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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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미국에서 1997년에 나온 이 책이 2012년에 15주년판으로 다시 나오고 2022년에 한국에 번역본까지 나오면서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리아의 나라>가 문화 간의 소통을 다룬 책인데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는 것보다 더 나은 본보기가 있을까 싶어서 (p. 13)] 무척 기쁘고도 놀랍다고 인삿말을 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제가 이 책을 취재하고 쓰는 여러 해 동안 제 책을 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워낙 막연했으니까요! 실제로 제 친구들은 이런 말로 절 놀리곤 했답니다. "뇌전증 앓는 몽족 아이에 대한 책을 쓰느라 9년 ㅅ체월이라... 근데 말이야, 앤. 책이 나올 무렵에 뇌전증 앓는 몽족 아이 분야라는 틉새시장이 남아 있을까?" (p. 13)

저자가 말하듯이 이 책의 주제는 막연하다. 저자가 어쩌다 뇌전증을 앓는 몽족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지 알수 없고 이 조사를 통해 무엇을 알아내고자 했던건지 알수 없다. 저자는 의사도 아니고 인류학자도 아니며 어떤 특정 분야의 연구자도 아니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그저 '전업 작가' 이다. 작가로서 첫 책의 인터뷰 대상자를 왜 뇌전증을 앓는 몽족 아이의 가족으로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 책은 출간된 해에 전미비평가협회상을 받았으니 저자 개인적으로는 첫 책부터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수 있겠다.

the spirit catches you and you fall down : a hmong child, her american doctors, and the collision of two cultures 라는 원제를 번역기에 넣어보면 '정신이 당신을 붙잡고 당신은 넘어집니다 : 몽족 아이, 그녀의 미국 의사,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몽족아이의 이름이 '리아' 이다. 리아는 어려서 뇌전증이 발병했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미국의 병원에서 리아의 부모와 의사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리아의 병증은 심해져만 갔다.

나는 언제나 가장 볼만한 것은 중심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 만나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중략) 9년전 머세드에 처음 갈 때 나는 내가 조금은 아는 미국의 의료 문화와 내가 전혀 모르는 몽족 문화 사이에서 양측의 십자포화에 피격당하지 않는다면 그 둘을 서로 어떤 식으로든 비출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중략) 나는 상황을 너무 직선적으로 분석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달리 말해 나도 모르게 조금 덜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조금 더 몽족처럼 생각하던 사고방식을 그만두게 되었다. (p. 18 - 서문 '충돌의 경계에서' 中-)

리아의 부모인 나오 카오 리와 푸아 양은 라오스 북서부 고지대에서 살던 몽족 이다. 몽족은 외떨어진 고산지대 부족으로 자신들의 삶의 정체성과 문화가 굉장히 자립적인 부족이었다. 다양한 약초를 사용한 자연 치유 요법과 샤먼에 의한 의식 등 부족 자체적인 치료법을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라오스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리아의 부모는 태국의 난민캠프를 거쳐 미국에 왔고 그 초창기에 태어난 아이가 리아였다.

몽족 사람들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병이 난다고 생각한다. (중략) 하지만 그들이 꼽는 병의 가장 큰 원인은 혼을 잃어버려서이다. 몽족은 사람에게 혼이 정확히 몇 개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혼이 몇이건 건강과 행복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생명의 혼을 잃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p. 32)

리아의 부모는 리아가 태어났을 때 리아의 혼을 리아의 몸에 단단히 붙들어두기 위해 그들의 아파트에서 '혼을 부르는 의식'을 행했다. 가난했지만 그들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초대하여 리아의 건강을 빌었다.

저자는 리아의 가족 이야기와 몽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이야기를 챕터별로 번갈아가며 서술한다. 첫 챕터에서 리아의 탄생을 다루고 다음 챕터에서는 몽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식이다. 역사적으로 몽족은 그 어느 나라에도 흡수되지 않으려 투쟁하거나 이주를 거듭해왔기에 중국에서 살던 부족이 라오스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몽족을 묘족, 먀오족, 메오족 이라고 부른다는데 '묘족' 출신 연예인이 있었던 것이 생각나 신기했다. 여하튼 몽족은 조국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노예가 되어 본 적도 없는 독립적인 부족으로 오랜 세월 살아왔다.

리아가 3개월 되던 때 (중략) 리아는 눈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팔이 머리 위로 홱 젖혀지더니 결국엔 기절하고 말았다. 리 부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후 플리 의례를 통해 리아의 혼을 조심히 맞이했건만 (중략) 혼이 리아의 몸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부부는 그로 인한 증상을 '코 다 페이'로 보았다. 이는 '영혼에게 붙들리면 쓰러진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영혼이란 혼을 훔치는 '다'를 말하며 '페이'는 붙들거나 친다는 뜻이고 '코'는 벼가 비바람에 눕듯이 땅에 뿌리를 막은 채 쓰러진다는 뜼이다. 몽영사전을 보면 코 다 페이는 뇌전증이라 번역되어 있다. 이 병은 몽족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이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한편에서는 이 병을 심각하고 위험한 질환으로 받아들인다. (p. 49) 그런가하면 몽족은 코 다 페이를 영예로운 병으로 여기기도 했다. (중략) 몽족의 뇌전증 환자는 흔히 샤먼이 된다. (중략) 치 넹이 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소명이다. 이 소명은 그 사람이 갑자기 아플 때 드러난다. 이것은 코 다 페이를 통해서도, 비슷하게 떨리고 고통스러운 증상이 나타나는 다른 병을 통해서도 찾아온다. 치 넹은 증상을 보고 그 사람이 치유의 영혼인 '넹'을 받아들일 자로 선택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다. (중략) 몽족이면서 이런 소명을 거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p. 50) 리아의 발작을 바라보는 리 부부의 태도엔 이런 걱정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p. 51)

이 책의 원제 the spirit catches you and you fall down 는 그러니까 코 다 페이 를 영어로 풀어 쓴 것으로 보여진다. '다'라는 악령이 리아의 '혼'을 잡아가서 '리아'는 쓰러지고 만 것이다. '몽족은 아이들에게 자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p. 51)' 샤먼을 숭상하는 몽족으로서는 리아의 뇌전증 초기 증상에 대해 부모는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자녀들보다 리아에게 더 정성을 다하고 사랑을 주었다. 리아의 발작이 심해져 응급실에 갔을 때 리아의 부모는 '딸의 증세를 '영혼에게 붙들려 쓰러진 병'으로 (p. 61)' 진단하고 있었지만 미국 병원에서 미국 의사는 '뇌의 돌발적인 기능 부전' 인 뇌전증으로 진단했고 서로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난민캠프에서부터 이미 몽족에게 서양의사들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그들이 주민들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지식은 서구인에게만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p. 73)'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지키려 중국과도 싸우고 프랑스와도 싸워서 결국 몽족은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민족이다라는 결론만 내리게 했던 그 몽족을 서양의료진은 원시인이나 미개인 혹은 동물 취급했다.

리아가 협조적이라 해도 푸아와 나오 카오는 딸에게 정확히 무얼 주면 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아가 먹어야 할 약들은 너무 복잡해지고 자주 바뀌어서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처방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리 부부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p. 88) 훌륭한 통역자가 없다는 건 의사소통 문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닐은 나오 카오가 '돌담'을 쳐두었으며 때로는 일부러 속인다고 느꼈다. 페기는 푸아가 '아주 어리석거나 완전 바보'인 줄 알았다. 통역을 정확히 해줄 경우에도 그녀의 대답은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두 의사는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 중 어느 정도가 의사소통이나 부모의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느 정도가 문화적인 장벽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p. 91)

리아의 발작은 점점 더 심해져갔고 리아의 부모는 병원 약을 믿지 못했던 데다 복용법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리아의 투약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의 부모는 몽족의 전통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리아에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봤을땐 '제발 이해를 좀 하라며 부모를 마구 흔들고 싶던 기억이 나요 (p. 105)' 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결국 의료진은 리아의 부모를 아동보호국에 신고했고 법원은 부모의 양육권을 박탈했다.

1980년대 초, 라오스 출신 난민들이 머세드에 정착하기 시작할 무렵 MCMC병원의 의사 중 '몽'이라는 말을 들어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전혀 몰랐다. (p. 116) 의사 댄 머피는 전공의 시절 이 자국(=부항 자국)때문에 프레즈노의 한 몽족 아빠가 감옥에 간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초등학생 아들의 가슴에 있는 부항 자국을 본 학교 선생이 신고를 한 것이었다. 아빠는 감방에서 목을 맸다. (p. 117)

1980년대 말 머세드에서 전공의 생활을 한 데이브 슈나이더는 이런 말을 했다. "언어장벽은 가장 분명한 문제이긴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제일 큰 문제는 문화장벽이었으니까요. 몽족을 대하는 것과 이외의 환자를 대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무한한' 차이라고 할까요" (p. 123)

의료진은 의료진 나름대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몽족은 자신들의 치료행위를 불신하고 치료약을 거부하면서도 아프면 병원에 왔고 의료진의 질문에 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통역이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통역이 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하고 있었다.

리아는 위탁가정으로 넘겨졌다. 리아의 부모는 이해할 수 없었고 미치기 직전의 상태까지 내몰렸다. '푸아와 나오 카오는 워낙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고 그 아이를 너무 사랑했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그들은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대상이 돼선 절대 안 되는 가족이었어요 (p. 152)' 라고 위탁모가 말할 정도로 리아의 부모는 리아에게 헌신적이었지만 미국의료진은 리아에게 투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리아의 부모를 신뢰할 수 없었다.

1961년 임기 마지막 날,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자인 케네디에게 라오스가 공산 세력에 넘어가면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까지 따라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1961년과 이듬해 제네바 회의에서 미국, 소련, 남북 베트남, 그 밖의 10개국이 라오스의 중립을 재확인하고 라오스에는 '어떠한 외국 군대나 군 관계자도 파견하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협약에 동의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몽족이 등장한다. 미국은 어떻게든 라오스의 반공 정권을 지원하고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으로 뚫은 보급로인 '호치민 트레일'을 차단하고 싶었다. '호치민 루트'라고도 하는 이 보급로는 라오스 남동부이자 베트남 국경 인근의 복잡한 산길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겉으로는 합법성을 유지하며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협약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미국은 베트남엔 갈 수 있어도 라오스엔 갈 수 없었다. 답은 대리전쟁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p. 212)

미국 CIA 요원들은 라오스에 비밀잠입하여 몽족 게릴라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은 200만 톤이 넘었는데 대부분 미국 비행기가 몽족 거주지에 있는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퍼부은 것이었다. 9년 동안 8분에 한 번꼴로 폭격을 위한 출격이 있었을 정도다.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단지평원 한 곳에 투하된 폭탄의 톤수가 제2차세계대전 동안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 퍼부은 양보다 많았다. (p. 221) 라오스 몽족은 1970년까지 인구의 3분의 1이상이 자국 내 난민이 됐다. (p. 225) ] 몽족 뿐만 아니라 라오스 내전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몽족은 미국을 대신해 전쟁을 치룬 자신들이 미국땅에서 받는 난민혜택에 대해 일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수도 있었지만 일반 미국인들은 몽족 난민들이 자신들의 몫을 앗아간다고 여길 수 있었다.

전쟁이 일으킨 가장 극심한 변화는 몽족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산, 즉 자급자족의 능력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p. 229)

리 부부가 전후 체험을 얘기해주던 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라고 했다. 그러자 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많이 슬펐지. 하지만 라오스를 떠나올 때만 해도 사는 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리아가 프레즈노에 가서 더 심해진 때처럼 슬프진 않았지" 처음에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3년 동안 푸아와 나오 카오는 라오스에서 아이 셋을 잃었다. 또 총탄과 지뢰와 불의 장벽을 헤쳐나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살던 마을과 나라를 떠나기까지 했다. 제일 아끼는 아이가 치명적인 병을 앓는다 한들 어찌 그때보다 더 나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폭력도, 기아도, 결핍도, 망명도 죽음도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적어도 그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비극의 영영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그 영역 바깥의 것이었다. (p. 285)

우여곡절 끝에 리아는 부모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늘 그랬듯 다정한 보살핌과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발작은 더 심해졌고 결국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리 부부는 늘 의료진이 리아에게 약을 너무 많이 먹게 하고 강압적 치료행위를 한다고 여겼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리아가 곧 죽을 거라고 의료진은 말하고 있었다. 부부는 리아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몽족이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몽'이란 말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에서 몽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심지어 그게 어떤 전쟁이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미국 정부가 '조용한 전쟁'을 입단속 하는 작업을 완벽하게 했던 것이다. 몽족에게 화려한 역사와 복잡한 문화, 효율적인 사회 시스템, 부러워할 만한 가족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때문에 몽족은 미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이라는 망상을 투사하기 딱 좋은 빈 스크린이었다. (p. 314)

몽족은 거짓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 일쑤였고 독립적인 문화는 유지될 수 없었으며 가족의 위계또한 무너졌다. 하지만 몽족은 다시 뭉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적응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곧 죽을거라던 리아를 그 부모는 보란듯이 살려냈다. 비록 식물인간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리아는 일곱살이 되었고 나름 건강했다. 리아는 죽지도 낫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리아를 사랑했다.

"리아의 부모는 약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가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p. 420)

"MCMC사람들 모두에게 이야기하세요. 리아 문제는 가족 탓이 아니라고요, 우리 잘못 이라고요"

(중략) 나는 쇼크 상태였다. 나는 리아게게 패혈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는 언제나 발작 장애라고만 생각했다. '리 부부가 결국 옳았구나. 리아가 정말 약 때문에 저 지경이 됐구나!' (p. 421)

리 부부가 라오스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리아는 계속되는 대발작으로 영아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의학은 리아의 목숨을 지키기도 하고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어느 쪽이 리아의 가족에게 더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p. 425)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먼이 개발한 질문이 다수의 이문화간 의료에 관해 논의한 자료에서 인용된다는 것을 보고 아서 클라인먼에게 리아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리아의 소아과 의사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바로 답했다.

이 케이스에선 몽족 환자와 그 가족의 문화가 대단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에 못지않게 의학이라는 문화도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문화가 나름의 취미나 정서나 편향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문화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p. 431)

저자는 리아의 삶을 추적하면서 리아의 불행이 '타문화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p. 435)'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을 9년간의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었다는 것이 나는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은 1997년에 나왔다. 책 속의 이야기는 1980년대 있었던 일들이다. 그러니까 40여년 전의 결론인 것이다. 지금 당연하게 느껴지는 생각이 당연해지기까지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어느 의과대학이나 전공의 과정에서도 이문화간 수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1996년 미국 가정의학회에서 '문화적으로 민감하고 만족스러운 의료를 위한 핵심 이수 과정 권고 지침'을 마련했다. (중략) 이제는 대부분의 의하도가 이문화간 문제에 대해 적어도 인식은 할 정도가 되었고 때로는 얼핏 아는 체를 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p. 447)

'어떤 사람이 무슨 병을 앓는지 묻기보다는 어떤 병을 누가 앓느냐고 물어보라' (p. 454)

이후 의료계에서 어느 정도까지 인식의 개선이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5살 즈음에 병원에서 사망예정 선고를 받았던 리아는 서른 살 까지 살았고 몽족의 바람은 '미국을 떠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이제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무지했으면 한다는 것 (p. 490)' 이다. 그리고 저자는 '<리아의 나라>가 몽족에 관한 책이 아니라 문화 간의 소통과 불통을 다룬 책으로 제자리르 잡아가길 바란다. (p. 496)' 며 오랜만에 리 가족을 다시 만났을 때 '15년 전 이 책의 서문을 쓸 때 상상했던 것을 들었다. 바로 공통의 언어였다. (p. 499)' 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공통의 언어가 미국의료계 현장에서도 들리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하튼 이제야 이 책을 통해 읽게된 이 공통의 언어가 한국의료문화에서는 이미 낯설지 않은 것이기를 바란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때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중요하지만 타문화와 우리 문화가 얼마나 소통하고 있는지도 이제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소통하지 않으면 갈등만 격화될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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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 베이식 아트 2.0
알렉산드라 콜로사 지음, 김율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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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예술가이자 활동가 키스 해링(1958~1990)

KEITH HARING 이라는 작가 이름은 생소했다. 하지만 단순한 구성의 표지그림부터 왠지 친숙했다. 어디선가 언젠가 본듯한 그림체...

마로니에 출판사에서 나오는 베이식 아트 시리즈는 작가 한 명에 집중하여 삶과 예술을 안내한다. 무엇보다 선명한 도판의 그림들을 큰 크기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림도 보고 예술가도 소개받을 수 있는데 그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책을 펼쳐볼 수밖에. ㅎㅎ

"해링의 예술에 익숙해지는' 단계는 간단했다. 그것은 해링의 작품 중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링은 주변에서 본 것들을 모사하고 통합했으며, 당대의 민감한 쟁점에 대한 확고한 직관으로 미국 사화를 관찰했다. 왜냐하면 해링은 생산자인 동시에, 특정 세대 특정 생활방식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P. 7)

1958년에 태어나 서른 남짓한 짧은 생을 살다간 이 예술가가 이렇게 한 권의 책에 담겨 지금도 읽힌다는 것은 그가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남긴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자유가 넘쳐나고 다양한 표현방식이 움트던 70~80년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투영한 듯안 그의 단순한 디자인의 그림과 메세지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책을 펼쳐 몇몇 그림을 보자마자 어느 팬시 점에선가 어느 티셔츠에선가 본듯한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980년 겨울에 해링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 기관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을 위해 다시 한번 도시 환경을 선택했다. 해링은 마커팬만을 이용해 광고 포스터를 바꾸기 시작했고, 낙서화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고유한 태그를 작품에 남겼다. 이 태그들은 화가의 서명을 연상시키는 약어를 표방함으로써 작가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P. 20)

해링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단순화된 아기와 개의 그림을 보면 아하~! 하게 될 것이다.

진정성은 해링 작품의 기본적 특징이다. 뚜렷하고 쉽게 이해되는 형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고 있다. 의도적인 단색 배경의 사용, 연속성을 지닌 빠르고 유연한 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등은 즉각적인 효과와 함께 작품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이런 이유들로 해링 작품의 형상들은 하나의 도상이 되었다. (P. 35)

해링의 그림은 보자마자 왠지 친숙한 뭔지 알것 같은 단순함이 특징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책의 뒤로 갈수록 단순함이 반복되어 복잡해진 그림들을 보다 보면 그리고 그 단순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표현한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예술세계가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면 복잡해보이는 그림조차 단순하게 느껴지게하는 해링의 그림은 '모든 사람을 위한 미술이 바로 내 작업의 지향점이다. (P. 42)' 라는 작가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듯했다. 키스 해링은 미술이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엘리트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그랬기에 키스 해링은 자신의 작품을 상품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을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하며 살수 있게 된 것이다.

해링의 작품에서보이는 밝음 뒤에는 위험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 무어보다도 명랑하고 활기차며 낙천적인 주제와 연관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링의 주제는 명랑하고 활기차며 낙천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다. 근심과 고통 없는 자유와 분명히 드러난 유쾌함은 무자비한 현실과 결합되곤 했다. 많은 작품이 폭력, 위협, 죽음, 성에 대한 중압감과 관련되었다. (P. 57)

해링의 작품은 당대의 사회부조리를 표현하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동성애자였던 그가 생애말년에 에이즈에 걸리면서 내적 갈등은 더욱 어두운 주제에 집중되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캔버스를 싫어해서 비닐 방수포라던가 광고판이라던가 여하튼 캔버스가 아닌 것에 주로 그림을 그리던 그가 생애 후반에 캔버스에 작품을 남기고 좀더 회화적인 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해보였다.

여하튼 해링의 작품은 활동 초기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었기에 서른 남짓의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그의 '생전에 해링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설립했으며, (중략) 어린이 자선을 위한 특별 후원과 에이즈와 싸우기 위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재단의 예술적인 목표는 더 많은 대중에게 키스 해링, 예술가, 한 남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회와 다른 기획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P. 87)' 덕분에 여전히 우리는 그의 작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당신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절망한다면 그것은 포기이고, 당신은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사는 것은 인생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나는 삶을 감사하기 위헌 어떠한 죽음의 위협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삶에 감사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당신이 삶을 충만하게,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향해 오고 있는 미래를 맞이할 것입니다" (P. 90)

키스 해링이 전기 작가에게 말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말한 것인지 주체가 불분명한 저 문장은 여하튼간에 키스 해링이 죽기전까지 삶에 대한 긍정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두운 주제를 표현하면서도 첫인상은 귀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키스 해링의 작품들을 온전히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그의 그림들은 인상적이었고 우연히 마주치게 될때마다 반가울 것 같다.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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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백석 외 지음 / 북카라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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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슴에 평생 간직하고픈 시들을 필사할 수 있는 시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백석,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노래한 박인환,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김영랑,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는 윤동주 등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들의 주옥같은 시 83편에 대한 필사의 향연을 제공

-출판사의 책 소개글 中-

백석, 박인환, 김영랑,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윤동주

요즘 교과서에서도 이 시인들의 시를 배우는 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읽어본 적 없던 내게 교과서에서나마 만났던 이 시인들의 시가 나는 무척 좋았더랬다. 그래서 몇몇 시집을 읽어본 적도 있는데 오히려 교과서 밖 현대시들은 내게 더 난해하게 다가와서 여전히 내게 가장 어려운 문학 분야는 '시' 이다.

예전 시를 읽으면 그 사용하는 구어들 때문인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옛 시절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김소월의 시가 영어로 번역되면 그 참맛을 전달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한글 특유의 운율에 새삼 혼자 경탄하기도 했다.

모던하고 깔끔한 편집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예전엔 시화집이라고 시와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는 책이나 엽서, 전시회들이 있었다. 그런 시화집들에 시와 함께 있는 배경 그림들은 종종 편지지가 되어 나오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요새도 편지지를 파는지 모르겠다. 이메일과 메신저가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예쁜 엽서와 편지지가 오히려 낯설어졌을 수도...

이 책은 그런 옛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한편엔 시가 한편엔 예쁜 편지지 같은 여백이 조금은 촌스럽다 싶은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예전 시화집과 편지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아련한 반가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나는 글씨가 영 못난이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필사 혹은 자신만의 감상을 적었을 때 이 책이 더이상 시집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고유한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혹은 지인에게 선물용으로도 괜찮은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아침저녁 서늘해져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오기 시작한 요즘

이 책으로 소박하게 시인의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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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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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만을 강요하던 폭력의 시대에 맞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의 효시가 된 불후의 고전

내게 <모비 딕>이라는 작품은 고전이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식의 인식은 없었다. 유명한 책이었고 <필경사 바틀비>에 홀딱 반한 후 관심이 생긴 허먼 멜빌의 역작이기에 읽어보고 싶었던 정도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종인 님의 원전 번역판이 나왔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전 번역분야에서 믿고 보는 이종인 님의 번역인데다 직접 길고 긴 [해제]를 쓴 이 벽돌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구가 붙는 작품인 만큼 사전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읽고 싶었기에 [해제]를 먼저 읽고 시작했다. 어릴 적 동화버전으로 읽었던 모비딕은 내 머릿속에서 보물섬과 노인과 바다와 심지어 해저2만리가 뒤섞인 혼종이었음을 알았다. 결국 나는 모비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번역자가 풀어주는 '거대한 소설'에 대한 '거대한 주제'가 생소하고도 무겁게 다가왔다.

[<모비 딕>,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제목의 [해제]를 통해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깃든 고전들과 상징적 표현들에 대해 역자가 다각도로 분석해 놓은 부분이 흥미로웠다. 거대한 책을 읽을 땐 사전정보가 작품의 이해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 분석해놓은 평론들은 안 읽지만,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은 먼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 책은 읽기 전 [해제]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냥 지나친 문장들이 사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구였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고래에 대한 '어원'과 이전 책들에서의 '발췌록'을 작품에 앞서 실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작품 내내 시종일관 유지되며 작품의 서술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소설적 내용 보다는 고래와 포경선에 대한 다큐적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작품을 읽으며 '20세기에 도래할 모더니즘을 예고'했다는 그리고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으로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데, 특히나 작품 속에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체취를 맡고 그리스신화와 플라톤의 향기를 맡을때마다 더욱 곱씹게 되는 이 작품의 가치는 독자마다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p. 37)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의 이 첫 문장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장이라고 한다. 또한 이 문장과 호응하는 듯한 마지막 문장인 "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p. 691) " 와 (그냥 고래도 아니고 다른 고래도 아닌)흰고래, 이렇게 3가지의 상징성에 대해 이해하면 이 작품을 거의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성경적 인물들과 세익스피어식 대사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쪽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역자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꽤 힘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중략) 타르 단지에 손을 담가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전까지 시골 학교에서 덩치 큰 학생들도 벌벌 떠는 호랑이 선생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담하건대, 선생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씩 웃으며 이런 일을 견뎌내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한 사발 진하게 달여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무뎌진다. (p. 40)

이 작품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은근히 많이 들어가 있다. [해제]뒤의 [허먼 멜빌 연보]에서 이미 읽고 온 것처럼 허먼 멜빌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자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 교사로 일하다가 포경선에 취직했다. 고작 그의 나이 21세(1840년) 때였다. 3년 정도의 이 경험은 작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첫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30세에 집필한 그의 역작 <모비 딕>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모비 딕>에 대한 혹평으로 작가적 삶을 거의 접어야 했고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된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사후(1891년)에 192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불러달라고 한 작품 속 화자는 젊은 청년이고 상선만 타다가 포경선을 타기 위해 포경업으로 유명한 섬 낸터킷에 왔다.

내가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신의 섭리를 따라 아주 오래전에 예정된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이 항해는 대규모 공연 사이에 낀 짤막한 막간극이나 일인극과 같다. 이 부분이 전체 공연 안내지에 소개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p. 41)

치열한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이란 자의 고래잡이 항해

피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전쟁

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할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어도,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니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게 교묘히 나타난 여러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예정된 역할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고, 또한 기만하여 내가 편견없는 자유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p. 42)

책을 보면 저 선전문구?!들이 색과 크기를 달리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이또한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 중의 하나다. 현실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미국에 나름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이 무척 높았던 사람 같다.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계획의 일부로 포경선 선원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고래잡이 항해를 한 '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대위에서 그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익살극보다 뛰어난 <모비 딕>을 열연하고 있다. 이 '극'이 뛰어난 이유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이며 그렇기에 다른 그 어떤 허구보다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후반 나타난 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모비 딕>은 그 모더니즘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진다. 사실주의던 모더니즘이던 그에 앞서 있었던 사조들의 그 어떤 '허구성'보다 '현실'을 중요시 하는 사조들이기에 허먼 멜빌의 자긍심은 앞서간 문인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소설들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내세웠다. 가령 디킨스와 발자크는 전형적인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로서 작품 내 인물들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취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소설가가 그려내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따라서 소설가의 자아와 세상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말고는 알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인식이 불완전할 때가 많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자아와 세상은 불일치 하므로 세상보다는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화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라마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p. 702 - 해제 中) ]

<모비 딕>은 1인칭 화자로 서술되면서 화자의 심리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가 그런 심리를 갖게 되는 요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라고할 정도의 구체적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와는 비교되게 인물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듯한 연극적 어투로 방백처럼 표현된다. <모비 딕>은 정말이지 이런저런 요소들이 새롭고 신선한 묘한 작품인 것이다. 지금도 묘한데 발표 당시에는 얼마나 묘했겠는가.

어쨌든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낸터킷에 가기 전에 '물보라 여관:피터 코핀'에 묵게 되는데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에는 시신을 넣는 관 이라는 뜻도 있다 (p. 45)'고 한다. 이 '관' 은 이 소설의 결말에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이처럼 <모비 딕>에서는 앞뒤 대칭적으로 상응하는 상징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여관에 걸린 그림은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또한 대칭적 장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었다.

그래, 이슈메일, 저게 바로 너의 운명일 수도 있어. 하지만 왠지 나는 점점 다시 즐거워졌다. 그래, 배가 부서지면 나는 명예롭게도 불멸의 존재로 진급하는 거야.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혼란 속에서 영원의 세계에 던져지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우리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 땅에서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가 실은 내 진짜 본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보는 방식이란 것이, 굴이 바닷물을 통해 태양을 바라보며 그 두터운 물을 가장 얇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육신이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누구든 내 육신을 가져가라.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낸터킷을 위해 만세 삼창! 부서진 배든, 으스러진 육신이든 올 테면 와라.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은 부술 수 없으니. (p. 76)

이슈메일은 이제 낸터킷에서 포경선을 타고 출항한다.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야만인 퀴케그보다 더 이상한 선장인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호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거기 돛대 꼭대기! 잘 살펴봐. 너희들 전부! 이 근처에 고래들이 있어! 흰 고래를 보면 폐가 찢어지도록 소리치란 말이야!" (p. 182)

"자네들 중 누구든 이마가 주름지고 아가리가 구부러진 대가리 하얀 고래를 보고하면,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하얀 대가리 고래를 보고하면, 자, 이 금화는 바로 그 사람의 것이다!" (p. 218)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해브 선장은 광기어린 집념을 드러낸다. 흰 고래를 찾아라! 선장의 한 쪽 다리를 앗아간 그 흰 고래를.

'작은 건물이야 공사를 처음 시작한 건축가가 완공할 수 있겠지만, 진정 웅장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대에 맡기는 법이다. 신은 내가 그 어떤 것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 전체도 하나의 초고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초고를 위한 초고에 불과하다. 아아, 내게 시간과 체력과 자금과 인내를! (p. 197)'

에이해브 선장은 위대한 흰 고래를 찾고 '나'는 그 위대한 여정을 기록한 후대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중이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이라는 자신의 작품에 이토록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작정하고 쓴 것인데 그러한 작품이 그토록 혹평을 받았으니 작가로서 받은 상처와 타격이 컸을 것 같긴 하다.

이 모든 아름답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가장 내밀한 개념 속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 두려운 핏빛보다 더 큰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포착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흰 색을 좀 더 기분 좋은 연상에서 분리시켜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대상과 결부시켰을 때 그 공포는 배가된다. (p. 253)

우리는 아직 흰색의 마법을 풀지 못했고, 왜 흰색이 우리 영혼에 그토록 강하게 호소력을 갖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 이상하고 훨씬 더 불길한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흰색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나아가 기독교 신이 쓰고 있는 베일인 동시에 인류에게 가장 소름끼치는 것들을 강화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p. 261)

이 모든 것의 상징이 바로 흰 고래다. 그래도 당신은 이 맹렬한 추격을 의아하게 여기겠는가? (p. 262)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많은 측면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p. 261)' 라며 이슈메일은 '흰 고래'의 의미와 그러한 흰 고래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심리에 대해 독자를 설득한다. 또한 고래의 속성과 종류, 포경업의 구체적 작업들을 설명하면서 이 두려운 흰 고래를 '모비 딕'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연결시키는데 그렇게해서, 조업을 하며 만나는 배들마다 에이해브 선장의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는 광기어린 집착을 포경업의 특성상 그러한 추적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설득시키려 한다. 흰 고래도 흰 고래를 쫓는 일도 모두 너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인 것이다. 호메로스의 비극이 그러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그러했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모비 딕>이라는 작품으로.

성문율이든 불문율이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규약 (p. 488)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은 자가 임자다.

하지만 이 훌륭한 법규는 워낙 간결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 법규를 설명하려면 방대한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 489)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원칙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p. 491)

작가는 '잡힌 고래'에 대한 비유로 러니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 과부의 마지막 동전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라고, 미통한 파산자가 가족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고리대금업자 모르드개가 무지막지하게 떼는 선이자가, 대주교가 등골 빠지게 일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얼마 되지 않는 빵과 치즈에서 뜯어낸 10만 파운드가, 영국에게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텍사스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놓친 고래'는 스페인에게 있어 아메리카가, 러시아 황제에게 있어 폴란드가, 터키에게 있어 그리스가, 영국에게 있어 인도가, 미국에게 있어 멕시코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이처럼 '인권이나 세계의 자유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겟는가? (p. 492)' 라고 물으니 어찌 '놓친 고래'를 추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모비 딕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고래가 물을 뿜는다! 고래가 물을 뿜는다! 흰 산 같은 혹이다! 모비 딕이다!" (p. 655)

운명의 추격이 시작된다. 이 운명적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많은 설명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벽돌책에서 이 몇 페이지를위해 그토록 길고 긴 설명이 그토록 현실감 넘치는 증명과 증언들이 등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약본 책에서라면 대부분 모비 딕에 대한 선장의 집념과 모비 딕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소설적 줄거리가 대부분의 내용이겠으나 원전 그대로의 모비 딕에서 사실 이러한 소설적 줄거리는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아들 이스마엘로 시작해서 레이철호(라헬=레이철, 아들을 잃은 어미 라헬)에 의해 구조되는 고아로 끝나는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흰 고래'는? ...

확실한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독자가 읽었을 때 분명 나와는 다른 감상을 얻었으리라는 것이다.

항해모험기이라고 하나 항해모험기로 읽히지 않는 이 소설은 한번 읽는 것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이 험난한 여정을 내가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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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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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흑인, 퀴어, 공산주의자,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의 아이콘 앤절라 데이비스가 쓴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

Women , Race & Class

198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단순한 제목의 이 책은 학문적 논리 보단 저자 개인의 삶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리고 짧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그 출판년도만으로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40여년 전 미국내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낯선 독자를 위해 국내 페미니즘학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정희진 박사가 책의 서두에 해제를 덧붙였다.

여성은 이렇게 다양하다. (중략) 인종과 계급, 지역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차이나 개인의 성격에 따라 젠더나 '여성성'을 실행하는 방식이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중 누구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범적 여성('젋고 예쁜 중산층 여성')은 남성이 정한다. 이에 반해 여성주의는 '아줌마, 할머니, 노예 여성, 트랜스 젠더 여성'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범위를 확장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목표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여성을 남성 공동체를 위한 성역할 노동자 집단으로 환원시킨 성차별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여성의 개인화와 인간화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여성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낸 권력을 해체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주장한다. (p. 12) -해제 中-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학 혹은 여성을 위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성만의 ... 뭐 이런 해석이 일반적인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옳지 않을 때가 많다. '성차별이나 인종주의는 지배 세력이 정한 규정이다. (p. 13)' 라는 저자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범주가 누군가에 의해 규제된 범주라면 더구나 그것이 억압에 가깝다면 그 범주를 해체하고 그 범주를 만들어낸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여성인가' 라고 묻는 정희진 박사의 질문에 앤절라 데이비스가 한 답은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 봤을 때 이해하기가 훨씬 나았다.

[여성, 인종, 계급]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앤절라 이본 데이비스가 1981년에 발표한 여성학 이론의 고전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대표적인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데이비스만큼 평생을 다양한 정체성과 젠더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삶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자 공산주의자, 저술가, 교수, 감옥 폐지 운동가,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활동가, 미국 공산당 대통령 후보였던 거스 홀과 함께 1980년과 1984년에 부통령 후보에 두 번 출마했다가 낙선한 직업 정치인이자, 한때 FBI가 지명한 10대 수배자이기도 했다. (p. 14)

저자의 다종다양한 이력만큼이나 저자가 주제삼을 것들은 다중적일 수 있겠으나 저자는 '누가 여성으로 간주되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는 영원한 질문(p. 15)'에 집중하여 이 책을 쓴 것 같다. '페미니즘이 다루는 젠더는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을 질문하고 추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남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뚜렷이 두 개의 성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남성과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이기만 한 남성, 여성이기만 한 여성은 없다. 즉 성별만으로 작동하는 문제는 단언컨대, 없다. 동시에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인종, 계급 개념도 불가능하다. (p. 15)' 는 해제의 설명처럼 여성이지만 여성이면 안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사상이다. (p. 15)' 여성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합적 권력의 성격을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상황적 지식 (p. 16)' 이라고 해제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저자인 앤절라 데이비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미국이 흑인노예의 노동을 바탕으로 자리잡은 가장 인종구속적인 국가라는 것은 (저자인) 흑인여성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저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프레임이 강하다. 그래서 해제에서도 '이 책의 전반적 '정서'가 흑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이라기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p. 26)' 라고 살짝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극명한 공산주의관련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인 한국에서 그 프레임도 해체하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이기에 그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요지는 여성이 흑인, 노예, 가난한 사람일 때 여성성의 기준과 페미니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라고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보편의 기준을 바꾸지 못한 채 특수하고 예외적인 타자만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방식을 비판하고 차이를 드러낸다. 남성중심적 보편성이든, 백인 여성 중심의 보편성이든 모든 보편성은 차이를 드러내야만 해체된다. (p. 20) '여자로 태어났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인가?' 우리는 기존의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중산층의 경험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다. 삶이 지나치게 고달픈 이들이나 부자들은 언어를 생산할 여력이나 이유가 없다. 모든 언어, 지식은 중산층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모두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p. 21)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노력중의 하나로 페미니즘의 고전을 읽을때에도 경전처럼 읽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처럼 고전은 경전이 아니다. (p. 27)' 라는 해제에서의 문장을 되새기며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투쟁한 이들의'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공부가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어떻게? 시공간이 다른 로컬에서 나의 위치성을 자각하고 저자의 생각을 상대화, 재의미화 하는 공부여야 한다. (p. 27)' 다행히 이 책으로 하는 '공부'는 일단 가독성 면에서 어렵지 않다.

노예 여성들은 여자라는 태생 때문에 온갖 형태의 성적 억압에 취약했다. 남성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태형과 신체 훼손이었다면 여자들은 태형과 신체 훼손에 더해서 강간을 당했다. 사실 강간은 노예 소유주의 경제적 지배력과 노동자로서의 흑인 여성에 대한 감독관의 통제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학대는 그러므로 이들의 노동에 대한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원활하게 했다. 이 착취를 위해 노예 소유주들은 억압을 할 목적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성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렸다. 흑인 여성들이 인정된 의미에서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노예제는 흑인 남성들의 남성우월주의 역시 억눌렀다. (p. 35)

미국사회에서의 페미니즘 발달을 이해하려면 흑인노예로서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 미국 사회내의 많은 문제는 흑인노예제에서 시작된다.

흑인노예로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없었다. 평.등.하게 학대받고 착취당했다. 오히려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흑인여성노예는 더 심한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흑인노예공동체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가 백인지배층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와 다르게 형성된 배경이기도 했으며, 추후 페미니즘의 발달에 있어서도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의 시각에 상당한 간극을 가져오게 했다. 여하튼 미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그래서 흑인노예제 폐지에서 시작된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 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 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p. 109)

초기 여성 권익 활동가들은 흑인 여성의 곤경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예제 반대에 참여하고 있는 백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851년 여성대회에 흑인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석했던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라는 연설은 지금 읽어도 찡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와 여성권익향상 운동은 서로 돕다가도 때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둘다 해결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관철시켜야 하지 않나 라는 조바심에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 견제해야 할 때도 많았다. 이또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노예제의 사슬이 끊어지긴 했어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강도 면에서 노예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종주의자 폭도들의 테러 공격을 상대해야 했다. (중략)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 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p. 131) 노예제 시기에 그랬듯 농업에 종사했던 흑인 여성들은 온종일 옆에서 함께 일했던 흑인 남성들만큼이나 혹사당했다. 이들은 종종 남북전쟁 이전의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는 지주들과의 '계약'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당했다. 계약 만기일은 형식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지주들은 노동자가 정해진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빚을 자신들에게 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144)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됐어도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게 없었다. 가진거 없이 해방된 노예들은 여전히 지주들 밑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노동을 하면서도 빚을 져야 했으며 그렇게 지게 된 빚은 늘어나기만 해서 종신계약에 가까운 노동은 노예제에서의 노동과 다를게 없었다. 오히려 혐오범죄에 더 노출되기까지 했다. 중요한건 깨우침과 깨달음이었기에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성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미국의 여성 투쟁사는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함께 문맹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했을 때 진정한 절정에 도달했다. 이들의 단합과 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가능성 중 하나를 지키고 공고히 다졌다. (p. 176)

이 희망적인 연대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권력투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셈법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고 인종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단번에 사라질 수 있는 인식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성참정권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남부의 흑인 여성들은 이 새로 성취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다. (p. 230' 미국내 페미니즘역사에서 흑인여성의 입장을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많이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인여성으로서의 페미니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 저자는 공산주의라는 논리를 접하며 큰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 '근 20년간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대변인이었던 사회당은 여성 평등 투쟁을 지지했다. 사실 숱한 세월 동안 여성참정권을 옹호한 정당은 사회당이 유일했다. (p. 234)' 따라서 저자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논리도 따로 챙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흑인 여성 노예의 삶에 대한 일체의 탐구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p. 32)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p. 114)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이 남북 전쟁 이후 공화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듯, 이 승리에 도취된 정치인들이 흑인의 천부적인 정치권에 신경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들이 남부에서 새로 해방된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할 필요를 인정했다고 해서 이들이 백인 여성보다 흑인 여성에게 더 호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p. 127)

노예제 시기에 흑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자격의 근간이 노예 소유주의 경제 권력이었듯, 자본주의사회의 계급 구조 역시 강간을 장려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p. 302)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억압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으로 남는 한, 성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얼굴인 강간의 위협은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강간 반대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주요 활동들은 독점자본주의의 궁극적 혁파를 염두에 둔 전략적 맥락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p. 304)

오늘날의 흑인 여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노동계급 자매들에게, 가사노동과 육아의 부담이 자신의 어깨에서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해방의 급진적 비밀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육아와 식사 준비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가사노동은 산업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는 노동계급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p. 343)

흑인노예는 기본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였고 당시 사회사상 중에서 남녀 평등을 포함한 논리는 공산주의가 유일했다. 그러니 저자가 흑인여성운동가로서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40여년이 흘렀다. 저자와 같은 사회주의자적인 시각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시각은 의미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저자의 페미니즘론으로 돌아가서 노예제 폐지와 참정권 획득을 이루고 나서도 여전히 문제화되고 있는 '강간'에 대해 살펴보면,

현대 강간 반대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강간 피해자로서의 흑인 여성을 둘러싼 이런 특수한 환경을 진지하게 분석한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시스템 차원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흑인 여성들과, 강간 기소라는 인종주의적 조작 때문에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흑인 남성들을 묶고 있는 역사적인 ㅐ듭은 이제 막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흑인 여성들이 강간에 저항할 때면 그것이 흑인 남성을 상대로 강간 기소를 날조하기 위한 치명적인 인종주의적 무기로 사용될 위험이 거의 동시에 제기된다. (p. 267)

저자는 '흑인 강간범 이라는 해묵은 신화(p. 278)' 가 꾸준히 이용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노예제 폐지 이후 인종주의가 그 꼴을 갖추는 데에 가상의 흑인 강간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흑인 남성을 가장 빈번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는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p. 291)' 흑인여성들로서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란한 때일수록 기준과 명분은 명확히 세워야 했고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분명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해묵은 신화'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출산통제의 진보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반박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종주의와 계급착취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p. 306) 임신중지와 영아살해는 생물학적 출산 과정이 아니라 노예제라는 억압적인 조건이 동기로 작용하는, 극한의 상황이 빚어낸 행동이다. 당연히 이런 여성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임신중지를 자유를 향한 디딤돌이라고 추켜세운다면 있는 힘껏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p. 309) '자발적인 모성' 슬로건에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새로운 여성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비전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 여성들이 누리는 생활양식에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p. 313)

두 입장차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생학으로 변질된 출산제한이었다. '나치가 전체 통치 기간 동안 시행한 불임수술의 건수가 미국 정부가 단 한 해 동안 자금을 지원한 불임수술 건수와 거의 똑같을 수도 있다는 게 진짜로 가능하단 말인가? (p. 326)'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노동 속에서 노예 여성은 노예 남성들과 동등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지독한 성평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예 거주 지역에 있는 집 안에서 '가정주부'인 백인 자매들보다 더 큰 성평등을 누렸다. (p. 341)' 저자가 말하는 '지독한 성평등' 이라는 표현을 보며 '평등'의 의미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평등이 일반적인 남녀평등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저자는 '독점자본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p. 359)' 라고 최종적인 전략을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 시대에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에서 새롭게 제시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할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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