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돼지의 낙타
엄우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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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나 표지에

'감색 운동화 한켤레 , 푸른 광장에서 놀다 의 작가 엄우흠 신작 장편소설' 이라고 되있는데,

이중 '감색 운동화 한켤레' 의 작가 라는 점에서 끌렸다.

'감색 운동화 한켤레' 라는 작품은 내 기억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소설이었던지라 오랜만에 제목을 보니 반가웠다.

노동소설로 읽었던 작품이었는데 당시 난쏘공 그리고 공지영 소설과 함께 대표적으로 읽히던 노동문학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사람아 아 사람아' 라는 소설도 일반적 소설은 아니었는데 방송인 오상진씨가 아내와 자신을 연결해준 책이라고 해서 놀랐었다. 아직도 읽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신기했고, 요즘 세대가 읽으면 무엇을 느낄까 궁금하기도 했고.


1968년생 작가가 1991년 첫 작품 '감색 운동화 한켤레' 이후 1999년 출간한 '푸른 광장에서 놀다' 소설 이후 2011년에 1년간 계간지 문예중앙에 연재했던 작품이 이 책이라고 한다. 당시 제목은 '올드 타운' 이었다고. 참 드문드문 작품을 내는 작가인것 같다. 여하튼 반가웠다.


전반적인 느낌이 참 묘한 소설이었다.

처음엔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좀 낯설고 이야기가 파편적이라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인물들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짜임새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구조라서 신기했다. 경수네 가족을 중심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등장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건가 싶었는데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등장인물 한명한명 묘사하는 방식도 신선했다. 인물들마다 속생각이 표현될 때 순진하달까 순수하달까 솔직하달까... 웃긴건 아닌것 같은데 웃음이 터져나오는 장면이 곳곳에 있었다. 작가가 그사이 유머가 늘은것 같기도 하고 ㅎㅎ

하지만 배경이 더이상 갈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비닐하우스 빈민촌이고 각각의 인생들은 소위 밑바닥 인생이라 불려지는 삶인지라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쏟는 작가의 날카로움은 여전한 것 같기도 했다.


제목이 워낙 독특해서 책을 읽는 내내 제목을 생각하며 읽게 됐다. 마리의 돼지의 낙타 면 결국 낙타가 핵심인건가???

작가의 유머와 날카로움은 마리의 돼지의 낙타를 묘사하면서 환상의 영역을 넘나든다.

인물들 사건들 배경들 모두 다 현실적인데 소녀 마리와 마리의 돼지와 돼지의 낙타 는 비현실적 느낌을 준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면서 소설은 좀더 부드러워진다. 마치 현실같은 꿈 혹은 꿈같은 현실처럼...


연재할 당시의 제목이었던 '올드 타운' 에서 제목을 잘 바꾼것 같다. 올드 타운 이라는 제목은 소설에 대한 경계선이랄까 한계랄까 뭔가 울타리를 치면서 범위를 한정하는 듯한 예상이 가능할 것 같은 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비해 마리의 돼지의 낙타 라는 제목은 왜 이제목일까 생각하면서 소설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속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낙타라는 존재가 주는 이질감에 대해 그 이질감이 소설 전체에 주는 분위기에 대해... 그리고 개인적 의견으로 이 소설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존재가 마리의 돼지의 낙타라는 것에 동의한다.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의 연결성은 믿으면 자연스러워지고 의심하면 부자연스러워졌다. 때로는 나비효과 였고 때로는 플라시보효과 였던 작은 사건들이 비현실에서 현실로 되는 계기들은 지극히 사소했다. 비현실적 존재가 현실에 존재함으로써 상징되는 것이 흔하디 흔한 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단어들로 표현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좋았다.


서민들의 이야기이고 이웃들의 이야기이면서, 낯설게 읽히고 감정의 파고를 겪지 않게 해주는 소설이 참 특별하고 매력적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은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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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함께 살기
폴 뒤무셸.루이자 다미아노 지음, 박찬규 옮김, 원종우 감수 / 희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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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아늑한 색감에 예뻐서 로봇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벼운 인문학에세이 또는 과학에세이 정도를 예상하고 읽었는데, 철학책이었다.;;;

로봇과 함께 살아갈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 시대에 인공지능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금 시대에

로봇을 정의하려면 로봇의 윤리를 정의하려면 로봇의 마음을 정의하려면 그 전에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해봐야 한다는 책이었다.

저자는 두명 다 철학을 전공하고 한명은 일본의 대학에서 강의중이고 한명은 일본에서 연구를 수년간 진행한 경험이 있는 학자들이다. 철학중에서도 로봇철학 혹은 과학철학을 주요 분야로 연구하고 계신 분들인것 같다. 우리나라는 철학의 학문적 기반이 약한 편인데, 미래철학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순간 궁금증이 일었지만 알수 없다. 기술적 발전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동반되야 할텐데 일본의 철학적 기반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하고 그렇다.


책은 기정사실처럼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로봇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도와주는 기계는 진작부터 사용되어져 왔다. 하다못해 주방의 믹서기도 로봇이라 할 수 있는 기계지만 우리는 로봇이라 부르지 않는다.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자동화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 정의부터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AI 라고 불리는 인공지능을 가진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진 것을 로봇이라 하는가? 하지만 우리는 로봇에게 결여되길 바라는 특성들이 바로 인간과 유사한 자율성 이라는 측면이다. 인간의 전유물 같은 자율성을 로봇이 가진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로봇이 알아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 해주길 바라기도 한다. 다시말해 우리는 로봇이 자율적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자율적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고 책은 주장한다. 소셜 로봇의 연구가 우리는 누구이며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무엇을 가려줄지를, 진짜 자율성이나 의식을 지니고 사고가 가능한 로봇의 탄생이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보다, 인공의 소셜 로봇을 탄생시키려는 우리의 계획이 당장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지를, 로봇들에게 공감능력을 심어주려는 노력이 인간의 감정 자체와 감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줄지를, 그리고 마음의 사회적 차원이 마음 자체나 다른 인지시스템과의 관계에 무엇을 가르쳐줄지를. 다시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이 로봇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무엇이며, 인간의 정서나 감정 혹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다시말해 인간에 대해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책은 주장한다.


우리는 인공의 존재에게 인간과 닮았으면서도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못하지만 인간보다 우월한 이상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다. 인간이 만드는 로봇을 통해 인간에게 없는 완전성에 다가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봇과 인간이 흡사하게 여겨질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뇌를 일종의 기호처리장치로 보았던 고전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외면했던 감정이 인지과학 분야의 주요 연구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지능은 이제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지능이 아닌 감정의 문제로 관심이 옮겨져 왔고 로봇에게 그러한 정서적인 부분을 어느정도 까지 요구할지 혹은 어느정도 까지 가능할지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셜 로봇공학은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주고 인간에 대해 이해하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지과학은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다름'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은 이론상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원론적 요소인 '다름'을 강조한다. 소셜로봇에 대한 연구는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좀처럼 인정하지 못했던 인간과 여타 지능체의 차이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다. 로봇과 인간은 다르지만 로봇은 인간처럼 만들어져가고 있고, 몸과 정신은 하나이지만 몸과 정신은 분리되어 연구되어 진다. 어쨌든 인간은 자연이나 인공의 여러 인지시스템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의 한 인식론적 행위자이다.


소셜로봇공학의 목적은 인간에게 익숙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타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가를 배우고이해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로봇이 사회에 적응하려면 공감과 감정이 필수적이다. 로봇과 인간은 어느정도 사회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정서는 무엇이고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인간연구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 타자의 마음은 이론상 존재하는 실체이고 나의 마음은 세상의 한 객체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무대가 된다. 이렇게 볼때 현대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유아론이나 관념론과 단절됐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음을 행위자의 뇌나 물질적 메커니즘에 체화하려 하면서도 유아론과 관념론의 기본 개념들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출현하는 지점이면서 정신철학과 인지과학이 외면했던 '사회환경'이란 측면을 연구하는 로봇공학은 '정서'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물질 일원론의 치장 뒤에서 마음과 물질의 이원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감정을 지닌 로봇에 대한 연구는 마음을 비물질적인 실체도 아니요 그렇다고 공간적으로 확장된 무엇도 아닌 하나의 네트워크나 생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의 상호작용에서 감정에 관한 진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속해 있다.


로봇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로봇은 의도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로봇을 조종하는 인간행위자가 안보이는 상태에서 로봇을 치료용일지라도 인간처럼 대하게되는 환자들의 감정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가짜감정이라고 거짓되다고 해야할까? 군사로봇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결정권까지 로봇에게 설정해야 할까?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 로봇윤리에 대한 문제는, 로봇이 문제가 아니라 로봇을 대하는 사람과 로봇을  조종하는 사람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로봇윤리는 선과 악의 차이를 가르침으로써 도덕적  기계를 만들고자 한다고 한다. 도덕규범을 장착한 인공행위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로봇의 자율성 문제를 고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도덕적이고 자율적 인공행위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들의 자율적 행위가 도덕문제를 야기하기에 인공행위자들에게 윤리적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율적 행위를 제한하여 도덕적인 인공행위자들을 만들자는건 다시말하면 진정한 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 없도록 이들의 행위를 제한하자는 얘기이기도 한 것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의 질문처럼 혼돈 그자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자율적 시스템에게 선택권을 양도하는 행위 속에 소수의 인간행위자들에게 결정권을 몰아줌으로써 정치적 도덕적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이 소수에 의한 권력 집중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사실 이 문제가 로봇보다 더 무서운 것인데... 오늘날 자율적 행위자들에게 결정권을 위임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들은 엄밀히 말해 윤리적이라기 보다 법적, 정치적 문제들이다. 로봇윤리를 말하고자 했으나 결국 다시 인간윤리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책은 인공윤리가 현재 진행중인 발전에 주목하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새로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윤리에도 혁신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인공윤리는 로봇들의 사회로의 진입을 종말의 시작이 아닌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전진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것은 인공의 사회적 파트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우리 인간에 대한 도덕적 성찰이자 탐구가 될 것이라고.


쉽지 않은 책이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철학자의 개념들이 별다른 설명없이 바로 인용될 때도 그렇고 문장이 길어서 맥락잡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최근에 읽은 AI나 로봇윤리 관련 책들이 떠오르면서 당장 적용시켜야 할 근시안적 윤리규범도 필요하겠지만, 이 책처럼 근본적인 관점도 필요하겠구나 싶다.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인간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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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숨은 과학
캐스린 하쿠프 지음, 김아림 옮김 / 생각의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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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부제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에 숨은 과학] 인 것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의 중심에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사실 나는 프랑켄슈타인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고,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줄 알고 있었던 만큼 그 소설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소설의 저자 메리 셸리 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 봤다.


저자는 작가 메리 셸리에게 영향을 주고 그녀의 가장 유명한 창작물에 영감을 불어넣은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괴물로 오해를 받았는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메리 셸리가 살았던 1797~1851 시기는 작가가 태어난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갖가지 과학적/비과학적 실험과 추측들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또한, 프랑스혁명 이후 온갖 분야에서의 자유주의가 난무하던 시대였다.

작가 메리 에 대한 추적과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추적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알아야 좀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메리 셸리의 대뷔 소설 프랑켄슈타인 은 괴물 하나를 만든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시발점이었다. 과학과 사회가 엄청난 혁명을 이뤄가던 시기에 쓰였던 이 소설은 새로운 발견에 따른 흥분과 공포 그리고 과학의 위력을 포착해냈다. 저자는 이 과학적 위력을 차근차근 되짚어 나간다.


당시 과학적 방법론은 크게 세 가지 변화를 이끌어 냈다.

첫째, 잘 구성된 논증에 따라 지식을 진전시키는 그리스 전통의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실험과 경험이 지식을 생산하는 유효한 방식이 되었다. 둘째, 뉴턴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운동이 수학적 용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셋째, 당시 계몽주의는 곧 기계장치의 시대였다.

18세기는 과학과 자연철학의 구분이 불분명했고 포괄적이었다. 과학은 당대 유행하는 철학이었고, 강연과 인쇄물을 통해 새로운 발견과 결과가 대중에게 폭넓게 퍼졌다.  과학자 라는 단어는 1833년 농담처럼 만들어진 단어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을 예술가 라고 하니 과학 하는 사람은 과학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발언에서 처음 나왔던 단어가 과학자였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몇년이 지난 후 부터였다.


과학에서 특히 전기의 발견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었는데, 전기와 생명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생명의 근원을 전기적 자극으로 이끌기도 했다. 고대 이후 정체되어 있던 의학은 해부학을 중심으로 급진적 발달을 했는데, 당시 해부는 대중적 쇼로 보여줄 정도로 인기였다.

교육 특히 여성의 교육에 있어서도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기회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는데, 메리 셸리는 당시 관습에서도 벗어날 정도로 지적 자극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 경우였다.


메리 셸리의 부모는 당시 급진적인 사상의 커플이었는데, 메리의 엄마 울스턴크래프트 는 성공한 작가이자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릴 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또한 작가이자 당시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교육에 열정적이어서 메리 셸리는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스폰지처럼 흡수한 딸로 자라났다. 하지만 부모가 실천했던 자유연애적 삶을 메리가 행동에 옮겼을때 딸은 내쳐졌다. 메리 셸리는 십대후반부터 자유로운 여성으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메리는 본인과 비슷한 남자를 만나서 작가로서의 삶을 사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인 퍼시 셸리는  교육을 잘 받은 귀족이자 작가이자 과학적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메리처럼 집안에 연연해하지 않고 살았다. 둘은 여행하며 글을 쓰며 자유롭게 사는 커플이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져 있다.

1부 착상 에서는 계몽-발전-가출-발생기 순서로 메리 의 삶을 다루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떻게 소설에 영향을 미쳤을지 추적한다. 2부 창조 에서는 교육-영감-수집-보존처리-조립-감전-소생 순서로 프랑켄슈타인에 들어가 있는 과학적 정보들이 당시 어땠는지 다양한 과학자들을 통해 과학사로 불러도 좋을 만큼 과학적 흐름을 풀어낸다. 3부 탄생 에서는 생명-죽음 으로 소설 프랑켄슈타인 자체에 대한 해설을 하며 메리의 마지막 삶을 정리한다.


책은 때로는 메리 셸리 라는 작가를 다룬 평전 같기도 하고 때로는 18세기~19세기 과학적 다양성을 다룬 과학사 같기도 하고 소설 프랑켄슈타인 에 대한 분석을 담은 해설 같기도 했다. 하지만 메리 셸리 라는 작가를 몰랐더라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가질법한 호기심들을 풀어낸 책이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과학과 의학적 지식들은 불과 100년도 안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 허무맹랑하게 보이고 얼토당토않게 보이는 실험과 믿음들이 당시엔 얼마나 당연했던 것들이었는지 읽다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도 미래에 가서 어떻게 뒤집힐 지 모를 일이다. 과학은 진보하면서 밝혀지는 분야이겠지만, 소설은 시대를 통과하며 이어지는 분야인것 같다. 당시의 과학적 지식들은 지금 전혀 다른 정보들로 새로워졌지만, 당시 과학적 정보들의 모음같았던 프랑켄슈타인은 모습을 바꿔가며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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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위인전 - 뻔뻔하지만 납득되는
보리스 존슨 지음, 이경준.오윤성 옮김 / 마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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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일까 위인전일까 아니면 르포일까 역사서일까

모두다 이기도 하고 모두다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읽다보면 제목처럼 정말 뻔뻔한 주장들에 저절로 납득이 된다. ㅎㅎ


저자는 영국 보수당의 정치인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역사가이자 2008~2016 런던시장이었다.

이책은 저자가 런던시장이던 2011년에 런던을 대놓고 편애하는 입장에서 지성과 애정으로 쓴 런던의 역사이자 런던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의 열전이다.


몇년전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갔던 도시가 런던이라서인지 유럽도시들 중에서는 런던을 편애하는 나이지만 저자의 편애는 상상초월이다. ㅋ

하지만 읽기에 거북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때론 키득거려지고 때론 어머정말 해가면서 읽게되는 것은 저자의 신랄하면서 직설적인 표현들 때문이다. 마치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것이, 저자는 거침없이 써대고 당당하게 내세운다. 런던은 이런도시다 라고.

저자가 풀어내는 17명의 인물들은 런던의 역사에 저마다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 중에는 듣도보도 못한 인물들이 많아서 새로웠다.


부디카 / 하드리아누스 / 멜리투스 / 앨프리드 대왕 / 정복왕 윌리엄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휘팅턴 / 윌리엄 셰익스피어 / 로버트 훅 / 새뮤얼 존슨 / 존 윌크스 / 윌리엄 터너 / 라이어널 로스차일드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메리 시콜 / 윌리엄 스테드 / 윈스턴 처칠 / 키스 리처즈


역사순으로 서술하면서 인물들의 일화중심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런던의 역사가 입체적이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온다.


저자의 이야기는 런던 브리지 에서 시작한다.

런던을 생각할 때 연상되는 몇가지 상징물들중에 커다란 성처럼 느껴지는 런던브릿지는 노래에도 자주 등장하는 다리이다. 다리는 사람들이 건너는 곳이고 시골과 도시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다리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이 다리를 건설한 것은 로마인이었다. 로마의 세력이 영국까지 펼쳐졌을때 역사상 최초로 런던의 은행을 공격한 인물이 부디카라고 한다. 여왕 부디카가 런던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역설적으로 로마인에게 런던의 중요성을 로마인의 위신과 연결시키는 사안이 되었다며 자연스럽게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로 넘어간다. 부디카의 반란으로부터 하드리아누스의 행차까지 60년간 런던은 빠르게 로마화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의 위세가 꺽이면서 410년부터 런던은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에서 제외되었다. 그뒤로 로마땅도 아니고 기독교땅도 아닌 상태로 7세기초까지 런던은 다시 야만으로 돌아간다.


멜리투스는 런던에 기독교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적이지 않은 표현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어서 뭔가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예를들어, "대모신 숭배와 기독교의 교집합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것보다 큽니다" 라거나 "5세기에 로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종교나 정치를 통합하려는 그 어떤 대단한 범대륙적 계획에도 잠재의식적으로 불신을 느낀다고 말이다" 라거나 "런던 깊은 곳에는 변치 않는 이교 기질과 야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라는 식의 표현은 현재의 영국에 대해 미국과 비슷할거라는 내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앨프리드 대왕은 색슨족 왕가의 번듯한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이킹을 바다 건너로 돌려보내고 왕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배며 시계며 랜턴 등 굵직한 발명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런던에는 그가 도시에 기여한 바를 적절히 기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기념비적 건축물이 없기 때문일까? 반면에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만족이었지만 런던의 왕위를 차지했고 런던타워를 만들어 남겼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영국인들에게 회자되는 왕이라고 한다. 노르만 시대에서야 런던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가 되었다.


영국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은 영어가 아닐까? 세계공용어인 영어의 발음은 영국식 발음을 제일 높게 쳐준다. 하지만 영어의 시작은 하층민의 언어였고 속된 언어였고 음란한 언어였다고 한다. 제프리 초서가 영어로 글을 쓰면서 당시 두갈래의 거대한 언어인 독일어와 로망스어를 한데 녹여냈고, 또한 노르만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영어와 적절히 섞어 쓰면서 유머러스 하면서도 활용성 높은 문학언어로 영어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한다.


런던이 도시화 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런던은 은행의 도시가 됐다. 리처드 휘팅턴 은 그 대표적 은행가인데 그가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선행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자가 베풀면 이름을 남기는법!

경제가 활성화되면 문화도 부흥하기 마련이다. 런던에 돈이 넘칠때 연극도 넘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었다. 저자는 상업연극이 다른 어느 나라가 아닌 영국의 아니 런던의 위대한 수출품이라고 주장한다. 베토벤과 미켈란젤로에 대한 런던의 효과적인 응수로 자랑스럽게 셰익스피어를 내세우며 잉글랜드의 호메로스 라고 부른다. 하지만 치켜세우기만 하지는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영어로 글을 쓴 가장 위대한 작가였으면서 속물이기도 했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로버트 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위대한 발명가로 소개한다. 그는 회화와 건축부터 과학분야의 다양한 혁신과 이론에 이르기까지 관심사의 범위가 다빈치에 버금갈 만큼 넓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영역에 걸쳐 너무 많이 질투심을 느꼈고 그만큼 불화도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뉴턴과의 일화에서 그의 모자란 인성이 안타깝기도 했다.

새뮤얼 존슨은 최초의 언어사전을 단독집필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사람도 부당한 말을 불쑥불쑥 내뱉기 일쑤였고 무례했으며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는 보수주의자 였지만 그 속엔 온정이 깔려 있었던 거라고 한다. 반면 필력에서 새뮤얼 존슨 버금가는 사람으로 존 윌크스는 신문이 하원 의사록을 보도할 권리를 쟁취하고 모든 성인남성의 투표권을 최초로 주장하며 윌크스와 자유 라는 구호와 45 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자유주의자 였다. 하지만 둘다 진정한 서민의 편은 아니었다.

연극에서 런던이 세계를 이끌고 과학에서도 유명세를 날릴때 유독 화가명단에서는 영국인이 드물었다. 그때 윌리엄 터너가 등장한다. 저자는 그가 화가가 무엇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화가에게 무언가가 어떤식을 보였는지가 중요하다는 원치을 처음으로 주장한 화가였다며 인상파의 아버지로 지칭한다.

로스차일드는 유럽 전역에 걸친 금융왕국의 영국이라는 지방의 군주라고 표현된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여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는 정치권에 진출한다. 돈과 권력은 역시 뗄수 없는 관계...

고대부터 어느새 중세를 지나 근현대 까지 왔다. 근대현대적 인물들은 역사적 흐름이라기 보다는 산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등장한다. 나이팅게일과 메리시콜 은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을 돌보는 양대산맥이었지만 한쪽은 간호학을 세웠고 한쪽은 호텔을 세웠달까. 당시에는 둘 다 칭송받았지만 역사엔 한명만 남은 것을 보며 나이팅게일의 정치력도 새삼 알수 있었다. 윌리엄 스테드는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을 창안한 사람으로 시선을 끄는 기사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영국언론의 화제몰이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윈스턴 처칠 은 실패한 정치가이지만 사랑받은 정치가로서 영국인들이 그에 대한 매력을 어디서 찾는지 왜 그가 런던의 상징이 되었는지 를 보며 영국인들의 특성을 생각하게 된다. 키스 리처즈 는 롤링 스톤즈에 대한 저자의 팬심이 가득한 파트 였다.

런던브릿지도 시작한 책은 인물들을 거쳐 미들랜드 그랜드 호텔로 마무리된다. 흥망성쇠를 거듭한 이 호텔은 2011년 밀레니엄 호텔로 거듭났는데, 20세기 중반 미들랜드 그랜드 호텔이 잊혀졌던 시기 런던의 부흥도 멈춰있었다. ​저자는 호텔의 재개장 처럼 런던의 부활을 희망한다. 런던은 뉴욕, 상하이와 3자간 대화를 하기 딱 좋은 시간대에 있고 소통하기 딱 좋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며 은근슬쩍 미국과 중국 사이에 영국을 끼워넣으려 한다. 세계의 중심은 이제 런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런던이 변방도시인 것도 아니다. 역사를 가진 만큼 저력을 가진 도시라서 저자의 희망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런던을 위대하게 보면서도 우습게 표현하고, 런던인을 고급지게 표현하면서도 야만성을 드러내며,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은근슬쩍 깍아내리는 이책의 재미는 제목그대로 뻔뻔하면서도 납득하게 되는 저자의 필력 때문인것 같다. 다시 런던에 간다면 이 책에 나온 곳들에 가서 런던의 역사를 음미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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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에 핀 꽃 아시아 문학선 21
이대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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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실화의 주인공을 직접 만났다거나 인터뷰했다거나 한 것이 아닌 자료에 근거한 허구의 소설이다.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한 허구적 소설에 나는 항상 관심이 간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가 그랬고 신경숙 작가의 리진 이 그랬다.

역사이지만 역사서로 읽지 않고 허구가 섞인 소설로 읽을 때 그 역사적 사실은 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면 안되고, 소설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면 안되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한다면 소설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기도 하다.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 그랬고 김탁환 작가의 거짓말이다 가 그랬다.

이 책 또한 그러하다.

이 소설은 평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헤이렌.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단체였다.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의 축약명칭 베헤이렌 이라는 일본어.

베트남 전쟁당시 일본내에 반전평화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단체

그 단체가 피신시킨 미군탈영병 중에 한 사람이

미국인이었지만 한국입양아였고,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었지만 베트남전쟁으로 부모를 잃게하고 있었던 한국출신 미군이었다. 냉전시대 그의 선택은 국가가 아닌 인간이었다. 작은인간.

주인공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인으로 자랐고 히피문화를 접하며 반전분위기가 확산되던 때 군인이 되었다.

그가 겪은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살육이었고, 부상휴가로 머문 일본내 미군기지에서 탈영하여 쿠바대사관에 망명하였으나 외교문제로 발이 묶였을때 베헤이렌의 도움으로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스웨덴에 정착하게 된다. 50여년 후 한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통해 잊고 있던 이름 손진호 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시간이 삶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간에 바쳐지는 날들이라는 주인공이 표현한 노년의 날들은 노년의 권태를 불러올 뻔 했지만,

아들과 함께 하는 추억여행속에서 젊은 시절의 혼란과 방황을 의지와 보은으로 마무리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의 권태를 물리치게 해주었다.

주인공은 어디에 있든 굳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궁금해하면, 나를 궁금해한다 는 문징은 소설 내내 주인공의 태도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주인공의 삶에 대해 그리고 베헤이렌 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어는 '세계시민' '개인' '작은인간' 이었다. 국적을 초월한 세계시만을 추구하는 삶. 그러나 "정신은 늘 국경을 초월하고 있어도 여권이 있어야 국경을 넘어설 수 있는 세계에서는 몸이 삶을 놓고 있으며 몸이 죽음을 놓을 땅에다 나의 이름을 두겠다는 선택" 은 자이니치의 국적에 대해 주인공의 국적에 대해 세계시민의 국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냉전시기 일본이 미국과 맺은 불평등한 미일지위협정은 미군 신분이었던 주인공의 행동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고, 베헤이렌 에게는 두 국가간 불평등의 역설이 만들어낸 평화운동의 합법지대 같은 것이 되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군인의 신분에 대한 불평등한 지위보장이 유효한 것이 생각나서 씁쓸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불평등조약에 의한 미군을 유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본경찰은 유령을 처벌할 수 없고 유령을 도와준 일본인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베트남전에 참여하지 말고 탈영하라고 선동하던 베헤이렌 은 탈영한 미군을 제3국으로 피신시키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한때 전쟁의 주범이었고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 전쟁광같아 보이던 일본에도 그런 양심 세력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하지만 그 양심세력이 세계평화를 주장하고 전쟁반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부터 하자는 반성운동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의 탈영이라는 선택은 베트남전쟁 반대라는 입장은 다른 미군 탈영병들과 달리 유일한 분단국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어느나라에서든 선전용으로 써먹기 좋은 조건이었던지라 순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북한도 남한도 미국도 아닌 제3국가를 선택하는 모습에서 한국전쟁 직후 포로수용소에서의 제3국행을 선택했다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국가라는 경계가 있는 한 평화에도 경계가 생길 수 밖에 없는게 아닌가 싶고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탐사하듯 서술해가는 이 소설이 많이 읽혀지길 바라지만, 문체가 조금 아쉬웠다. 근대소설 속 화법 같기도 하고 연극배우들의 대사 같기도 한 대화체들이 어색한 곳이 여러곳 있었다. 예를들어,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중에

"까마득한 옛날 행적이 정확한 날짜와 함께 등장할 모양인데, 이건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가로등 같은 거구나" 하고 아버지가 말하자

"가로등 따라 맥주로 목을 축이며 걸어갑시다. 이제 초저녁이니 길이야 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아들이 답한다. 좀 어색하지 않나?;;;

어린시절 추억담에서 소를 부를때 열살남짓 소년이 '소야 나오너라' 하고, 허세 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허장성세 라고 한다.

현대시점에서 쓴 책이니 대화체나 표현이 좀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면 읽으며 좀더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약간 아쉬움이 있더라도, 이 소설이 좀 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이유는

한국전쟁과 고아, 입양아들의 외국인으로서의 삶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흔, 일본과 미국에 대한 고정관념등 여러 곳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주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살면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새빨간 바탕에 총한자루 그 총구에 꽃한송이 로 인상적인 표지에서 꽃이 눈에 박히는 것은

우리가 겨누고 있는 총구에서도 언젠가 평화의 꽃이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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