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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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흑인, 퀴어, 공산주의자,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의 아이콘 앤절라 데이비스가 쓴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

Women , Race & Class

198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단순한 제목의 이 책은 학문적 논리 보단 저자 개인의 삶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리고 짧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그 출판년도만으로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40여년 전 미국내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낯선 독자를 위해 국내 페미니즘학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정희진 박사가 책의 서두에 해제를 덧붙였다.

여성은 이렇게 다양하다. (중략) 인종과 계급, 지역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차이나 개인의 성격에 따라 젠더나 '여성성'을 실행하는 방식이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중 누구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범적 여성('젋고 예쁜 중산층 여성')은 남성이 정한다. 이에 반해 여성주의는 '아줌마, 할머니, 노예 여성, 트랜스 젠더 여성'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범위를 확장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목표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여성을 남성 공동체를 위한 성역할 노동자 집단으로 환원시킨 성차별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여성의 개인화와 인간화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여성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낸 권력을 해체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주장한다. (p. 12) -해제 中-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학 혹은 여성을 위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성만의 ... 뭐 이런 해석이 일반적인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옳지 않을 때가 많다. '성차별이나 인종주의는 지배 세력이 정한 규정이다. (p. 13)' 라는 저자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범주가 누군가에 의해 규제된 범주라면 더구나 그것이 억압에 가깝다면 그 범주를 해체하고 그 범주를 만들어낸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여성인가' 라고 묻는 정희진 박사의 질문에 앤절라 데이비스가 한 답은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 봤을 때 이해하기가 훨씬 나았다.

[여성, 인종, 계급]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앤절라 이본 데이비스가 1981년에 발표한 여성학 이론의 고전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대표적인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데이비스만큼 평생을 다양한 정체성과 젠더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삶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자 공산주의자, 저술가, 교수, 감옥 폐지 운동가,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활동가, 미국 공산당 대통령 후보였던 거스 홀과 함께 1980년과 1984년에 부통령 후보에 두 번 출마했다가 낙선한 직업 정치인이자, 한때 FBI가 지명한 10대 수배자이기도 했다. (p. 14)

저자의 다종다양한 이력만큼이나 저자가 주제삼을 것들은 다중적일 수 있겠으나 저자는 '누가 여성으로 간주되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는 영원한 질문(p. 15)'에 집중하여 이 책을 쓴 것 같다. '페미니즘이 다루는 젠더는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을 질문하고 추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남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뚜렷이 두 개의 성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남성과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이기만 한 남성, 여성이기만 한 여성은 없다. 즉 성별만으로 작동하는 문제는 단언컨대, 없다. 동시에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인종, 계급 개념도 불가능하다. (p. 15)' 는 해제의 설명처럼 여성이지만 여성이면 안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사상이다. (p. 15)' 여성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합적 권력의 성격을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상황적 지식 (p. 16)' 이라고 해제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저자인 앤절라 데이비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미국이 흑인노예의 노동을 바탕으로 자리잡은 가장 인종구속적인 국가라는 것은 (저자인) 흑인여성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저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프레임이 강하다. 그래서 해제에서도 '이 책의 전반적 '정서'가 흑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이라기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p. 26)' 라고 살짝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극명한 공산주의관련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인 한국에서 그 프레임도 해체하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이기에 그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요지는 여성이 흑인, 노예, 가난한 사람일 때 여성성의 기준과 페미니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라고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보편의 기준을 바꾸지 못한 채 특수하고 예외적인 타자만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방식을 비판하고 차이를 드러낸다. 남성중심적 보편성이든, 백인 여성 중심의 보편성이든 모든 보편성은 차이를 드러내야만 해체된다. (p. 20) '여자로 태어났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인가?' 우리는 기존의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중산층의 경험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다. 삶이 지나치게 고달픈 이들이나 부자들은 언어를 생산할 여력이나 이유가 없다. 모든 언어, 지식은 중산층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모두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p. 21)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노력중의 하나로 페미니즘의 고전을 읽을때에도 경전처럼 읽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처럼 고전은 경전이 아니다. (p. 27)' 라는 해제에서의 문장을 되새기며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투쟁한 이들의'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공부가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어떻게? 시공간이 다른 로컬에서 나의 위치성을 자각하고 저자의 생각을 상대화, 재의미화 하는 공부여야 한다. (p. 27)' 다행히 이 책으로 하는 '공부'는 일단 가독성 면에서 어렵지 않다.

노예 여성들은 여자라는 태생 때문에 온갖 형태의 성적 억압에 취약했다. 남성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태형과 신체 훼손이었다면 여자들은 태형과 신체 훼손에 더해서 강간을 당했다. 사실 강간은 노예 소유주의 경제적 지배력과 노동자로서의 흑인 여성에 대한 감독관의 통제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학대는 그러므로 이들의 노동에 대한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원활하게 했다. 이 착취를 위해 노예 소유주들은 억압을 할 목적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성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렸다. 흑인 여성들이 인정된 의미에서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노예제는 흑인 남성들의 남성우월주의 역시 억눌렀다. (p. 35)

미국사회에서의 페미니즘 발달을 이해하려면 흑인노예로서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 미국 사회내의 많은 문제는 흑인노예제에서 시작된다.

흑인노예로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없었다. 평.등.하게 학대받고 착취당했다. 오히려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흑인여성노예는 더 심한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흑인노예공동체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가 백인지배층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와 다르게 형성된 배경이기도 했으며, 추후 페미니즘의 발달에 있어서도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의 시각에 상당한 간극을 가져오게 했다. 여하튼 미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그래서 흑인노예제 폐지에서 시작된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 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 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p. 109)

초기 여성 권익 활동가들은 흑인 여성의 곤경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예제 반대에 참여하고 있는 백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851년 여성대회에 흑인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석했던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라는 연설은 지금 읽어도 찡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와 여성권익향상 운동은 서로 돕다가도 때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둘다 해결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관철시켜야 하지 않나 라는 조바심에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 견제해야 할 때도 많았다. 이또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노예제의 사슬이 끊어지긴 했어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강도 면에서 노예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종주의자 폭도들의 테러 공격을 상대해야 했다. (중략)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 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p. 131) 노예제 시기에 그랬듯 농업에 종사했던 흑인 여성들은 온종일 옆에서 함께 일했던 흑인 남성들만큼이나 혹사당했다. 이들은 종종 남북전쟁 이전의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는 지주들과의 '계약'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당했다. 계약 만기일은 형식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지주들은 노동자가 정해진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빚을 자신들에게 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144)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됐어도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게 없었다. 가진거 없이 해방된 노예들은 여전히 지주들 밑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노동을 하면서도 빚을 져야 했으며 그렇게 지게 된 빚은 늘어나기만 해서 종신계약에 가까운 노동은 노예제에서의 노동과 다를게 없었다. 오히려 혐오범죄에 더 노출되기까지 했다. 중요한건 깨우침과 깨달음이었기에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성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미국의 여성 투쟁사는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함께 문맹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했을 때 진정한 절정에 도달했다. 이들의 단합과 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가능성 중 하나를 지키고 공고히 다졌다. (p. 176)

이 희망적인 연대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권력투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셈법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고 인종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단번에 사라질 수 있는 인식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성참정권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남부의 흑인 여성들은 이 새로 성취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다. (p. 230' 미국내 페미니즘역사에서 흑인여성의 입장을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많이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인여성으로서의 페미니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 저자는 공산주의라는 논리를 접하며 큰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 '근 20년간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대변인이었던 사회당은 여성 평등 투쟁을 지지했다. 사실 숱한 세월 동안 여성참정권을 옹호한 정당은 사회당이 유일했다. (p. 234)' 따라서 저자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논리도 따로 챙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흑인 여성 노예의 삶에 대한 일체의 탐구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p. 32)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p. 114)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이 남북 전쟁 이후 공화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듯, 이 승리에 도취된 정치인들이 흑인의 천부적인 정치권에 신경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들이 남부에서 새로 해방된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할 필요를 인정했다고 해서 이들이 백인 여성보다 흑인 여성에게 더 호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p. 127)

노예제 시기에 흑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자격의 근간이 노예 소유주의 경제 권력이었듯, 자본주의사회의 계급 구조 역시 강간을 장려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p. 302)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억압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으로 남는 한, 성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얼굴인 강간의 위협은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강간 반대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주요 활동들은 독점자본주의의 궁극적 혁파를 염두에 둔 전략적 맥락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p. 304)

오늘날의 흑인 여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노동계급 자매들에게, 가사노동과 육아의 부담이 자신의 어깨에서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해방의 급진적 비밀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육아와 식사 준비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가사노동은 산업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는 노동계급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p. 343)

흑인노예는 기본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였고 당시 사회사상 중에서 남녀 평등을 포함한 논리는 공산주의가 유일했다. 그러니 저자가 흑인여성운동가로서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40여년이 흘렀다. 저자와 같은 사회주의자적인 시각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시각은 의미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저자의 페미니즘론으로 돌아가서 노예제 폐지와 참정권 획득을 이루고 나서도 여전히 문제화되고 있는 '강간'에 대해 살펴보면,

현대 강간 반대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강간 피해자로서의 흑인 여성을 둘러싼 이런 특수한 환경을 진지하게 분석한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시스템 차원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흑인 여성들과, 강간 기소라는 인종주의적 조작 때문에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흑인 남성들을 묶고 있는 역사적인 ㅐ듭은 이제 막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흑인 여성들이 강간에 저항할 때면 그것이 흑인 남성을 상대로 강간 기소를 날조하기 위한 치명적인 인종주의적 무기로 사용될 위험이 거의 동시에 제기된다. (p. 267)

저자는 '흑인 강간범 이라는 해묵은 신화(p. 278)' 가 꾸준히 이용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노예제 폐지 이후 인종주의가 그 꼴을 갖추는 데에 가상의 흑인 강간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흑인 남성을 가장 빈번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는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p. 291)' 흑인여성들로서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란한 때일수록 기준과 명분은 명확히 세워야 했고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분명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해묵은 신화'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출산통제의 진보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반박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종주의와 계급착취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p. 306) 임신중지와 영아살해는 생물학적 출산 과정이 아니라 노예제라는 억압적인 조건이 동기로 작용하는, 극한의 상황이 빚어낸 행동이다. 당연히 이런 여성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임신중지를 자유를 향한 디딤돌이라고 추켜세운다면 있는 힘껏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p. 309) '자발적인 모성' 슬로건에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새로운 여성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비전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 여성들이 누리는 생활양식에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p. 313)

두 입장차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생학으로 변질된 출산제한이었다. '나치가 전체 통치 기간 동안 시행한 불임수술의 건수가 미국 정부가 단 한 해 동안 자금을 지원한 불임수술 건수와 거의 똑같을 수도 있다는 게 진짜로 가능하단 말인가? (p. 326)'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노동 속에서 노예 여성은 노예 남성들과 동등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지독한 성평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예 거주 지역에 있는 집 안에서 '가정주부'인 백인 자매들보다 더 큰 성평등을 누렸다. (p. 341)' 저자가 말하는 '지독한 성평등' 이라는 표현을 보며 '평등'의 의미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평등이 일반적인 남녀평등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저자는 '독점자본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p. 359)' 라고 최종적인 전략을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 시대에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에서 새롭게 제시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할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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