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링의 작품은 당대의 사회부조리를 표현하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동성애자였던 그가 생애말년에 에이즈에 걸리면서 내적 갈등은 더욱 어두운 주제에 집중되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캔버스를 싫어해서 비닐 방수포라던가 광고판이라던가 여하튼 캔버스가 아닌 것에 주로 그림을 그리던 그가 생애 후반에 캔버스에 작품을 남기고 좀더 회화적인 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해보였다.
여하튼 해링의 작품은 활동 초기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었기에 서른 남짓의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그의 '생전에 해링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설립했으며, (중략) 어린이 자선을 위한 특별 후원과 에이즈와 싸우기 위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재단의 예술적인 목표는 더 많은 대중에게 키스 해링, 예술가, 한 남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회와 다른 기획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P. 87)' 덕분에 여전히 우리는 그의 작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