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지성 클래식 10
루 월리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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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50년간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 <벤허> 의 모태가 된 원작 소설을 만나다


BEN-HUR : ATALE OF THE CHRIST 는 루 월리스(1827~1905) 작가의 1880년에 출간된 기독교 역사소설이다.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벤허 하면 격렬한 로마식 전차경주가 펼쳐지는 흑백장면이 자동적으로 떠오를만큼 유명한 영화로 제목이 낯익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기독교적인 작품인지는 몰랐다. 부제가 그리스도 이야기 인것도 몰랐다. 종교에 성서에 무지한 나에게 벤허는 그저 오래된 소설이었다. 흑백영화같은 소설이었다. 원전번역고전을 좋아하기에 읽게 된 책이었다. 그런데 읽고나니... 여러모로 엄청난 책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히브리어에서 Ben 은 '~의 아들' 이라는 의미로 벤허는 HER 가문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벤허의 인생과 그리스도의 인생이 묘하게 맞물리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성서 못지 않은 종교성와 역사책 못지 않은 역사성을 조화롭게 엮어내고 있어서 800여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을 소설로서 몰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다만, 책의 가장 앞부분에 있는 역자서문이 옥에 티라고 생각된다. 작품이나 작가보다 더 깊은 종교인의 자세로 써낸 서문은 나같은 비종교인이 읽기엔 좀 거북해서 이 책의 의미를 좁히는 느낌을 주었다. 서문이 주는 편견없이 이 작품을 읽는 것이 훨씬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동방박사 세명의 만남으로 시작되는데, 그리스인 인도인 이집트인 으로 이루어진 동방박사들의 구체적 재현이 흥미로웠다.


이곳에서 먼 서쪽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에 무척이나 많은 것들을 주었고,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예술, 철학, 웅변, 시, 전쟁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 여러분, 그 나라의 영예는 완전해진 글자로 길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찾아내어 선포하게 될 그분께서 바로 그 나라의 언어를 통해 온 세상에 알려지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그리스입니다. 저는 아테네 사람 클레안테스츼 아들 가스파르 입니다.  (p. 31)

저는 멜키오르 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가장 먼저 문자를 가진 언어, 즉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인입닏. 저희 민족은 지식을 탐구하고, 그것을 세분화하여 발전시킨 최초의 민족이지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종교와 유용한 지혜의 원천으로서 4베다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p. 36)

저는 이집트 사람 발타사르 라고 합니다. 저희 민족은 자랑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지요. 역사는 저희 민족과 더불어 시작되었지요. 저희가 최초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에게는 구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전하는 시 대신에 확실한 사실을 전하죠. 오 멜키오르 형제, 바라-브라만의 베다나 브야사의 우팡가보다도 오래되었고, 오 가스파르 형제, 호메로스의 시가나 플라톤의 형이상학보다도 오래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전이나 역대왕조와 마야 부인의 아들 부처의 경전보다도 오래되었고 히브리인 모세가 등장하는 창세기보다도 오래되었지요. 인간의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저희 민족 최초의 왕 메네스의 기록이랍니다. (p. 43)
이 세명의 동방박사들은 성령의 별을 쫒아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빛의 안내를 받아 구유속 아기를 경배드리게 된다.
그리고 마구간의 말구유 라는 것이 비천한 곳에서의 성스러운 탄생을 비유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당시의 유대인들의 여행 관습에 의해 굉장히 자연스러운 환경 속 거처였음을 알게 되어 신기했다.


동방박사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했다. 그들이 보기에 아기는 여느 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머리 위에는 후광이나 왕관 같은 것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말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그들의 환성과 기원과 기도를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아기처럼 등불의 불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아기는 그들이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구세주였다! 그들은 일말의 의심 없이 경배하였다. 왜일까?
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알고 있는 그분이 보낸 징표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으로 충분하여 그 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p. 119)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난 다음장은 스물한 해를 건너뛴 시점에서 벤허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작가가 건너뛴 이 스물한해가 너무나 궁금한데;;; 구세주로 태어나 경배받은 아기의 성장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한데... 이렇게 한문장으로 건너뛰다니 너무너무 아쉬웠다. 성서에는 이 성장사가 나오려나?
종교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인간인 붓다 나 마호메트의 경우 인간으로서 성장사가 이미 알려져 있다. 인간으로 자란 후 성장하여 종교적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인생이 전체적으로 대부분 밝혀져 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메시아로 지정받은 (인간인) 예수의 성장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왜일까? 인간으로서의 삶은 왜 마지막 모습만 알려지고 성장사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벤허 이므로 배경인물인 예수의 모습은 잠깐씩 나올 뿐이니 나의 궁금증은 저자의 서술 의도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패~쓰.


디오니소스를 걸고 맹세컨데 도대체 유대인이란!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심지어 하늘과 땅도 변하지. 하지만 유대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 태초의 선조들 모습 그대로야. 이 모래에 원을 하나 그려볼 테니 봐! 유대인의 삶에 또 뭐가 있는지 말해 보라고. 그저 돌고 또 돌기만 한다고. (p. 134)
네가 정말 안됐어, 율법학교에서 회당으로,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가겠지. 별 가능성은 없는 삶이지. 하지만 나는... 로마인 앞에 어떤 가능성들이 펼쳐져 있는지 보라고 (p. 135)
이제 그만 현명해져. 어리석은 모세의 율법이나 전통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운명의 여신 파르카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고. 그러면 너에게 말해 줄 거야. 로마가 바로 세계라고. 유대에 대해 물어봐.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 줄 거야. 유대는 로마의 뜻에 달려 있다. (p. 140)

벤허와 메살라는 어렷을 적 친구였다. 하지만 로마로 유학을 가서 완전한 로마인으로 성장하여 돌아온 메살라는 완전한 유대인으로 자란 벤허와 가치관이 정반대인 사이가 되었다. 로마인에게 좋은 가치들도 있었을텐데, 온갖 안좋은 것들만 골라 익혀온 메살라의 자만심은 벤허의 경건한 종교를 비웃고 깍아내렸다.


로마에서는 시인, 웅변가, 원로원 의원, 궁전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풍자라고 하는 것에 온통 미쳐 있다더구나  (p. 151)

 옛 친구에게서 반가운 해후가 아닌 쓰라린 상처를 받고 돌아온 벤허에게 벤허의 어머니가 표현하는 로마인들을 보며 나는 저자의 문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굉장히 로마풍이라고나 할까 ㅎㅎㅎ. 풍자 라는 단어를 본 순간, 얼마전 읽은 찰스 디킨스의 문체가 떠올랐다. 벤허의 저자인 루-월리스와 찰스 디킨스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그 시대 작가들 문체는 다 이렇게 풍자적이었을까? 벤허의 서술방식도 은근 풍자적이다. 예전 무성영화를 설명해주는 변사처럼 혹은 그이전 세세한 장면하나하나를 서민적으로 풀어내놓던 판소리꾼처럼 이 소설 또한 제3자가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목소리를 변형해 인물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읽다보면 어떤 순간에는 얼쑤! 혹은 저런! 하는 추임새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하튼 그 다음날 사건이 터진다. 새로운 총독 행렬을 구경하던 벤허의 방앞 기왓장이 미끄러 떨어지며 총독을 맞추었고, 총독은 살해혐의를 씌워 벤허집안을 하루아침에 몰락시킨다. 메살라는 총독과 한편이 되어 벤허집안을 무너뜨리고 재산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벤허는 갤리선 노잡이 노예로 끌려간다. 그리고 노예로 끌려가던 길에서 잠시잠깐 인간 예수의 인상적인 호의를 경험한다.


노잡이 노예로 배에서 5년을 보내는 동안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벤허는 새로운 사령관의 목숨을 구해주게 되면서 양자로 입양되어 아리우스2세가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다시돌아오게된 벤허는 아랍인 일데림 족장과 동방박사의 한명이었던 발타사르의 이야기를 통해 메시아에 대해 알게 된다.



벤허는 어떤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비참함과 그들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은 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사람들의 한탄과 탄식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브리튼의 참나무 숲에서는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사람들의 신봉을 받고 있으며, 갈리아와 독일과 북유럽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딘과 프레이야가 여전히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집트는 악어와 아누비스를 숭배했고, 페르시아는 여전히 아후라마즈다와 아리만을 섬기면서도 악어와 아누비스 숭배를 받아들였다. 열반의 희망을 품고 있는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의 암흑의 길을 정진한다. 아름다운 그리스인들의 마음은 철학에 머무르면서도 호메로스의 영웅적 신들을 노래한다. 반면에 로마에서 신들만큼 흔해 빠지고 값싼 존재는 없었다.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숭배와 봉헌의 대상을 마루엏지도 않게 이 제단에서 저 제단으로 변덕스럽게 바꾸었고 수많은 신들을 세워놓고 즐거워했다.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신들의 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신들은 다 차용해 놓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제들을 신으로 떠받을며 제단을 만들어 거룩한 의식까지 지냈기 때문이다. 그랬다, 민중의 불행한 처지는 종교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실정과 수탈과 헤아릴 수 없는 폭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도탄에 빠져 벗어나기를 간절히 빌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은 지독하게도 본질적으로는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 390)

당시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 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고전을 읽다보면 당시의 종교들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데, 그 종교들을 저마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읽을때 나는 늘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유대교의 유일신은 화려한 로마가 보기에 답답해보였을 수 있고, 정신없는 로마의 다신교는 유일신의 유대교에서 보자면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벤허는 종교적 생각에서 시작했으나 점차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게 되고 그 방법은 결국 정치적 선택일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메시아는 왕이어야 했다. 유대인이 바라던 메시아는 왕의 모습이었고, 왕은 권력의 대체일 뿐이었으나 인간의 방법만 생각할 수 있던 때로서는 다른 방법은 믿을 수 없었다. 벤허의 중립적인 태도와 메시아의 개념에 대한 갈등은 곧 이 책의 핵심이자 종교의 핵심일 믿음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종교적이기만 한것은 아니다. 나름 삼각관계 로맨스도 펼쳐지는데, 동방박사 발타사르의 딸 이라스 와 벤허 집안의 집사였던 시모니데스의 딸 에스더 는 벤허에 대한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집트 여인 이라스에 대한 묘사는 교활한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고(클레오파트라를 이렇게 악녀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좀 유감스럽지만 서양인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것은 안다;;;)  유대인 처녀 에스더는 순종과 복종의 결정체다. 그리고 사실 벤허가 에스더를 여동생처럼 여기겠노라 말한 순간부터 아무리 이라스의 매력에 끌려도 결국 에스더에게 갈 것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여동생은 곧 아내가 되지 않던가.


벤허는 일단 개인적인 복수에는 성공한다. 메살라와의 전차경기에서 이김으로써 명예와 재산을 되찾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전차경기를 전후해서 벤허는 개인에서 종교인으로 변화해간다.



"복수야말로 유대인의 당연한 권리요 법입니다"  (p. 488)

소설을 읽어나가며 신기했던 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신분계급도 철저히 유지하며, 상하관계에서의 순종과 복종은 엄격하고, 복수는 당연하다. 따라서 로마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 복수를 실행해줄 왕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켜나가는 모습은 그 두 종교의 유사함을 더욱 느끼게 했다.


종종 나오는 표현인 " 왕께서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모습으로, 따르는 이 없이, 군대도 없이, 도성이나 성채 없이 말입니다. " 라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기대는 발타사르 에게는 영혼의 왕국으로 시모니데스에게는 유대나라의 왕국으로 인식되어지는데,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 엔딩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벤허를 비롯한 소수에게만 이루어지면서 성서의 역사는 소설에서 펼친 역사와 맞물려 떨어진다.


사람들은 꿈이 밤에 잠잘 때만 꾸는 거라고 하지만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결과들은 저절로 예정된 것이고, 저절로 예정된 것들은 모두 깨어 있는 꿈속에서 만들어진다. 꿈을 꾸면 노동에서 해방되고 포도주를 마셨을 때처럼 활기가 넘친다. 우리가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노동 자체 때문이 아니라 꿈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꿈은 늘 단조로운 일상에 들어 있어서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사는 것은 곧 꿈꾸는 것이다. 오로지 죽어 무덤에 묻힌 후에야 꿈이 사라진다. 벤허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 벤허의 행동을 보고 비웃지 말기를. (p. 596)

벤허가 왕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며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중에 하는 생각들을 저자는 비웃지 말기를 당부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저자의 당부보다 저자가 말하는 꿈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가 인간에게만 있는 것처럼 영혼의 존재와 꿈의 존재도 인간에게만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꿈과 종교와의 관계성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게 해보게 되기도 했다.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없다네. 우리 신앙의 차이점을 알겠네. 자네는 인간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나는 영혼의 구원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지. (p. 651)

철학자들은 신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할 걸세. 그래서 영혼의 존재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각기 알맞은 정신을 갖고 있다네. 오로지 인간에게만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자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나?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그러한 힘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더 나은 내세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거라고 생각하네. (p. 655)

그러면 이제 실제적인 문제가 남는군.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하는 문제지. 만일 그분이 헤롯과 같은 왕일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는 한 자네는 당연히 왕홀을 쥐고 황제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계속 찾아다니겠지. 반면에 내가 찾는 그분은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평범한,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시라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표징으로 알아보게 되겠지. 그분은 나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실 것이네. 영혼의 아름다운 순수한 삶 말이지. (p. 657)

소설 속에서 가장 유대교적인 인물은 이집트인 발타사르 이다. 발타사르의 발언들은 일정하게 종교적이다. 그리고 가장 비유대교적인 인물은 발타사르의 딸인 이라스 이다. 이라스는 시종일관 이집트의 신들과 로마의 문화를 찬양한다. 메시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발타사르가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그의 신실한 믿음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인 그의 딸에게는 전파되지 않았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작가는 의도한 것일까?


여하튼, 목수의 아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고 그리스로도 선포된 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되는 마지막 장은 벤허와 예수의 부활의 장이다.

3년 동안 벤허는 예수의 언저리에서 그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며 언제든 그를 유대의 옥좌에 앉힐 수 있게끔 뒤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이고 벤허는 혼란스럽다. 죽은줄 알았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환자로 예수앞에 엎드리고 치유되는 기적을 보며 벤허는 더욱더 예수가 실천하려는 가치에 대해 고심하게 된다.



우리는 늘 인간보다 뛰어난 것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 나사렛 사람이 미문에서 그냥 반대편 문으로 걸어 나갔다고 이라스가 투덜거린 경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분이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행태를 완전히 뛰어넘었다는데 있다. (p. 742)

"난밤 저들이 그분을 잡아 재판한 수 새벽녘에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지요. 빌라도는 두 번이나 그분이 죄가 없다며 넘겨주기를 거부했지만 저들의 저항이 완고하자 마침내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저들이 대답했습니다"

"저들이, 제사장과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p. 766)

"대장님, 지금 속고 있는 분은 저희나 동지들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나사렛 사람은 왕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를, 이스라엘을 저버렸어요. 그는 미문에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윗의 옥좌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닙니다.자유를 위해서라면! 당신과 합류하겠습니다."

지금이 벤허에게는 일생일대의 고비였다. 그 제의를 받아들여 한 마디만 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결정된 역사일 것이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었다. 벤허는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 었지만 나중에야 그분 덕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p. 777)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가 아니었다. 동족집단의 선택이었고 율법학자들의 판결이었다. 유대인 왕의 자리에 앉지 않는 예수를 보며 유대인들은 찬미하던 존재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뱉어낸다. 자신들의 왕이 될 것이 아니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등을 돌린다. 그렇게 동족이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보며 벤허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 작품은 정말 그냥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성서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다. 따라서 종교와 역사를 버무린 약간의 허구성은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역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이 작품을 위치시킨다. 예수의 죽음 5년 후 네로황제때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는 소식에 벤허의 가족은 그동안 축적된 벤허의 재산이 어떻게 쓰여야 할 지 깨달았고 그렇게 지하교회의 태동을 알리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재현된 불신과 갈등의 태동은 이후 역사를 아는 지금 읽기에 더욱 씁쓸하기만 했다. 종교적 분쟁은 이후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잔혹하게 이어지고 있기에 소설속에서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작품을 쓴 작가의 삶도 소설적인 면이 많았다. 미국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지휘하며 워싱턴을 지켜냈고 링컨 대통령의 암살공범 재판에 재판관으로 참여했으며 변호사와 정치가 외교관으로서 이력과 함께 작가로서의 명성도 높였다. 이 작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월리스의 일생동안, 그가 무신론자였다가 소설을 쓰기 위한 배경자료 수집 차 성지를 방문했다가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일화로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월리스 자신은 이 이야기를 부인하며 자신은 무신론자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으며 벤허를 쓰기 전에는 성지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벤허> 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비종교인이 읽어도 크게 위화감을 갖지 않게 쓰여진듯 하다. 처음부터 과한 종교성을 드러냈다면 이렇게 성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읽다보면 천천히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에 대해 뭔가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역자의 서문은 차라리 빼거나 뒤로 물렸으면 싶은 바램이 있다;;;)


여하튼 이 작품은 종교성을 뺀 스토리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서사가 있고, 성서를 읽기 전에 이 책부터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종교성도 있다. 그리고 기왕 읽는다면 완역본인 이 책으로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고전이 왜 고전으로 계속 읽히는지 다시한번 느끼게 해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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