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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평점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SNS 시대, 모든 것이 개인화된 지금도 대중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Vom Sog der Massen und der neuen Macht der Einzelnen 이라는 원제를 번역기에 돌려보니 '대중의 끌어당김 과 개인의 새로운 힘' 이라고 나온다. 독일어를 잘 모르니 이게 제대로 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어판의 원제는 대중과 개인을 연결짓는 부분에 있어서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책 내용을 좀더 충실히 반영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대중이란 어떤 개념이고 개인은 대중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저자가 두명이라서인지 내용을 절반쯤으로 나누었을때 앞부분과 뒷부분의 관찰시점과 관심대상이 좀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앞부분은 1978년부터교수이셨다는 노학자 군터 게바우어, 뒷부분은 1975년생인 젊은학자 스벤 뤼커 의 서술이지 않을까 싶다. 내용상의 표현방식은 큰 차이는 없지만, 논리전개를 위한 예시들의 사용에 있어서 앞부분은 과거 사건들을 뒷부분은 최근 사건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시점 차이가 두드러지고, 앞부분은 연륜이 뭍어나는 맥락이 있다면 뒷부분은 여기저기 튀는 산발적인 전개가 느껴지는데, 여하튼 이 책은 굉장히 독일적인 책이다.
예전에 어떤 강연에서 들었던가.. 어떤 인터뷰에서 읽었던가.. 하여튼 독일에서는 책이 많이 읽히고 독서모임도 활발하고 저자와의 강연프로그램도 많은 것에 대해 한국인이 칭찬을 했는데, 독일인의 답변은 의외였다. 책을 많이 보는 것이 TV프로그램이 너무 재미없어서 라고 했다. TV프로그램들이 예능은 거의 없고 드라마도 별로 없는데 온갖 시사정치토론 프로그램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에 대비 한국의 TV 프로그램은 정말 다양하고 무엇보다 엄청 재미있는게 많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ㅎㅎ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예전 생각이 난 것은, 이 책은 그런 독서토양을 가진 독일인들이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독일의 철학자가 독일의 국내상황을 '대중과 개인' 이라는 주제에 맞춰 독일인에게 설명해주고있는 이 책은 독일을 제외한 나라에서 얼마나 범용적으로 적용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내용을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독일의 학자들 이론 몇 가지가 자주 인용되는데 그 이론들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특히나 '엘리아스 카네티' 라는 학자가 누군지 어떤 이론을 펼쳤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이 학자의 이름과 저서는 수시로 언급된다. 마치 이 책이 카네티의 기존 이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기 위한 책인 것처럼.
하지만 현재에서의 대중과 개인의 관계와 의미는 과거와 분명 달라졌기에 이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따라서 이 책이 대중이론을 새롭고 분명하게 제시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론이 왜 필요하고 어떤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차근차근 따져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의 시도와 의도는 적절하고 또 의미있었다.
대중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순전히 수량으로 규정해서 대중의 특수성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중을 형성하기 위해 특별히 많은 사람이 모일 필요조차 없다. 대중은 실제의 사안, 의도, 정서, 평가를 결합시키는 데서 생겨난다. (p. 45)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대중 형성의 첫 단계다.
대중이 성장하는 두 번째 단계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중은 이제 실제의 행동, 몸을 움직이고 구호를 외치는 것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도 생겨난다. 이것이 대중 형성의 세 번째 단계다. 대중은 생각 속의 대중으로 변한다.
행동이 생각과 결합되는 순간에 대중은 잠재력을 얻을 수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지금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대중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생기는 것이 대중 형성의 네번째 단계다. (p. 50~53)
대중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대중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에 대하여 저자는 1968프랑스와 1989독일의 통일을 예로 들어 대중의 특성을 정리해보고 있다. 그리고 조금은 뜻밖의 결론을 내린다.
결국에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승자들이 아니다. 나중에 정해질 '승자들' 과 '패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소한 사건들의 주인공인 말없고 이름 없는 다수가 역사를 서술한다. 이 다수는 위대한 개인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는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 의해 '목적의 세계(니체)'로 옮겨진다. 다수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의미'를 얻고 후세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의 역사는 '권력자의 비서들'에 의해 기술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는 '말없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증거들에 근거를 두고 기록되는 대중의 역사'다. (p. 78)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일종의 관용구 처럼 쓰이는 말이 아니었나. 우리가 읽는 역사책들은 누군가가 쓴 기록들이다. 따라서 승자 위주의 기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록이 되기까지 그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한 실제적 상황에서의 역사주체들에게 중심을 둔다.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낸 실제적 역사의 주인공은 소수의 영웅들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 바로 대중이다.
대중을 특정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나 구조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행동 방식들의 복잡한 가닥들의 다발로 인식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여러 층에 걸쳐 있는 복잡한 사안이 이 모든 것을 알려준다. 대중은 매우 다양한 원리로 움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을 그 구조에 따라 구분하고 분류하고, 기능을 발휘하는 특성들을 서술하고, 그들의 활동 구조와 그 형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p. 115~116)
대중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는 민중, 백성, 농민, 하층민 등으로 표현되는 역사속에서의 다수는 낮은 계급을 의미해왔고, 역사가 서술하는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묶여지는 특정되지 않는 모두를 포함한 큰 의미 없는 불특정한 다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다수를 역사로만 기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물론, 역사속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계급이 없어졌지만 계층은 오히려 다양해 졌고 개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개인이 모인 집단도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20세기는 대중의 시대이고 21세기는 개인의 시대로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게 아니라, 현재는 개인과 대중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2016년의 독일 통일 기념 연설에서 수상 메르켈은 예전의 구호 '우리가 국민이다'를 다시 꺼내 문장을 이렇게 바꿔 표현했다. '모두가 국민이다' 얼핏 간결한 이 표현은 구호의 원래 의미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1989년에 이 구호가 결코 포괄하는 뜻이 아니라 동독의 당과 정치인들을 겨냥했던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다. 사실 메르켈은 결코 순진하게 모두를 포괄한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페기다(독일의 극우성향 반잉슬람단체로 2015년 '우리가 국민이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극우운동을 펼침) 시위대가 1989년의 구호를 해석한 의도를 겨냥했던 것이다. 메르켈의 입장에서는 그 해석을 시급히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메르켈은 1989년의 구호를 새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렇게 전한 것이다. 당신들은 통일 전환기 이후의 독일의 근간을 이루었던 국민적 합의와 동떨어져 있다. 당신들은 모두의 일원이 아니며, 당신들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 앙겔라 메르켈의 연설에서 처음에는 모두를 포괄하는 모범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이중 대중의 전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p. 133)
대중은 다른 대중에 맞서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중 대중' 에 대한 설명을 풀어나가던 중에 나온 메르켈 총리의 일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치인들의 수사법은 정말 알고나면 이마를 탁 치게 될때가 많다. 이 책은 독일의 내부적 상황을 예로 들어 풀고 있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읽으면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통일 후 동독인들의 상황과 IS사태 후 난민들의 상황은 독일내에서 심각하게 분석해야 할 사안이었을 것이기에 독일에서의 대중의 의미는 우리와는 또다르게 풀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대적 상황이 대중의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 유일한 한국사례로 2016년의 광화문 광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저자의 논리 전개에 큰 의미는 없다. 따라서 한국의 대중에 대한 이해는 한국인 학자가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
포퓰리스트들의 리더들은 '입법자'의 이 중요한 역할은 결코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 누구나 경시당했던 경험을 기입할 수 있도록 공란만 제시할 뿐이다. (p. 165)
난민의 물결이 밀려오기 오래전 구동독 지역의 생활 공동체들은 정치인들로부터 의례적인 격려의 말을 들었었다. 그들은 구호의 손길로 생각해왔던 국가가 자신을 돌봐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많은 공동체들에서는 난민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사정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일자리가 상실되었고, 그 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넌 동독의 제도인 사회 시설들과 문화를 누릴 기회 등이 폐지되었다. 그들은 난민들에게 정서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자신에게서 최종적으로 애정을 거둬들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전의 '기득권층'은 자신의 고향 도시에서 국외자로 변해버렸다. (p. 176)
대중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무수한 사회적 접촉을 통해 날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활동을 한다. 포퓰리즘은 남들과의 사회적 접촉을 마치 오염의 한 형태나 되는 것처럼 기피함으로써 상시적인 위급 사태를 일으켜 이 일상성을 파괴하려 든다. (p. 180)
대중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단어가 포퓰리즘 아닐까. 선동적인 소수자에 의해 휩쓸리는 대중의 약한 모습을 우리는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퓰리스트들에게 흔들리고는 한다. 독일에서 구동독의 시민들과 난민들의 문제는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것과 현저히 다를 심각성을 띠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도 흔하다. 소외층이 더 소외되고 그렇게 더 소외되는 층이 더더 보수집단이 되어가는 것은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할 뿐 현실은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안타까울뿐...
대중행동과 그 장소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서로 힘을 강화해주고 감정을 고조해주는 작용이 일어난다. 어차피 취약해진 공간에서 벌이는 집단 난동은 그곳을 더욱 무가치하게 만들고, 슬럼화를 가속화하며, 결국에는 더욱 격렬한 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운동은 주요한 공공 공간들의 상징적 위력도 함께 누린다. 그들은 이 위력에서 이득을 얻는 동시에 '국민적 상징'인 그 장소의 역사에 새 장을 추가함으로써 그 위력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p. 184)
1장에서 4장 까지는 대중이란 무엇이고 개인이란 그 속에서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했다면 5장부터는 분위기가 약간 바뀌어서 대중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지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시작은 '공간' 이다.
대중의 성격과 공간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축제처럼 벌이던 시위와, 폐쇄된 일정 공간에서 억압받으며 불길처럼 일어난 시위는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6장에서는 에로스와 고립을 을 살펴보며 대도시와 대중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19세기의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 에드거 앨런 포, 샤를 보들레르의 작품을 통해 파악해 본다. 대중의 모습은 미학적은 시각으로도 새롭게 이해될 수 있었다. 소설이나 시에서 미학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다음은 영상매체 아니겠는가. 7장에서는 영화와 인터넷으로 범위를 넓혀 가상의 대중들을 파악해 보고 있었다.
가상세계는 마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지금은 컴퓨터 너드nerd라는 의미로 쓰이는 유저user라는 단어는 원래 마약 중독자를 나타냈다. 이 이야기에서 거리에 나서 항의를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실제의 대중은 각자가 따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대중, 디지털 원주민으로 대체된다. 네트워크에서는 감염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전형적인 대중역학이 관찰된다. (p. 258)
인간 유저가 진짜 신분을 모르는 소셜봇의 메시지에 감염당하면 허구의 대중에서 실제의 대중으로 변하는 것이다. (p. 268)
언제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두를 대변했다. '여론의 파멸'에 대한 한탄은 종종 세인들의 의견에 미치는 영향력 상실, 특히 예전에는 단독으로 누가 어떤 것에 관해 공적으로 말할지 결정했던 그런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력 상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대중을 조각으로 분열시킨다는 말이 맞다면, 이 새로운 사태는 정보의 다각화에 유리한 작용도 했다. 소위 모두가 일치해서 관심을 기울였다며 뒤늦게 이성적으로 찬양되는 '하나의' 여론을 되찾으려는 꿈은 인터넷에 의해 모두에게 제공되는 의견의 다양성을 미화하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태도다. (p. 263)
독자층은 새로운 종류의 대중이다. 독자층은 대중이 근대에 들어 띠게 되는 한 형태이다. 독자층은 가상적인 동시에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독자층은 비록 몸소 만나는 일은 없다 해도 상당수가 동일한 유행을 따르고, 동일한 신문과 잡지를 읽고, 그렇게 해서 동일한 의견이 형성되는 것을 통해 각자의 일체성이 생겨난다. 이 새로운 종류의 대중은 일부 영역에서는 과거의 대중을 몰아내며, 그밖의 영역에서는 그들과 공존한다. 독자층이라는 가상의 대중은 물리적 대중 형성을 대체하는 대신 강화해줄 수도 있다. (p. 270)
과거의 투쟁적 구호 '당신은 어느 편에 가담하는가?' 는 오늘날에는 틀림없이 '접속하는가'로 끝날 것 이다. 내가 어느 편에 가담하는지는 내가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는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p. 276)
그나마 소설이나 영화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모습은 파악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이 생기는 순간 대중은 실제 대중과 가상대중이 혼합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어느쪽이 진의를 가진 대중인지 알수 없다. 가상의 공간에서는 기계적인 여론몰이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기계적인 여론이 다시 실제적인 대중의 의견을 바꿔놓게 되기도 한다. 대중이 항상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읽으며 행도하기 전의 독자층은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층이다.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대중의 규모나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대중에 대한 파악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대중이 탈개인화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대중문화가 무해해지거나 더 나빠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대중이 너무나 세련화되고, 개인화되고, 주관화되어 있어서 주체의 유일성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동일철학의 폭넓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의 개인들에 관해 서술하고 규범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조차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대중은 이질성과 내부 차이를 허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이질성과 내부 차이를 해방으로서가 아니라 규범화하는 새로운 형태로서 요구하기까지 한다. 대중문화는 바로 이 비동질적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다. (p. 287)
현대사회에서 대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이 정치사회적인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팬덤문화에서 대중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8장에서는 대중문화 비평을 통해 대중의 모습을 풀어보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 현상으로서의 개인주의는 하이데거의 세인에 대한 규정-'누구나 타인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며 아무도 타인이 아니다' (p. 294)
윙거의 '더 높은 형이상학적 질서'에 대한 설명은 이상하게도 하이데거의 '본원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기력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두 이론의 바로 이러한 양상이 독자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파시스트들은 윙거와 하이데거를 별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이 두 이론은 막 대두하기 시작한 파시즘과 결합한다. 윙거의 '더 높은 질서'에 대한 지적은 그의 글의 가장 빈약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것이 뉴라이트 측의 숨은 의미로 변했다. (p. 301)
저자는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보며 현재에 적용가능한 대중이론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이데거 의 철학개념들도 종종 인용이 되는데, 처음 인용될땐 하이데거에 우호적인 걸까 싶어서 우려가 되었으나 뒤로 갈수록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안심했다. 여하튼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현대의 대중이론은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면 결론이랄까.
오늘날 대중 속의 개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 개인들의 행동이 대중의 속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역으로 개인들도 대중에 의해 변화된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대중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한낱 개인이 대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고, 대중이 구성원들에게 곧바로 작용하는 일도 없다고 간주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전능한 지도자를 요구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대중을 역사적 세력으로 이해할 것이다. 대중과 개인들은 오히려 어떤 역동적인 사안을 통해 다방면에 걸쳐 서로 결합되어 있다. (p. 327)
새로운 대중의 중요성이 현재로서는 인격 개념을 그대로 남겨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사회적 정체성과 주관적 정체성의 구분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p. 361)
대중속에 개인이 묻혀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고 개인들만 따로따로 있는 시대라고 할 수도 없다. 개인들은 이합집산하며 이런 대중이 되었다가 저런 대중이 되었다가 한다. 그러한 대중의 규모는 빙산의 일각처럼 보여진 대중보다 보여지지 않은 대중이 훨씬 크다. 게다가 가상의 대중과 실재적 대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변화시킨다. 대중과 개인은 서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개인의 힘과 대중의 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게 되었다. 새로운 대중이 탄생한 것인가, 어떤 대중인지 모르기에 새롭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개인이 올바른 대중이 된다는 기본 아닐까...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