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의 역사 -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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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매너와 에티켓을 발명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20세기 섹스 에티켓까지

품격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매너'의 모든 것

영화 <킹스맨>을 안본 사람도 아는 명대사, 영화를 본 사람은 더더욱 명료하게 기억하는 명대사, 바로 Manners, Maketh, Man.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영화에서 킬러를 교육하며 이런 대사를 하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모든 사람은 제 나름의 품격이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일견 통하는것 같기도 한 이 명대사가 '매너'라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했었고 매너란 무엇일까.. 궁금증을 남겼었는데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책이 나왔다. <매너의 역사>

동양의 예의범절 전통이 서양에서보다 훨씬 더 유구하고 정교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책은 서양, 특히 영국에 초점을 맞추어 매너의 역사를 고찰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공인 영국사에 한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부족한 역량 탓이다. 하지만 이유를 한 가지 더 찾자면 영국의 제국주의가 영국식 예의 규범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매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p. 7)

저자 서문 [책을 펴내며] 中

매너라고 하면 동양에 예의라는 것이 있듯 서양엔 매너라는 것이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예의범절과 매너라는 것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신사'라는 말 앞에 왠지 '영국'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듯 ('신사'라고 쓰고 '영국신사'라고 이해한달까) '매너'라는 말 앞에도 왠지 '영국'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영국사 전공자의 매너의 역사는 저자서문부터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두어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갑자기 예의, 무례, 배려, 불관용, 매너, 품격, 천박 같은 단어들이 엄청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p. 6)' 라는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중 하나였다는 문장을 읽으며 더욱 공감했다. 무례의 시대가 되어서야 매너에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싶어서... 혹은 사회의 무례를 더이상 참을 수 없어져서 매너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구나 싶어서...

학계에서 매너를 도외시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매너가 이른바 '역사 발전의 단계별 변화'와 완벽하게 조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법서가 다루어 온 중요한 규칙들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발맞추어 변화하기보다는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역사학은 일반적으로 지속보다는 변화에 주목하기 때문에 매너처럼 지속력을 보여주는 주제는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매너에 관한 통찰력 있는 논의가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에게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p. 15)

저자에 의하면 '매너의 역사'는 역사학 중에서 홀대받는 분야였다고 한다. 아니 좀 무시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역사연구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역사를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내가 역사를 읽으며 매번 느끼는 것은 인간의 역사는 늘 비슷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매너의 역사 경향이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동안 '매너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는지 몰라도 다행히 저자는 이 책을 체계적으로 쓴 것 같다. '매너에 관한 역사학의 성과는 여전히 미진하고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 책은 거칠게나마 고대 그리스·로마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긴 시간 전체를 아우르며 매너의 역사를 재구성한다.(p. 20)' 독자로서 참 감사할 따름이다.


서양역사에서 예절에 관한 담론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를 철학적·도덕적·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의 바른 행동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행위 지침서다. 전자는 예의범절을 독립적으로 고찰하기보다는 인간 혹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분석을 통해 존재의 당위성을 논하는 것이고, 후자는 온전히 사람의 외형적 행동거지에 집중하는 일종의 매뉴얼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후자인 행동 매뉴얼을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며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 결과 예절의 철학적·도덕적 가치를 파고든 연구에 비해 예법의 실체적인 행태를 연구한 사례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역사가들이 소홀하게 취급해 온 바로 그 행위 지침서를 주목하며, 그 장르야말로 진정한 예법서라고 생각한다. (p. 30)

저자의 이러한 접근이 이 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었다. 역사서가 너무 학문적으로만 서술되면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책은 구체적 행위지침들에 주목하면서 그 시대 그런 행동들을 했을 사람들이 연상되어 친근하게 읽혀졌다. 그리고 조금 스포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나 사고방식들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1부는 고대와 중세의 매너를 다룬다. 여기서 핵심은 '키케로'이다.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으로서의 매너에서 '계급성'을 부여한 매너를 최초로 언급하고 강조한 인물이 키케로였다. 그리스·로마사에서 그리스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회와 로마사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회는 그리스·로마라고 한묶음으로 묶기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또한번 느꼈다. 로마사를 계승하고 중요시하는 사회는 권위적이고 계급적이고 차별적이다라고나할까...

2부는 매너의 새로운 이상인 시빌리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매너를 가르쳐야 할 교육의 범주에 넣은 것은 유의미하지만 아직 프랑스 예법의 영향이 큰 매너였다.

3부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국식 예절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변화는 영국식 경제적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만큼 '젠틀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4부에서는 그동안의 조금은 느즛한 매너를 대체해 엄격한 에티켓이 탄생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본다. 산업화와 더불어 새로운 부르주아 집단이 성장하자 영국의 상류층은 신흥부자들이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인 '소사이어티'를 만들었다.

5부에서는 에티켓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 간 양상을 살펴본다. 다양한 에티켓들이 등장하는데 쇼핑에티켓까지 나타날 정도다.

6부에서는 20세기 에티켓의 특징을 살펴본다. 계급적 구분이 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사회적 구별 짓기의 단위가 계급에서 개인으로 전환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다양한 생활 에티켓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가장 현실적이면서 재미있게 읽혀질 최신 매너모음 부분이겠다.

매너라고 부르든 에티켓이라고 부르든 여하튼 서양식 예의범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행동지침들의 시작은 서양 역사의 시작인 고대그리스·로마에서부터 출발한다. 매너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동시적이랄까. 인간사회의 시작에 인간행동지침들이 필요했던건 당연한 것일수도 있지만, 고대그리스·로마 시대에서의 매너론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으로서의 철학적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토스의 저서에서 확인되는 바, 그중에서도 눈여겨보게되는 부분은 이때부터 '이후 매너의 역사를 관통해 허세는 아주 경계해야 할 악덕의 지표로 꼽히게 된다. (p. 42)'는 점이다. '내면과 외양의 일치는 19세기 전까지 매너의 역사에서 예법의 절대적인 대전제였다. (...) 외적 행동이 내면적 덕과 상응한다는 오랜 믿음은 결코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p. 64)'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 시대에는 예절이 계급을 구분하는 수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매너는 단지 덕을 갖춘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표지였다. 하지만 이후 서양의 역사에서 매너는 계급적 구별 짓기의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 시작은 키케로였다. (p. 59)

키케로는 매너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첫번째는 그가 '데코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데코룸은 (...) 이후 '매너'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p. 60)

예법서의 전통에서 인간이 생리현상을 은폐해야 하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인물이 키케로다. (p. 65)

키케로는 직업의 귀천을 논함으로써 이후 직업에 따른 차별이 생겨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p. 69)

키케로는 외국에서 물품을 수입해 대량으로 분배하는 도매상들에게는 찬사를 보내면서 소매업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이라며 천하게 여겨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사회기준으로 말하자면 재벌옹호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지배층들이 이 '매너'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있었겠는가?!

테오프라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매너를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키케로는 데코룸에 계급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사실 키케로는 누구라도 갖출 수 있는 미덕, 누구나 추구해야 할 행복을 위한 행동강령으로서의 매너가 아닌, 사회 엘리트가 갖춰야 할 자질로서의 매너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매너 담론에서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하며 이후 매너가 계급적인 구별 짓기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p. 68)

사실 '매너의 역사'는 '매너'라는 말 자체부터 문제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윤리로서 제시된 행동지침들이 누군가를 특징짓기 위한 '매너'가 되면서 '차별'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키케로 이후 매너의 역사가 아무리 다채롭고 시대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해도 결국은 그 매너를 행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차별적 기본전제를 알고 나면 왠지 씁쓸해진다. '매너가 사람들 만든다'는 명대사에 광분했던 우리는 결국 우월적 계급성을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보다는 '매너'라도 있는게 낫긴 하지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자. 좋은 매너를 갖추는 일은 곧 행복에 대한 추구이자 삶의 즐거움의 하나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따뜻함과 인정, 그리고 이해를 소중히 여긴다는 감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매너에는 자기에 대한 존중과 남에 대한 존중이 교차하고, 그 존중을 행동으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다. 따라서 좋은 매너는 당연히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더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평화로움을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훌륭한 매너를 보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 (p. 594)

저자의 '나가며' 글 中

어쩌면 우리는 고대시대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과들을 도출해낸 이후 계속 퇴행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구별짓고 차별짓기 위해 기준점들을 꼬고꼬아서 만들어온 것이 매너인것 같아서... 재미있게 읽은 이천년간 다채로운 매너의 변화사가 퇴행이라고 하면 좀 허무해질지도 모르지만 '행동이 사람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다시 핵심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도 좋겠지만 그렇지못하더라도 꼭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행동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사회를 만드니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ps. 역사적으로도 탄탄하고 서술내용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서 두꺼운 외형이 주는 부담감을 간단히 날려보내주는 재밌는 책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휘리릭 읽혀지고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책날개를 보니 저자의 책들이 재미난 주제들로 다양했다. 그중 <지도 만드는 사람>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에 저자의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꼭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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