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로 보다, 근현대사 - 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기록된 현장을 찾아서 보다 역사
문재옥 지음 / 풀빛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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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기록된 현장을 찾아서

개항부터 촛불혁명까지, 격동의 근현대사 이야기기 담긴

14개의 답사 코스를 함께 걷는 역사 산책

예전엔 길치 방향치라는 자괴감에 지도 종류는 무조건 기피하게 되곤 했었는데,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다보니 지도가 필수라는 걸 깨달았다. 읽다보니 역사이해에 필요한 정도의 지도읽기는 즐겨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답사하듯 읽게되는 역사책은 더욱 반기게 되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해설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2023년에 <서대문형무소 도슨트>책을 출간했다. (p. 4) 이 책을 보고 풀빛출판사에서 감사하게도 연락을 주었다. 내게 근현대사 지식을 대중들에게 쉽게 전해 주는 책을 써 볼 것을 권했다. (p. 5)

대학다닐때 나의 역사지식과 사회지식을 쌓게 해주던 책들은 풀빛출판사 책들이 많았다. 대학앞 사회과학전문 서점도 사라지고 익숙했던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이름도 잘 보이지 않는 시대에 이렇게 다시 풀빛의 책을 읽게되니 그또한 반가웠다. 아직 살아있구나 싶어서.

책의 구성이 굉장히 유익하게 되어 있었다. 답사때 실제로 들고다니면서 읽어도 좋을 만큼.

각 장마다 본문 내용에 해당하는 관련 연표가 한국사/세계사로 간략하게 실려 있고 이 챕터를 답사하며 생각할 지점들을 먼저 알려준 후 답사코스 지도까지 보여준 후 본문이 시작되니 준비가 아주 탄탄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1863~2025 라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장소들 중 중요사건들과 연결된 장소들을 골랐다보니 (지금의)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장소로보는 근현대사라기 보다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서울답사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근현대사는 침탈의 역사다. 그러니 개항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터. 출발은 인천과 강화도이고 이후로는 내내 서울 곳곳의 투어다. 따라서 대부분의 장소들이 거의 가봤던 곳들이라 익숙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새로운 면면들이 보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저자의 관점이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전 세계를 약탈했던 프랑스군의 도둑질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p. 17)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조선에 책임을 묻겠다며 침략해 왔다.' (p. 21)

'금융 침탈은 단순한 물건 수출입보다 훨씬 강력하게 조선을 옥죄었다. 제일은행권은 조선을 찌른 일제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p. 41)

일제가 미두 거래, 주식 거래, 금광 개발 등을 통해 일부 한국인이 벼락부자가 되도록 놔둔 것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잊게 하는 마약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식민 통치의 부당함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탕주의의 만연은 일제가 한국인에게 뿌려 놓은 새로운 의식 문화였다. 근대화, 식민화는 한국인의 의 식까자도 변화시켰던 것이다. (p. 48)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역사를 읽다보면 변하지 않은 현실에 절로 개탄이 흘러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벼락부자...한탕주의... 지금은 과연 다른가? 이것을 조장하는 세력이 과연 지금은 없는가?

2016년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이해, 서울시는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길을 정비했고, 2018년 10월30일부터 일반에 정식으로 개방해 '고종의 길', 영어로는 'King's Road'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길이 120미터에 이르는 이 길을 걸으면서 서울시가 굳이 'King's Road'로 소개하려는 이유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미국공사관 뒤를 통해 덕수궁에 도달하는 길은 큰 길이 아닌 좁은 골목길로, 떳떳한 길이 아닌 숨겨진 길이다. 힘이 부족해 자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외국군의 위협을 피해야 했고, 도 다른 외국의 힘을 빌려야만 겨우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던 고종이 지나간 이 길을 '왕의 길'이라고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가 난감했다. 물론 고난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내고 이렇게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King's Road'라는 명칭은 도리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차라리 '고난의 길'로 부르는 편이 낫게싿는 생각이 든다. (p. 73)

궁궐에 가면 편전으로 가는 길에 표지석이 있고 중앙은 도톰하게 올라와 있다. '어도'라고 신하들은 이 가운뎃길을 걸으면 안되고 양 옆으로 가야 했다는 것을 궁궐구경을 한번이라도 하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런데 저 골목길을 굳이 King's Road 라고 한다라...

일제가 환구단의 핵심이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공간인 원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는데 이는 환구단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겠다는(p. 76, 77) 일제의 의도가 다분했다. 해방후 1967년에 조선호텔을 재건축하면서도 대한제국의 환구단은 복원되지 못했다. King's Road와 환구단에 대한 무시는 같은 역사관을 가진 위정자들의 의도때문이 아닐런지...

'2010년 서울시는 이곳에 녹천정 표석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녹천정은 역사적 의미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녹천정터'라는 표석을 세우려고 한 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아픈 역사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국과 일본 시민 단체에서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임을 알리는 '통감관저터'표석을 먼저 세웠다.' (p. 87) 2010년의 서울시장이 지금의 서울시장이다. 서울시장의 현재진행중인 만행?!은 뒤에도 여러가지 등장한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서 1955년 10월3일부터 다음해 8월 15일 광복절까지 큰 공사가 이뤄졌다. 높이가 23.5척(약7미터), 축대 포함 총81척(약25미터)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 건립되었다. 생존해 있던 이승만의 81살 생일에 맞춰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라며 떠받들던 간신배들이 세운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북한의 김일성 동상이 1972년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니 이보다도 먼저 이승만 우상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려고도 했다. 국민을 무시하고 권력만을 바라본 아부꾼들의 세상, 간신배들의 전성시대였다.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성도 하지 않은 결과 였따.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8월에 동상이 철거되었다. (p. 98)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이 매우 놀랍다.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p. 159)

이승만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다 그릇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할 사람들...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천도교다. 당시 천도교는 3대 교주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유능한 인재들과 중앙대성전 건립을 위해 모은 자금을 갖고 있었다. 천도교인들이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곳이 서울의 북촌이다. (p. 130) 3.1운동에서 불교계의 활동도 중요했다. (p. 131)

역사적 사건에서 종교인들이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 역할이 사회적 이익이냐 집단이기주의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지는데...

동학이 천도교가 민족종교가 한국에 뿌리내렸다면 이후의 역사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을 것 같은데...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는(여운형) 1947년 7월19일에 극우 청년들로부터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사주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p. 133)

정조가 자주 찾았던 효창원은 조선 왕실의 가족묘다. 주변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면서 한양도성과 가까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인을 위한 공원과 행사장을 만들었다. (p. 156) 해방후 일제가 물러났을 때, 이곳은 사실상 공터나 다름없었다. 해방 직후에는 국립묘지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을 모실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p. 156) 김구는 시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효창공원에 애국지사의 묘소를 만들고자 했다. (p. 157) 김구가 좀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효창공원은 순국선열의 묘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있는 김구 묘를 비롯한 순국선열의 묘를 이장시키려 했다. (...) 친일파가 득세했던 이승만 정권에게 순국선열의 묘가 서울 시내에 있다는 것이 눈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p. 164) 이승만 정권은 1959년부터 약8천평 대지 위에 2만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축구장을 짓기 시작했다. (p. 165) 이승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친일파 출신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이 친일 논란을 희석시키기 위해 강조한 것이 '반공'이데올로기다. (p. 166)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도 효창공원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효창공원이 홀대를 받고 훼손되는 사이, 국군묘지인 현충원은 날로 커졌다. (p. 166) 국가유공자 묘역에는 친일파들이 다수 묻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인 조경한은 '내가 죽으면 친일파가 묻혀 있는 현충원에 묻지 말고 동지들이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시정부 요인을 위한 별도의 묘역이 만들어진 것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다. (p. 167)

미국은 한반도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가 들어서기를 원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로 전환되는 것을 막았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등을 개인 정치가로 취급했다. 미국이 원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기독교 신자여야 하고 미국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에서 이런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p. 180)

이래서 대통령이 중요한 거다... 위정자의 역사관이 중요한 거다... 예나 지금이나 반공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치가는 친일파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무엇을 감추려고 다른 것을 그리 강조하겠는가... 성조기 흔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일장기 흔드는 거나 성조기 흔드는 거나 남의 나라 국기 흔드는 것은 나라의 주인을 국민이 아닌 외국으로 갈아치운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일본도 미국도 어차피 다 자기네들 잇속 차리려 한국에 뿌리내린 침탈자들이긴 매한기지인 것을... 에혀...

2022년, 정부는 광화문광장을 세종대로 서편으로 붙여서 세종문화회관 및 정부 청사와 연결시켰다. 광장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는데, 2009년에 광장을 만들 때부터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다. (p. 239)

2009년 광장을 만든 서울 시장이 앞서 말한 지금의 그 시장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세우려고 난리다. 2024년에 100미터에 달하는 초댛형 태극기 계양대를 세우겠다고 발표했을 때 반대 여론이 들끓자 한발 물러나긴 했는데 그럼에도 광화문 광장에 국가상징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p.240)이라던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아무래도 역사를 잘못배운것 같은데 말이다....

1506년 연산군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역사를 두려어하지 않는 자들만큼 못된 사람들도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큰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p. 246)

하물며 연산군도 역사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최근 역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너무 많이 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대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것은 더욱 암울한 기억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긴 했지만 어쩌면 어두운 시기라서 더욱 그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더 짙은 어둠 속에 파묻히지 않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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