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는 가당치도 않은 의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벤치뉴는 자신의 의심만큼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셀로에게는 거짓이나마 물증이 있었다면 벤치뉴에게는 아무런 물증 없이 그저 혼자만의 심증만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카토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 소파에 몸을 뻗었다. 그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p. 337)'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p. 340)'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뭐야?" (p. 342) "나는 그 이유를 알아. 우연의 일치로 닮았기 때문이지... 신의 섭리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야...비웃는 거야? 이해해. 신학교에 다녔으면서도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 (p. 344)'
그러니까... 카피투와 벤치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제키에우는 벤치뉴가 봤을 때 죽은 에스코바르를 똑닯았던 것이다. 발가락만 닮아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처럼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도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카피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껍질 안에 있는 과실처럼 한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해답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중략)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과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결국 나를 기만하고, 하나가 될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p. 361)' 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으로 확인되는 화자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혀를 끌끌 차며 기막힌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벤치뉴는 정말 자신의 불신을 믿음으로 확고히 한 것일까? 오셀로 처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일까?
왜냐하면 시작부터 벤치뉴는 단절되어 살아온 노년기의 자신이 젊은 날의 자신과 연결되어 화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차치하고 그저 독자로서 이 소설을 꼽씹다보면 작가의 은근한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호라 이래서 정소현 소설가는 다시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고 말했구나! 하지만 나는 다시 읽게 되진 않을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해피엔딩이 절실한 시절이라서랄까...
ps. 브라질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쌈바축제때 보이는 유색인이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디오들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읽은 브라질 작가의 소설은 내가 알던 그 브라질이 아니었다. 그저... 포르투갈 이었다. 검색해보니 브라질의 인구구성에서 백인의 비중은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브라질의 역사는 이 소설보다 내게 더 충격적 잔상과 여러 물음표들을 남겨 놓았다. 과연 브라질 적인 것은 무엇일까?...
'마샤두 지 아시스는 백인이 아닌 가난한 집안 출신의 물라토 혼혈로 인종적·사회적 열등감에 늘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미디어 속 마샤두 지 아시스의 이미지가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르 연상시키는 외모로 묘사되거나 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정·보완되어 소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브라질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실제로 그러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흑인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다. (p. 367 - 해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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