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살인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형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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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수필가이자 번역가, 평론가의 보리스 야쿠닌의 '에라스트 판도린'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추리소설로서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산뜻한 그러면서 현대적인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까 홍보 문구대로 '애거서 크리스티형 추리소설'의 현대판입니다. 물론 소설 속 시대적 배경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1878년의 초대형 유람선 '리바이어던' 호가 배경입니다), 작품 속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 현대적이네요. 무척 깔끔하게 읽힙니다.

1878년 3월 15일 파리의 그레넬 가에 위치한 리틀비 경의 저택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1층에는 커다란 식탁 둘레에 9명의 하녀와 경호원들이 얌전히 죽어 있고, 2층에는 저택의 주인인 리틀비 경은 무거운 물체로 정수리를 강하게 맞은 채 죽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2층에서 범인의 물건으로 보이는 증거를 발견하고, 프랑스의 고슈 경감은 리바이어던 호에 탑승하게 됩니다. 리바이어던 호의 '윈저' 홀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10명의 승객을 모와 놓고 열심히 관찰하고 조사를 합니다. 과연 이 10명의 승객 중에 범인은 있을까요? 그리고 프랑스의 고슈 경감은 범인은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요? 범행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이곳에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범인을 추적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런 미스터리한 사건 이외에도 재미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범인의 정체와 반전 등은 이런 요소들에 비해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우선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에라스트 판도린'이라는 러시아의 외교관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대단히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심지어 말을 더듬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인공임에도 존재감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물론 사건은 그가 해결을 하지만요. 가끔은 답답하기도 한데, 암튼 묘한 매력이 있는 주인공이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이 소설은 서술 대상이나 서술 시점이 일정치가 않고 계속 바뀝니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시점도 그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글을 읽는 내내 누구의 말도 믿을 수는 없지만, 믿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추리를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믿고 읽어야 합니다. 일본 군인의 말은 거짓일까? 진실일까? 고고학 교수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처음에는 모두 평범한 승객이었으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이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들이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거든요. 물론 그런 비밀들은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을 해야겠죠. 마지막으로 다양한 국적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문화적 관습의 차이에서 오는 유머와 긴장감도 무척 좋았습니다.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의 시선,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잘못된 추리, 영국인과 프랑스인 사이의 묘한 갈등, 인종에 대한 편견 암튼 이런 요소들이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가의 장난스러운 유머가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겉으로는 귀족처럼 행사하지만 껍데기를 벗기면 정말 우스꽝스럽게 변하는데서 오는 유머가 무척 즐겁습니다. 암튼 부담 없이 가볍게 읽기에 적당한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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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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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족의 냄새. 비릿하고 눅눅한"

오랜만에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면서 아름답고 그러나 불편한 소설을 접했네요. 참으로 불편하지만 아름답습니다. 퇴폐와 타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예술적(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으로 표현한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개인적으로 한강의 <몽고반점>(비록 단편소설이기는 하지만)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 재미있고 흥미롭지 않을까 싶네요. 그만큼 두 작품은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면서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깁니다.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욱더 절망스러운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두 캐릭터(40대 초반의 양아버지 구라시노 준고와 20대 후반의 딸 하나)의 성적 일탈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미친년 놈들이 정말로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딸과 아버지의 격정적이며 위험한 러브스토리, 도덕적으로 몹시 위험합니다. 그렇죠. 정말 위험하죠.

작가의 선택은 영리합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구조를 취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건에 접근합니다. '누가?', '어떻게?'가 아닌 '왜?'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지라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물씬 풍깁니다. 왜 양아버지와 딸은 서로 공범 관계에서 이런 위험한 사랑을 하는 것일까? 이들 사이의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런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들의 위험한 사랑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불편함은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씁쓸한 행복, 과거는 절망적인 행복(그들의 만남부터는 절대 불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펼쳐도 이런 아슬아슬한 행복이 보이는 것 같아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5x2>, 가스파르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 등의 작품과 비교해서 읽어도 역시나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오프닝의 불행이 결말의 행복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은 묘한 고통을 주는 것 같아요. 엔딩의 행복이 결코 행복이 아니라는 것. 물론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 구조는 아닙니다. 초반부터 끝까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께름칙하게 남아있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네요. 중년 남성의 어린 미소녀 길들이는 장면이 몹시 불편합니다. 그들이 초반에 살던 동네 어르신이 하나에게 하는 말 "너는 아직 어리다." 어린 소녀는 스스로 그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아직 미숙한 어린 소녀를 중년 남성이 성적으로 길들이는 장면은 역시나 쉽게 공감할 수가 없어요. 그에게 고통스런 과거가 있다고 해도 말이죠. 그런데 절망의 구렁텅이를 향해 살아도 죽은 존재처럼 한없이 빠져드는 그의 모습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족으로 사쿠라바 가즈키의 필력 괜찮네요. 중간 중간 가족에 대한 그(또는 그녀)의 생각에 대한 묘사는 정말 좋습니다. 물론 번역본이라 원본의 매력을 100% 느낄 수는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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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바위 - 영험한 오하쓰의 사건기록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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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에서의 초능력을 가진 한 소년처럼 <흔들리는 바위>에서는 제3의 눈을 가진 오하쓰라는 소녀가 등장을 하네요. <용은 잠들다>의 주인공 소년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것과는 다르게 오하쓰는 죽을 위험에 처한(삶을 포기한) 사람의 모습을 제3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비토쓰키(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에 쓰인 사령의 본 모습도 볼 수 있고요. 암튼 그러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흔들리는 바위>는 믿기 힘든 캐릭터가 주인공인 시대미스터리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해결도 논리적인 추리와는 거리가 멀고, 오하쓰라는 열여섯 살 소녀의 그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물론 사건은 논리적으로 해결을 합니다. 단, 그 방법의 하나가 오하쓰의 영험한 능력이라는 것이 조금 애매합니다.

기름통에서 발견된 어린 여자 아이의 시체, 물가에서 발견된 어린 남자 아이 시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사령(스포일러는 아닙니다. 초반부터 범인은 밝힙니다). 그리고 움직이는(울고 있는) 바위, 백 년 전의 겐로쿠 아코 사건. 사령이 부르짖는 '리에'라는 이름. 암튼 사건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하기가 힘듭니다. 백 년 전의 겐로쿠 아코 사건과 지금의 아동 연쇄살인사건을 연결 짓는 고리는? 암튼 그 연결 고리는 찾는 것이 오하쓰와 우쿄노스케(지금에야 이름이 등장하네요. 무가 집안의 적자로 태어났으나 산학에 뜻을 두고 있는 조금 어설픈 청년입니다. 오하쓰와 함께 사건을 해결합니다)의 임무인데, 사건 해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이하면서 슬픈 사연들이 이번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네요.

탐정 콤비 소설입니다. 미야베 미유키 소설에는 은근히 탐정(물론 탐정이라는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콤비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캐릭터와 캐릭터간의 관계에 무척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작품의 재미와는 상관없이 캐릭터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오하쓰라는 소녀 캐릭터가 무척 기억에 남더군요(죄송하게도 우쿄노스케라는 청년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를 않네요). 오하쓰의 능력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저주일까요? 역시나 이 소설에서도 노인(행정 부교 네기시 야스모리)의 도움으로 오하쓰는 자신의 그런 능력에 고마워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갑니다. 노인과 아이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애정과 관심은 한결 같은 것 같아요.

아동 연쇄살인사건 이면에는 '겐로쿠 아코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겐로쿠 아코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현재까지도 <가나데혼 주신구라>가 인기가 있을 정도라고 하네요. 암튼 이 겐로쿠 아코 사건은 결과는 있으나 동기(이유)가 꽤나 불분명한 사건입니다. 아코 번주 아사노가 기라를 벤 이유가 확실하지가 않거든요. 그렇다면 아코 번의 마흔일곱 명의 무사들의 기라에 대한 복수와 그 이후의 할복은 역사 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건의 진실. 충신이라는 이름하에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로 만들어지고 있는 겐로쿠 아코 사건. 그 사건의 이면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마흔일곱 명의 무사들의 고뇌와 번민이 있지 않았을까요? 백년이 지나 사령이 되어 떠도는 나이토 야스노스케처럼 말이죠. 역사의 진실, 그리고 재해석, 그 속에 숨어 있는 죽은 자들의 고뇌와 번민, 이러한 것들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미스터리의 매력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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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파워 - 나와 세상을 구하는 경제학의 힘
마크 스쿠젠 지음, 안진환 옮김, 김인철 / 크레듀(credu)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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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파워 - 나와 세상을 구하는 경제학의 힘>. 재테크 도서가 아닌 일반 경제학(경제학자와 경제이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교과서에서 배우는 구닥다리 경제학자와 이론은 아닙니다) 도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읽네요.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유용합니다. 그리고 배우는 점도 무척 많습니다. 여러모로 무척 만족스러운 경제학 도서였습니다.

보통 경제학이라고 하면, (책의 내용을 빌리면) '음울한 학문이며 실물경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학문으로 생각을 하죠. 현실 경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상아탑에 갇혀 입만 열심히 떠드는 그런 학문. 경제학이 서민들의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구제해 주었는가? 경제학이 생활의 윤택함과 재산 증식에 도움을 주었는가? 대답은 'NO'죠. 물론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반 개인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암튼 이런 일반인들의 경제학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를 이 책은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에 소개된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현실에 꼭 들어 는다는 보장도 없고요(물론 관찰, 실험, 분석 등의 방법으로 이미 증명되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니) 경제학 이론을 가지고 '맞다, 틀리다'라고 할 수 없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케인즈의 이론은 이제는 낡은 이론이더군요(그 당시에는 모두가 따르던 이론이었음에도). 그리고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이 틀리고, 200년 전 마르퀴 드 콩도르세(프랑스의 수학자)의 "미래 생각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글이 맞는다고 합니다(예를 들면, 의학적인 발전, 평균수명의 극적인 증가, 질병의 치료. 근로일의 축소 등등 요즘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암튼 그 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학이 얼마나 쓸모없는 학문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네요. 사실 경제학은 어렵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수학처럼 '정답'이 없는 학문이잖아요. 예측 불가능한 요소도 많고요.


마크 스쿠젠(저자, 워싱턴대학 경제학박사)은 이 책에서 세상을 바꾸는 경제학의 7가지 핵심 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책무성과 사용자 지불의 원칙, 절약과 비용편익 분석, 저축과 투자, 인센티브 유인의 원칙 등등.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 7가지 원칙입니다. 다 설명하기에는 힘들고(이해는 하나 설명은 조금 힘들어요),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한 책무성과 사용자 지불의 원칙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감상아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설명입니다). 다른 원칙들은 책을 통해서 읽으세요.

책무성과 사용자 지불의 원칙. 퇴직연금의 대명사 401(k) 플랜에 대한 내용이 주인데, 한마디로 국민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연금에 대한 이야기가 많잖아요. "국민연금 타 먹을 수는 있는 거야?", "이거 괜히 쌩 돈 틀어박는 거 아냐?", "정부의 정책을 믿을 수 있어야지." 암튼 이런 이야기들 심심찮게 들을 수 있죠. 물론 저 역시 연금을 내는 사람으로 불안합니다. 401(k) 플랜은 민간이 경쟁적으로 운영하는 연금제도입니다. 개인이 받는 혜택을 개인의 기여금 납부액과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기금의 투자 관리를 근로자 스스로가 하는 겁니다. 연금 못 타먹을까 걱정할 일은 없겠죠. 암튼 지금 우리나라의 연금제도는 확실히 문제가 많죠. 주식시장에 연기금 부을 생각만 하지 말고, 이런 슈퍼이코노미스트들의 새로운 경제이론을 시장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 좋겠네요. 덧붙여 의료보험 문제의 해결책 '건강저축계좌(HSA)'도 무척 흥미롭더군요.

사실 경제학자들의 이론이나 용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신경제학, 혼합경제, 미시경제, CPI, GO, 행동경제학, 래퍼곡선, 공공재정학, 공공선택이론, 공급중시 경제학 등등 이런 용어들을 한번 쓱 읽고 이해할 수는 없죠. 사실 정확한 뜻도 잘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이 어렵지는 않거든요. 암튼 <이코노파워> 경제에 무지한 일반인들에게 있어 (요즘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재테크 서적들에 비해) 매우 유용한 책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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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골짜기의 5월 미도리의 책장 4
후나도 요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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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현대사(정확하게는 1986년 필리핀 2월 혁명 이후)를 13세 소년 도시오(일본인 아버지와 에이즈로 죽은 필리핀 어머니(매춘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로 필리핀에서는 '자피노'로 불립니다. 소설 외적으로는 일본인의 시각)의 시점으로 바라본 무척 독특하고 이상야릇한 모험소설이자 성장소설, 역사소설입니다. 1998년 5월부터 2000년 5월까지(각 해의 5월의 사건만 다루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세부섬의 가르소본가 지구를 중심으로 소년 도시오과 어른들의 멸시와 곱지 않은 시선, 조롱, 그리고 무능하고 비열하며 악랄한 정부(특히 경찰, 국가경찰군이나 국가통합결찰 모두 권력에만 눈이 멀었지 치안이나 국민의 안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문화가 남아있는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진통이지 않을까 싶네요.

세부섬의 가르소본가 지구는 무척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메르난가산의 신인민군 게릴라는 정부를 상대로 투쟁은 하지 않은 채 동네 주민들에게 ‘혁명세’라는 이름으로 돈을 갈취합니다. 그리고 무능하고 부패한 경찰들은 푼돈을 받고 법을 어깁니다. 지구 대표 선거는 돈으로 치러지고, 주민들은 그런 돈에 매수되어 자신의 신념과 긍지를 팔아버립니다. 어른들은 자피노(혼혈인)이라는 이유로 도시오를 때리고 겁을 주며 놀립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평온한 일상, 평온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자세하게 들어보면 썩을 때로 썩어버린 거죠. 마을도 사람도 모두.

암튼 이 소설은 그런 시대와 정부와 어른들에 맞서 싸우는 한 소년의 처절한 투쟁기입니다(물론 그의 뒤에는 무지개 골짜기에서 홀로 싸우는 게릴라 호세 만가하스, 전 항일인민군 병사였던 할아버지, 그리고 마을에서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라몬과 메그 남매가 있습니다). 13세 소년으로서는 겪어서는 안 되는 그런 사건들에 휘말려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몹시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3세 소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라 큰 부담감은 없습니다. 이야기의 밑그림은 무척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사실 정치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소설도 아니고요. 물론 그러한 의미도 함께 이해하면 더욱 좋지만, 그냥 13세 소년 도시오가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물론 마음 아프기는 하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인 것 그 이상의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쪽이 수놈이고 어느 쪽이 암놈인지 모르지만 호세는 한 마리는 아사무, 또 한 마리는 다간이라고 불렀다. 타갈로그어로 아사무는 희망, 다간은 긍지를 의미한다."

후나도 요이치의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은 희망과 긍지를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희망과 긍지를 잃는 순간, 살아 있음에도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좀비)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무지개 골짜기에서 홀로 싸우는 게릴라 호세 만가하스. 사람들은 그를 미련하고 멍청하다며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반면 부정부패와 돈으로 얼룩진 지구 대표 차페스 앞에서는 꼬리를 흔들면서 아부를 하고요. 희망과 긍지를 잃어버린 인간은 돈과 권력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약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한 인간들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희망과 긍지를 잃어버린 인간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는 것. 특히나 국가의 미래는. 그들은 결코 무지개 골짜기에 뜨는 동그란 무지개를 볼 수 없을거에요. 아름다운 동그란 무지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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