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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수레바퀴 아래서 초판본 리커버 디자인 고급 벨벳 양장본 세트 - 전2권 ㅣ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외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20년 1월
평점 :
품절
초판본 리커버 디자인의 표지를 보면서 영화속 책이미지가 떠올랐었다. 책이 출판된 동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이든 시대가 동일한 경우) 어떤 인물이 책을 들고 있다면 이런 모양이었다. 살짝 작은 듯한 사이즈에 어두운 바탕의 하드커버에 금박 제목... 영화속 인물들은 손바닥보다 살짝 큰 책 한권을 가지고 다니며 읽고 소중하게 보관하곤 했다. 영화속에서 그 책들의 제목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 시대의 책이 또 등장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학창시절 읽었던 책들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헤세의 책과 헤밍웨이의 책은 내게 문학의 양대산맥 같은 존재였다. 헤세의 책이 감성을 예민하게 건드렸다면 헤밍웨이의 책은 감성을 폭발시키는 느낌을 주곤 했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이미지적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을 수십년만에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렸을때는 데미안이 강렬하게 다가왔었는데 지금은 수레바퀴아래서 가 더 진하게 다가온달까.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첫 장편소설 '페터카멘친트'로 작가적 명성을 얻고 난후 발표한 두번째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1906년) 와 이런저런 개인적 고난 및 시대적 수난을 경험한 후 발표한 데미안(1919)은 모두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헤세의 자아성찰 성향은 본인의 타고난 성향일수도 있고 시대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배경들을 통해 자라난 성향일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소설을 읽는 내내 헤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는 한스 기벤라트 라는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영특한 신동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 라는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열살 무렵의 소년에서 스무살 남짓의 청년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스 기벤라트 는 자신의 예민함을 극복하지 못한 느낌이라면 에밀 싱클레어는 영적인 득도를 함으로써 극복하는 느낌을 준다. 이 두 작품 사이에 헤르만 헤세의 정신분석 치료가 있었다.
혹독하고 치열했던 지난 몇 년간 호기심은 잠들어 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신앙은 가끔 구둣방 아저씨와 대화할 때만 잠시 되살아나 개인적인 삶과 어우러졌다. 구둣방 주인과 목사를 비교하자니 웃음이 나왔다. 힘든 시절을 통해 습득한 구둣방 주인의 완강함과 엄격함을 한스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플라이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단순하고 편협한 면이 있었고 지나친 경건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다. (수레바퀴 아래서 p. 59)
한스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신동소리를 듣고 주에서 운영하는 상급학교에 이등으로 합격하며 입학한다. 상급학교는 신학교였기에 종교색이 짙었지만 한스의 고향에 있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 아저씨보다 경건하진 않았다.
우리는 불 앞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신비 의식과 종교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것들의 가능한 미래를 그려보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궁금하고 흥미롭기만 할뿐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박식함을 자랑하며 지나간 세계가 남긴 폐허를 지루하게 뒤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신비주의의 추종이니, 전통적 종교 형태로 모자이크 맞추기니 하는 말들에 온통 반감이 생겨났다.
"피스토리우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지긋지긋한 구닥다리 같아요!" (데미안 p. 155)
싱클레어는 다양한 방황을 거듭한 끝에 우연히 만난 피스토리우스 에게서 많은 영적 가르침을 받지만 그는 현실감이 없었다.
한스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자신보다 강하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 와주길,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행복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p. 88)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의 관계가 바로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붓벌레라는 가장 부조화한 우정이었다. (p. 97)
그 열정적이었던 소년은 이후에도 많은 천재적인 시도와 탈선을 거듭한 다음, 냉혹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훈육을 거친 끝에 영웅은 되지 못했지만 그럴듯한 인물로 성장했다. (p. 143) <수레바퀴 아래서>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한 하일너는 한스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작가에 의해 그럴듯한 인물로 성장했더라 라는 후일담을 남기지만, 한스는 그렇지 못했다.
한스의 외로운 미소 뒤에는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진 채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워하며 절망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p. 146)
한스는 이제 무엇보다도 쉬고 싶었다. 충분히자고 싶고 울고 싶고 마음껏 꿈꾸고 싶었다. 그동안 견뎌온 모든 힘든 일에서 벗어나 한 번만이라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p. 149)
그 모든처방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도아니었다. 모든 건강한 인생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젊은 한스에게는 벌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p. 168) <수레바퀴 아래서>
한스는 유년시절을 잃었고 청소년기의 방황속에 헤맸으며 성년으로서의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한채 성년을 맞이했다. 그렇게 어린시절 만들었던 물레방아바퀴를 부수고 학교의 수레바퀴에 깔리며 시계의 톱니바퀴를 만들지 못했다.
한스의 집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외로운 가정이었다면 싱클레어의 집은 빛 그 자체였다.
나는 밝고 참된 세계에 속했고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었지만, 내 눈과 귀가 향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다른 세계가 있었다. 비록 낯설고 괴이했으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과 공포를 느꼈지만, 나 역시도 그 다른 세계 안에서 살고 있었다.심지어 가끔은 금지된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았던 적도 있었다. 밝은 세계로 돌아가야 하며 그게 유익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곳이 덜 아름답고 지루하고 따분한 세계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내 목표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되어서 밝고 순수하게, 훌륭하고 조화롭게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갈 길이 멀었다. (p. 15) <데미안>
싱클레어의 성장기는 두 세계의 끊임없는 분투기 였다. 밝은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끊임없이 어두운 세상에 발을 딛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듯 하는 독백은 읽는 내내 헤세가 받았다던 융의 정신분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데미안의그 말은 청소년기 동안 줄독 내 안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늘 속으로만 간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느님과 악마, 틀에 박힌 하느님의 세계와 비밀스러운 악마의 세계에 대해 데미안이 한말은 나 자신의 생각, 나 스스로 만들어낸 신화와 정확히 일치했다. 두 세계 혹은 반으로 나뉜 세계,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나의 문제가 모든 사람의 문제며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직감이 신성한 그림자처럼 문득 뇌리를 스쳤다. 나 자신의 개인적 삶과 생각이 위대한 사상의 영원한 흐름에 얼마나 깊이 동참하고 있는지를 갑자기 깨달았다. 그러자 불안과 경외심이 몰려왔다. 그런 깨달음은 무언가 긍정적이고 뿌듯한 느낌을 주었찌만 반갑지는 않았다. 그것은 가혹하고 씁쓸했다. 책임을 져야 하고 더 이상 아이로 머물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 서야 한다는 의미가 깨달음 안에 들어 있었기때문이다. (p. 80) <데미안>
데미안과의 만남은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에서 밝은 세계로 구원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밝은 세계의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존재인 데미안과의 교류를 통해 싱클레어는 종교와는 다른 의미의 영적 성장을 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이는 상대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오.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법은 없으니까. (p. 141) <데미안>
데미안과 떨어져 상급학교에 진학한 싱클레어는 방탕해진다. 하지만 그 쾌락들 속에서도 방황은 멈춰지지 않았고 그때 만난 음악가이자 종교가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는 데미안과는 또다른 가르침으로 싱클레어에게 다가왔다. 무엇을 하든 여하튼 싱클레어는 내적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스스로도원하는 타입이었다.
누구에게나 '과제'가 있지만 그 과제는 스스로 선택할 수도, 맘대로 결정해서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잘못이었고, 세상에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완전히 잘못됐다! 깨우침을 얻은 인간에게 의무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이 이끄는 곳이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 뿐, 그 외에 다른 의무는 절대, 절대 절대로 없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p. 159)
모든 이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그가 관심을 둬야 할 일은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운명을 찾는 것, 그 운명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었다. (p. 160)
우리의임무는 세상에서 섬이 되어, 어쩌면 본보기가 되어, 어떤 경우가 됐든 삶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던 나는 완전한 고독을 겪어본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우정에 대해 배웠다. 두 번 다시 행복한 자들의 식탁과 유쾌한 자들의 축제를 동경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의 모임을 보아도 절대부러움이나 향수에 젖지 않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표식'을 지닌 자들의 비밀 속으로 빠져들었다. (p. 180)
우리가 의무와 운명으로 삼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즉, 우리 모두가 완전한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자연이 자신안에 심어놓은 씨앗의용도에 맞도록 충실히사는 것,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당히 자연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었다. (p. 182) <데미안>
싱클레어의 깨달음은 세상을 위한 것이라거나 종교적이라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 자기자신 스스로를 향한 존재의 당위성이었다.
한스가 소통하지 못하는 외로움에 허덕이다 스러졌다면, 싱클레어는 완전한 혼자가 됨으로써 살아남았다.
두 작품 모두 일인칭으로 서술되다 보니 헤세가 한스인듯 헤세가 싱클레어인듯 여겨지며 읽게됐지만, 다 읽고 나니 헤세는 하일너 였고 헤세는 데미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다만 너무 지치지 않도록 하게나. 안 그러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테니" (p. 124) <수레바퀴 아래서>
"이제 우리 모두가 거대한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p. 199) <데미안>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렸지만 싱클레어는 수레바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 114) <데미안>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 문구는 헤르만 헤세 자신을 위한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스의 알은 부화되지 못했으나, 싱클레어의 알은 부화했다. 그리고 부화하면서 파괴한 세상을 바라보며 괴로움에 몸무림치던 헤세는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결국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