가 알려주는 통찰들은 이렇게 고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 한다. 아주 겸손하게. ㅎ


뮤즈를 위한 신전이 지금의 대학이나 박물관과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관으로 지내다가 왕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에 자신의 왕조를 개창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뮤제이온'이라는 예술의 공간을 마련해 이곳에서 예술과 학문, 음악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졌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프톨레마이오스가 건립한 뮤제이온의 일부였다. 이렇듯 고대의 예술과 역사, 나아가 박물관도 음악을 매개체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 96)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은 정말 자주 들어봤는데... 도서관 자체로 단독체 인줄 알았는데 뮤제이온의 일부였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알렉산더 대왕은 참 여러모로 역사적인 인물인듯 하다. 그가 정말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역사의 가정을 또 생각해보게 된다.


샤먼의 도구로서 청동방울을 본격적인 악기로 발달시킨 나라는 중국이었다. 1977~1978년에 발굴된 전국시대의 증후을묘에서는 65개의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편종이 발견되었다. 이 편종이라는 악기는 작은 망치로 때려서 소리를 내는데, 각각의 종에서도 때리는 위치에 따라서 조금씩 음색이 변한다. 서양에서는 피아노가 사용되기 시작한 건 12세기가 지나서부터였다. 그런데 피아노와 음역이 유사한 악기가 중국에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사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p. 101)


과거의 영화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에서 현재까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세월은 흥망성쇠의 증거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나는 중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사실 한 나라의 역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은 하나의 나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땅이 넓은 만큼 다양한 문명이 있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서양의 고대도시국가들처럼 세세한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중국 이라는 하나의 역사로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중국땅에서 이루어진 최초는 상당히 많다. 악기도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그 다음이 아니겠는가...


음악에 대한 고고학적 이야기를 읽는 와중에 발해의 음악이 당시 중국과 일본에 크게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조선의 '공무도하가' 또한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덕분에 남아있게 된 것을 보면서 고대 한반도 북쪽 땅의 역사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게다가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까지 최대한 피하려고 했던 흉노족이 고조선과는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과 한민족과의 연결지점들도 참 많이 궁금해지고... 이런 측면에서는 통일 여부를 떠나 남북 고고학계가 힘을 합친다면 의미있는 역사적 발견을 많이 할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울 따름이다.


한나라도 처음에는 진시황처럼 무력으로 흉토를 꺾으려 했다. 백등산 전투(패배)이후 한나라의 정책은 바뀌었다. 한나라는 무력으로 흉노에 대응하기보다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선물로 흉노의 마음을 홀리기 시작했다. 흉토가 중국의 아름다움에 빠져있을 때에 중국은 물밑작업을 계속했다. 조공을 바치며 흉노를 안심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흉노를 이간시켜 남흉노를 중국으로 귀의시켰다. 동시에 서역의 나라들과 연합하여 흉토의 경제적 기반을 차단했다. 이른바 실크로드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1세기경에 흉노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 일파는 유라시아 서쪽으로 사라졌다. 2000년 전 유라시아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던 흉토를 무너뜨린 것은 강대한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흔들던 중국의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던 것이다. 단조로운 초원의 빛깔에 싫증을 내어 아름다운 빛깔을 탐한 결과가 나라의 멸망이라니. 진정한 경국지색은 이런 것이 아닐까. (p. 124)


유목민족은 떠돌아다니는 민족이었던 만큼 역사적 사료를 많이 남기지 않았고, 따라서 신비로운 시간으로 남아있는 역사이다. 로마사를 읽다보면 스키타이족 흉노족 등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유목민족을 강렬한 이미지로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중국에서 흉노족을 바라보니 또 다르다. 역사는 역시 연결하며 읽어가야 하는 학문임을 또다시 느낀다. 이렇게 중국문화를 경험하며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 세력들이 유럽으로 건너와 사치와 분열에 빠진 로마를 보았을 때 과연 그들의 문화가 위대해보이기만 했을까? 그들의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을까? 유목민족들은 로마를 멸망시키지 않았고 적절히 갈취했고 갑자기 떠났다. 북방에서 남하해온 게르만족 고트족과 동방에서 달려온 유목민족의 시선은 분명 달랐을 것 같다.


저자가 시베리아 발굴장에 갔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모기 였다고 한다. 추위가 풀리면서 녹아내린 바닥들은 모기에게 최선의 생태지가 되서 엄청난 모기때가 생긴다는데 시베리아 사람들은 여러 음식에 고수풀을 넣어 먹고 다양한 잡초를 태우는, 다소 원시적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모기를 쫓는걸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수풀의 원산지는 지중해라는 것도 함께 알려준다. 즉, 고대부터 교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넓은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새삼 또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많은 연구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의 의미를 통과의례, 빛과 하늘의 신화, 곰과 호랑이의 토템 등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진짜 의의는 바로 유라시아의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에서 태평양 연안의 캄차카까지 곰과 관련된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에서는 기나긴 겨울을 지나 등장하는 알싸한 곰마늘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곰마늘의 맛과 향에서 단군신화에서 잊혀진 또 다른 이야기를 발힐 수 있을 것다. (p. 139)


향수의 발달은 아무래도 악취를 없애기 위한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나 보다. 프랑스 향수의 시작이 길거리에 널려있는 분변냄새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시취를 없애기 위한 향들은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해 왔다. 향유, 몰약, 침향 등등.... 향신료 또한 향기와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일텐데, 유럽쪽엔 고수였다면 동양쪽은 마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쪽져 있는 마늘 말고 풀의 형태로 보이는 곰마늘은 생각보다 훨씬 대중적인 풀이었다. 곰마늘이 퍼져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단군신화에 국한 되어 있는 마늘에 대한 이미지가 살짝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패총은 조개무덤이다. 그리고 일종의 생활쓰레기장이다. 따라서 고고학자라면 패총은 필수코스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생활이 이루어진 곳에서 발견되기 마련인 패총 속엔 생선뼈 동물뼈가 함께 있어서 뼈 자체만으로는 큰 가치가 없다할지라도 당시의 음식이나 기후 등 환경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 대 초 저자가 벌교 근처에서 발견된 패총이야기를 하면서 당시만 해도 국내에 관련 전문가가 없어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국내 고고학의 상황을 엿본 듯 해서 마음이 안타까워지기도 했다.


3000천년 전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에겐 침술이 굉장히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뼈로 만든 침과 침통이 발견되었을 때 바늘이라기엔 바늘귀가 없어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고 한다. 그것이 '침'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만강 일대의 청동기 시대 무덤 곳곳에서 이러한 침통과 바늘이 다수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이 침을 잘 놓았다는 기록도 사료에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북방 사람들은 침술을 상당히 발달시켰던 것 같다. 침술의 원조는 중국이 자신하듯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조가 어찌됐건 자체적인 발달의 역사는 있을 수 있다. 완전한 100% 전승 전래 라는 것이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중국과 붙어 있는 북한지역의 역사는 정말 갈수록 궁금해지고 그래서 또 아쉬워지고 그렇다...


개발을 위해 땅을 파다가 유적이 나오면 발굴을 하는 것을 '구제발굴' 이라고 한다. 경제개발이 서둘러 행해지던 때에는 이러한 구제발굴도 사실 제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따라서 개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유적이 사라졌는지는 파악조차 힘들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풍납토성' 의 이야기는 잘 몰랐었는데 알고 나니 더 마음이 안좋아지긴 한다... 하지만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이 살면서 경제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존과 개발의 경계는 늘 위태위태할 수 밖에 없는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 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렇듯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대안으로 제시된 헤이그조약이지만, 실제로는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열강들이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었다. 즉 헤이그조약은 국제사회에서 약탈된 문화재를 반환할 수 있는 간으성을 사전에 차단해버린 셈이다. 실제로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국가들은 대부분 독립했지만, 문화재의 제대로된 반환은 거의 없었다. (p. 204)


헤이그 라는 도시는 참 기묘한 느낌을 주는 도시인것 같다. 우리역사에서는 밀사를 보냈던 곳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다 보니 문화재 관련해서도 한 획을 그은 도시 였다. 전쟁과 약탈은 어찌보면 한몸인데, 그 거대한 몸체가 행동한 결과를 이렇게 강국들끼리 조약을 체결하고 다른 약소국들은 다 그냥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너무나 자주 등장해서 이젠 뭐 식상할 정도다... 그 식상함이 우리역사에도 일어났으니...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고분들은 혹독하게 도굴 당했다. 경주의 신라고분을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고분들은 대부분 도굴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전시용으로 그렇게 호화롭게 발굴을 했으면서도 이후 대부분의 무덤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무덤을 경쟁적으로 도굴하는 것도 당시의 일본총독부는 수수방관했다. 결국 일제는 제대로 된 문화재를 관리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호화로운 겉치장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자신들보다 먼저 제국주의를 일구어낸 서구열강을 흉내 냄으로써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p. 209)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재를 약탈한 이유는 단순한 유물의 수집이 아니라, 일본 민족의 기원이 북방 어딘가에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근동지역을 약탈한 서구 열강이 유럽 문명의 근원인 성서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선 거라고 주장하는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 기마민족설은 역설적으로 일본이 패망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일본인들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는 정부의 허황된 선전 아래 전쟁에 내몰렸다. 그리고 전쟁에 패망하면서 다시 섬으로 쫓겨났다.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일본인들을 위로해준 것은 일제의 전장을 따라다니며 발굴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조사했던 고고학자들이었다. (p. 219)

경주 신라 고분에 대한 일제의 관리는 형편없었다. 1920년대, 일제는 경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부속 건물들을 사용하면서 필요한 토사를 황남동 고분군 일대에서 채취했다. 어떻게 한 국가의 왕족 무덤을 건축자재로 쓰기 위해서 없앤다는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수천 기의 무덤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p. 295)


일본은 전쟁속에서 참 많은 것을 얻어간 나라이다. 다양한 실험으로 인체분야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발견도 있었는데 역사에서까지 그랬구나 싶은 것이.... 하지만 진실을 덮는 그러한 발견들 속에서 학자의 양심이라는 것조차 지키지 않는 일본인들의 뼈속깊은 믿음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후지무라의 조작사건과 침묵했던 학자들의 이야기는 더더 그들의 집단적 왜곡인식의 폐해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 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주거지는 제대로 발굴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금석병용기(청동기와 신석기시대가 함께 나왔음을 의미)' 라는 용어가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말은 원래 유럽에서 사용되었는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용어를 한국인들의 미개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즉, 금석병용기를 '청동기를 수입해도 여전히 미개한 상태에서 석기를 쓰는 시대'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미개하고 그 문화적 역량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청동기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기시대로 살았다는 뜻이다.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p. 225,226)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 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북한 고고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청산하면서 그 기세를 높였고, 1960년대에는 고조선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중고등학교에서 상식처럼 배우는 '고조선은 비파형동검을 사용하여 돌널무덤을 만들었다' 는 사실도 밝혀내다. 이렇듯 층위적인 발굴과 중첩의 확인은 고고학의 교과서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 (p. 226)


지금 우리가 상식처럼 배우는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 , '민무늬토기=청동기시대' 라는 것은 발굴로 증명된 것이고 이러한 발굴로 일본의 잘못된 식민 패러다임을 깨트린 것은 북한의 발굴단 이었다. 북한의 발굴단은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을 함께 발견했으며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동기시대 문화층을 불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여러 면에서 북한 지식층이 앞서 나갔다. 하지만 강압적 통합의 정시사 속에 북한은 멈추었고, 분열과 비난의 정치사 속에 더디었던 남한의 발달은 늦었지만 빨랐다. 현재 시점에서 역사적 협력의 필요성이 다시한번 뼈저리게 다가온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궁전이나 무덤 같은 유적은 없었다. 발견된 무덤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해서 계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유적지에는 사원이나 군대의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p. 238)


세계4대문명 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곳들 중의 하나가 인더스 문명이다. 나는 인더스 문명이 막연하게 인도위쪽 강가 에서 시작됐고 그 문명이 지금의 인도로 이어졌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하며 그 기원과 멸망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문명이었다. 고대문명은 밝혀지지 않은 만큼 많은 이야기가 기대되기 마련인데 인더스 문명에 대해선 정말 알려진게 너무 없구나 싶은것에 새삼 놀랐다.

인더스 문명 못지 않게 신비로운 문명으로 현재 중국땅의 '홍산문화' 이다. 중국에는 역사적 유물 유적지도 정말 많은데, 홍산유적지는 특이한 것이 대형 제사유적지는 발견되었는데 주변에 성터나 마을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제사만 지내는 성스러운 지역인 것으로 이 문화 또한 기원전 2700년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고고학은 굉장히 판타지적 재미가 있다. 거대한 제사터라... 괴베클리 테페가 생각나기도 하고...


고고학자에게 명성은 마치 헤엄치는 고래와 같다. 고래는 오랜 기간 물속에 잠겨 있다가 때가 되면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분출한다. 너무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수면 위에 계속 머물러서도 안 된다. 너무 오래 수면 위에 있다면 결국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수면 위에서 따뜻한 햇살을 바라보는 건 좋지만 고래가 살아야 할 곳은 물속이듯, 결국 고고학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혼자 외롭게 유물을 바라보는 중에서 피어나야 한다. (p. 265)


고고학자의 고래에 대한 비유가 마음에 와 닿았다. 공명심으로 거짓과 왜곡을 일삼는 학자들에게 이런 즐거움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물이 주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전시품 안에 있는 유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고고학에서는 하나의 유물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새로운 유물은 게속 발견되고 그에 대한 해석 역시 계속 바뀐다. 이렇듯 고고학에는 정답이 없다. 고고학은 매일 바뀌어가는 일상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p. 277)

고고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자료로 과거들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미래를 지향하는 학문인 이유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고학은 더욱 더 진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고학을 마치 먼지구덩이의 유물만을 꺼내는 고물상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유물이 예전 것이기때문에 고고학자들도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생각은 마치 노인들을 질료하는 병원의 의사도 똑같이 늙고 기술은 낡았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과 같다. 실상은 다르다. 고고학은 첨단과학의 각축장이다.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중에서 가장 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바로 고고학이다. (p. 305)

고고학은 인간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같이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생존을 거듭하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느낄 수 있는 지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고학은 이어진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고고학은 계속된다. (p. 310,311)


저자가 말하는 고고학은 젊어서 좋았다. 고고학자로서의 순수한 기쁨과 유물 유적에 대하는 호기심과 역사인식·사람에 대한 공정성이 매력적으로 녹아 있는 문장들이 편안하면서도 울림이 있어 좋았다. 고고학적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고고학에 대한 지혜를 얻어가는 재미를 주는, 여러모로 참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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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내 인생의 사서四書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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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중용]60수의 힘

 

저자의 이름은 못외웠어도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이라는 책 제목은 정말 많이 들어봤다. 사오년전쯤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기억이 안나는 걸로 보아 저자가 사십대에 썼던 논어 책을 제대로 못 읽은 것 같으니, 저자가 오십대에 쓴 중용 책은 잘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논어' 원전 완역본을 읽었는데, 그때도 이전에 읽었던 논어 관련 책이 기억이 안나서 그때는 내 기억력의 문제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 알았다. 내 기억력도 문제는 문제지만,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은 논어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십, 중용을 읽어야 할 시간' 이 중용 책이 아닌 것처럼.

이 책은 중용에 대한 해설이나 번역을 중심으로 한 책이 아니다.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교수인 저자가 오십대의 나이에 생각해봄직한 화두들에 대해 중용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인생강의를 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중용의 구절들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나오면서 중용을 중심으로 내용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순서상관없이 부분적 발췌를 해서 그 부분을 예로 들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을 잘 알고 있는 학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 들이기는 하나, 중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중용에 대해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을 읽고서도 논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중용 자체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이 아니라, 오십대에 생각해보면 좋을 내용들을 인생조언처럼 여기며 이 책을 읽는다면 편안하고 수월하게 읽히는 책이다. 삶의 연륜이 꽤 쌓인 나이이긴 하나 아직 '지천명'을 깨닫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릴때 고전의 몇 마디 말로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들이 더 내려놓고 더 배우는 마음자세를 갖게끔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읽다보면 '중용' 을 제대로 읽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중용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뭔가 중간적이고 중심적이고 그래서 묵직하고 편안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데, 사실 중용은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잡하던 세력의 다툼 속에서 탄생한 중용은 그래서 더욱 나라의 중심을 군주의 중심을 개인의 중심을 강조하게 됐던 것인듯 싶다. 그래서 저자가 제일 처음 인용한 중용의 구절이 '소은행괴' 이다.

[중용] 하면 평온하고 차분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예상할 수 있다. [중용]은 극단이 판을 치는 '소은행괴'의 세상에서 주위에 널려 있고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평범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쉰의 나이도 조명이 쏟아지는 특별하고 화려함보다 공기처럼 편안하고 일상처럼 부담 없는 보통에 다시 눈이 가는 때다. 보통이 결국 오래가기 때문이다. [중용] 과 쉰의 나이는 평범함에서 잘 어울린다. (p. 21)

사회가 혼란할 수록 다양한 인간군상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중용이 필요했던 춘추전국 시대는 공감력 없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소은행괴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 인용된 구절들 중에는 공자의 말씀도 많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손자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연구했구나 싶기도 했다. 사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사상은 후대로 갈수록 반론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공자의 사상은 당대에 실패했기에 후대에 확산되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시대를 그렇게 망가트렸구나 하는 후회가 다음 시대는 제대로 바른 세상을 만들어보리라는 기대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져 오게 한 것이 아닐까. 그때와는 또다른 소은행괴들이 판을 치는 현대에서 나이들어갈 수록 중용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이 그렇게 이여져 있는게 아닐까.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약한 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혼자 있는 상황에서 삼간다. (p. 44)

[중용]에서는 이중의 역설을 통해 나는 '자신을 알고 있는 나'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공적 공간에서 주의하는 만큼이나 사적 공간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에 대해 유학이 사람에게 숨 쉴 공간을 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할 수 있지만 자신을 전일적으로 통제하려는 도전으로 볼 수도 있다. (p. 47)

 

유학은 대부분 개인개인의 수양을 강조한다. 사실 한사람한사람이 다 각각 제대로 된 한사람한사람이면 그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저절로 올바른 사회가 될수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올바른 한사람한사람이 될 것을 공자왈맹자왈 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이 중용대로 살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데도 이를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중용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고 또 왜 중용대로 살아야 하는지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 쓰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p. 60)

공자는 중용대로 살 수 있지만 한 달 동안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중용대로 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장기적으로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p. 61)

 

중용을 설파하는 공자님도 중용대로 사는 것이 한들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니... 그럼 공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범부들은 어쩌란 말인가? 중용을 배우란 말인가 배워도 소용없다는 말인가? 이 뒷 내용을 정말 주의깊게 읽었는데 어려운 이유는 나와도 해결법은 나오지 않았다. 어려운 이유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역시 중용을 완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걸까...

내가 자식으로 부모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자식을 키우면 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부모를 모시면 된다. 핵심은 내가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분명하지 않으니 자식과 부모에게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쩔쩔매게 된다. (p. 90)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었다. 좋은 말이었다. 내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기대할때 나도 자식으로서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뭔가를 기대할때 내가 내 자식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선이라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를 터득하는 것이 교육이다. (p. 107)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은 사람이 천에게 명령을 받은 대로 살아야 하고 그 명령의 내용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라는 맥락으로 읽힌다. 사람은 천이 명령한 본성을 실현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그러지 않으면 사람답지 않은 사람 또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사람은 천이 자신에게 무엇을 명령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지천 知天 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천명은 사람에게 인의예지의 네 덕목을 본성으로 실천하라고 명령했다고 할 수 있다. 천에서 성으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솔성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천이 명령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다. 성이 도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수도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솔성으로 실천하면서 도를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넓히는 길이 바로 나를 가르치고 남을 이끄는 교가된다. (p. 108,109)

 

이 구절이 [중용]에서 제일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책의 중간즈음에 등장하지만, 첫 구절은 기억해 놓고 싶었다.

[중용]에는 중용이 없다. 우리는 책 이름을 들으면 그 안에 이름에 어울리는 내용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중용]은 그렇지 않다. [중용]에는 중용이라는 개념이 자주 쓰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풀이한 내용도 없다. 그렇다 보니 [중용]을 읽고 나더라도 중용이 뭔지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용]이란 책이 [대학] [논어] [맹자] 에 비교해서 어렵다고 한다. (p. 113)

이 책에는 [중용]책이 없어서 '중용' 이 없다 치더라도, [중용] 책에도 '중용'이 없다니 그렇다면 '중용'은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그래서 예로부터 [중용]책에 대한 해설서가 많았고 주희 라는 학자의 책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하고, 정약용의 책도 의미있는 풀이라고 하는데, 필부로서 중용을 깨우치기는 더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제사는 유학을 종교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제사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교류함으로써 죽은 자를 주기적으로 소환하여 공동체에서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활동이다. 유학에는 사후 심판과 천당이라는 개념이 없다. 죽은 사람이 살아생전 행적에 따라 영혼이 구원되는 절차가 없다. 죽으면 육체적으로 소멸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철저히 잊힐 수 있다. 제사, 특히 명절 제사보다 일 년 단위로 지내는 기제사가 중요하다. 제사에서 향을 피워 영혼을 부르고 술을 따라 육신을 불러 제상에서 혼과 백이 만나게 된다. 제사상을 보고 후손이 자리하니 결국 조상과 후손이 만나게 된다. 이렇게 죽은 조상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살았고 후손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후손이 축문으로 일 년간 있었던 일을 고유하면 조상과 후손이 같은 소식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제사를 되풀이하면 세상은 산 사람이 독점하는 곳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교류하는 장이 된다. 이를 통해 조상은 죽어도 죽제 않게, 즉 영원히 살게 된다. 따라서 제사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생명, 즉 영생을 누리게 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p. 218)

세계4대종교 라고 하면, 기독교,불교,이슬람교,유교 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유교는 종교는 아니고 철학 혹은 사상이나 동양문화권에서 종교와 같은 전통적 믿음이라 4대종교로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사에 대해 이렇게 읽고 보니 유교의 종교성이 느껴면서 이해가 됐다. 그리고 한명 혹은 소수의 몇명만 누리는 영생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영생이라는 평등개념이 몹시 혁명적으로 보였다. 천당과 지옥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가능하고 모두에게 연결된다는 생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것 아닌가?!

[중용]은 성인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을 텐데, 다섯 가지라니 좀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인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이 신이라면 절대자, 전지전능 등으로 간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 성인은 신이 아니지만 범인과 다르다. 이런 성인의 특성을 설명하자니 이런 면도 있고 저련 면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p. 265)

첫째는 '총명예지'다. 성인의 첫번째 특징으로 앎을 내세우고 있다. 둘째는 '관유온유'다. 그것은 바로 부드러움이다. 셋째는 '발강강의'다. 기백이다. 넷째는 '재장중정'이다. 성인은 위엄이 있고 점잖으며 곧고 바르다. 기품이 넘치고 공정하다. 다섯째는 '문리밀찰'이다. 조리가 있고 디테일에 강하니 사태를 차근차근 구분하여 잘 풀어갈 수 있다.

이처럼 성인은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노력 끝에 이른 최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p. 266,267)

 

중용의 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였으나 성인이 어떤 사람인지 읽어내며 끝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이 오십이 넘고나면 모두가 성인이 될 마음으로 중용을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려나...

저자는 [중용]이 아름답다 하였다. 후대 학자들이 다양한 풀이를 끊임없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용] 자체는 함축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얘기다. 한자 자체가 뜻글자라서 한글처럼 문장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한구절한구절 한단어한단어 해석해 나가며 이해해야 하는데, 그 한자들로 이어진 문장들 단락들이 하늘에 구름인듯 바다위 파도인듯 눈에 읽히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시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두루뭉수리한 풀이보다는 명확한 해석이 필요한 사람인지라 저자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을 미처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중용 한문장한문장 풀이해주는 책을 읽고나야 이 책의 묘미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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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 사회, 과학, 수학, 국어 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김정화.김혜경 지음, 서원초등학교 교사연구회 감수, 박현주 기획 / 소울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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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나서 학창시절 때 얘기를 하다보면 자주 하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이라는 후회같은 탄식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름 역발상의 시도를 한 책이다. '그때 알게 된 것을 지금까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탄탄한 지식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역시 책 중의 책은 교.과.서. 라고나 할까. ㅎㅎㅎ 제목 그대로 정말 친절한 지식교과서 였다.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 국어, 사회, 과학, 수학 4과목의 핵심을 정리한 책으로 딱딱하게 단원별로 나눈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응용하기가 더 쉽게 되어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적절한 대답할 수 있도록 4년치의 지식을 질문별로 한번에 엮어 놓았기 때문에 왠지 좀더 고차원적 대답을 해주는 느낌을 주게 한다. 엄마아빠가 이걸 알겠어? 하며 미심쩍게 물어봤다가 이런 대답을 들으면 오~! 하는 감탄을 혹은 적어도 오호~! 정도의 공감은 할 수 있게끔. ^----^

사실 아이가 부모에게 질문을 해오는 때까지는 아직 아이가 어리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갖추어질수록 아이는 부모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질문하는 아이를 뒀을때가 그나마 키우는 재미가 있는 때라고나 할까. 질문하는 아이에게 '너네 배우는 교과서쯤이야' 하며 대답해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나름 멋진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런 부모의 모습을 갖추는데 이 책은 정말 유용한 책이다.

지리, 정치, 경제, 생명과학, 지구과학, 화학, 물리학, 국어, 문법과 맞춤법, 문학, 수, 식과 연산, 측정단위, 비율과 확율 등 단원별로 세세하고 책 뒤쪽에 교과연계표도 정리되어 있어서 정말 구성이 깔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도 200개가 조금 넘어서 그냥 상식책으로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혀지는 책이다. 잡학다식용 대중서가 정말 다양한 종류로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 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망라하며 하루에 한가지씩만 알아도 일년이면 365가지를 알게 되는 것부터 한 분야를 세세하게 파고든 것까지 마음만 먹으면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지적 대화는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과 지적대화를 나누려면 사실 그러한 지식책들보다 이 책이 더 쓸모가 많다.

초4~중2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읽어봄직한 책이다. 더욱이 국어 에서 맞춤법 부분은 어른도 헤깔려하는 것들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어서 더욱 유용하다. 그러고 보면 배워야 할 중요한 지식은 교과서에서 다 배운 것이 맞나 보다. 그런데 왜 교과서의 지식은 그리도 빨리 잊혀졌는지;;;; 이렇게 한 권으로 다양하게 되새김질 하며 읽다보니 교과서로 봤을때는 못 느꼈던 재미도 쏠쏠한 것이 벌써부터 2권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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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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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처럼 끊임없이 재생되고 뒤섞이는

죽음에 대한 충동과 삶에 대한 열망

자신을 구하고 싶은 절실한 이들을 위한 단 하나의 소설

 

 

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하는가. 기억되는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ㅇ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p. 1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 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 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p. 17)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서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p. 25)

질문은 상충하는 두개의 선택지가 아니고, 선택할 수 없어서 무수해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p. 38)

나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쓸모없어지는 것. 의자에 고요히 앉으려던 것뿐인데 이미 고통이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가는 것. (p. 40)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만 겨우 삶을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죽음만을 생각하는 동안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잊었다. (p. 55)

나는 책상 앞으로 달려가 다급히 쓴다.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다. (p. 69)

이것은 누구의 단어인가. 누구의 문장인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녀는 그저 한번만 그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완성된 문장의 힘에 붙들려, 문장이 단언하는 바를 믿고 싶었을 뿐인데. 존재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를 초과해버리는 단어를 읊조리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가는 음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아, 차라리 그녀는 언어를 잃고 싶다. 아무리 말해도 말해질 수 없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고 싶다. (p. 82)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p. 94)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p. 95)

120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문장마다 빗금치어진 무제 를 제외하면 116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95페이지에 다다라서야 작가는 고백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 소설의 표현방식을 따라하며 소감을 적어보자면,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기시작했고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도 소설인지 모르겠다. 소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끝까지 읽기로 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인물도 없고 사건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계속 생각한다.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죽음은 때로는 꿈에서 때로는 음악에서 때로는 환영에서 때로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작가의 머리에 번뜩인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생각일 뿐 일어나지 않았기에 작가는 계속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이라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사건이 되고 시간이 되어 줄거리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줄거리가 없다. 즉 아무 사건도 없다. 그 어떤 명징한 사물조차 등장하지 않고 소제목처럼 붙어 있는 피아노연주곡을 들으며 남긴 감상인가 싶었더니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냥 책으로 내면서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음악이랑 글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자동피아노 인가. 대체 피아노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작가는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작가가 만약 바이올린을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바이올린이 되었을까 작가가 만약 첼로를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첼로가 되었을까. 아니다. 피아노는 자동피아노가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현을 직접 켜야 하므로 자동악기가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생긴 자동악기를 만들면 되는것 아닌가. 나는 지금 소설에 대한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일까. 그냥 작가를 흉내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생각을 되짚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마음을 공감해보려는 것일까. 나는 소설을 읽었다. 다 읽었기에 이렇게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읽힐 수 있을까?

연재를 마친 뒤 한해가 지나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개고를 위해 작품을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 원고 검코를 마냥 미뤄온 탓이었다. 개고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동피아노]의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본 것이 바로 그렇게 찢기고 훼손된 언어였다. 끝없는 동어반복, 논리와 인과가 없는 진술, 상충되고 모순적인 사유가 끓어넘치는 정념에 매몰된 채 뒤범벅되어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소설을 써오는 내내 심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지만, 내게는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 문학적으로 제련된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봄에 쓴 [자동피아노]는 내가 작가로서 세워둔 최후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었다.

작가의 말 中

저자는 '작가의 말' 에서 자신이 그동안 극심한 자살충동과 우울과 불안증세가 있어왔음을, 치료를 받았고 호전되기를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죽음보다 삶을 생각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평생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변하였듯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죽고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그 충동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작가의 글을 소설이라고 읽어야 할지 일기라고 에세이라고 읽어야할지 독백 혹은 고백이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가가 썼으므로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소설책이라고 출판되었으니 소설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가 아닌 글을 담고 있는 이 책을소설이라 부른다면 허구라고 부른다면 작가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엇고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러한 작가를 보며 이 소설은 무엇인걸까. 이책이 소설인지 아닌지 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소설이건 증상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정도 공감을 한다거나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삶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므로. 하지만 소설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이 울려 퍼질지는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그닥 많이 울려퍼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긴 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이 책에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저자는 자신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는 것 같으므로. 하지만 자동피아노라는 것이 원래 연주자 없이 관객도 없이 그저 저 혼자 음악소리를 내는 것이니, 작가가 없어도 독자가 없어도 이 글이 책이 되어 나온이상 죽음에 대한 생각의 돌림노래는 계속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주는 관객이 없기를 바라며 울려 퍼지는 죽음의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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