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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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만을 강요하던 폭력의 시대에 맞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의 효시가 된 불후의 고전

내게 <모비 딕>이라는 작품은 고전이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식의 인식은 없었다. 유명한 책이었고 <필경사 바틀비>에 홀딱 반한 후 관심이 생긴 허먼 멜빌의 역작이기에 읽어보고 싶었던 정도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종인 님의 원전 번역판이 나왔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전 번역분야에서 믿고 보는 이종인 님의 번역인데다 직접 길고 긴 [해제]를 쓴 이 벽돌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구가 붙는 작품인 만큼 사전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읽고 싶었기에 [해제]를 먼저 읽고 시작했다. 어릴 적 동화버전으로 읽었던 모비딕은 내 머릿속에서 보물섬과 노인과 바다와 심지어 해저2만리가 뒤섞인 혼종이었음을 알았다. 결국 나는 모비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번역자가 풀어주는 '거대한 소설'에 대한 '거대한 주제'가 생소하고도 무겁게 다가왔다.

[<모비 딕>,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제목의 [해제]를 통해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깃든 고전들과 상징적 표현들에 대해 역자가 다각도로 분석해 놓은 부분이 흥미로웠다. 거대한 책을 읽을 땐 사전정보가 작품의 이해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 분석해놓은 평론들은 안 읽지만,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은 먼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 책은 읽기 전 [해제]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냥 지나친 문장들이 사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구였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고래에 대한 '어원'과 이전 책들에서의 '발췌록'을 작품에 앞서 실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작품 내내 시종일관 유지되며 작품의 서술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소설적 내용 보다는 고래와 포경선에 대한 다큐적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작품을 읽으며 '20세기에 도래할 모더니즘을 예고'했다는 그리고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으로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데, 특히나 작품 속에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체취를 맡고 그리스신화와 플라톤의 향기를 맡을때마다 더욱 곱씹게 되는 이 작품의 가치는 독자마다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p. 37)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의 이 첫 문장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장이라고 한다. 또한 이 문장과 호응하는 듯한 마지막 문장인 "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p. 691) " 와 (그냥 고래도 아니고 다른 고래도 아닌)흰고래, 이렇게 3가지의 상징성에 대해 이해하면 이 작품을 거의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성경적 인물들과 세익스피어식 대사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쪽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역자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꽤 힘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중략) 타르 단지에 손을 담가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전까지 시골 학교에서 덩치 큰 학생들도 벌벌 떠는 호랑이 선생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담하건대, 선생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씩 웃으며 이런 일을 견뎌내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한 사발 진하게 달여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무뎌진다. (p. 40)

이 작품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은근히 많이 들어가 있다. [해제]뒤의 [허먼 멜빌 연보]에서 이미 읽고 온 것처럼 허먼 멜빌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자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 교사로 일하다가 포경선에 취직했다. 고작 그의 나이 21세(1840년) 때였다. 3년 정도의 이 경험은 작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첫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30세에 집필한 그의 역작 <모비 딕>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모비 딕>에 대한 혹평으로 작가적 삶을 거의 접어야 했고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된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사후(1891년)에 192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불러달라고 한 작품 속 화자는 젊은 청년이고 상선만 타다가 포경선을 타기 위해 포경업으로 유명한 섬 낸터킷에 왔다.

내가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신의 섭리를 따라 아주 오래전에 예정된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이 항해는 대규모 공연 사이에 낀 짤막한 막간극이나 일인극과 같다. 이 부분이 전체 공연 안내지에 소개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p. 41)

치열한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이란 자의 고래잡이 항해

피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전쟁

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할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어도,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니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게 교묘히 나타난 여러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예정된 역할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고, 또한 기만하여 내가 편견없는 자유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p. 42)

책을 보면 저 선전문구?!들이 색과 크기를 달리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이또한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 중의 하나다. 현실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미국에 나름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이 무척 높았던 사람 같다.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계획의 일부로 포경선 선원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고래잡이 항해를 한 '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대위에서 그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익살극보다 뛰어난 <모비 딕>을 열연하고 있다. 이 '극'이 뛰어난 이유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이며 그렇기에 다른 그 어떤 허구보다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후반 나타난 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모비 딕>은 그 모더니즘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진다. 사실주의던 모더니즘이던 그에 앞서 있었던 사조들의 그 어떤 '허구성'보다 '현실'을 중요시 하는 사조들이기에 허먼 멜빌의 자긍심은 앞서간 문인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소설들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내세웠다. 가령 디킨스와 발자크는 전형적인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로서 작품 내 인물들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취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소설가가 그려내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따라서 소설가의 자아와 세상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말고는 알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인식이 불완전할 때가 많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자아와 세상은 불일치 하므로 세상보다는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화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라마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p. 702 - 해제 中) ]

<모비 딕>은 1인칭 화자로 서술되면서 화자의 심리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가 그런 심리를 갖게 되는 요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라고할 정도의 구체적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와는 비교되게 인물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듯한 연극적 어투로 방백처럼 표현된다. <모비 딕>은 정말이지 이런저런 요소들이 새롭고 신선한 묘한 작품인 것이다. 지금도 묘한데 발표 당시에는 얼마나 묘했겠는가.

어쨌든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낸터킷에 가기 전에 '물보라 여관:피터 코핀'에 묵게 되는데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에는 시신을 넣는 관 이라는 뜻도 있다 (p. 45)'고 한다. 이 '관' 은 이 소설의 결말에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이처럼 <모비 딕>에서는 앞뒤 대칭적으로 상응하는 상징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여관에 걸린 그림은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또한 대칭적 장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었다.

그래, 이슈메일, 저게 바로 너의 운명일 수도 있어. 하지만 왠지 나는 점점 다시 즐거워졌다. 그래, 배가 부서지면 나는 명예롭게도 불멸의 존재로 진급하는 거야.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혼란 속에서 영원의 세계에 던져지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우리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 땅에서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가 실은 내 진짜 본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보는 방식이란 것이, 굴이 바닷물을 통해 태양을 바라보며 그 두터운 물을 가장 얇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육신이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누구든 내 육신을 가져가라.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낸터킷을 위해 만세 삼창! 부서진 배든, 으스러진 육신이든 올 테면 와라.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은 부술 수 없으니. (p. 76)

이슈메일은 이제 낸터킷에서 포경선을 타고 출항한다.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야만인 퀴케그보다 더 이상한 선장인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호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거기 돛대 꼭대기! 잘 살펴봐. 너희들 전부! 이 근처에 고래들이 있어! 흰 고래를 보면 폐가 찢어지도록 소리치란 말이야!" (p. 182)

"자네들 중 누구든 이마가 주름지고 아가리가 구부러진 대가리 하얀 고래를 보고하면,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하얀 대가리 고래를 보고하면, 자, 이 금화는 바로 그 사람의 것이다!" (p. 218)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해브 선장은 광기어린 집념을 드러낸다. 흰 고래를 찾아라! 선장의 한 쪽 다리를 앗아간 그 흰 고래를.

'작은 건물이야 공사를 처음 시작한 건축가가 완공할 수 있겠지만, 진정 웅장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대에 맡기는 법이다. 신은 내가 그 어떤 것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 전체도 하나의 초고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초고를 위한 초고에 불과하다. 아아, 내게 시간과 체력과 자금과 인내를! (p. 197)'

에이해브 선장은 위대한 흰 고래를 찾고 '나'는 그 위대한 여정을 기록한 후대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중이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이라는 자신의 작품에 이토록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작정하고 쓴 것인데 그러한 작품이 그토록 혹평을 받았으니 작가로서 받은 상처와 타격이 컸을 것 같긴 하다.

이 모든 아름답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가장 내밀한 개념 속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 두려운 핏빛보다 더 큰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포착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흰 색을 좀 더 기분 좋은 연상에서 분리시켜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대상과 결부시켰을 때 그 공포는 배가된다. (p. 253)

우리는 아직 흰색의 마법을 풀지 못했고, 왜 흰색이 우리 영혼에 그토록 강하게 호소력을 갖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 이상하고 훨씬 더 불길한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흰색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나아가 기독교 신이 쓰고 있는 베일인 동시에 인류에게 가장 소름끼치는 것들을 강화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p. 261)

이 모든 것의 상징이 바로 흰 고래다. 그래도 당신은 이 맹렬한 추격을 의아하게 여기겠는가? (p. 262)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많은 측면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p. 261)' 라며 이슈메일은 '흰 고래'의 의미와 그러한 흰 고래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심리에 대해 독자를 설득한다. 또한 고래의 속성과 종류, 포경업의 구체적 작업들을 설명하면서 이 두려운 흰 고래를 '모비 딕'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연결시키는데 그렇게해서, 조업을 하며 만나는 배들마다 에이해브 선장의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는 광기어린 집착을 포경업의 특성상 그러한 추적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설득시키려 한다. 흰 고래도 흰 고래를 쫓는 일도 모두 너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인 것이다. 호메로스의 비극이 그러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그러했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모비 딕>이라는 작품으로.

성문율이든 불문율이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규약 (p. 488)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은 자가 임자다.

하지만 이 훌륭한 법규는 워낙 간결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 법규를 설명하려면 방대한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 489)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원칙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p. 491)

작가는 '잡힌 고래'에 대한 비유로 러니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 과부의 마지막 동전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라고, 미통한 파산자가 가족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고리대금업자 모르드개가 무지막지하게 떼는 선이자가, 대주교가 등골 빠지게 일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얼마 되지 않는 빵과 치즈에서 뜯어낸 10만 파운드가, 영국에게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텍사스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놓친 고래'는 스페인에게 있어 아메리카가, 러시아 황제에게 있어 폴란드가, 터키에게 있어 그리스가, 영국에게 있어 인도가, 미국에게 있어 멕시코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이처럼 '인권이나 세계의 자유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겟는가? (p. 492)' 라고 물으니 어찌 '놓친 고래'를 추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모비 딕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고래가 물을 뿜는다! 고래가 물을 뿜는다! 흰 산 같은 혹이다! 모비 딕이다!" (p. 655)

운명의 추격이 시작된다. 이 운명적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많은 설명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벽돌책에서 이 몇 페이지를위해 그토록 길고 긴 설명이 그토록 현실감 넘치는 증명과 증언들이 등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약본 책에서라면 대부분 모비 딕에 대한 선장의 집념과 모비 딕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소설적 줄거리가 대부분의 내용이겠으나 원전 그대로의 모비 딕에서 사실 이러한 소설적 줄거리는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아들 이스마엘로 시작해서 레이철호(라헬=레이철, 아들을 잃은 어미 라헬)에 의해 구조되는 고아로 끝나는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흰 고래'는? ...

확실한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독자가 읽었을 때 분명 나와는 다른 감상을 얻었으리라는 것이다.

항해모험기이라고 하나 항해모험기로 읽히지 않는 이 소설은 한번 읽는 것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이 험난한 여정을 내가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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