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나만 따라와 - 십대와 반려동물 서로의 다정과 온기를 나누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78
최영희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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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와 반려동물

서로의 다정과 온기를 나누다

-일곱 작가가 들려주는 반려동물 이야기-

"우린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절대 걱정하지 마"

 

 

제목부터 따스한 색감의 표지까지 책읽기전에 미소부터 먼저 지어지는 책이었다.

예전에 티비에서 봤던 유아교구광고한편이 생각난다. 한 아이가 엄마와 걸어가는데 커다란 보름달이 아이를 계속 비춰주는 장면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자꾸 달이 나를 따라와?' 엄마가 말했다. '네가 예뻐서 그래' ^^ 아이의 웃음과 따듯한 이미지들이 보기 좋은 광고여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따라오던 달이 자신만을 비추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나이에 만난 반려동물들은 정말 자신만 따라다녔다. 왜 자꾸 나만 따라오냐며 때로는 맞아주고 때로는 떨쳐내도 계속 반려인만 바라보는 그 반려동물들의 이야기 일곱 편이 이 책속에서 펼쳐진다.

처음 만난 여덟 살, 그 가을 이후로 퍼슬은 1년에 두 번씩 멋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과 가을에 내 앞에 등장했다. 등굣길에 따라붙을 때도 있었고 밤중에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오늘처럼 길가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p. 16)

녀석은 해마다 침으로 축축한 도토리를 내밀었고, 내가 받아 주지 않으면 내 발치에 굴려놓고 돌아갔다. 늘 알이 굵은 도토리였다. (p. 17)

초등학교 시절 내내 녀석의 출몰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넌더리가 난다. 야, 네 동생 쥐 왔다. 얼른 가서 찍찍이랑 놀아줘야지 (p. 19) <누덕누덕 유니콘>

 

퍼슬은 공생동물로 만들어진 초창기 모델 설치류 동물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유니콘이 탄생하자 저마다 공생동물로 유니콘을 선택했다. 재하가 어렸을때 돌아가신 엄마가 재하의 공생동물로 퍼슬을 신청해놓았었다는 것을 재하는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모두들 갖고 있는 유니콘이 갖고 싶었고, 유니콘을 입양할 수 있는 금액이 모아진 열다섯살에 퍼슬을 파양신청하고 유니콘 입양신청을 한다. 그리고 파양된 퍼슬을 잡기 위해 사냥꾼이 숲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왜 퍼슬은 왜 꼬박꼬박 재하를 찾아왔던 것일까?

퍼슬이 찍찍거리며 몸을 떨었다. 녀석의 몸 어디선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작별 인사를 하면 됐다.마지막 인사를 나누겠다고 영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호흡이 한참 거칠어지다가 점점 가늘어지는 퍼슬을 보면서, 내가 상수리 숲으로 온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p. 35) <누덕누덕 유니콘 - 최영희>

유행하듯 소유하는 반려동물, 외형만 보고 갖고 싶어하는 반려동물에 대해, 반려동물은 함께 하는 것임을 그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였던 첫 작품부터 마음이 울렁거렸다.

송이는 가장 원하는 것이 산책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것도 산책이 되어 버렸다. 정말 공놀이가 재미있지만 그것만큼 무서운 놀이도 없을 것이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송이의 등 뒤로 서서히 원이 형이 겹쳐지다, 이내 익숙한 열일곱의 소년이 되어 갔다. (p. 63) <피라온>

미르의 엄마는 어느날 공사장에서 떨고 있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데려온다.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것 보살펴주어도 강아지는 버려진 두려움에 떨며 곁을 주지 않았다. 그 강아지에게 유독 마음이 갔던 미르는 버려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송이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송이는 한 마리의 강아지였지만, 하나의 반려동물이었지만, 자신 또한... 어쩌면 비슷하게...

나는 피라온이었다. 인간의 DNA 데이터를 분석해 특수 3D HB 프린터에 입력해 만든 인간의 복제품에 불과했다. (p. 69) <피라온>

인간 복제품... 아이를 원하거나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을 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인 피라온. 어쩌면 반려동물처럼 피라온을 구입했던 사람들... 그렇게 미르가 식당에서 알게 된 원이 형은 가족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 하지만,

"한 번만 더 피라온을 입에 올리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저 아이는 인간을 위한 복제품이 아니에요. 기계나 제품도 아닙니다. 강미르 우리 부부의 아들입니다. 앞으로는 꼭 미르라 부르세요" (p. 79) <피라온 - 이희영>

피라온인 미르에게는 변함없이 따듯한 가족이 있었고, 미르는 송이에게 그마음을 전달해주면서 자신의 불안감 또한 공유하고 싶었다. 진정한 반려감은 아마도 가족애인듯...

이민자의 아들, 내가 이 땅에서 얻은 또 다른 이름이다. 대 놓고 무시하는 인간도 있고 뒤에서 무시하는 인간도 있다. 간혹 우리는 동등한 지구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글쎄다. 인종차별을 운운하면 모두들 놀라고 경악스러워하지만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느낀 것은 과연 몇이나 날 똑같은 인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아버지는 말한다. 세상 어디든 똑같고 세상 어디든 불평등은 존재한다고. 그래서 감내하라는 것인가? 오케이! 감내하라면 해야지. 그런데 나는 늘 아프다. 늘 상처받고 늘 움츠러든다. 그래서 캐나다로 이민 온 후,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p. 88) <스위치, ON>

외국에서 동양인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힘들겠지... 생면부지의 동네로 이사만 가도 낯설고 적응시간이 꽤 걸리는 법인데 하물며 외국이라니... 다온은 캐나다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오기를 독기처럼 품은채 성장중이다. 하지만 아이스하키의 거친 세계에서 다온의 팔꿈치는 부서졌다. 산책겸 나간 바닷가 모래밭에서 만난 작은 생명체 덕분에 마음까지 부서지는 것은 면하게 된다.

"너도 루저냐? 앞발에 힘을 더 줘야지, 거북아"

나는 새끼 거북이를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녀석의 작은 등 위를 덮은 모래 알갱이가 떨어졌다. 비록 아주 적은 수의 모래 알갱이일지라도 등딱지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녀석의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급기야 나는 밤하늘에 울려 퍼지도록 구령을 외쳤다. "하나, 둘, 하나, 둘!"

흘끔 구덩이를 쳐다보니 작은 거북이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치기라도 했는지 녀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작은 발이 뭉개져 있었다. (p. 92) <스위치, ON - 이송현>

 

언젠가 바다로 돌려보내주어야 겠지만, 그대로 갈매기밥으로 두고 올 수는 없어서 다온은 새끼 거북이를 데려온다. 꼬부기라고 부르면서 녀석을 지켜보다 보니 작지는 쉬지않는 움직임에 다온의 끈기도 점점 되살아나게 된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버튼이 눌려진다. 스위치 ON

나는 냄새에 민감하다. 여자아이들의 화장품 냄새, 남자아이들의 체취...... 보통의 사람들보다 먼저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여느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것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 불행에 가까웠다. (p. 129)

"너 개코라며? 내 페친이 너 알더라" "그냥 개라던데?" (p. 130) <냄새로 만나>

 

고등학교 1학년 서진은 혼자 살고 있다. 후각에 예민하다는 것이 동물취급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도 새엄마와 지방에 가고 혼자 남은 서진에게 예민한 후각은 쓸데없고 불편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강아지는 코로 세상을 봅니다. (p. 139)

강아지는 냄새로 정보를 탐색합니다. 강아지는 냄새를 맡아 그 아이가 건강한 아이인지 사귈 만한 친구인지 등 모든 것을 알아낸다고 합니다. (p. 140) <냄새로 만나>

 

이웃사촌 민정누나와 함께 살고 있는 유기견이었던 개, 만나 는 다른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유독 서진을 보면 꼬리를 흔들었다. 만나의 반응으로 인해 처음 만난 날 만나를 하루 맡게 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서진을 괴롭히던 불량배들이 집에 들이닥친다.

만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으르릉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왈왈, 왈왈. 만나가 짖기 시작했다. 밤공기는 만나의 소리에 힘을 가세했다.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최는 만나에게 입을 다물라며,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안했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숟가락에 맞은 만나가 낑낑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오가 발로 만나를 차려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p. 143) <냄새로 만나 - 최양선>

서진이 맡았던 만나의 냄새, 만나의 반려인 민정누나의 냄새, 새엄마의 냄새....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존재들이 풍기던 냄새... 그 냄새를 맡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없고 외롭기만 했던 서진은 만나를 만나면서 냄새로 다른 대상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말했잖습니까.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동물은 낯설기만 하다고. 당신 말대로 원인과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물을 낯설어하니까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좋아하지도 않는 데 돈과 시간을 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네, 불쾌합니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제 겁니다. 제가 데려왔으니까요. (p. 162) <고양이를 찾 - 김학찬>

작품 제목을 쓰다 만 것이 아니다. '고양이를 찾' 이 제목이 맞다. ㅎㅎ 일인칭 서술로 진행되는 작품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데려왔던 길냥이에 대해 말한다. 동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길냥이에게 밥을 주고 동물 좋아하진 않지만 길냥이를 집에 데려와 보살펴주고 동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집나간 길냥이를 찾는 화자의 츤데레식 어투는 키득거리며 읽기 시작하다가 점점 웃을 수 만은 없게 되는 길냥이 보호기 였다.

고양이는 이제 나무 덤불 뒤에 숨지 않았다. 내가 산에 올라가 면 어떻게 알았는지 꼬리를 직각으로 세우고 다가왔다. 꼬리 끝부분은 언제나 나를 향해 구부러져 있었는데 그건 나를 신뢰한다는 표시였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초록색 눈을 가진 삼색 고양이의 이름은 신비로워야 한다.

시벨.

그 이름은 내가 오래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내 진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꺼이 그 이름을 고양이에게 주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시발, 시발이라고 외치고 다닐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시벨, 시벨이라고 불러 보았다. 그러면 상스러운 단어 '시발' 이 성스러운 단어 '시벨'로 변했다. (p. 204) <시벨 - 김선희>

 

최찬구 라는 함부로 지어진 이름을 갖고 있는 여고생은 임쓰(임대아파트 쓰레기) 라고 불리며 늘 투명인간처럼 지내왔다. 쓰레기를 모아오는 엄마로 인해 집은 움직일 공간도 부족한 쓰레기 집이었고 아빠의 직업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으며 한번도 대화해본적 없는 하나뿐인 언니는 언제까지 이 집에 살아야 하냐며 불평중인 그런 생활 속에서 흔하디 흔한 삼색이 길냥이 한마리를 만난다. 그리고 집을 떠나게 되던 날 소녀는 시벨에게 배낭지퍼를 열어보였고, 시벨은 순순히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반 아이들 대부분은 캐양이를 키웠다. 개를 모체로 고양이의 유전자를, 또는 고양이를 모체로 개의 유전자를 배합한 상품을 모두 캐양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더하여 주인이 원하는 성격을 갖도록 다양한 약물로 호르몬을 조절하여 성격을 통제하고...... 아무튼 캐양이는 그런 과정을 통해 개발된 개인 맞춤형 반려동물이었다. 흔히 PP(Personal Pet)라 불렀다. (p. 224) <돌아온 우리의 친구 - 한정영>

도아는 예쁜 PP가 좋았다. 리트리버를 모체로 한 대형 PP 였던 위니는 도아가 7년간 기르던 캐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털이 빠지고 볼품없어지는 위니를 반납하고 러시안블루를 모체로 한 캐양이 루이를 데려왔다. 루이는 너무너무 예쁜 인형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집근처에서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목이 잘린 비둘기, 피투성이가 된 쥐, 도아의 옛날 물건들 이 현관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반려동물은 인간맞춤형으로 만들어낸다는 설정부터 인형처럼 사고버리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꼬집은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서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따스함으로 시작해서 아릿함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집은 일관된 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린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절대 걱정하지 마"

누구보다도 작고 보드라운 존재이지만 한없이 크고 든든한 존재에 대하여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품들을 읽고나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건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가족으로서 받아들일 때만 온전히 그 관계가 서로에게 따듯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자꾸 너만 따라다닐 거야' 하는 반려동물의 목소리가 온기로 다가갈지 냉기로 다가갈지는 오롯이 반려인의 몫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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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수레바퀴 아래서 초판본 리커버 디자인 고급 벨벳 양장본 세트 - 전2권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외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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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리커버 디자인의 표지를 보면서 영화속 책이미지가 떠올랐었다. 책이 출판된 동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이든 시대가 동일한 경우) 어떤 인물이 책을 들고 있다면 이런 모양이었다. 살짝 작은 듯한 사이즈에 어두운 바탕의 하드커버에 금박 제목... 영화속 인물들은 손바닥보다 살짝 큰 책 한권을 가지고 다니며 읽고 소중하게 보관하곤 했다. 영화속에서 그 책들의 제목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 시대의 책이 또 등장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학창시절 읽었던 책들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헤세의 책과 헤밍웨이의 책은 내게 문학의 양대산맥 같은 존재였다. 헤세의 책이 감성을 예민하게 건드렸다면 헤밍웨이의 책은 감성을 폭발시키는 느낌을 주곤 했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이미지적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을 수십년만에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렸을때는 데미안이 강렬하게 다가왔었는데 지금은 수레바퀴아래서 가 더 진하게 다가온달까.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첫 장편소설 '페터카멘친트'로 작가적 명성을 얻고 난후 발표한 두번째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1906년) 와 이런저런 개인적 고난 및 시대적 수난을 경험한 후 발표한 데미안(1919)은 모두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헤세의 자아성찰 성향은 본인의 타고난 성향일수도 있고 시대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배경들을 통해 자라난 성향일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소설을 읽는 내내 헤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는 한스 기벤라트 라는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영특한 신동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 라는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열살 무렵의 소년에서 스무살 남짓의 청년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스 기벤라트 는 자신의 예민함을 극복하지 못한 느낌이라면 에밀 싱클레어는 영적인 득도를 함으로써 극복하는 느낌을 준다. 이 두 작품 사이에 헤르만 헤세의 정신분석 치료가 있었다.

혹독하고 치열했던 지난 몇 년간 호기심은 잠들어 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신앙은 가끔 구둣방 아저씨와 대화할 때만 잠시 되살아나 개인적인 삶과 어우러졌다. 구둣방 주인과 목사를 비교하자니 웃음이 나왔다. 힘든 시절을 통해 습득한 구둣방 주인의 완강함과 엄격함을 한스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플라이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단순하고 편협한 면이 있었고 지나친 경건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다. (수레바퀴 아래서 p. 59)

한스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신동소리를 듣고 주에서 운영하는 상급학교에 이등으로 합격하며 입학한다. 상급학교는 신학교였기에 종교색이 짙었지만 한스의 고향에 있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 아저씨보다 경건하진 않았다.

우리는 불 앞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신비 의식과 종교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것들의 가능한 미래를 그려보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궁금하고 흥미롭기만 할뿐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박식함을 자랑하며 지나간 세계가 남긴 폐허를 지루하게 뒤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신비주의의 추종이니, 전통적 종교 형태로 모자이크 맞추기니 하는 말들에 온통 반감이 생겨났다.

"피스토리우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지긋지긋한 구닥다리 같아요!" (데미안 p. 155)

 

싱클레어는 다양한 방황을 거듭한 끝에 우연히 만난 피스토리우스 에게서 많은 영적 가르침을 받지만 그는 현실감이 없었다.

한스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자신보다 강하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 와주길,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행복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p. 88)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의 관계가 바로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붓벌레라는 가장 부조화한 우정이었다. (p. 97)

그 열정적이었던 소년은 이후에도 많은 천재적인 시도와 탈선을 거듭한 다음, 냉혹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훈육을 거친 끝에 영웅은 되지 못했지만 그럴듯한 인물로 성장했다. (p. 143) <수레바퀴 아래서>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한 하일너는 한스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작가에 의해 그럴듯한 인물로 성장했더라 라는 후일담을 남기지만, 한스는 그렇지 못했다.

한스의 외로운 미소 뒤에는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진 채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워하며 절망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p. 146)

한스는 이제 무엇보다도 쉬고 싶었다. 충분히자고 싶고 울고 싶고 마음껏 꿈꾸고 싶었다. 그동안 견뎌온 모든 힘든 일에서 벗어나 한 번만이라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p. 149)

그 모든처방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도아니었다. 모든 건강한 인생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젊은 한스에게는 벌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p. 168) <수레바퀴 아래서>

 

한스는 유년시절을 잃었고 청소년기의 방황속에 헤맸으며 성년으로서의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한채 성년을 맞이했다. 그렇게 어린시절 만들었던 물레방아바퀴를 부수고 학교의 수레바퀴에 깔리며 시계의 톱니바퀴를 만들지 못했다.

한스의 집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외로운 가정이었다면 싱클레어의 집은 빛 그 자체였다.

나는 밝고 참된 세계에 속했고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었지만, 내 눈과 귀가 향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다른 세계가 있었다. 비록 낯설고 괴이했으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과 공포를 느꼈지만, 나 역시도 그 다른 세계 안에서 살고 있었다.심지어 가끔은 금지된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았던 적도 있었다. 밝은 세계로 돌아가야 하며 그게 유익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곳이 덜 아름답고 지루하고 따분한 세계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내 목표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되어서 밝고 순수하게, 훌륭하고 조화롭게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갈 길이 멀었다. (p. 15) <데미안>

싱클레어의 성장기는 두 세계의 끊임없는 분투기 였다. 밝은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끊임없이 어두운 세상에 발을 딛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듯 하는 독백은 읽는 내내 헤세가 받았다던 융의 정신분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데미안의그 말은 청소년기 동안 줄독 내 안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늘 속으로만 간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느님과 악마, 틀에 박힌 하느님의 세계와 비밀스러운 악마의 세계에 대해 데미안이 한말은 나 자신의 생각, 나 스스로 만들어낸 신화와 정확히 일치했다. 두 세계 혹은 반으로 나뉜 세계,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나의 문제가 모든 사람의 문제며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직감이 신성한 그림자처럼 문득 뇌리를 스쳤다. 나 자신의 개인적 삶과 생각이 위대한 사상의 영원한 흐름에 얼마나 깊이 동참하고 있는지를 갑자기 깨달았다. 그러자 불안과 경외심이 몰려왔다. 그런 깨달음은 무언가 긍정적이고 뿌듯한 느낌을 주었찌만 반갑지는 않았다. 그것은 가혹하고 씁쓸했다. 책임을 져야 하고 더 이상 아이로 머물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 서야 한다는 의미가 깨달음 안에 들어 있었기때문이다. (p. 80) <데미안>

데미안과의 만남은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에서 밝은 세계로 구원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밝은 세계의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존재인 데미안과의 교류를 통해 싱클레어는 종교와는 다른 의미의 영적 성장을 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이는 상대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오.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법은 없으니까. (p. 141) <데미안>

데미안과 떨어져 상급학교에 진학한 싱클레어는 방탕해진다. 하지만 그 쾌락들 속에서도 방황은 멈춰지지 않았고 그때 만난 음악가이자 종교가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는 데미안과는 또다른 가르침으로 싱클레어에게 다가왔다. 무엇을 하든 여하튼 싱클레어는 내적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스스로도원하는 타입이었다.

누구에게나 '과제'가 있지만 그 과제는 스스로 선택할 수도, 맘대로 결정해서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잘못이었고, 세상에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완전히 잘못됐다! 깨우침을 얻은 인간에게 의무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이 이끄는 곳이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 뿐, 그 외에 다른 의무는 절대, 절대 절대로 없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p. 159)

모든 이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그가 관심을 둬야 할 일은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운명을 찾는 것, 그 운명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었다. (p. 160)

우리의임무는 세상에서 섬이 되어, 어쩌면 본보기가 되어, 어떤 경우가 됐든 삶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던 나는 완전한 고독을 겪어본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우정에 대해 배웠다. 두 번 다시 행복한 자들의 식탁과 유쾌한 자들의 축제를 동경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의 모임을 보아도 절대부러움이나 향수에 젖지 않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표식'을 지닌 자들의 비밀 속으로 빠져들었다. (p. 180)

우리가 의무와 운명으로 삼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즉, 우리 모두가 완전한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자연이 자신안에 심어놓은 씨앗의용도에 맞도록 충실히사는 것,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당히 자연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었다. (p. 182) <데미안>

 

싱클레어의 깨달음은 세상을 위한 것이라거나 종교적이라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 자기자신 스스로를 향한 존재의 당위성이었다.

한스가 소통하지 못하는 외로움에 허덕이다 스러졌다면, 싱클레어는 완전한 혼자가 됨으로써 살아남았다.

두 작품 모두 일인칭으로 서술되다 보니 헤세가 한스인듯 헤세가 싱클레어인듯 여겨지며 읽게됐지만, 다 읽고 나니 헤세는 하일너 였고 헤세는 데미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다만 너무 지치지 않도록 하게나. 안 그러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테니" (p. 124) <수레바퀴 아래서>

"이제 우리 모두가 거대한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p. 199) <데미안>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렸지만 싱클레어는 수레바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 114) <데미안>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 문구는 헤르만 헤세 자신을 위한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스의 알은 부화되지 못했으나, 싱클레어의 알은 부화했다. 그리고 부화하면서 파괴한 세상을 바라보며 괴로움에 몸무림치던 헤세는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결국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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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쓸모 - 불확실한 미래에서 보통 사람들도 답을 얻는 방법 쓸모 시리즈 1
닉 폴슨.제임스 스콧 지음, 노태복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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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미래에서 보통 사람들도 답을 얻는 방법

뉴스데이터, 주식시장, 스포츠통계, 의료진단등

일상에서 성공의 확률을 높여주는 생각의 힘

 

 

약간 큰편의 사이즈에 두툼한 하드커버, 게다가 제목에 '수학' 이 들어가는 책의 위압감^^ 대비 가독성이 좋은 책이었다.

저자 두명 모두 통계학 교수이고 본내용들도 통계관련 사례들이기 때문에 사실 수학의 쓸모라기 보다는 통계학의 쓸모 가 더 정확한 표현 같지만 통계학도 수학의 일종이긴 하니깐 뭐 ㅎㅎㅎ

원제는 AIQ 라고 써있는데, 풀어써놓지 않아서 아마도 Artificial Intelligence Quotient 즉 인공지능지수 가 아닐까 싶다. 수학 그중에서도 통계학 그중에서도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AI 이야기가 주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AI 개발자의 역할은 알고리즘에 무엇을 할지 갈쳐주는 것이 아니다. 통계와 확률의 규칙을 이용해, 무엇을 할지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p. 9)

오늘날 수많은 회사에서 AI 를 이용한 다양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AI 알고리즘 뒤에는 수학이 있다.

매력적인 역사 속 인물을 한 명씩 만나는 사이에 여러분은 왜 똑똑한 기계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며 반대도 마찬가지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성과 기술을 결합하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p. 13)

7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역사적 인물의 사례와 지금 현실 사례를 접목시키며 스토리적 재미를 높여주고 있다. 수학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게 이야기를 읽듯 술술 읽히면서 AI 와 데이터 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제껏 여러분의 디지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알고리즘은 검색이었다. 즉 대다수가 이용하는 구글 검색 말이다. 하지만 미래의 핵심 알고리즘은 검색이 아니라 추천이다. 검색은 좁고 제한적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검색해야 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하며, 여러분의 지식과 경험이 받쳐주는 만큼만 검색할 수 있다. 한편 추천은 풍부하고 제한이 없다. 수십억 명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 추천 엔진은 도플갱어와 같아서, 언젠가는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여러분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 (p. 22)

첫 이야기는 넷플릭스로 시작한다. 넷플릭스의 성공기반은 데이터 축적이었다.다년간 쌓아놓은 데이터들은 테스트없이 바로 제작해도 성공하는 드라마를 만들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검색 엔진이 생기면서 무궁무진한 지식의 정보가 넘쳐났고 그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지도 얼마 안된것 같은데, 이젠 추천의 시대라니. 그 변화속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그 이면에도 또한 수학이 있다.

에이브러햄 왈드는 전투기를 한번도 타보지 않은 수학자였지만 2차대전 중 전투기 피해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수많은 조종사들의 생명을 살렸다. 돌아온 전투기 동체에 가장 많은 총탄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전투기 동체에 한겹더 보호막을 덧대려 할때 왈드는 말했다. 돌아온 전투기가 아닌 돌아오지 않은 전투기를 돌아올 수 있도록 보호막을 덧대야 한다고, 동체가 아니라 엔진을 보호해야 한다고.

왈드의 조건부 확률은 넷플릭스가 활용한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거리의 비밀을 푸는 진정한 단서는 천체의 진짜 밝기에 관한 지식이다. 천체의 겉보기 밝기와 실제로 방출하는 빛, 즉 진짜 밝기를 알게 된다면 물리학 법칙을 이용해 그 천체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다음 계산하는 과정은 수학적으로 따분한 일이긴 하지만 개념은 단순하다.

AI 분야의 관점에서 보자면, 레빗이 예측 규칙을 발견한 셈이었다. '출력=입력의 함수' 라는 간단한 공식을 사용해서 말이다. (p. 84)

 

천문학은 수학과 데이터축적이 필수적인 학문이다. 튀코 브라헤의 실측 데이터가 없었다면 케플러의 법칙은 발견될 수 없었다. 근대에서 천문학은 세계관을 좌우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첨예한 논쟁이 늘 있어왔다. 별들의 거리문제도 논쟁거리였다. 1912년 헨리에타 레빗의 규칙(저자에 의하면 우주의 줄자)이 없었다면 그 논쟁은 아마 시간이 더 오래 지난후에야 해결점을 찾았을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AI 에서 패턴 인식은 방정식을 데이터에 맞춘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개념은 벌써 1805년에 나왔다. 그렇다면 혁신적인 발전은 왜 최근에야 일어났을까?

그 이유는 이미지, 텍스트, 동영상 등의 대용량 데이터에서 나타나는 패턴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레빗의 맥변광성 그래프처럼 산포도로 시각화할 수 있는 패턴보다 엄청나게 복잡하다. 그리고 이 패턴들은 직선의 방정식보다는 훨씬 어려운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이런 방정식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용량의 컴퓨터 연산 능력과 아울러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기술 수준이 높아진 최근에 와서야 혁신적인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p. 92)

 

아무리 훌륭한 원리일지라도 뒷받침되는 기술이 있어야 활용할 수 있다. 컴퓨터연산능력의 발달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1968년 미핵잠수함 스콜피온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수색해야할 바다 범위는 너무나 넓었고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때 수색범위를 좁히고 마침내 스콜피언을 찾아낼 수 있게 한 사람이 존 크레이븐 이라는 베이지언 검색의 달인이었다.

스콜피온 이야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 바로 모든 확률이 조건부확률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모든 확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달려 있다. 우리의 지식이 달라지면 확률도 반드시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베이즈 규칙은 확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려준다. (p. 132)

베이즈 규칙은 새로운 정보가 입수됐을 때 기존의 믿음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알려준다. 사전확률을 사후확률로 바꿔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자율주행차는 자신을 베이즈 도로에서 이동하는 확률의 한 방울이라고 생각한다. (p. 133)

 

통계와 확률은 쌍둥이 같은 사이다. 방대한 데이터 축적을 바탕으로 한 통계자료에서 원하는 조건의 확률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자도 베이즈 규칙을 활용하면 매일 마주치는 정보의 홍수 안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확률을 구해낼 수 있는 정리된 데이터자료를 우리가 항상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랄까

최초의 컴퓨터는 엄청나게 컸고 계산력도 그닥 신뢰할만하지 못했다. 당시 컴퓨터를 활용하려면 프로그래머가 테이프에 알맞은 비트들의 구멍들을 뚫고서 컴퓨터 회로에 끼워넣어야 했다. 1944년 수학교수직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던 여성 그레이스 호퍼는 컴퓨터는 인간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컴퓨터에 말을 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언어 혁명이 시작되었고 자연언어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인 자연언어를 컴퓨터가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인간의 언어는 너무 규칙이 많았고 견고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에 따라 모호할 수 밖에 없었다.

2010년 즈음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흘러가던 혁명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견인한 것은 바로 데이터의 방대한 유입이었다. (p. 191)

인간의 언어를 프로그래밍할 수는 없었지만, 데이터들을 쌓아 컴퓨터가 확률적으로 선택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지금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화?!하는 가전들이 나오고 있다. 언젠가는 정말 AI 와 편안한 대화를 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69년에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은 아이작 뉴턴이다. 그렇다. 미적분의 발명자, 만유인력을 알아낸 사람, 시인 알렉산터 포프의 시구를 통해 불멸의 존재로 드돞여진 바로 그 뉴턴이다. 1969년에 쉰네 살의 뉴턴은 과학계 거물로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종신 교수직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에 돌연 교수직을 그만두고서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더니, 정부 관리인 친구가 제안한 한직을 수락했다. 왕립조폐국 감사 직책이었다. (p. 221)

당시 영국화폐는 은화였는데 화폐금액보다 은 자체의 가치가 더 높다보니 화폐시장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뉴턴은 여러가지 노력을 했으나 은화의 변동성을 알아채지 못했고 따라서 부정거래를 근절시키지 못했다. 저자는 데이터를 통한 부정거래 적발과 스포츠에서의 데이터활용사례를 통해 변동성을 측정한다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한다.

이처럼 무턱대고 패턴을 찾아내려는 사람의 성향은 그동안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가령 한 데이터 집합이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여러분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데이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p. 286)

하지만 지금 당장 답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입수한 데이터로부터 의심스러운 가정을 이용해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고자 하는 억지다. 그런 자백이 결국에는 진짜 피해를 초래할지 모른다. (p. 287)

 

통계와 확률은 유용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저자는 한 신문기사를 예로 들어 잘못된 확률이 얼마나 왜곡된 가짜 뉴스를 양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얼마전 읽었던 '이상한 수학책' 에서는 평균과 같은 대표값의 허위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확률은 그 기본 데이터가 탄탄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성공과 대비해 볼때,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는 그런 문화적 헌신이 부족했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다. AI 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분야가 의료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발전된 AI 기술이 실제 환자를 대규모로 돕는 시기가 오려면 아마도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한데, 그 이유는 과학이나 컴퓨팅 역량과는 하등 관계가 없고 전적으로 문화, 동기, 관료주의와 관계가 있다. (p. 311)

나이팅게일하면 백의의 천사,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능력은 의료행정에서 더욱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부상이나 질병보다 위생상태나 잘못된 절차로 인한 사망건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조사하고 분석한 데이터로 보여줌으로써 의료현장의 많은 부분을 개선시켰다. 그 당시에도 데이터의 힘은 막강했다. 하물며 지금은 AI 시대 아닌가. 개인정보보호 관련 문제도 문제이지만 여전한 관료주의와 문화적 인식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저자는 개선을 요구한다.

다음번에 일어날 의료 분야의 데이터 과학 혁신은 나이팅게일과 같은 단 한사람이 아니라 수천 명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멋진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는 사람들이 의료계 동료들에게 AI 시스템이 정말로 효과적이라고 설득하면서 근거를 계속 내놓아야 혁신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의사와 간호사, 프트웨어 엔지니어, 데이터 베이스 관리자, 프라이버시 전문가, 벤처 투자가, 보험업자, 병원 운영자, 정책 입안자 그리고 환자들도 전부 참여해야 한다. 혁신은 전부 함께 힘을 모을 때 일어난다. 모쪼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가장 굳건한 결단력이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깃들기를 바란다. (p. 347)

2018년에 이 책을 출판했던 저자들이 코로나사태를 예상하진 못했겠지만, 저자가 마무리한 저 문단은 지금 확실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사태가 아직 현재진행중인 이때, 데이터를 숨기는 나라 와 데이터를 왜곡하는 나라 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난을 감수하며 공개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인지 와의 차이가 어떤 결과로 드러날 것인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제대로 축적한 곳만이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음으로써 마무리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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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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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패배가 만들어내는 뜨거운 눈빛

 

 

<딸에 대하여> 라는 작품을 통해 김혜진 작가를 알게 됐다. 그리고 팬이 되었다.

'어비' 라는 작가의 단편을 읽고, 이번에 <불과 나의 자서전> 을 읽고 나니, 작가만의 색깔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읽어봐야 겠지만, 작가의 작품들 속에선 일관되게 전해지고 있는 주제가 있었다.

소외된 혐오와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젊음.

하지만 작가는 소외된 혐오를 중앙에 배치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그것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쉽게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렇다고 쉽게 절망적이라고 포기할 수도 없는, 삶의 진솔함을 묵직하게 드러낸다.

낡은 동네의 한 건물 철거현장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안타까움과 미안함, 후회와 죄책감 따위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마침내 이곳이 사라지는구나. 오히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내가 느낀 건 그런 실감이었고, 오늘 정말 그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 심이었습니다. (p. 11)

남일동이라는 동네의 상징적이었던 장소 제일약국건물의 철거현장에 굳이 찾아갔었던 것은, 없어질듯 없어질듯 없어지지않고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장소가 정말 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실감이 필요해서였다. 현재적 실감은 감정에 앞서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 남일동이 그 시절 어머니에게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로부터 시간이 훨씬 더 오래 지난 뒤에 깨달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나를 키우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내내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일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p. 24)

 

서른살 홍이는 3년전 갑작스레 발병한 두드러기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낸다. 하릴없이 백수로 지내고 있긴 하지만 홍이의 속이 태평하지 않다는 것은 그녀의 피부발진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일동의 제일약국에 약을 사러다닌다는 이유로 홍이는 남일동을 내내 배회하고 있다. 그러다 주해모녀를 만나게 된다. 어린 딸 수아를 홀로 키우는 엄마 주해를.

다들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아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입바른 말만 하는 사람을 누가 좋다고 해. (p. 41)

어머니의 말은 홍이에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주해를 처음 만난 날 홍이는 3년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왜인지 남일동을 생각하면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한 번도 제대로 빛난 적이 없다는 생각 탓입니다. 남일동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 처박히듯 방치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p. 51)

소설을 읽는 내내 남일동에 대한 묘사는 내가 나고자란 동네를 생각나게 했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닥 변하지 않은 곳... 남일동 같은 곳을 나또한 알고 있달까...

주해라면 뭐든 솔직하게 답할 텐데도 대놓고 뭔가를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추측과 의혹을 부풀리는 것이 사람들에겐 더 익숙하고 편한 방식이었을 겁니다. (p. 52)

누군가 새로 이사를 와서 반갑게 인사하며 잘 지내보자고 할때 선뜻 그러자고 손내미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될까? 그저 스쳐지나가는 잠깐의 모습만 보고 이런것같더라 저런것같더라 하며 수근대는 방식을 왜 선호하는 것일까...

내 눈엔 모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친절이나 호의를 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 선의나 진심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 무레와 몰상식이 몸에 밴 인간들. 그러니까 외지 사람들이 남일도, 남일도 할 때 그 남일도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p. 56)

가로등이 없어 어두컴컴한 길에 가로등 설치를 요구하고, 한번도 마을버스가 올라온 적 없는 산동네에 마을버스노선을 만들려고 청원서를 들고 사인을 요청하는 주해에게 동네 사람들은 냉대하고 박대할 뿐이었다. 불편한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그 고집을 뚫고 마을버스가 들어왔을때 정작 가장 많이 타고다닌 것은 자신들이었으면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주해를 찾았습니다. 그럼 누구한테 말을 해? 시작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이 집 새댁이 여기 책임자 아니요?

부탁이나 요청이 아니고 거의 강요나 강제로 보이는 그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주해는 모두 들었습니다. 임시로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고 제 것을 내어주고서라도 사람들의 성난 마음을 달래려고 했습니다. (p. 92)

 

주말에 약국사거리에서 주해가 안쓰는 물건을 펼쳐놓고 앉아있던 것을 시작으로 한두사람 모여들더니 '마녀시장'이라는 유명세를 얻어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이게 됐을때, 주해옆에 하나둘 모여들어 장사하던 동네사람들은 점점 더 당연한듯 주해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홍이 씨, 그렇게 해서 사람들 마음을 어떻게 얻나요?

사람들 마음을 얻어야 해요?

주해는 내 팔을 잡고 소곤거렸습니다.

홍이씨, 난 여기서 오래 살고 싶어요. 여기 아니면 갈 데도 없고요. 알잖아요. 내가 이러는 거 다른 사람들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필요해서 하는 일이에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요. 난 정말 잘하고 싶어요. (p. 95)

 

주해는 그저 그 낡고 후미진 동네에서 살고 싶은 것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동네 사람들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더 뻔뻔스럽게 당연하게 받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재개발계획 소문이 퍼진다. 늘 그랬듯 계획만 세우다 어그러질것이라 홍이는 생각했지만 주해모녀는 아파트로 이사할 꿈에 부푼다. 하지만 주해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동네 밖에서도 찾아왔다.

누가 그래? 그 새댁이 그래요? 도서관이고 버스고 다 시에서 결정하고 시행하는 일이지. 어디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것인가. 별소릴 다 듣네. 어디 가서 괜히 그런 말 꺼내지 말아요. 동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떠난 주해 모녀에 대해 냉담하게 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얻자고 안간힘을 쓰던 주해가 바보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주해가 가지려고 했던 것이 고작 이 동네에 머무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남일동에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집이 없다는 불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나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주해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따져보면 나도 이곳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쨋거나 나 역시 끝까지 주해를 믿지 못했으니까. (p. 162)

남일동에서 학교를 다니며 따돌림을 당했던 중3때의 기억은 홍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왕따당하는 박대리의 옆을 지키게 만들었고 그 결과를 홍이의 피부는 여전히 되새기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 만났던 주해모녀를 통해 홍이는 더더더 남일동이 두려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불길은 몸부림치듯 높이 더 높이 솟구쳤습니다. 그 순간에는 어둠을 이기며 몸집을 부풀리는 그 불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니, 차라리 그 불이 여기 이 남일동 전체를 휩쓸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커지고 더 커지고 누구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져서 저 남일동을 모두 집어삼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무시무시한 남일동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더는 없다는 생각을 나는 했던 것입니다. (p. 167)

한 사람 한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남일동이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늘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p. 168)

 

여기까지 읽고나서야 제목을 다시 살펴봤다. 불과 나의 자서전...

홍이에게 남아 끊임없이 홍이를 괴롭히는 남일동의 흔적을 불은 태워버릴 수 있을까...

한 번씩 그 밤에 드럼통 바깥으로 넘쳐흐를 듯 넘실거리던 불꽃을 떠올리면 남일동이 허물어지는 것을 기필코 봐야겠다는 오기가 살아나고 그 마음이 점점 번지고 커지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오늘 정오에 남일동의 남은 주택들이 철거됩니다. (p. 170)

철거현장에서 시작해서 철거현장으로 돌아오는 홍이의 기억을 함께하는 동안, 주해모녀가 살았던 1년남짓한 시간이 남일동에 남겼던 흔적을 함께 더듬는 동안, 주해의 당당함과 홍이의 두려움이 상반되지 않고 동시에 아프게 다가와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불의 자서전은 짧게 끝났다면 산동네 남일동은 이제 철거됐다면, 홍이의 자서전은 현재진행중이다. 그리고 주해의 삶도...

하지만 읽는 내내 알고 있었다. 꺼졌다 생각했던 불씨는 숨어있기 마련이며 철거되고 새로 세워진 재개발동네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그래서 더 홍이와 주해의 남은 시간들이 벌써부터 힘겹게 다가왔다.

하지만 또한 알고 있다. 어쨌든 홍이도 주해도 나도 모두 살아있고, 삶이 지속되는 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1983년생으로 2012년에 등단한 젊은 작가가 이토록 뚜렷한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반가웠다. 앞으로도 무척 기대가 된다.

김혜진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의 눈빛과 그 인물들의 삶이 보여주는 불빛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빛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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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냐도르의 전설 에냐도르 시리즈 1
미라 발렌틴 지음, 한윤진 옮김 / 글루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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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족의 왕자

서로 다른 야망

하나의 운명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인만큼 드래곤, 엘프, 데몬, 인간 네 종족이 등장하고, 그 외에도 기이한 존재들과 마법 그리고 현실적이지 않은 환경이 등장한다. 거기에 전쟁과 평화 그리고 사랑과 야망이 소용돌이치는 판타지 세계가 등장한다.

사랑... 야망... 그렇다. 이 판타지 소설엔 사랑과 야망이 등장한다. 판타지 소설에서 에로틱한 장면이 묘사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사건 사이사이 에로틱이 등장한다. 어른용 판타지 소설이랄까 ㅎㅎㅎ

돌의자에 앉은 대마법사가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미소가 마법사의 입가에 걸렸다.

"난 네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지. 내 친히 네가 원하는 권능을 하사하겠노라. 그렇지만 대신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성품, 그러니까 불굴의 의지를 가져갈 것이다"

왕자에게 손을 얹고, 그가 지닌 불굴의 의지를 거둬 간 마법사는 왕자를 드래곤으로 변신시켰다. (p. 10)

"내가 불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왕자가 간청했다. 이에 대마법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왕자에게 그가 지닌 미모를 요구했다.

"네 피부는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가죽이 되리라. 앞으로 드래곤의 화염도, 인간의 칼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니, 네 눈에서 쏘아진 치명적인 눈빛만으로 타 종족을 굴복시키리라. 이제 그 권능은 바로 네 것이다."

그렇게 북부 왕국의 왕자는 추악한 데몬의 형상을 한 채 집으로 되돌아갔다. (p. 11)

"부디 데몬족의 사악한 눈빛이 내게 통하지 않게 해 주시고,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검을 만드는 재능을 내려 주시오"

마법사는 한눈에 그에게 요구해야 할 대가를 알아차렸다. 그건 바로 왕자가 느끼는 사랑, 유머, 삶의 의욕과 같은 감정 이었다. 그렇게 서부 왕국의 왕자는 누구보다도 아름답지만 도도하고 쌀쌀맞은 엘프가 되어 제 왕국으로 돌아왔다. (p. 12)

"아무 힘도 원하지 않소" (p. 14)

 

에냐도르 대륙을 통치하는 네 왕국이 있었다. 네 왕국의 인간 군주들은 점점 욕망에 부풀어 다른 왕국를 침범하여 이루는 통일을 꿈꿨다. 왕들은 대마법사에게 왕자를 보내 필요한 힘을 얻어오도록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렇게 인간의 네 왕국은 드래곤 왕국, 데몬 왕국, 엘프 왕국으로 재 탄생했다. 마지막 인간왕의 왕자는 대마법사에게 가서 그 어떤 힘도 요구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왕국 인간들은 힘없는 노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대마법사는 뜻밖에도 이 인간왕자에게 마법능력을 주면서 예언을 남긴다. 에냐도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세대를 거듭하던 전쟁 속에 데몬은 드래곤족을 종속시키고 엘프는 인간족을 종속시켜서 양대 구도가 형성되었다. 엘프족은 수시로 인간마을에 와서 적당하게 잘 자란 장자를 징집해 갔다.

트리스탄은 고아다. 카이 대신에 징집에 내보내질 목적으로 키워진 소년. 열일곱살이 되었을때 엘프족에 징집되던날, 마법사라고 오해를 받게 된 카이의 여동생 아그네스도 끌려 가게 된다. 마법사는 바로 카이였는데.

트리스탄은 노예로 끌려가는 중에도 아그네스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등에 심하게 채찍질을 맞게 되고 그 상처를 치료해준 마론과 가까워진다. 마론은 동생대신 노예로 끌려온 남장여자였다. 아그네스는 엘프궁으로 보내지고 트리스탄은 병영으로 보내지는데, 그 사이 카이는 형제처럼 자란 트리스탄과 여동생 아그네스를 구출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떠난다.

초보마법사로 우여곡절끝에 염소와 그레타 라는 하녀와 동행이 되고 그러다 드래곤 소녀 스흐오크와 데몬 소년 툴 까지 합세하게 되는 동안, 트리스탄은 병영에서 엘프족에게 대항했다가 처형의 위기에 몰리고 그순간 드래곤 한마리가 날아와 그를 살린다. 그 드래곤 사피라에 의해 트리스탄은 자신이 왜 드래곤의 화염속에서도 다치지 않고 사피라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게 된다.

"불구대천의 숙적이 서로 표식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표식을 얻은 자, 파수꾼이 되리라. 파수꾼은 각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다스리니니, 데몬, 드래곤, 인간, 엘프가 진실이라는 하나의 핏줄로 이어지리다" (p. 383)

한편, 엘프궁으로 잡혀갔던 아그네스가 갇힌 감옥 옆방에는 이상한 존재가 있었다. 감옥관리자인 엘프가 매일 죽이러 오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도 잠시후면 다시 되살아나는 불사의 존재. 그는 마법사 엘리야 였고, 아그네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 엘프왕자 이스타리엘이 아그네스를 보호하려다 엘리야의 탈출을 돕게 된다. 이스타리엘은 궁을 떠나면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쌍둥이 여동생 이조라에게 사랑의 물약을 선물로 준다.

"뭐, 알겠어요. 특정 상황에 부닥치면 각성하는 능력을 타고난대요. 이런 네 명의 기형아... 아니, 특이체질들이 각각의 종족마다 한 명씩 동시에 등장하면, 에냐도르에 새 시대가 열린대요. 엘프와 데몬족은 그걸 몹시 우려하고 있다죠. 이 두 종족이 다른 왕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지배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변화를 꺼려요. 이런 이유로 데몬족은 그들 가운데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린대요" (p. 409)

카이가 만난 데몬왕자 툴은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태어나 힘들게 살아남은 소년이었다. (이조라와 이스타리엘 쌍둥이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엘프족과 다르게 인간의 감정을 지닌 것을 숨긴채 살아왔다.) 카이는 묘한 조합의 일행들과 함께 트리스탄과 아그네스를 찾으러 가는 여정에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며 마법사로서도 성장하게 된다.

엘리야는 탈출하면서 아그네스의 목걸이를 보게 되는데 그 목걸이가 트리스탄것이었음을 알고 트리스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트리스탄을 찾아가는 길에 카이 일행과 만나게 되고 트리스탄이 드래곤과 함께 병영에서 탈출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모두의 목적지가 한 곳으로 향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에냐도르의 네 종족은 핏줄을 통해 재능이 이어졌다. 하지만 파수꾼이 되려면 정해진 시기에 때맞춰 표식을 얻어야 한다. 제 종족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종족의 대리인이 남긴 상처를 통해서. 나는 이스타리엘에게 표식을 새겼다. 엘프는 트리스탄에게, 그리고 트리스탄은 용에게 표식을 남겼지. 그렇기에 트리스탄 또한 드래곤과 함께 슈발벤하인으로 날아간 거다. 그 용은 파수꾼들이 어디에서 화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말은 이제 당신이 네 번째 파수꾼인 데몬을 찾을 거란 뜻도 되겠네요. 내 말이 맞나요? 당신이 그 데몬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어쩌겠어요?" (p. 470)

 

카이일행이었다가 헤어진 데몬족 툴 이 그 소년이었다. 다음 보름달이 뜨기전에 네명의 파수꾼이 예언의 장소에 모여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 시대는 통합과 평화의 시작이 될 터였다.

가장 먼저 슈발벤하인에 도착했던 트리스탄은 엘리야가 떠난 후 보호마법이 사라져 위기에 처한 왕궁을 구하기 위해 방황중이었던 이조라공주를 만난다. 자신의 약혼자 이름이 새겨진 검을 들고 있는 트리스탄을 보고 그가 약혼자라고 생각한 이조라는 이스타리엘이 주고간 사랑의 묘약을 나눠마신 후에야 그가 인간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둘은 이미 뜨거운 사랑에 불타올랐고, 트리스탄이 고백한 마론에 대한 마음에 슬픔을 갖게 된다.

트리스탄이 잠시 자리를 비운때 엘리야 일행이 도착하고 이조라공주는 예언의 전모를 알게 되지만, 그 일행속에 마론이 등장하면서 이조라는 자신의 실수를 처절히 깨닫게 되어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예언의 실현과 사랑의 파국이 예상되면서 책은 마무리 되는데...

그렇다. 이 작품은 에냐도르 이야기의 1권인 셈이다.

상세한 배경설명과 인물설명이 이어지고 여기저기 포석이 제대로 깔리면서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싶을 때 딱 끝나는!!

540여페이지가 만들어놓은 서막은 제대로 흥미진진하게 올려졌다. 두번째 이야기 <에냐도르의 파수꾼> 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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