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꾸물거릴까? - 미루는 습관을 타파하는 성향별 맞춤 심리학
이동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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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의지박약도 게으른 사람도 아니다

일을 미루는 것은 감정 조절의 문제다!

미루는 습관을 타파하는 성향별 맞춤 심리학

책 표지의 나무늘보가 친숙하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봤던 그 나무늘보의 대화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느려도느려도 그렇게 느릴 수 없이 세상속터지게 하던 그 나무늘보! 하지만 우리에게도 각자의 나무늘보가 있다. 모든 일에 바로바로 착착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때로는 종종 어쩌면 자주 우리는 해야한다는 생각과 나중에 라는 변명속에 꾸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곤 한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고 늘어지면서 꾸물거리고 꾸물거리는 나, 왜일까? 뭐가 문제일까?

이 책은 '우리가 꾸물거리는 이유'에 대해 탐구하는 글이다. 이 글의 선임 필자는 20여 년간 다양한 장면에서 연구와 강의, 그리고 상담을 해온 상담심리학자이다. (p. 4)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루기 행동에서 연상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고자 함이다. (p. 7) 둘째, 꾸물거리는 이유에 중점을 둔다. 꾸물거림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 셋째, 이 책은 꾸물거리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대한 위로나 단순한 공감보다는 꾸물거리는 이유에 대한 인지적 이해, 그리고 더 바람직한 마인드셋을 검토할 기회 제공에 주안점을 두었다. (p. 8) -프롤로그 中-

표지그림도 귀엽고 제목도 편안하다고 해서 이 책이 그냥그런 만만한 자기계발서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5명의 학자가 공동집필한 엄연한 심리서이고 따라서 이 책은 이렇게하는게 좋다 저렇게하는게 좋다라는 식의 따라해도그만 안따라해도그만인 행동지침서들과는 다른 자기자신을 탐구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 본연의 위엄?!은 책의 첫번째 챕터 첫번째 문단에서부터 느껴지는 바가 있다. '할 일을 미루는 행동을 심리학에서는 꾸물거림, 학술 용어로는 '지연 행동(procrastination)'이라고 한다. (p. 17)' 꾸물거림을 학술 용어로 바뀌어 읽으니 벌써부터 뭔가 다르지 않은가?! ㅎㅎㅎ

꾸물거림은 시간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 조절의 문제이다. (p. 18) 꾸물거림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적 교착 상태'로 인한 행동적 결과이다. 성격이란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나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패턴이다. (p. 19) 하지만 꾸물거림은 다르다. (p. 20) 그러면 우리는 대체 왜 꾸물거리는 것일까? 이 '왜(why)'라는 질문으로부터 변화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때의 '왜'는 '왜 이렇게 게을러?'와 같은 질책이 아니다. (p. 21)

이 책이 쉽게 위안을 주는 그렇고그런 힐링서는 아니지만 원인에 집중한다고 해서 책임추궁을 하는 그런 책도 아니다. 이 책은 탐구하고 분석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기회를 준다. 왜 꾸물거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스스로 고쳐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꾸물거림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p. 31)

이 책에서는 꾸물거림의 발단이 되는 다섯 가지 개인 특성(비현실적 낙관주의, 자기 비난, 현실 저항, 완벽주의, 자극 추구)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이 다섯 가지 개인 특성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또 동일한 특성이라도 개인마다 그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중간 회색지대가 있을 수도 있다. 나의 꾸물거림의 발단이 되는 특성(들)을 명료하게 이해함으로써 변화 과정에서 방향감각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p. 38)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꾸물거림의 원인으로는 크게 다섯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비현실적 낙관주의, 자기 비난, 현실 저항, 완벽주의, 자극 추구

이 책의 본문은 이 다섯가지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끔 유도한다.

나는 왜 꾸물거릴까? 그럼 어떻게 되면 좋을까?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직접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대신, 스스로 장기 목표에 집중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는 왜 꾸물거릴까?'라는 '이유'에 자신이 대답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p. 215)

여러번 강조하는 위와 같은 이 책의 의도는 명확하다. 하지만 읽는 와중에 찾아지는 자신의 꾸물거림에 대한 분석은 그리 명확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한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가지 원인이 동시에 혹은 혼합된 순서로 자신의 꾸물거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꾸물거림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은 여러번의 시행착오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되고 해결되지 않는다 해서 또다시 좌절에 빠지진 말자.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변화를 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자각이다. (p. 220)' 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기운을 얻어보자. 어찌되었듯 분명한 것은 꾸물거리는 것이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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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쟁인가?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허보미 옮김 / 책세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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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류는 참혹한 실수를 반복하는가?

힘의 논리만으로는 고찰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섬세한 성찰

왜 전쟁인가?

참으로 끌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양차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전쟁이 멈춘 적이 있었던가? 세계대전 만큼의 전쟁이 아니라고 해서 전쟁이 전쟁이아닌 것은 아니다. 전쟁은 끊임없이 이땅저땅에서 벌어져 왔는데 왜 지금 더욱 화두가 되었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 제목에서부터 이를 확실히 한다. [이번에는 '진짜' 전쟁이다]

이번에는 전쟁이, '진짜'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플라톤에서 마키아벨리, 홉스에서 클라우제비츠, 루소에서 카를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과거 전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전쟁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노력한 모든 사상가의 이론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p. 10)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서문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의 이름들도 어마어마하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200여 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이 다행스럽고 철학자들의 이론을 상세히 풀어낸다기 보다는 저자가 이미 소화시킨 철학들을 주제에 맞춰 곁들이는 정도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저 '왜'에 집중하면서 읽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왜? 그다음엔 '마지막으로 최후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책을 끝맨고자 한다.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p. 14)' 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떤 평화를 원하는가?


과연 전쟁이 귀환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을까? 귀환이란 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하 '러우 전쟁')이 반세기 넘게 평화를 구가하던 유럽 역사에 '갑작스런 단절'을 초래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포하는 데 말이다. 오히려 1945년 이후 전쟁이 어떤 모습으로 변천했는지를 자문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현 사태를 전쟁의 주요한 전략적 변천 과정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책은 앞으로 냉전, 글로벌 전쟁, 혼돈 유발 전쟁. 이렇게 총3막의 비극으로 나누어, 전쟁의 주요한 전략적 변화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p. 18)

결과적으로 러우전쟁은 '전쟁'이 맞다. 러우전쟁은 '가장 오래된 전쟁의 정의에 부합하는 전통적 전쟁의 구조를 갖췄기 때문(p.43)' 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규정하는 측면은 무엇인가? 저자는 '공적인 차원의, 정의로운, 무력' 분쟁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국가대국가 차원에서 발생하므로 공적인 차원이라는 부분에서는 딱히 철학의 도움까진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와 무력의 측면에 대해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철학적으로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서 현저히 다른 결론으로 향해갈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한 명분의 전쟁론 이면에 감춰진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결정적인 전쟁의 이유는 바로 권력의 우발성이리라. (p. 126)

전쟁의 3대원인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연구를 토대로 정리해보면 '탐욕, 공포, 명예욕' (p. 152) 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 3가지 원인에 결부된 다른 한 문장이 더 눈길을 끌었다. '전쟁이 남녀 차이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남성적 일상성'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상 전쟁은 매번 남성의 구분, 남성의 우월성을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제도화하고, 재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p. 160)' 러우전쟁에서 이 '남성의 일상성'을 결부시켜 파악해보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주제일것 같다... 여하튼 저자는 러우전쟁에서 앞서 말한 전쟁의 3대원인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후 '이제는 수많은 전쟁이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역행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헤겔의 사상을 뛰어넘어야 할 때다. (p. 172)' 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음... 헤겔의 사상을 좀더 설명해주었으면 싶긴 한데;;; 저자는 서문에서 언급한 '평화'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평화란, 다시 말해 합리적인 철학이 토대로 삼아야 할 평화란, 무장 평화나 공동묘지의 평화보다는 훨씬 더 희망에 찬, 조금 더 진실 어린 평화여야 하지 않을까. (...) 두 가지 종류의 평화를 제안해볼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전쟁이 언제나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 반공화주의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 178)

나가는 글에서 '평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라 '그렇다면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라는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책을 마무리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저 저자가 기억하라고 한 두 철학자의 언급으로 섣부른 결론을 정리한다면 세계 모든 국가가 완벽하게 공화주의적이고 완벽하게 민주주의적이라면 전쟁은 없을 것이다 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평화가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연스러움'으로 이를 실현해보려 한다.


우리는 일정한 사물이 현존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자연은 최종적으로는 일종의 조합능력 그리고 완성원리를 의미한다. (p. 180)

국가가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들 사이에 자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가련한 인간들의 이해타산, 치졸한 야망, 빈약한 상상력이 빚어낸 오판 등이 지나치게 많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를 평화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증오심, 잘못된 복수심, 두려움, 심술궂은 교만함이라는 인류의 문화다. 왜냐하면 평화란 언제나 부정적 감정들을 이겨낸 환희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p. 181)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철학적 사유다.

ps. 유럽대륙에선 전쟁이 일어나면 유럽철학자가 이토록 온갖 철학들을 관통하며 끊임없이 사유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펴내 다른 이들에게 알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철학이 없어진 사회는 너무나 암울하다... 그 암울함이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는 결국 각자의 몫으로 돌아갈 터인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이여 먼저 사유하고 목소리를 내어주었으면... 한국의 철학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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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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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열지 않던 문을 열었다

창비의 소설Y시리즈는 이제 영어덜트소설에서 믿고보는 시리즈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 같다. 매 작품마다 꾸준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것도 놀라운데 매 작품마다 새로운 판타지 세계가 펼쳐지니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엔 액션의 크리처 스릴러물이다.

검은과부거미섬이라는 곳의 지하터널에 한 마을이 존재한다. 원래는 섬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무피귀라는 괴물이 나타나면서 육지로 연결된 해저터널을 통해 탈출하다 육지쪽에서 터널을 봉쇄하는 바람에 섬으로도 육지로도 못가고 그대로 터널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수십년째 살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해저터널에 바닷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터널입구를 막아 무수한 생명을 구한 황선태의 손자 황필규의 부름에, 척박한 터널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 서주필의 손녀 서다형이 답하다, 카아! 이거야말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 아닌가?" (p. 20)

섬쪽으로 나가려면 무피귀의 출입을 막고있으면서 해저터널에 공기를 전해주고 있는 거대환기팬을 뚫고나가야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무피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거고 한번 뜯어낸 거대 환기팬을 다시 달 수 있는 기계가 마을에 없다.

육지쪽으로 나가려면 위급한 탈출시기 군대가 막은 차폐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섬으로 올라가 반대편의 항구를 통해 육지로 일단 넘어가야 하는데 누가 그 목숨건 도전을 하겠는가, 게다가 배도 없을 것인데.

그때 마을의 무능력한 촌장이 열여섯 소녀 다형에게 몰래 제안을 한 것이다. 다형이 그 도전을 한다고 자원하면 폐렴으로 위독한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약을 주겠다고.

촌장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준 채 현재의 삶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p. 19)

황필규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던 이의 딸을 사지로 몰아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페니실린으로 목숨을 구해도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었다. (p. 23)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 의협심 강한 소녀, 이기적인 어른이 파놓은 함정, 무엇보다 상상초월적 괴물의 존재

액션어드벤처판타지크리처물의 뼈대가 완벽히 세워졌다. 이제 펼쳐질 이야기는 당연히 휘몰아치는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될 것 ㅎㅎㅎ

아, 여기서 무피귀를 잠깐 살펴보자면,

무피귀의 키는 성인 남성의 두 배에 육박해고 피부가 없는 탓에 근육, 힘줄, 인대, 뼈 등이 고스란히 밖에 드러나 있었다. 특히나 눈꺼풀 없이 그대로 돌출된, 하얀 구슬같은 안구와 그것을 움직이는 빨간 실타래 같은 근육들 (p. 29)

다형은 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촌장의 생각대로 영웅적 시늉만 하다 올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마을을 구하고 싶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랬기에 마을에 남아있을 친구들에게 촌장 모르게 이런저런 지시들도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섬으로 올라가자마자 무피귀로부터 도망을 쳐야했는데 더욱 예상치 못했던건 다른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섬위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 존재했다니! 그런데 여기서 알게된 터널 속 마을의 진실은 더욱 다형의 예상을 벗어났으니...

자! 페이지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다형의 모험이 어떻게 펼쳐질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은가? 그 재미는 책을 읽으며 찐~하게 느껴보기를. ㅎㅎㅎ

역시 창비! 역시 소설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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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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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픔에 대한 가장 진정성 있는 고민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공감과 연대, 치유의 이야기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소설은 이미 읽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다고 했을때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됐었는데 개봉시즌에 맞춰 리마스터판으로 책도 새로 나왔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긴한데 책을 먼저 읽게 되버렸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p 7)

소설의 첫 문장이다. 로기완 이라는 이름 석자도 나중에야 익숙해질 그는 처음에 그저 이니셜L 이었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2010년 이다. 오래됐다면 꽤 오래전의 시점이니 그당시와 지금의 탈북자 입지가 달라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L, 로기완 그는 생면부지의 땅 벨기에에 떨어진? 스무살 청년 탈북자였다. 서울에서 방송작가를 하던 '나'에게 이니셜L은 자료수집차원에서 읽어본 한 잡지의 기사에서 발견한 낯선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이 그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현실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그의 모습을 나는 상상의 영역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커다란 천가방을 메고 허름한 청바지에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다. 색이 바랜 갈색 모자를 썼고 유리에 금이 간 시계를 찼다. 보풀이 인 장갑, 목을 칭칭 감은 촌스러운 색의 모도리, 실밥이 터지고 때가 탄 운동화... 버스에서 내린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그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두려움으로 흐려지곤 했을 것이다. (p. 9)

화자인 '나'는 김작가로 불리는 베테랑 방송작가였다. 낯선 기사 속 인물도 현실감 넘치는 영상으로 옮겨 담는 일을 하던 김작가가 오히려 상상의 영역에서 더욱 완성시킬 수 있을 낯선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기사 속에서 그가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한마디에 어쩌면 희망을 걸고 어쩌면 변명으로 삼고자 사표를 내고 벨기에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도망이었다.

나는 아직 로기완에 대해 무언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는 건지 자신할 수가 없다. (p. 32)

그렇게 도망처럼 벨기에에 와서 로기완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와중에도 중요한 건 사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있는 한 질문이었다. 그 대답을 이니셜L이 미리 해준것만 같아서 일단 오긴 했으나 아직 질문조차 던지지 못한채 발자국만 따라 밟고 있는 중이었달까...

재이가 기획하고 우리가 5년 동안 함께 만들어온 그 프로그램은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25분짜리 미니다큐로 만들어 한회에 두꼭지씩 방송으로 내보내는 동안 실시간으로 전화ARS시스템을 통해 후원을 받는 것이 전체 프레임이었다. (p. 59)

수년간 스크립터로만 있다가 처음으로 메인작가로 발탁된 이 프로그램에 김작가는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게다가 프로그램 PD였던 재이와 가까워질수록 '연민'에 대한 고뇌가 커져갔다. '어떻게 저런 쓰레기를 만들었지? 입에 올린 적은 없었지만 우리의 눈빛은 매번 그런 질문을 하고 싶다는 듯 우울하게 빛났다. (p. 63)' 그러다 윤주를 만나 여느때처럼 미니다큐를 찍던 도중에 윤주에게 더욱 마음을 쏟던 김작가의 노력이 오히려 윤주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때 그 미안함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김작가는 도망쳤던 것이다. 이니셜L에게로.

이니셜L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암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내가 내 인생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여놓도록 인도하는 마법의 주문에 가까웠다. (p. 77)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알게된 그의 현실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처참했다. 서울에서 홀로 병실에 있는 윤주의 상황만큼이나.

L의 행적을 쫓는 와중에 알게되는 고통과 아픔은 윤주의 과거를 통해 알게됐던 고통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도 했고 어쩌면 서로 상쇄시켜주기도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눈물까지 애틋함의 시선으로 완성하는 것, 언젠가 나는 재이에게 대본이든 대본 이외의 글이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면 좋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p. 141)' 김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벨기에에 왔지만 아직 글을 쓰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p. 152)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p. 152)'어서 김작가는 일단 현실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장소만 떠나왔을 뿐 실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더욱 그 현실 고뇌속으로 더 깊이 빠지고 있었다. 정작 로기완은 자신의 짧은 인터뷰가 자신의 짧은 인생사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도 못해겠지만... 덕분에 김작가는 윤주에게 다시 연락할 요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방송용 대본이 아니라 후회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 너무도 외로웠던 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 여정을 담은 글이며 소설이라기보다 일기에 가까운 글이라고도 말한다. 열심히 쓰고는 있지만 종종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괴로워지곤 한다는 말도 어렵게 꺼낸다. (p. 220)

누가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 감히 연민을 드러낼 수 있을까?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외면하기 보다는 괴롭더라도 어떻게든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보여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김작가의 여행을 두번째로 또 읽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p. 222)

'작가의 말'에서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 인간으로서나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저를 성장하게 해준 작품인 셈입니다. (p. 238)]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공감을 믿게 됐다'라고도...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연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공감'이 아니었을까...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공감해야 하는 것의 전제가 될 것입니다. (p. 239) -작가의 말 中-

알게 되면 알기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 먼저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각자도생 이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삶에 대한 공감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에 좀더 시간을 썼으면 좋겠다. 그런 시간이 결국 나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긴 인생의 끝엔 알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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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해설과 그림이 있는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릴랜드 라이큰 글,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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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나서 이른바 기독교3대소설이라고 불리는 다른 두 소설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다. 신곡 → 천로역정 → 실락원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새로 나온 <천로역정>을 알게 됐다.

고전읽기를 할때 어떤 번역본이냐에 따라 원본의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정해지기 마련인데, 이번 책은 원전번역본에 대한 사전조사 없이 읽은 터라 타 번역본과 비교를 못해본 것이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원작자 존 버니언의 정본을 번역했고 그림도 있고 해설도 있으며 가이드북까지 합본으로 새로 나온 책이라고 하니 혹하는 마음에 일단 집어들었달까;;;

<천로역정>의 원제는 The Pilgrim's Progress 이다.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순례자의 진보'라고 나오는데, 줄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인물의 영적 순례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다보니 한 순례자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점차 (종교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진보라고 한다면 원제는 말그대로 작품의 줄거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제목이라고 하겠다.

우리말제목 <천로역정>도 한자풀이를 하면 원제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번역그대로 원제를 살렸어도 됐을텐데 왜 굳이 한자어제목이 되었을까 궁금했다. 혹시 옛날 번역문학이 주로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다보니 이 작품도 그러했나 싶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1678년에 존 버니언이 쓴 이 작품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선교활동에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 흐름을 따라 1895년 구한말 선교사로 조선땅에 온 캐나다 선교사에 의해 영어원본이 한글로 바로 번역이 되면서 '텬로력뎡' 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근대번역문학사에서 일본어판 중역이 아닌 원어원본에서 바로 번역된 최초의 소설이라는 의의도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원작자 존 버니언(1628~1688)은 정규교육을 거의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탁월한 설교자이자 작가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청년시절, 종교적자유를 주창한 크롬웰 군대에 입대후 청교도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고 영국국내 상황이 다시 국교회 주도로 돌아갔을 때에도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종교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12년의 감옥생활을 보냈으며 이후 죽을때까지도 자신의 신념이 담긴 종교활동과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작품은 수감당시 자신의 영적 투쟁과 성장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천로역정>은 2권이라고 한다. 1부는 1678년에 2부는 1684년에 나왔는데, 1부는 크리스찬이라는 인물의 순례기이고 2부는 그의 아내의 순례기이다. 두 권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비슷한 구조로 각각의 순례체험을 통한 성장을 담고 있어서인지 주로 1부만 번역되고 널리 알려진 편이라고 한다. 이번책도 1부의 내용만 담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쓰려고 펜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 식의 책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책을 쓸 생각이었는데, 책을 거의 다 쓰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은 복음 시대 성도들의 인생행로와 생애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들의 여정과 영광으로 이르는 길에 관한 우화로 빠져들었습니다. 스무 가지도 넘는 사건들까지 더해서 말입니다. (p. 25)

존 버니언은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변'을 풀어놓는다. 이 작품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로서는 새로웠을 종교문학에 대한 작가 자신이 독자에게 전하는 간곡한 당부랄까. 또한, '나는,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썼을 뿐입니다. (p. 26)' '이런 스타일로 글을 쓰면 안 되나요? 이런 방식으로 써도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유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렇게 쓰지 못할 이유가 뭘까요? (p. 28)' 지금은 이상할게 없지만 당시로서는 온갖 비유들로 영적 성장을 소설처럼 써낸다는 것이 나름 큰 모험이었나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있게 말한다. '구구절절 온갖 지혜를 써 내려가는 성경에도 모호한 비유와 풍유가 도처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에서 우리의 어두운 밤을 낮으로 바꿔 주는 광채와 광선이 나옵니다. (p. 33)' 그러니 자 이제 온갖 모호한 비유와 풍유가 가득한 <천로역정>에서 어떤 광채가 나올지 읽어봐야겠지?!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의 지시를 잘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땅으로 안내받을 것입니다. (p. 37)' 를 과연...?!

이 세상 광야를 두루 다니던 중, 우연히 동굴이 있는 어떤 곳에 이르른 나는, 그곳에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을 자던 중 꿈을 꾸었다. (p. 40)

소설의 시작은 이러하다. 작가가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크리스찬이라는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순례기를 체험하는.

"선생님, 제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을 읽어보니, 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그 후에는 심판받을 거라고 합니다. 저는 죽기도 싫고 심판도 감당 못 합니다." (p. 43)

"선생님, 저는 저기 저 앞에 있는 좁은 문으로 갑니다. 듣기로는 저곳에 가면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내와 자식은 있습니까?"

"있지요, 하지만 이 짐이 너무 무거워서 아내와 자식에게서 전처럼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전, 마치 아내도 자식도 없는 사람 같아요" (p. 60)

"처음에 어떻게 그 짐을 짊어지게 된 거요?"

"내 손에 들린 이 책을 읽고 나서부터입니다." (p. 62)

소설의 시작에서 크리스찬이라는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어떤 책(아마도 성경일 책)을 읽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그닥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류하는 가족도 뿌리치고 혼자 다른 세상을 찾아 길을 나서는 모습은 일면 너무 개인주의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책속의 해설에 의하면 열여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크롬웰의 군대에 들어가 잉글랜드 내전에 참전했는데 '이 전쟁에서 크롬웰은 (다른 자유와 정치적 권리 중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찰스 1세와 싸우고 있었다. 군 복무 중에 버니언은 개인의 은혜 체험을 일반적 종교 전통보다 소중히 여기는 청교도 사상가들을 접하게 되었다. (p. 69)' 고 한다. 크롬웰의 집권시기는 7년 정도였는데 (크롬웰은 버니언이 기포드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후 7년 동안 권좌에 있었는데, 이는 개신교 교회들이 그 기간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는 의미였다. 버니언에게 이 기간은 영적으로 성숙해 가며 사역을 전개해 나가던 시기였다. (p. 139)) 이 기간 동안 그의 신앙은 견고해졌고 그후에도 버니언은 이때 깨달은 종교적 방향을 일평생 유지했다고...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이는

먼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 하며,

두드리는 사람은 들어가게 될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고 그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으므로" (p.76)

작품 속에선 성경의 인용구가 아주 자주 나온다. 줄거리를 성경구절로 요약하자면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할 수 있을듯.

그러나 그 문으로 가는 길을 당연히 험난할 터, 그러니 천로역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크리스천은 마침내 구원의 땅에 이른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빛나는 이들은 무지를 공중으로 데리고 올라가 전에 언덕 옆에서 본 문으로 가서는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보니 그곳엔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그때 나는 멸망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천국 문에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잠이 깨어, 이 모든 게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p. 409)

잠들어 꿈꾸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잠에서 깨는 것으로 마무리는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갖은 고생끝에 크리스천이 구원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과 의견이 달라 뒤에 쳐져 오던 무지라는 인물에 대한 응징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종교적 방향을 더욱 실감하며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책속의 책 이라고 뒤편에 보면 파란색 종이로 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 이다. 영문학교수이자 기독교적 관점의 고전문학에 대한 전문가인 릴랜드 라이큰 교수의 가이드북을 합본한 것이다. 문학의 본질부터 고전의 중요성을 간략히 요약설명해주고 <천로역정>의 특징과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 그리고 본문 각 장의 줄거리와 해설 및 묵상이나 토론을 위한 지침까지 꽤 알찬 가이드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표지에도 쓰여 있는 '캐리 마스의 정련된 해설' 이라는 부분이 내게는 읽는 내내 좀 걸렸다. 일단 캐리 마스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그의 해설에 얼마만큼 신뢰를 가져야할 지도 모르겠는데 해설이 본문 아래 따로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중간중간 본문과 같은 글자크기로 섞여 있다보니 본문만 집중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책의 앞뒤 어디에도 캐리 마스와 그의 해설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것이 아쉽다.

책은 두툼하지만 동화책처럼 큰 글씨가 성기게 편집되어 있고 중간중간 그림도 있는데다 내용 자체가 우화적이라 어렵지않게 호로록 읽히긴 한다. 하지만 내가 종교가 없다보니 너무 쉽게쉽게 넘어가서 그럴 수도 있다. 성경을 알고 그 문구들을 연상하며 이 작품을 읽을 경우 이 책은 좀더 천천히 좀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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