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제목을 보고 의아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은 편집자이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나다 도요시는 왜 요즘 세대는 영화나 영상을 빨리 감기로 재생하면서 보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취재를 시작하여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출현이 시사하는 무서운 미래]라는 칼럼을 세상에 내놓았다.

 

저자는 출판사에서 DVD 관련 잡지 편집부에 몸담고 있던 시절, 매달 수많은 비디오 샘플을 봐야 했다. 2시간짜리 영화를 세 편이나 봐야 하는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이때 빨리 감기의 효과를 맛보았다. 대화가 없는 장면이나 풍경 묘사는 건너뛰면서 보았다. 빨기 감기로 한 번 시청했던 작품을 다시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느낌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영상 작품은 시정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따라 콘텐츠로 불리기도 하고,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청자는 영상 작품을 소비할 수도 있고 감상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배우를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그녀)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건너뛴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영상을 볼 땐 내 마음대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재미나 편안함을 추구한다.

 

처음으로 패스트무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 여성은 중학생인 아들이 몰아보기영상만 본다며 탄식했다. 아들은 패스트무비 사이트에서 작품을 찾고 거기서 알게 된 작품을 정규 배급 서비스로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본다. 그에게 마트의 시식 코너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본편이 길어서, 전체를 보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이 또한 하나의 장르로 즐긴다라고 했다.

 

예술 감상 감상 모드

오락 소비 정보 수집 모드

정보 수집 모드는 서점에 서서 책을 스르륵 넘겨보는 행위에 가깝다.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의 목차만 읽고 본문은 대충 넘겨보며 수십 권을 심사한 후 꼭 읽고 싶은 책만 산다. 그렇게 구입한 책은 건너뛰지 않고 천천히 읽은 뒤 책꽂이에 잘 정리해두고 때때로 다시 읽어본다.p58~59

 

빨리 감기에 적극적인 이들은 보고 싶은 작품알고 싶은 작품을 명확히 구분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대충만 알아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확연히 늘어나니까 가성비가 좋다고 한다. 다만 높은 가성비를 누릴 수 있는 건 그 콘텐츠가 화제에 오르는 동안만이다.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다. 작품이 유행할 때 봐두어야 비용 대비 효과가 크고 가성비가 좋다는 말이다.

 

밀레니얼 세대나 그 위 세대가 라이벌로 삼은 것은 교실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지만 Z세대에게는 SNS에서 유명한 또래들이 모두 라이벌이 된다. 빨리 감기의 가장 큰 효능은 효율이다. 2시간짜리 작품을 1시간 만에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뒤에는 시간 낭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영화 예고편은 가장 멋진 장면을 아낌없이 보여주어 관객을 이끌기도 하고 하이라이트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나 말을 찾고 그것만 강화하게 된다.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추천하는 작품이라면 쉽게 좋은 평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낳는다. , 다행이다. 보길 잘했다. 책에서 거듭 지적하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봐두면 안심할 수 있는심리 말이다.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가 의외로 많은 사람의 습관이 된 사실을 깨달은 것은 2020년 중반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가운데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수요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페이스북에서 각종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오던 중에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를 하며 본다라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의 반향은 상당했다.

 

중년 세대의 젊은이 비판이라며 야유하는 의견도 일부 있었지만 그런 시선은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우선 빨리 감기가 젊은 세대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습관이기는 하나 그들만의 습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대한 영상 작품을 모두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봐야 할 것은 넘쳐나는 콘텐츠를 빨리 감기로 보는 일은 20대 이하의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현상을 보통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오징어 게임>30분 만에 몰아보는 현상이 뉴스에 나오기도 한다. 이 책으로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처음 보는 책이다. 1511년에 출간된 [우신예찬]은 저자가 풍자와 해학을 담아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글이다. 책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준 역작이라고 하였다.

 

우신이란 어리석음의 신이라고 한다. [우신예찬]을 어떤 상황에서 무슨 목적으로 집필하게 되었는지 서문에 자세히 밝힌다.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여행을 하던 중 친구 토머스 모어의 별장에 잠시 머물게 되었고, 토머스 모어를 비롯해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지병인 신장병의 고통을 잊고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소품인 [우신예찬]을 일주일 만에 써내려갔다. 불과 몇 달만에 이 책이 7쇄까지 인쇄되었고, 그것도 여러 도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실상을 잘 보여준다.

 

우신은 라틴어로는 스툴티티아그리스어로는 모리아라고 한다. 우신은 자기만이 신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며 연설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얼굴과 표정만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미네르바 또는 지혜의 여신라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내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잘못 생각했음을 즉시 알아차린다.

 

현자들은 자기 자신을 예찬하는 것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오만 방자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자들의 말에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의 배은망덕함이랄까 아둔함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을 정도다. 나를 낳은 아버지는 부와 재물의 신 플루토스이다. 태가 태어난 곳은 씨를 뿌리지 않고 밭을 갈지 않아도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나는 행복의 섬이다.

 

우신은 최고의 신이고, 우신은 생명 탄생의 주역이다. 시인들이 신들이 변신이라는 방식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돕는 것처럼, 관에 들어가기 직전인 사람들을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유년기로 돌아가게 해준다. 이 시기를 2의 유년기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여자를 이성적인 동물로 분류해야 할지 말지 고민한 듯하다. 여자가 현저히 어리석은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우신인 나 자신도 여자이면서 여자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에 대해 여자들이 진정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들이 가장 원하는 일이 남자들을 최대한 기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여자들의 어리석음이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도 남편을 좋아하며 결혼 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다 우신 덕분이다. 요약해보면 어떤 사회나 인간관계도 우신 없이는 즐거울 수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인생이란 것도 일종의 연극이 아닐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 각자 맡은 역할을 하다가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퇴장하는 연극이다. 인생이 얼마나 재앙으로 가득한지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무슨 악행을 저질렀기에 재앙들을 겪는 것인지, 어느 신을 노엽게 해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화를 당하는 것일까.

 

다른 신들은 까탈스럽게 굴고 화를 내기 때문에, 그런 신들을 섬기느니 아예 무시해버리는 편이 더 안전하고 잘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떠받들고, 심지어 성직자들까지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고, 온 세상이 나의 신전이며,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신전인데, 신전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질문을 던진다. 선생, 시인, 수사학자, 저술가, 법률가와 변증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 군주, 궁정 귀족, 주교, 추기경, 교황, 사제 들을 차례대로 불러내어 그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다. 자기들끼리 시나 찬가를 주고받으며 서로 칭송하는 자들이 가장 웃긴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무식한 자가 무식한 자를 칭송하는 꼴이다.

 

어리석어야 출세한다. 우신을 칭송한 성경의 예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지혜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되었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광기와 어리석음에 있다. 일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가장 숭배하고 물질적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물질적인 것에 가까운 것일수록 무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한다. 저자는 책을 출간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언제나 나의 열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자 함을 강조하였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여 인간의 모든 행복이 어리석음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 상상력 공장 - 우주, 그리고 생명과 문명의 미래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주, 상상력 공장]은 우주의 탄생, 다중우주, 시공관과 물질 외계인과 UFO, 지구와 우주의 문명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138억 년 우주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권재술 교수의 전작 [우주를 만지다]에서 우주의 역사를 풀어냈다면, [우주, 상상력 공장]은 우주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를 풀어냈다. 과학 이론부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비밀을 다채롭게 담아낸 특별한 과학 에세이다.

 

138억 년을 돌리면 지금의 우주가 나타난다. 신선한 음식물도 시간이 지나면 썩게 되는데 이것은 분자들이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하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이다.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 엄청나게 일어날 것이다. 가장 큰 모순은 과거로 돌아가서 이미 일어난 사건을 못 일어나게 하거나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 물체들의 틈 사이에는 빠짐없이 공간이 존재한다. 물체가 있건 없건 공간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누구도 시간을 멈출 수 없듯이 공간을 쫓아낼 수도 없다. 말장난 같지만, 공간이 없는 공간은 없다고 말한다.

 

별과 태양은 빛이 나고 왜 저렇게 밝을까 과학자들은 별이 밝은 빛을 내는 것은 온도가 높기 때문이고, 높은 온도를 만들어내는 열은 중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태양이 저렇게 오래 밝은 것은 중력 에너지뿐만 아니라 핵융합으로 발생하는 에너지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중력적인 수축으로 온도가 올라가서 약 1,000만 도가 넘으면 수소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다.

 

모든 존재는 우주를 갈망한다. 우리가 일상을 보고 만지는 하찮은 물건도 138억 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놀라운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우주적 존재이다. 과학은 몽상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발견한 것으로도 몽상의 세계를 넘어선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우주의 놀라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우주란 우와 주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주라는 말은 철학적으로는 물론 과학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용어다.

 

옛날 중국 기나라의 우라는 사람이 별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했다고 해서 기우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기우는 아인슈타인을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우주 공간이 무한히 넓고, 무한한 공간에 별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면 별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 까닭은 없다. 기우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정적인 우주를 믿었던 아인슈타인은 절대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우주상수라는 항을 하나 추가했는데 그것이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인간의 두뇌로 이해할 수 없는 원자 세계나 우주는 논리와 수학의 도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자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계산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진화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존재이다. 가족, 친척, 친구, 동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고, 다른 섬은 있는지, 육지는 얼마큼 떨어져 있는지, 근처에 사람이 사는 섬은 없는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뇌에 있는 해마라는 조그만 살점이 조종하는 것이라니 한편으로 얼마나 놀랍고, 한편으로 얼마나 허무한가? 기억이, 인간의 정신이, 그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이 저 물렁물렁한 한 줌밖에 안 되는 기름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한 분야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례가 있다. 이런 증세를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많이 나타나고, 특별한 기억력이나 수학 분야에서 이런 증후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선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고로 뇌를 다친 후에 나타나기도 한다.

 

인류는 뛰어난 두뇌와 집단을 무기 삼아 자기의 육체적 약점을 딛고 일어섰다. 인간은 질병에 맞서야 한다. 스페인 독감,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 사스 최근에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고통을 겪는 중이다. 역병 외에도 극복하지 못한 질병이 많지만 머지않아 암도 퇴치될 것이다. 가장 어려운 질병인 노화도 우리 인류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는 하다. 저자는 우주의 생명, 정신, 문명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본 적이 없어 만들면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과학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우주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를 풀어낸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 -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당대엔 괴짜혹은 별종으로 불렸지만, 지금 돌아봤을 때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시간을 앞서 살아간 전복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스물여섯 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참기 힘든 일을 잘 견뎌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책의 구성은 3부로 되어 있다. 1부 스스로 빛난 찬란한 별들에서는 최승희, 김향안, 천경자, 기형도, 김추자, 한대수, 박신자, 홍청자, 김창완, 윤복희. 2부 약자들의 편에 선 친구들에서는 김동원, 조영래, 최동원, 정종명, 함세웅, 박두성, 현봉학, 전태일. 3부 시련을 견대낸 존재들에서는 진창현, 김벌래, 김중업, 전형필, 김윤심, 김일, 이창호, 성철 등이 실렸다.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조선의 뛰어넘어 세계 최고의 무용수가 된 최승희는 완벽한 춤을 위해선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티스트였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에고이스트이기도 했다. 김향안은 혼인을 반대한 부모와 연을 끊고자 개명을 하였고 화가인 남편 김환기를 유럽과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내조를 하였다.

 

수십 마리의 뱀이 엉켜 있는 모습을 그린 <생태>를 발표한 뒤 화단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천경자는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 것만 같은 고약한 예술가로 불린다. 요절한 젊은 시인의 짧은 생애와 불안한 마음이 기록된 시집 한 권이 1990년대 독자들로 하여금 청춘의 몸살을 앓게 했던 기형도 시인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은 음악도 춤도 아닌 이었다. 딸의 유학으로 독일에서 생활하는 김추자는 딸과 대화하고 마주 보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엄마는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가수다. 조선 최초 걸그룹이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난영을 제외하고 저고리 시스터즈 출신 멤버들이 모두 단명하거나 말년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미니스커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윤복희는 한류의 원조로 활동했다. <여러분>은 타인에게 위로만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노래가 아니라 내가 먼저 너의 벗과 등불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노래기이도 하다.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를 인권 변호사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건 그가 죽은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되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20세기 들어서 교육의 기회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다. 정종명은 식민지 조선 여자고학생들의 큰언니로서 평생을 가정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노력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인 박두성은 일제강점기에 점자를 만들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던 박두성은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흥남부두에서 98천명을 피난시킨 현봉학이 있다. 사람들은 흥남부두 피란민 철수 작전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전쟁 통에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적이라는 호명이 전혀 아깝지 않다.

 

본명 김평호였지만 극단에서 항상 눈에 띈다고 벌레라고 불린다. 우체국을 그만두고 행동무대를 창단하였고 배우로서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음향 일을 담당했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들어봤던 그 많은 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면 아마 김벌래의 작품일 것이다. 물려받은 전 재산을 일평생 문화재를 사 모으고 보호하는 데 사용했던 전형필 덕분에 수많은 문화재가 우리 곁에 남았고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으로 더욱 돋보인다.

 

누구를 막론하고 3천 배를 올리게 한 성철을 두고, 권위주위적이며 고지식하다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성철에게서 사람들이 절에 와서 부처는 안찾고 나만 찾더라법정마저도 성철의 3천 배 요구의 숨은 뜻을 알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유명한 인물들의 위인전이라기보다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의 삶을 기록한 수기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에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은 태양처럼 강렬하고 뜨겁진 않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로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띠며 밝게 빛나고 있다. 역사란 나를 포함한 우리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트 러닝]에는 여덟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무언가를 상실한다. 불안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결핍을 말한다. 첫장 부터 읽어나가기에 애매하면서 독특하지만 매력이 있다.

 

표제작이기도 하고 미발표작인 <나이트 러닝>은 드리 아빠와 나는 21조로 경비일을 하고 있는데 숙모 잔느에게 빌붙지 않으려면 짤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합격자 발표 기사에 나온 사진을 옛날 사진으로 교체해달라고 하는 여자는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잔느와 결혼할 쌍둥이 삼촌 드레가 결혼식날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 잔느는 매일 자신의 팔을 자른다. 다음 날이면 다시 돋아나서 괜찮다고 했다. 매일 팔을 자르다가 많이 쌓여서 언덕에 올라 조금씩 잘 태웠는데 오늘은 불이 번졌다. 잔느는 드레가 보고 싶어서 팔을 자른다고 하였고, 그리운 사람이 자신의 변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예전 사진을 들고 올라온 여자의 마음도 알 것 같다.

 

<슈슈>에서는 나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타국에 있는 이복 언니를 찾아나선다. 언제나 친절하게 잘 대해준 언니였는데 나를 좋아한 적도 별로 없지만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곯아떨어진 언니는 폭풍 같은 숨소리를 냈다. 슈슈, 푸푸, 퓨퓨 내가 찾던 숨소리는 이것이었을까. <얼룩, 주머니, 수염>에서 공항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빈사모(빈티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난 신경증이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한다. 그녀가 선물한 빈티지 밥솥이 고장나 헤어지게 된다. 그녀의 선물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불시에 들이닥치는 건 그녀의 취미생활이니 주의해야 했다.

 

<우리가 소멸하는 법>의 유구와 나는 왕릉을 걷고 있다. 소도시에서 만난 교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함부로 잔다는 것과 사랑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 유구가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호의 없는 몸과 유구의 거짓말과 나의 딸꾹질이 한데 모여서 옥수수 스프처럼 끓는 한낮의 여름. 매미 소리는 여전히 울창했고 나는 계속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모두에게 다른 중력>에 나는 사진을 전공했지만 종양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사촌 언니가 사는 맨해튼으로 가게 된다. 어느 날 사촌 언니가 사라지고 사촌 언니의 친구 도움으로 취업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의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의 학원 강사 해원은 동업자가 애들 명단을 빼서 다른 교습소를 차렸다. 제자의 집에 얹혀 살면서 제자가 잃어버린 강아지 리치를 찾아달라고 한다. 리치도 할머니가 되었고 오십이 된 해원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무계획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젊었다. <곰 같은 뱀 같은>은 엄마가 죽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같은 요양원 간병인 온유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왔다. 엄마는 어릴 적 나에게 이런 미련 곰탱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곰탱이. 곰에 가까운가. 나는 배우다. 감독들의 독립 영화에만 개스팅이 됐다.

 

나는 두 묶음 사람이고 어디선가 연락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혼자 해보기로 했다.(중략)그리고 어디선가 연락이 오면 좋겠다. 내가 에덴에 있는 동안.p271

 

<에덴>에서 나는 베를린 유학 중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귀국을 한다. 베를린에서 알고 지냈던 제리는 하룻밤을 지낸 연인 피나를 찾아나선다. 피나는 캠핑카에서 지냈는데 제리는 낮에 캠핑카를 찾으러 다니고 밤에는 일을 한다. 피니는 몇 묶음 사람일까. 제리는 두 묶음, 피니는 한 묶음 사람이라면? 둘은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녀를 본 적이 없지만 피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버섯이라고 표현했다. 나의 할머니는 몇 묶음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뒤늦게나마 친구들처럼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말없이 집을 저당 잡힌 돈을 내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이트 러닝]은 소설 속 이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중력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는 우다영 소설가의 말처럼 삶에 대한 불안 속에 살고 우리는 같은 두 묶음 사람들로 혼자서 지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