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면 저 선전문구?!들이 색과 크기를 달리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이또한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 중의 하나다. 현실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미국에 나름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이 무척 높았던 사람 같다.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계획의 일부로 포경선 선원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고래잡이 항해를 한 '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대위에서 그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익살극보다 뛰어난 <모비 딕>을 열연하고 있다. 이 '극'이 뛰어난 이유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이며 그렇기에 다른 그 어떤 허구보다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후반 나타난 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모비 딕>은 그 모더니즘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진다. 사실주의던 모더니즘이던 그에 앞서 있었던 사조들의 그 어떤 '허구성'보다 '현실'을 중요시 하는 사조들이기에 허먼 멜빌의 자긍심은 앞서간 문인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소설들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내세웠다. 가령 디킨스와 발자크는 전형적인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로서 작품 내 인물들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취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소설가가 그려내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따라서 소설가의 자아와 세상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말고는 알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인식이 불완전할 때가 많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자아와 세상은 불일치 하므로 세상보다는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화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라마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p. 702 - 해제 中) ]
<모비 딕>은 1인칭 화자로 서술되면서 화자의 심리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가 그런 심리를 갖게 되는 요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라고할 정도의 구체적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와는 비교되게 인물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듯한 연극적 어투로 방백처럼 표현된다. <모비 딕>은 정말이지 이런저런 요소들이 새롭고 신선한 묘한 작품인 것이다. 지금도 묘한데 발표 당시에는 얼마나 묘했겠는가.
어쨌든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낸터킷에 가기 전에 '물보라 여관:피터 코핀'에 묵게 되는데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에는 시신을 넣는 관 이라는 뜻도 있다 (p. 45)'고 한다. 이 '관' 은 이 소설의 결말에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이처럼 <모비 딕>에서는 앞뒤 대칭적으로 상응하는 상징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여관에 걸린 그림은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또한 대칭적 장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