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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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SNS 시대, 모든 것이 개인화된 지금도 대중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Vom Sog der Massen und der neuen Macht der Einzelnen 이라는 원제를 번역기에 돌려보니 '대중의 끌어당김 과 개인의 새로운 힘' 이라고 나온다. 독일어를 잘 모르니 이게 제대로 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어판의 원제는 대중과 개인을 연결짓는 부분에 있어서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책 내용을 좀더 충실히 반영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대중이란 어떤 개념이고 개인은 대중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저자가 두명이라서인지 내용을 절반쯤으로 나누었을때 앞부분과 뒷부분의 관찰시점과 관심대상이 좀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앞부분은 1978년부터교수이셨다는 노학자 군터 게바우어, 뒷부분은 1975년생인 젊은학자 스벤 뤼커 의 서술이지 않을까 싶다. 내용상의 표현방식은 큰 차이는 없지만, 논리전개를 위한 예시들의 사용에 있어서 앞부분은 과거 사건들을 뒷부분은 최근 사건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시점 차이가 두드러지고, 앞부분은 연륜이 뭍어나는 맥락이 있다면 뒷부분은 여기저기 튀는 산발적인 전개가 느껴지는데, 여하튼 이 책은 굉장히 독일적인 책이다.

예전에 어떤 강연에서 들었던가.. 어떤 인터뷰에서 읽었던가.. 하여튼 독일에서는 책이 많이 읽히고 독서모임도 활발하고 저자와의 강연프로그램도 많은 것에 대해 한국인이 칭찬을 했는데, 독일인의 답변은 의외였다. 책을 많이 보는 것이 TV프로그램이 너무 재미없어서 라고 했다. TV프로그램들이 예능은 거의 없고 드라마도 별로 없는데 온갖 시사정치토론 프로그램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에 대비 한국의 TV 프로그램은 정말 다양하고 무엇보다 엄청 재미있는게 많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ㅎㅎ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예전 생각이 난 것은, 이 책은 그런 독서토양을 가진 독일인들이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독일의 철학자가 독일의 국내상황을 '대중과 개인' 이라는 주제에 맞춰 독일인에게 설명해주고있는 이 책은 독일을 제외한 나라에서 얼마나 범용적으로 적용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내용을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독일의 학자들 이론 몇 가지가 자주 인용되는데 그 이론들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특히나 '엘리아스 카네티' 라는 학자가 누군지 어떤 이론을 펼쳤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이 학자의 이름과 저서는 수시로 언급된다. 마치 이 책이 카네티의 기존 이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기 위한 책인 것처럼.

하지만 현재에서의 대중과 개인의 관계와 의미는 과거와 분명 달라졌기에 이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따라서 이 책이 대중이론을 새롭고 분명하게 제시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론이 왜 필요하고 어떤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차근차근 따져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의 시도와 의도는 적절하고 또 의미있었다.

대중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순전히 수량으로 규정해서 대중의 특수성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중을 형성하기 위해 특별히 많은 사람이 모일 필요조차 없다. 대중은 실제의 사안, 의도, 정서, 평가를 결합시키는 데서 생겨난다. (p. 45)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대중 형성의 첫 단계다.

대중이 성장하는 두 번째 단계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중은 이제 실제의 행동, 몸을 움직이고 구호를 외치는 것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도 생겨난다. 이것이 대중 형성의 세 번째 단계다. 대중은 생각 속의 대중으로 변한다.

행동이 생각과 결합되는 순간에 대중은 잠재력을 얻을 수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대중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생기는 것이 대중 형성의 네번째 단계다. (p. 50~53)

 

대중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대중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에 대하여 저자는 1968프랑스와 1989독일의 통일을 예로 들어 대중의 특성을 정리해보고 있다. 그리고 조금은 뜻밖의 결론을 내린다.

결국에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승자들이 아니다. 나중에 정해질 '승자들' 과 '패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소한 사건들의 주인공인 말없고 이름 없는 다수가 역사를 서술한다. 이 다수는 위대한 개인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는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 의해 '목적의 세계(니체)'로 옮겨진다. 다수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의미'를 얻고 후세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의 역사는 '권력자의 비서들'에 의해 기술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는 '말없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증거들에 근거를 두고 기록되는 대중의 역사'다. (p. 78)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일종의 관용구 처럼 쓰이는 말이 아니었나. 우리가 읽는 역사책들은 누군가가 쓴 기록들이다. 따라서 승자 위주의 기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록이 되기까지 그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한 실제적 상황에서의 역사주체들에게 중심을 둔다.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낸 실제적 역사의 주인공은 소수의 영웅들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 바로 대중이다.

대중을 특정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나 구조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행동 방식들의 복잡한 가닥들의 다발로 인식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여러 층에 걸쳐 있는 복잡한 사안이 이 모든 것을 알려준다. 대중은 매우 다양한 원리로 움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을 그 구조에 따라 구분하고 분류하고, 기능을 발휘하는 특성들을 서술하고, 그들의 활동 구조와 그 형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p. 115~116)

대중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는 민중, 백성, 농민, 하층민 등으로 표현되는 역사속에서의 다수는 낮은 계급을 의미해왔고, 역사가 서술하는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묶여지는 특정되지 않는 모두를 포함한 큰 의미 없는 불특정한 다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다수를 역사로만 기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물론, 역사속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계급이 없어졌지만 계층은 오히려 다양해 졌고 개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개인이 모인 집단도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20세기는 대중의 시대이고 21세기는 개인의 시대로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게 아니라, 현재는 개인과 대중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2016년의 독일 통일 기념 연설에서 수상 메르켈은 예전의 구호 '우리가 국민이다'를 다시 꺼내 문장을 이렇게 바꿔 표현했다. '모두가 국민이다' 얼핏 간결한 이 표현은 구호의 원래 의미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1989년에 이 구호가 결코 포괄하는 뜻이 아니라 동독의 당과 정치인들을 겨냥했던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다. 사실 메르켈은 결코 순진하게 모두를 포괄한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페기다(독일의 극우성향 반잉슬람단체로 2015년 '우리가 국민이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극우운동을 펼침) 시위대가 1989년의 구호를 해석한 의도를 겨냥했던 것이다. 메르켈의 입장에서는 그 해석을 시급히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메르켈은 1989년의 구호를 새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렇게 전한 것이다. 당신들은 통일 전환기 이후의 독일의 근간을 이루었던 국민적 합의와 동떨어져 있다. 당신들은 모두의 일원이 아니며, 당신들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 앙겔라 메르켈의 연설에서 처음에는 모두를 포괄하는 모범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이중 대중의 전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p. 133)

대중은 다른 대중에 맞서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중 대중' 에 대한 설명을 풀어나가던 중에 나온 메르켈 총리의 일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치인들의 수사법은 정말 알고나면 이마를 탁 치게 될때가 많다. 이 책은 독일의 내부적 상황을 예로 들어 풀고 있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읽으면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통일 후 동독인들의 상황과 IS사태 후 난민들의 상황은 독일내에서 심각하게 분석해야 할 사안이었을 것이기에 독일에서의 대중의 의미는 우리와는 또다르게 풀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대적 상황이 대중의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 유일한 한국사례로 2016년의 광화문 광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저자의 논리 전개에 큰 의미는 없다. 따라서 한국의 대중에 대한 이해는 한국인 학자가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

포퓰리스트들의 리더들은 '입법자'의 이 중요한 역할은 결코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 누구나 경시당했던 경험을 기입할 수 있도록 공란만 제시할 뿐이다. (p. 165)

난민의 물결이 밀려오기 오래전 구동독 지역의 생활 공동체들은 정치인들로부터 의례적인 격려의 말을 들었었다. 그들은 구호의 손길로 생각해왔던 국가가 자신을 돌봐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많은 공동체들에서는 난민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사정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일자리가 상실되었고, 그 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넌 동독의 제도인 사회 시설들과 문화를 누릴 기회 등이 폐지되었다. 그들은 난민들에게 정서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자신에게서 최종적으로 애정을 거둬들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전의 '기득권층'은 자신의 고향 도시에서 국외자로 변해버렸다. (p. 176)

대중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무수한 사회적 접촉을 통해 날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활동을 한다. 포퓰리즘은 남들과의 사회적 접촉을 마치 오염의 한 형태나 되는 것처럼 기피함으로써 상시적인 위급 사태를 일으켜 이 일상성을 파괴하려 든다. (p. 180)

 

대중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단어가 포퓰리즘 아닐까. 선동적인 소수자에 의해 휩쓸리는 대중의 약한 모습을 우리는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퓰리스트들에게 흔들리고는 한다. 독일에서 구동독의 시민들과 난민들의 문제는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것과 현저히 다를 심각성을 띠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도 흔하다. 소외층이 더 소외되고 그렇게 더 소외되는 층이 더더 보수집단이 되어가는 것은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할 뿐 현실은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안타까울뿐...

대중행동과 그 장소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서로 힘을 강화해주고 감정을 고조해주는 작용이 일어난다. 어차피 취약해진 공간에서 벌이는 집단 난동은 그곳을 더욱 무가치하게 만들고, 슬럼화를 가속화하며, 결국에는 더욱 격렬한 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운동은 주요한 공공 공간들의 상징적 위력도 함께 누린다. 그들은 이 위력에서 이득을 얻는 동시에 '국민적 상징'인 그 장소의 역사에 새 장을 추가함으로써 그 위력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p. 184)

1장에서 4장 까지는 대중이란 무엇이고 개인이란 그 속에서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했다면 5장부터는 분위기가 약간 바뀌어서 대중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지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시작은 '공간' 이다.

대중의 성격과 공간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축제처럼 벌이던 시위와, 폐쇄된 일정 공간에서 억압받으며 불길처럼 일어난 시위는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6장에서는 에로스와 고립을 을 살펴보며 대도시와 대중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19세기의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 에드거 앨런 포, 샤를 보들레르의 작품을 통해 파악해 본다. 대중의 모습은 미학적은 시각으로도 새롭게 이해될 수 있었다. 소설이나 시에서 미학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다음은 영상매체 아니겠는가. 7장에서는 영화와 인터넷으로 범위를 넓혀 가상의 대중들을 파악해 보고 있었다.

가상세계는 마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지금은 컴퓨터 너드nerd라는 의미로 쓰이는 유저user라는 단어는 원래 마약 중독자를 나타냈다. 이 이야기에서 거리에 나서 항의를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실제의 대중은 각자가 따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대중, 디지털 원주민으로 대체된다. 네트워크에서는 감염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전형적인 대중역학이 관찰된다. (p. 258)

인간 유저가 진짜 신분을 모르는 소셜봇의 메시지에 감염당하면 허구의 대중에서 실제의 대중으로 변하는 것이다. (p. 268)

언제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두를 대변했다. '여론의 파멸'에 대한 한탄은 종종 세인들의 의견에 미치는 영향력 상실, 특히 예전에는 단독으로 누가 어떤 것에 관해 공적으로 말할지 결정했던 그런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력 상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대중을 조각으로 분열시킨다는 말이 맞다면, 이 새로운 사태는 정보의 다각화에 유리한 작용도 했다. 소위 모두가 일치해서 관심을 기울였다며 뒤늦게 이성적으로 찬양되는 '하나의' 여론을 되찾으려는 꿈은 인터넷에 의해 모두에게 제공되는 의견의 다양성을 미화하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태도다. (p. 263)

독자층은 새로운 종류의 대중이다. 독자층은 대중이 근대에 들어 띠게 되는 한 형태이다. 독자층은 가상적인 동시에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독자층은 비록 몸소 만나는 일은 없다 해도 상당수가 동일한 유행을 따르고, 동일한 신문과 잡지를 읽고, 그렇게 해서 동일한 의견이 형성되는 것을 통해 각자의 일체성이 생겨난다. 이 새로운 종류의 대중은 일부 영역에서는 과거의 대중을 몰아내며, 그밖의 영역에서는 그들과 공존한다. 독자층이라는 가상의 대중은 물리적 대중 형성을 대체하는 대신 강화해줄 수도 있다. (p. 270)

과거의 투쟁적 구호 '당신은 어느 편에 가담하는가?' 는 오늘날에는 틀림없이 '접속하는가'로 끝날 것 이다. 내가 어느 편에 가담하는지는 내가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는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p. 276)

 

그나마 소설이나 영화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모습은 파악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이 생기는 순간 대중은 실제 대중과 가상대중이 혼합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어느쪽이 진의를 가진 대중인지 알수 없다. 가상의 공간에서는 기계적인 여론몰이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기계적인 여론이 다시 실제적인 대중의 의견을 바꿔놓게 되기도 한다. 대중이 항상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읽으며 행도하기 전의 독자층은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층이다.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대중의 규모나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대중에 대한 파악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대중이 탈개인화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대중문화가 무해해지거나 더 나빠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대중이 너무나 세련화되고, 개인화되고, 주관화되어 있어서 주체의 유일성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동일철학의 폭넓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의 개인들에 관해 서술하고 규범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조차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대중은 이질성과 내부 차이를 허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이질성과 내부 차이를 해방으로서가 아니라 규범화하는 새로운 형태로서 요구하기까지 한다. 대중문화는 바로 이 비동질적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다. (p. 287)

현대사회에서 대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이 정치사회적인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팬덤문화에서 대중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8장에서는 대중문화 비평을 통해 대중의 모습을 풀어보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 현상으로서의 개인주의는 하이데거의 세인에 대한 규정-'누구나 타인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며 아무도 타인이 아니다' (p. 294)

윙거의 '더 높은 형이상학적 질서'에 대한 설명은 이상하게도 하이데거의 '본원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두 이론의 바로 이러한 양상이 독자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파시스트들은 윙거와 하이데거를 별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이 두 이론은 막 대두하기 시작한 파시즘과 결합한다. 윙거의 '더 높은 질서'에 대한 지적은 그의 글의 가장 빈약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것이 뉴라이트 측의 숨은 의미로 변했다. (p. 301)

 

저자는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보며 현재에 적용가능한 대중이론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이데거 의 철학개념들도 종종 인용이 되는데, 처음 인용될땐 하이데거에 우호적인 걸까 싶어서 우려가 되었으나 뒤로 갈수록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안심했다. 여하튼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현대의 대중이론은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면 결론이랄까.

오늘날 대중 속의 개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 개인들의 행동이 대중의 속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역으로 개인들도 대중에 의해 변화된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대중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한낱 개인이 대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고, 대중이 구성원들에게 곧바로 작용하는 일도 없다고 간주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전능한 지도자를 요구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대중을 역사적 세력으로 이해할 것이다. 대중과 개인들은 오히려 어떤 역동적인 사안을 통해 다방면에 걸쳐 서로 결합되어 있다. (p. 327)

새로운 대중의 중요성이 현재로서는 인격 개념을 그대로 남겨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사회적 정체성과 주관적 정체성의 구분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p. 361)

 

대중속에 개인이 묻혀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고 개인들만 따로따로 있는 시대라고 할 수도 없다. 개인들은 이합집산하며 이런 대중이 되었다가 저런 대중이 되었다가 한다. 그러한 대중의 규모는 빙산의 일각처럼 보여진 대중보다 보여지지 않은 대중이 훨씬 크다. 게다가 가상의 대중과 실재적 대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변화시킨다. 대중과 개인은 서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개인의 힘과 대중의 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게 되었다. 새로운 대중이 탄생한 것인가, 어떤 대중인지 모르기에 새롭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개인이 올바른 대중이 된다는 기본 아닐까...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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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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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이제껏 우리가 몰랐던 우리 모두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변혁시켜 온 정신사의 궤적과 한국 사회의 방향을 제시해 온 이어령의 시대적 선언!

 

 

띠지의 사진을 왜 저런 포즈로 찍으셨을까;;; 종교 교주 같은심;;;

이어령 선생님 이름을 안들어본 사람보다 들어본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도 놀라운데,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시리즈 집필을 시작하셨다니 더욱 놀랍다. 게다가 그 시리즈 제목이 무려 '한국인 이야기' 이다.

00인 이야기 라는 제목을 들으면 대부분 로마인이야기 라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될 것 같은데, 나또한 그러하여 이 책이 소설적 역사이야기 인줄 알았다.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그 역사를 살아온 사람 즉, 한국인에 초점을 맞추어 연대기식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시려나 기대했다. 그런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책이었다. -0-

책은 태명 이야기로 시작된다. 태명이 굉장히 오래전부터 늘 있어온 관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어령 선생의 북콘서트 후 책에 사인을 해주던 자리에서 쑥쑥이이름으로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야 선생은 태명에 대해 알게 되신듯 하다. 그리고 태명이라는 것이 한국인만의 것임을 논증하기 시작한다.

한자가 들어오기 전 당연히 우리는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글자가 없어 그 뜻이나 소리를 이두식 한자로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라는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의 이명으로 '불구내' 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석에서도 광명이세 로 밝혀져 있듯이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 는 뜻이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를 토박이말로 환원하면 '불구내'는 '밝누리(놀이)'가 아니라 '밝아누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혁거세를 한자의 뜻으로 풀어보면 '밝을 혁' 과 '누리 세'로 그 뜻이 부합한다. 그러니까 혁거세는 원래 이름의 뜻을 옮긴 훈차요, 불구내는 그 이름의 발음을 적은 음차 라고 보면 된다. (p. 19)

태명으로 시작하여 이름에 대해 한글 이름과 한자 이름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시는데, 한글에 대해 이분만큼 정확히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일단 믿고 읽게 되는 내용들이었다.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퍼져있는 태명이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진짜 오리지널 한류라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되는 내용들이었다. 2001년쯤에서부터 태명짓는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그렇게밖에 안됐나 싶어 놀랐다.

아시아는 성을 중시하고 유럽은 이름을 중시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 표기 순서가 다르다. 아시아에서도 특히 한국과 중국은 성씨를 중요시 여겨 한국은 세계에서 성이 가장 적은 수에 속하고 인구가 그렇게나 많은 중국도 인구의 85퍼센트 안팎이 100개 이하의 성씨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성씨는 갯수는 많지 않은데 비해 일본은 성씨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여 성씨와 이름을 자주 바꾸고 새로 짓고 하다보니 30만 종의 성씨가 있다고 한다. 이름의 문화만 보더라도 서양과 동양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엄청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한 살 나이 차이에서 비로된다. 천년만년 다른 문화와 문명 그리고 앞으로 올 미래의 세월에 큰 차이가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최첨단 초음파 기술이라 할지라도 앞 못보는 심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태의 생명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람 눈의 수정체도, 카메라의 렌즈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오직 생명의 예지를 지닌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이라는 점이다. (p. 63)

저자는 한국인 고유의 배내 문화에 대해서도 장점을 부각시킨다. 한국나이는 서양식 만 나이와 혼용되어 헤깔리기 일쑤이지만, 태아를 생명으로 존중하여 태어나자마자 1살로 치는 태도는, 태아를 생명으로 존중하지 않고 0살로 치는 서양식 태도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걷고 뛰는 두 발의 힘이 오늘의 인간과 그 문화 문명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 못하는 것은 물건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은 손에서 나왔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 행동의 힘은 발과 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가정이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문화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손으로 쥐고 잡는 능력 때문에 짐승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같은 유인원들이 먼저 인간으로 진화했어야 옳았다. (p. 83)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침팬지나 고릴라도 하루에 기껏 길어야 3킬로미트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채집 시대의 원인류는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다는 것이다. 손이 아니다. 이동성을 가능케 한 바로 그 발과 다리가 오늘의 인간과 그 문화 문명을 만들어낸 주역이었던 것이다. (p. 84)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손이 아니라 발이 인간을 유인원에서 독립시켰다. 그리고 쿵푸와 가라데는 손을 사용하지만 태권도는 오직 발만 이용하는 운동이다. 태권도가 갑자기 달리 보인다. 최근 걷기 가 유행인데 이또한 달리 보인다. 쇠젓가락으로 콩을 집을 수 있는 민족도 한국인데 유일하다는데 심지어 발까지!! 저자의 한국인 장점논리에 점점더 빠져든다. ㅎㅎ

출산후 미역국을 먹는 문화도 한국인만의 고유한 산후조리법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미역은 바다속 잡초 취급당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출산과 미역국은 생소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미역의 산후조리능력은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있다. 뱃속 태아를 소중히 여기고 산후조리를 미역국으로 보신했던 한국인은 애초에 생명을 주시는 삼신할머니 문화부터 달랐다.

일찍이 이능화 선생이 <조선무속고>에서 지적한 것처럼 (삼신할머니 의)'삼' 은 한자의 삼(三)이 아니라 태(胎)를 뜻하는 우리 고유의 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맞는 말이다. 요즈음 말로도 탯줄을 자르는 것을 '삼 가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삼신을 '三神'이라고 해온 것은 '생각'을 '生覺' , 사랑을 '思郞' 으로 써온 한자 중독증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삼신의 뜻을 토박이말로 바꿔놓으면 꼬부랑 고개의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p. 120)

드라마 도깨비에서 등장했던 삼신할머니의 다채로운 모습(할머니 아가씨 등등)은 한국에서만 가능했던 표현이라고 한다. 타 문화에선 상상도 못했던 생명신의 모습이라고 ㅎㅎ 몽고반점도 한국인의 경우 발생률이 97퍼센트대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면서 한국인의 부지런함과 응원열정을 연결짓는데 묘하게 설득되어진다. 우리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하지만 타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신선했다.

인터넷에서 캐낸 한국인 이야기다. IMF의 환란 때 떠돌던 유머인 것 같다. 경제난으로 일가족이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실을 시도한다. 그런데 한 사람도 떨어져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였고, 어머니는 바람난 주부에, 딸은 날라리 였다. 거기에 큰아들은 제비족이었고, 둘재 아들은 비행소년, 막내는 덜떨어진 아이였다는 이야기다. 한국사람이라면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듣고 웃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유머 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기러기아빠' 나 '제비족' 그리고 '바람난다' 같은 독특한 한국어의 속어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더구나 '날라리' 나 '비행'의 동음이의어는 음운 체계가 달라 번역조차 불가능하다. (p. 145)

저자는 전공을 살려 한국어의 장점을 여러면에서 부각시키는데 읽을때마다 한글의 위대함은 감탄스럽다. 고전서만 고집하지 않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다양한 글을 인용하시는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인데, 저자가 퍼온 저 유머를 읽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한글은 정말 위대하다!

말의 힘은 대단하다. 젖을 빨던 아이가 음식을 '씹'는 아이로 성장하고, 오즘 '싸'고 똥 '싸'던 아이가 오줌 '누'고 똥'누'는 아이로 바뀐다. 이렇게 똥오줌을 '가리게'되면 가랑이 사이에 족쇄처럼 채워졌던 기저귀를 떼게 된다. 쉬쉬와 응가와 끙가 같은 절묘한 소리와 패턴을 분석해보면 태명과 상통한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쉬쉬' 는 잇소리다. 간지러운 잇몸에서 막 이가 나려고 하는 바로 그 치음이다. '응가'는 응애하고 태어날 때 숨 쉬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고, '끙가'는 그보다 더 힘을 줘야 하는 쌍기역 소리다. 이렇게 미세한 차이가 젖먹이 똥싸개아이에게 전달되면, 이제는 자의로 배변을 할 수있는 힘이 생겨난다. (p. 161)

한글이 위대한 것은 표현방식도 그렇지만, 애초에 그 글자로 적을 수 있었던 우리말의 표현이 다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말의 표현은 정말 글자 하나차이로 성장을 표현해 낼 수 있을 다채롭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제대로 번역될 수만 있다면 외국인들이 정말 깜짝 놀랄텐데...

제주도 지역을 제외하면 한국은 요람 문화권에서 벗어난 거의 유일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애를 업어 기르는 포대기는 밀착형 육아문화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애를 업고는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주도만이 아이를 구덕에 넣어 기르는 걸 봐도 짐작이 간다. (p. 172)

2,000년 전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는 스와들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부모는 아직 유약한 정신을 가진 아기들에게 약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견뎌내도록 강요한다. 그들은 울고 발버둥치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그들의 몸이 곧게 자라지 않고 굽을 까 봐 단단히 천으로 묶어둬야 한다. 그런 다음 차근차근 교양 교육을 시키는데, 만일 이 말을 듣지 않고 거부하면 겁을 주어야 한다' 아기를 천으로 꽁꽁 감싸주는 스와들링은 아이가 힘들어해도 강요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겁을 줘서라도 뜻을 이뤄야 한다는 폭압적 부모론이다. 적어도 세네카의 말 속에 아기의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 186)

부르는 언어가 다르고, 믿는 종교가 다르고, 감고 두르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더라도 유럽의 스와들링 풍습만은 어디를 가나 똑같았다. 공간적으로 모두 스와들 문화권에 속하는 유럽권 지역이다. 멀리 4,500년 전 고대로부터 17세기 이후 스와들링에 관한 비판이 이뤄지기 이전까지 스와들링은 아무런 문제 제게 없이 모두가 공유하는 육아방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스와들링 풍습은 전 세계적으로 뿌리 깊게 남아 행해지고 있다. (p. 194)

 

한국인만의 포대기와 기저귀문화의 장점을 이야기 하면서 서양에서 이루어졌던 스와들링 육아법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기저귀가 없었다니;;; 기다란 천으로 미라처럼 묶은채 요람에 떨어뜨려 아기혼자 재우면서 용변을 볼때마다 갈아준것도 아니라니;;; 뱃속에 있을 때는 생명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태어나서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보살핌이 없는 문화가 역사에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 그런데 한국인만의 독특한, 안고 업어 재우는 밀착형 육아의 스킨십문화는 서구로 건너갔고, 현재 한국에선 서양식 스와들과 분리형 육아를 선호하고 있다니 이무슨 안타까운 일인가... 나도 길거리에서 아이를 앞에 정면을 보게 하여 매달고 다니는 젊은부모들을 보면 머리와 팔다리가덜렁거리고 있는 아기를 보면 불안함이 느껴진다. 가슴에 꼭 안아주거나 등에 푹 업어주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언어학자들은 이 의성어가 가장 발달한 말로 한국어를 꼽는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의성어를 많이 쓴다는 건 이미 객관적 통계로도 밝혀진 바 있다. 정식으로 사전에 나와 있는 것만 8,000개다. 일본은 2,200개, 독일은 우리의 7퍼센트 수준인 541개이니 말하 것도 없다. (p. 237)

다채롭게 표현할 도구가 많다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류 드라마나 한국 아이돌이나 한국 영화가 점점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 축하축하 ㅎㅎ)

일본도 옛날에는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돌잡이 문화가 같았지만, 그것을 보유하고 발전시켜 지금까지 지속하는 것은 한국뿐이다. 요즘 일본에서는 책을 잡는 풍속이 없다. 지금은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책을 덜 읽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어를 보면 책과 연관된 단어가 많다. 일본 사람은 '쓰구에' 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은 '책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남편을 서방(書房), 'Library Man'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자기 남편을 '책방'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책으 귀하게 여긴 민족인 거다. (p. 274)

한국의 좌식문화를 상징하는것이 바로 앉아서 받는 돌상이다. 우리 돌잡이는 앉아 있고, 일본의 돌잡이는 같은 좌식문화인데도 돌상을 앉아서 받지 않고 서서 걷는다. '앉다' 와 '서다' 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비록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기는 하나 중세에 만들어진 버질의 동상은 좌상이었다. 그런데 르네상스에서 그것이 입상으로 바뀌게 된다. 중세의 '앉은 자세' 와 르네상스기의 '선 자세'는 대립된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서 있는 자세가 전투적, 행동적, 외향적인데 반해, 앉아 있는 자세는 평화적, 명상적, 내향적인 것에 가깝다. (p. 275)

 

돌잡이 문화가 한국에만 있었구나... 남편을 책과 연결시켜 서방님이라고 불렀다니, 남편은 책만 읽는 사람이었던건가 ㅎㅎ 여하튼, 좌식문화의 평화적 연결도 돌잡이 문화의 미래희망성도 다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잡는다' 는 의미가 들어있는 돌잡이문화가 있는 한국인만이 기회를 잡고 사랑을 잡고 운명을 잡고 나아가 세계를 잡는 '잡는다'는 의미를 가장 제대로 아는 민족이라는 저자의 표현에 그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ㅎㅎㅎ

'3'이란 숫자는 세계 어디에서나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한국인만큼 셋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건 그냥 돈이나 물건을 세는 수의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수를 알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셋이라는 수다. 서양아이들이 동전 던지기로 승부를 결정할 때, 동쪽 아시아의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로 내기를 한다. 이항대립이 아니라 삼항순환의 오묘한 사고 체계를 공유하는 거다. 그것도 일본 아이들은 동전 던지기처럼 단판으로 하는데 한국의 아이들은 보통 삼세판이다. (p. 283)

그렇다. 숫자 3 참 좋아한다. ㅎㅎ 저자는 이 숫자 3을 세살까지의 중요성과 연결지으며 다시한번 한국인만의 태교문화와 육아문화와 생명존중 문화의 우수함을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밖에 나가면 서양 아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그 방대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ㅇ르 찾아서>의 맨 첫머리가 그렇게 시작한다. 한국의 소설에서는 눈 씻고 보려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쓴 소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한국의 아이들은 '나들이'란 말을 알기 때문이다. 나들이의 집합 기억이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다. (p. 305)

서양문화에서는 일반적인것 같은 분리불안이 한국에서는 성립하지 않을 것 같은 육아방식에서의 신뢰감은 고향의 추억과 한국인만의 호미의 재발견을 거쳐 할머니 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꼬부랑 할머니에서 시작해서 열두 고개를 지나 꼬부랑 할머니로 끝나는 셈이다. 이 꼬부랑은 인간이 만든 직선길이 아닌 자연이 만든 길이기에 곧 신이 만든 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부모는 과거다. 내가 훗날 부모가 되면 부모의 과거였던 시간이 내 훗날 미래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옛 이야기의 의미다. 수천 년을 이어온 옛이야기, 그때 내 말이 있었고, 내 말이 또다시 수천 년을 이어 아이의 옛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 아이의 아이로 또다시 이어진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또다시 과거가 되어 미래로 탄생한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오래된 미래'라는 당착어법이 생겨난다. (p. 381)

과거는 현재의 자양분이 되고 현재는 미래의 기반이 된다. 옛이야기들은 쌓이고 쌓이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고계속 이어진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이어지는 것, 저자는 이러한 것들을 찾아내고 있다. 한국인만의 옛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자긍심을 북돋우며 오래된 것을 잊지 말고 활용하여 미래를 만드는데 활용하도록 연결짓고 있다.

'오래된 미래'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티벳 저쪽 산골마을 라다크의 현실을 다룬 오래된 미래는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단어였다. 미래 보다는 오래된 에 방점이 찍혔달까.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오래된 미래는 그 의미가 아니다. 오래되었지만 소중한 한국인만의 고유한 장점을 대를 이어 계승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이다. 오래된 을 바탕으로 한 미래에 방점을 찍는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국인 이야기' 는 이제 탄생 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시킬 지 모르겠으나, 역사서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아울러 '한국인 이야기' 라는 제목을 쓰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저자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령과 병환으로 십년만에 완성됐다는 이 '탄생'을 시작으로 마지막 권까지 지적 활동을 멈추지 않으시길 응원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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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랑이 처음인데요 - 사랑이 막막한 십 대를 위한 심리학 이야기
이남석 지음, 유지별이 그림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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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막막한 십 대를 위한 심리학 이야기

십 대의 성(性)과 사랑에는 심리학이 필요하다

 

 

북트리거 출판사에서 나오는 청소년 책들을 여러권 읽어봤는데, 다 좋았다. 과학, 인문, 사회, 정치 관련한 내용을 청소년들이 읽기에 쉽고 재밌으면서 톡톡 튀는 감성까지 두루 갖춘 책들로 책을 읽기 싫어하는 청소년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는 한방을 빵~! 날리는 듯한 늘 기대이상이었던 책들이었던지라, 새로 나온 이 책에도 관심이 갔다. 하지만 시작전부터 솔직히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십대의 사랑이라...

저자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강연과 상담을 하고 있는 현업 심리학자다. 청소년심리에 관심이 늘 있어왔는지 청소년의 고민에 조언을 해주는 책으로 쓴 것이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자녀들은 궁금해하지만 부모들은 피하고 싶은 주제인지라 시작하기전 마음이 조금은 무거웠는데, 작고 얇은 책으로 일러스트까지 곁들여진 예쁜 책이라서 손에 잡자마자 쑥 읽히는 책이었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연애는 무엇이고, 독이 되는 연애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해요. 저는 청소년기에 사랑을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가오는 사랑을 피하며 꼭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따면 일부러 피할 필요는 없어요. 자신의 삶과 행복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사랑을 하는 것이 맞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저의 우려는 내가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심에 놓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모르겠고, 일단 연애는 좋다니까 호기심이 생기네. 한번 해볼까?' 라는 십 대의 생각은 '행복은 모르겠고, 청소년기에 연애는 좋지 않으니 무조건 나중에 하라고 말해 버리자' 라는 어른의 생각처럼 문제가 있어요. (p. 10)

청소년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영 불편한 것이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되어가나 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길가다가 마주치는 청소년들의 연애모습은 내가 현실감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알아야는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보다도 청소년들이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이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으로 다가갔으면 싶은 마음이 있다.

만약 주변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착하다' 라는 말을 해줘서는 안 돼요. 대신에 '너는 행복해야 하는 사람' 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해줘야 해요. 스스로도 상대방을 위해 착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해요. (p. 21)

이 책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 부터 애착까지 사랑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이 쉽게 오판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조언으로 시작한다. 무엇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에 대한 첫 내용이 가장 와닿았다. 청소년들은 아직 어른들의 보호아래 성장중인 미성년자다. 누군가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은 보호자의 의견에 생각이 좌우될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은 보호자가 아니어도 옆에 있는 사람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누군가가 연애의 상대일때는 더욱 판단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가 어떻게 생각할지 애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채는 연습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들어야 어른이 되어서도 스스로를 잘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들의 사랑에서 있을 법한 사랑의 형태, 스킨십에 대한 고민, 책임의 문제, 이별의 아픔까지 저자는 시종일관 따듯하고 친절하면서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사이사이 내담자들의 사례도 곁들여가면서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경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에 조언을 구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부디 이 책이 여러분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원리를 제대로 알고 사랑을 해야 행복할 수 있어요. 행복할 수 있는 원리를 알고, 그 방법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더 나은 선택과 실행을 응원합니다. (p. 162)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의 사랑과 결혼에 있었던 시행착오를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누구나 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것임을 말하고, 이미 시행착오를 거쳐 그 시행착오가 실패라고 여기고 있을 청소년에게 다독임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이 책은 어려운 이론도 없고 내용이 짧으면서 공감도도 높고 글말미마다 뼈때리는 조언도 짧게 정리해놓아서 책을 가까이 하지 않던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호기심이나 욕망이나 희생이 아니라, 사랑이란 어떤 형태이건 자기자신을 중심에 놓고 상대방과 함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없이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어 좋았다.

내가 생각할 때 청소년기의 사랑은, 사랑을 굳이굳이 해보려고 혹은 굳이굳이 하지 않으려고 의식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마는 것으로 부담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다만, 하게 된다면 적어도 이 책이 알려주는 에티켓 정도는 알고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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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지성 클래식 10
루 월리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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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50년간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 <벤허> 의 모태가 된 원작 소설을 만나다


BEN-HUR : ATALE OF THE CHRIST 는 루 월리스(1827~1905) 작가의 1880년에 출간된 기독교 역사소설이다.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벤허 하면 격렬한 로마식 전차경주가 펼쳐지는 흑백장면이 자동적으로 떠오를만큼 유명한 영화로 제목이 낯익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기독교적인 작품인지는 몰랐다. 부제가 그리스도 이야기 인것도 몰랐다. 종교에 성서에 무지한 나에게 벤허는 그저 오래된 소설이었다. 흑백영화같은 소설이었다. 원전번역고전을 좋아하기에 읽게 된 책이었다. 그런데 읽고나니... 여러모로 엄청난 책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히브리어에서 Ben 은 '~의 아들' 이라는 의미로 벤허는 HER 가문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벤허의 인생과 그리스도의 인생이 묘하게 맞물리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성서 못지 않은 종교성와 역사책 못지 않은 역사성을 조화롭게 엮어내고 있어서 800여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을 소설로서 몰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다만, 책의 가장 앞부분에 있는 역자서문이 옥에 티라고 생각된다. 작품이나 작가보다 더 깊은 종교인의 자세로 써낸 서문은 나같은 비종교인이 읽기엔 좀 거북해서 이 책의 의미를 좁히는 느낌을 주었다. 서문이 주는 편견없이 이 작품을 읽는 것이 훨씬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동방박사 세명의 만남으로 시작되는데, 그리스인 인도인 이집트인 으로 이루어진 동방박사들의 구체적 재현이 흥미로웠다.


이곳에서 먼 서쪽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에 무척이나 많은 것들을 주었고,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예술, 철학, 웅변, 시, 전쟁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 여러분, 그 나라의 영예는 완전해진 글자로 길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찾아내어 선포하게 될 그분께서 바로 그 나라의 언어를 통해 온 세상에 알려지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그리스입니다. 저는 아테네 사람 클레안테스츼 아들 가스파르 입니다.  (p. 31)

저는 멜키오르 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가장 먼저 문자를 가진 언어, 즉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인입닏. 저희 민족은 지식을 탐구하고, 그것을 세분화하여 발전시킨 최초의 민족이지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종교와 유용한 지혜의 원천으로서 4베다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p. 36)

저는 이집트 사람 발타사르 라고 합니다. 저희 민족은 자랑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지요. 역사는 저희 민족과 더불어 시작되었지요. 저희가 최초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에게는 구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전하는 시 대신에 확실한 사실을 전하죠. 오 멜키오르 형제, 바라-브라만의 베다나 브야사의 우팡가보다도 오래되었고, 오 가스파르 형제, 호메로스의 시가나 플라톤의 형이상학보다도 오래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전이나 역대왕조와 마야 부인의 아들 부처의 경전보다도 오래되었고 히브리인 모세가 등장하는 창세기보다도 오래되었지요. 인간의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저희 민족 최초의 왕 메네스의 기록이랍니다. (p. 43)
이 세명의 동방박사들은 성령의 별을 쫒아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빛의 안내를 받아 구유속 아기를 경배드리게 된다.
그리고 마구간의 말구유 라는 것이 비천한 곳에서의 성스러운 탄생을 비유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당시의 유대인들의 여행 관습에 의해 굉장히 자연스러운 환경 속 거처였음을 알게 되어 신기했다.


동방박사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했다. 그들이 보기에 아기는 여느 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머리 위에는 후광이나 왕관 같은 것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말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그들의 환성과 기원과 기도를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아기처럼 등불의 불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아기는 그들이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구세주였다! 그들은 일말의 의심 없이 경배하였다. 왜일까?
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알고 있는 그분이 보낸 징표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으로 충분하여 그 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p. 119)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난 다음장은 스물한 해를 건너뛴 시점에서 벤허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작가가 건너뛴 이 스물한해가 너무나 궁금한데;;; 구세주로 태어나 경배받은 아기의 성장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한데... 이렇게 한문장으로 건너뛰다니 너무너무 아쉬웠다. 성서에는 이 성장사가 나오려나?
종교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인간인 붓다 나 마호메트의 경우 인간으로서 성장사가 이미 알려져 있다. 인간으로 자란 후 성장하여 종교적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인생이 전체적으로 대부분 밝혀져 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메시아로 지정받은 (인간인) 예수의 성장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왜일까? 인간으로서의 삶은 왜 마지막 모습만 알려지고 성장사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벤허 이므로 배경인물인 예수의 모습은 잠깐씩 나올 뿐이니 나의 궁금증은 저자의 서술 의도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패~쓰.


디오니소스를 걸고 맹세컨데 도대체 유대인이란!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심지어 하늘과 땅도 변하지. 하지만 유대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 태초의 선조들 모습 그대로야. 이 모래에 원을 하나 그려볼 테니 봐! 유대인의 삶에 또 뭐가 있는지 말해 보라고. 그저 돌고 또 돌기만 한다고. (p. 134)
네가 정말 안됐어, 율법학교에서 회당으로,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가겠지. 별 가능성은 없는 삶이지. 하지만 나는... 로마인 앞에 어떤 가능성들이 펼쳐져 있는지 보라고 (p. 135)
이제 그만 현명해져. 어리석은 모세의 율법이나 전통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운명의 여신 파르카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고. 그러면 너에게 말해 줄 거야. 로마가 바로 세계라고. 유대에 대해 물어봐.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 줄 거야. 유대는 로마의 뜻에 달려 있다. (p. 140)

벤허와 메살라는 어렷을 적 친구였다. 하지만 로마로 유학을 가서 완전한 로마인으로 성장하여 돌아온 메살라는 완전한 유대인으로 자란 벤허와 가치관이 정반대인 사이가 되었다. 로마인에게 좋은 가치들도 있었을텐데, 온갖 안좋은 것들만 골라 익혀온 메살라의 자만심은 벤허의 경건한 종교를 비웃고 깍아내렸다.


로마에서는 시인, 웅변가, 원로원 의원, 궁전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풍자라고 하는 것에 온통 미쳐 있다더구나  (p. 151)

 옛 친구에게서 반가운 해후가 아닌 쓰라린 상처를 받고 돌아온 벤허에게 벤허의 어머니가 표현하는 로마인들을 보며 나는 저자의 문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굉장히 로마풍이라고나 할까 ㅎㅎㅎ. 풍자 라는 단어를 본 순간, 얼마전 읽은 찰스 디킨스의 문체가 떠올랐다. 벤허의 저자인 루-월리스와 찰스 디킨스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그 시대 작가들 문체는 다 이렇게 풍자적이었을까? 벤허의 서술방식도 은근 풍자적이다. 예전 무성영화를 설명해주는 변사처럼 혹은 그이전 세세한 장면하나하나를 서민적으로 풀어내놓던 판소리꾼처럼 이 소설 또한 제3자가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목소리를 변형해 인물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읽다보면 어떤 순간에는 얼쑤! 혹은 저런! 하는 추임새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하튼 그 다음날 사건이 터진다. 새로운 총독 행렬을 구경하던 벤허의 방앞 기왓장이 미끄러 떨어지며 총독을 맞추었고, 총독은 살해혐의를 씌워 벤허집안을 하루아침에 몰락시킨다. 메살라는 총독과 한편이 되어 벤허집안을 무너뜨리고 재산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벤허는 갤리선 노잡이 노예로 끌려간다. 그리고 노예로 끌려가던 길에서 잠시잠깐 인간 예수의 인상적인 호의를 경험한다.


노잡이 노예로 배에서 5년을 보내는 동안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벤허는 새로운 사령관의 목숨을 구해주게 되면서 양자로 입양되어 아리우스2세가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다시돌아오게된 벤허는 아랍인 일데림 족장과 동방박사의 한명이었던 발타사르의 이야기를 통해 메시아에 대해 알게 된다.



벤허는 어떤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비참함과 그들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은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사람들의 한탄과 탄식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브리튼의 참나무 숲에서는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사람들의 신봉을 받고 있으며, 갈리아와 독일과 북유럽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딘과 프레이야가 여전히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집트는 악어와 아누비스를 숭배했고, 페르시아는 여전히 아후라마즈다와 아리만을 섬기면서도 악어와 아누비스 숭배를 받아들였다. 열반의 희망을 품고 있는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의 암흑의 길을 정진한다. 아름다운 그리스인들의 마음은 철학에 머무르면서도 호메로스의 영웅적 신들을 노래한다. 반면에 로마에서 신들만큼 흔해 빠지고 값싼 존재는 없었다.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숭배와 봉헌의 대상을 마루엏지도 않게 이 제단에서 저 제단으로 변덕스럽게 바꾸었고 수많은 신들을 세워놓고 즐거워했다.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신들의 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신들은 다 차용해 놓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제들을 신으로 떠받을며 제단을 만들어 거룩한 의식까지 지냈기 때문이다. 그랬다, 민중의 불행한 처지는 종교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실정과 수탈과 헤아릴 수 없는 폭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도탄에 빠져 벗어나기를 간절히 빌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은 지독하게도 본질적으로는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 390)

당시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 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고전을 읽다보면 당시의 종교들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데, 그 종교들을 저마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읽을때 나는 늘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유대교의 유일신은 화려한 로마가 보기에 답답해보였을 수 있고, 정신없는 로마의 다신교는 유일신의 유대교에서 보자면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벤허는 종교적 생각에서 시작했으나 점차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게 되고 그 방법은 결국 정치적 선택일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메시아는 왕이어야 했다. 유대인이 바라던 메시아는 왕의 모습이었고, 왕은 권력의 대체일 뿐이었으나 인간의 방법만 생각할 수 있던 때로서는 다른 방법은 믿을 수 없었다. 벤허의 중립적인 태도와 메시아의 개념에 대한 갈등은 곧 이 책의 핵심이자 종교의 핵심일 믿음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종교적이기만 한것은 아니다. 나름 삼각관계 로맨스도 펼쳐지는데, 동방박사 발타사르의 딸 이라스 와 벤허 집안의 집사였던 시모니데스의 딸 에스더 는 벤허에 대한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집트 여인 이라스에 대한 묘사는 교활한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고(클레오파트라를 이렇게 악녀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좀 유감스럽지만 서양인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것은 안다;;;)  유대인 처녀 에스더는 순종과 복종의 결정체다. 그리고 사실 벤허가 에스더를 여동생처럼 여기겠노라 말한 순간부터 아무리 이라스의 매력에 끌려도 결국 에스더에게 갈 것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여동생은 곧 아내가 되지 않던가.


벤허는 일단 개인적인 복수에는 성공한다. 메살라와의 전차경기에서 이김으로써 명예와 재산을 되찾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전차경기를 전후해서 벤허는 개인에서 종교인으로 변화해간다.



"복수야말로 유대인의 당연한 권리요 법입니다"  (p. 488)

소설을 읽어나가며 신기했던 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신분계급도 철저히 유지하며, 상하관계에서의 순종과 복종은 엄격하고, 복수는 당연하다. 따라서 로마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 복수를 실행해줄 왕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켜나가는 모습은 그 두 종교의 유사함을 더욱 느끼게 했다.


종종 나오는 표현인 " 왕께서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모습으로, 따르는 이 없이, 군대도 없이, 도성이나 성채 없이 말입니다. " 라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기대는 발타사르 에게는 영혼의 왕국으로 시모니데스에게는 유대나라의 왕국으로 인식되어지는데,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 엔딩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벤허를 비롯한 소수에게만 이루어지면서 성서의 역사는 소설에서 펼친 역사와 맞물려 떨어진다.


사람들은 꿈이 밤에 잠잘 때만 꾸는 거라고 하지만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결과들은 저절로 예정된 것이고, 저절로 예정된 것들은 모두 깨어 있는 꿈속에서 만들어진다. 꿈을 꾸면 노동에서 해방되고 포도주를 마셨을 때처럼 활기가 넘친다. 우리가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노동 자체 때문이 아니라 꿈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꿈은 늘 단조로운 일상에 들어 있어서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사는 것은 곧 꿈꾸는 것이다. 오로지 죽어 무덤에 묻힌 후에야 꿈이 사라진다. 벤허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 벤허의 행동을 보고 비웃지 말기를. (p. 596)

벤허가 왕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며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중에 하는 생각들을 저자는 비웃지 말기를 당부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저자의 당부보다 저자가 말하는 꿈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가 인간에게만 있는 것처럼 영혼의 존재와 꿈의 존재도 인간에게만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꿈과 종교와의 관계성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게 해보게 되기도 했다.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없다네. 우리 신앙의 차이점을 알겠네. 자네는 인간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나는 영혼의 구원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지. (p. 651)

철학자들은 신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할 걸세. 그래서 영혼의 존재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각기 알맞은 정신을 갖고 있다네. 오로지 인간에게만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자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나?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그러한 힘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더 나은 내세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거라고 생각하네. (p. 655)

그러면 이제 실제적인 문제가 남는군.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하는 문제지. 만일 그분이 헤롯과 같은 왕일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는 한 자네는 당연히 왕홀을 쥐고 황제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계속 찾아다니겠지. 반면에 내가 찾는 그분은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평범한,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시라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표징으로 알아보게 되겠지. 그분은 나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실 것이네. 영혼의 아름다운 순수한 삶 말이지. (p. 657)

소설 속에서 가장 유대교적인 인물은 이집트인 발타사르 이다. 발타사르의 발언들은 일정하게 종교적이다. 그리고 가장 비유대교적인 인물은 발타사르의 딸인 이라스 이다. 이라스는 시종일관 이집트의 신들과 로마의 문화를 찬양한다. 메시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발타사르가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그의 신실한 믿음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인 그의 딸에게는 전파되지 않았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작가는 의도한 것일까?


여하튼, 목수의 아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고 그리스로도 선포된 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되는 마지막 장은 벤허와 예수의 부활의 장이다.

3년 동안 벤허는 예수의 언저리에서 그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며 언제든 그를 유대의 옥좌에 앉힐 수 있게끔 뒤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이고 벤허는 혼란스럽다. 죽은줄 알았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환자로 예수앞에 엎드리고 치유되는 기적을 보며 벤허는 더욱더 예수가 실천하려는 가치에 대해 고심하게 된다.



우리는 늘 인간보다 뛰어난 것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 나사렛 사람이 미문에서 그냥 반대편 문으로 걸어 나갔다고 이라스가 투덜거린 경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분이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행태를 완전히 뛰어넘었다는데 있다. (p. 742)

"난밤 저들이 그분을 잡아 재판한 수 새벽녘에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지요. 빌라도는 두 번이나 그분이 죄가 없다며 넘겨주기를 거부했지만 저들의 저항이 완고하자 마침내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저들이 대답했습니다"

"저들이, 제사장과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p. 766)

"대장님, 지금 속고 있는 분은 저희나 동지들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나사렛 사람은 왕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를, 이스라엘을 저버렸어요. 그는 미문에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윗의 옥좌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닙니다.자유를 위해서라면! 당신과 합류하겠습니다."

지금이 벤허에게는 일생일대의 고비였다. 그 제의를 받아들여 한 마디만 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결정된 역사일 것이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었다. 벤허는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 었지만 나중에야 그분 덕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p. 777)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가 아니었다. 동족집단의 선택이었고 율법학자들의 판결이었다. 유대인 왕의 자리에 앉지 않는 예수를 보며 유대인들은 찬미하던 존재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뱉어낸다. 자신들의 왕이 될 것이 아니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등을 돌린다. 그렇게 동족이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보며 벤허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 작품은 정말 그냥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성서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다. 따라서 종교와 역사를 버무린 약간의 허구성은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역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이 작품을 위치시킨다. 예수의 죽음 5년 후 네로황제때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는 소식에 벤허의 가족은 그동안 축적된 벤허의 재산이 어떻게 쓰여야 할 지 깨달았고 그렇게 지하교회의 태동을 알리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재현된 불신과 갈등의 태동은 이후 역사를 아는 지금 읽기에 더욱 씁쓸하기만 했다. 종교적 분쟁은 이후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잔혹하게 이어지고 있기에 소설속에서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작품을 쓴 작가의 삶도 소설적인 면이 많았다. 미국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지휘하며 워싱턴을 지켜냈고 링컨 대통령의 암살공범 재판에 재판관으로 참여했으며 변호사와 정치가 외교관으로서 이력과 함께 작가로서의 명성도 높였다. 이 작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월리스의 일생동안, 그가 무신론자였다가 소설을 쓰기 위한 배경자료 수집 차 성지를 방문했다가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일화로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월리스 자신은 이 이야기를 부인하며 자신은 무신론자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으며 벤허를 쓰기 전에는 성지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벤허> 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비종교인이 읽어도 크게 위화감을 갖지 않게 쓰여진듯 하다. 처음부터 과한 종교성을 드러냈다면 이렇게 성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읽다보면 천천히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에 대해 뭔가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역자의 서문은 차라리 빼거나 뒤로 물렸으면 싶은 바램이 있다;;;)


여하튼 이 작품은 종교성을 뺀 스토리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서사가 있고, 성서를 읽기 전에 이 책부터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종교성도 있다. 그리고 기왕 읽는다면 완역본인 이 책으로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고전이 왜 고전으로 계속 읽히는지 다시한번 느끼게 해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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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후의 서평글이라서

리뷰 카테고리 에 올렸어야 했는데;;;

페이퍼 카테고리에 올리고 나서

수정을 하려고 보니 변경이 안되어

리뷰에 새 글로 올림;;;

 

https://blog.aladin.co.kr/758481150/11508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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