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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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수의 새로운 이야기는 근대의 이야기 이다. 좀 이야기하기 껄끄럽고 속이 터지는 미어짐이 있더라도 역사의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후손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예상대로 이덕일의 책은 날카로운 비판과 역사와 문화가 가져다 준 우리 현재의 모습을 비판한다. 일제강점기의 그 아픈 모습이 아니 그 제도가 어쩌면 지금 우리 몸속에 아무 거부감 없이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 다는 생각에 역사의 갑갑함과 분노 보다는 더 몸서리 쳐지는 지금의 우리 제도와 관습을 잘 들여다보고 새롭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큰 자본이 없는 사람은 학교를 설립할 수 없게 만든 것인데, 현행 대한민국 학교 설립 요건도 이와 비슷해 그 잘못된 뿌리가 사립학교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95쪽)

 

갑자기 일제강점기의 교육제도에 대한 부분이 생각나는 것은 지금도 교육문제로 시끄러운 아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모습에서 일본이 심어놓은 제도가 아직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한 부분을 저자의 말에서 인용하여 책의 감상을 시작하려 한다.

 

시작은 고종의 정치와 외교 그리고 신하들의 이익을 다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리고 이덕일의 전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노론에 대한 비 판적 언급과 세도가의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새롭게 받아들여진 부분은 다름이 아니라 고종의 행보였다. 이중적 정치 행보를 보이면서 당파 아니 신하들의 세력에 이끌려온 군주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면서 겉으로는 신하들의 뜻을 따르는 듯하며 안으로는 이들과 다른 의견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동학을 징벌하라 명하고 이들 보고 봉기하라 명하는 이중적 행보에 대한 고민이다. 누가 군주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자국의 신하들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 고종의 행보 속에서 힘없는 약소국이 외세에 의존해 생존하려는 어리석은 판단에 나라의 모양과 꼴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나라가 넘어가고 이들의 손에는 은사금이 주어진다. 물론 친일 세력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이 일을 우리나라가 근대화로 갈 수 있었던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관점 즉 역사라는 현실 앞에서 사람이 어떤 이익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저 정의감 높게 나라의 위상을 생각하며 선비의 정신으로 자결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서로 앞 다투어 나라를 넘긴 사람들의 이름도 생각해 본다. 지금 누가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이렇게 시작되는 독립운동과 탄압 그리고 만주에서의 무력 봉기 그리고 많은 희생들이 보인다. 임시정부의 출범 등 우리가 노력한 모습 하지만 결국 임시정부도 무장 세력도 결국은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외세에 나라를 파는 일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뭉쳐서 팔았지만 되 찾는 일에는 힘겹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였지만 하나가 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는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는 만들어 지고 현대를 만나고 있다.

 

좀 갑갑하고 힘들게 읽혀지는 책이다. 고종의 무능함 일본의 무력 통치 그 일제 강점기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 그리고 그 것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 지금도 아무의미 없이 사용하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들을 생각하며 역사의 흐름을 생각하기 보다는 이상한 감정 즉 이성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 일수록 더 이성적이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도 우리는 일본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열세에 있다. 한 번의 아픈 추억이 아닐 것이다. 임진년 그 전쟁의 기억부터 끈임 없이 지켜온 세월이다. 더 분발할 힘은 하나라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부디 자신의 부귀영화에 나라를 팔아먹는 그런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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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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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작가로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이전의 몽환적 그리고 주술적 느낌의 작품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특히 다잉 아이의 마지막 강렬함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번 작품이 또 어떤 충격적인 결말을 던져 줄지 하는 기대감과 그의 실마리를 푸는 단초를 어디에 숨겨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그런 강렬함 보다는 평범함 그리고 평범함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살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어서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렬함 보다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나 한다.

 

니혼바시의 닌교초 거리에서 벌어진 40대 이혼 여성 미쓰이 미네코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가가 형사는 닌교초 거리의 상점을 하나씩 돌아보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사실 사건의 실마리라기보다는 닌교초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서로 으르렁 거리는 고부 관계이면서도 속마음은 서로에게 다가가기 힘들었음을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 터 놓고 지내고 싶은 마음을 담은 이야기부터, 골동품 시계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센베이 과자점, 민속공예점을 운영하는 가족의 이야기 등등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전제를 깔고 본다면 모든 사람들을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담게 만든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생활이 정말 일상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의도였을지 모른 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각기중 시계의 구조는 스승님네 가족과도 같다.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188쪽)

 

소설의 구조 역시 비슷하였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오가는 사이에 그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처럼 그 내부는 같은 고리로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닌교초 거리의 사람들이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가가 형사가 파해 친 이들의 일상은 방향만 다르지 그들의 생할은 같은 삶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구나 하나쯤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또 하나를 말미에 언급하는 그 것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죽이는 몹쓸 짓을 한 이상 범인을 잡는 건 당연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또 어디선가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죠. (426쪽)

 

추리소설 그리고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의 작품만 접하다 보니 이제는 그가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사는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질 범죄의 뒤 배경과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범죄의 현황과 범인의 행적은 잘 보도가 되고 있지만 구조적 즉 사회 구조적으로 그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을 하고 해결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좀 필요할 것 같다. 개인적인 부족함이나 이상으로 분류하여 처리하여 버리기엔 희생자의 아픔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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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발랑기 - 이대로 서른이 되어도 괜찮을까?
이주윤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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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물 공원에 놀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으로 보이는 두 명, 부부로 보이는 남과 여 그리고 이 부부의 아이 둘 대략 4살, 2살 정도로 추정이 됨. 날도 좋았고 더워서 그런지 놀이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이 많아서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였고 바글바글한 느낌이 멍한 상태에서 우연이 미혼 여성으로 보이는 두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크게 이야기 해서

여성1 : “오늘이 무슨 어린이날이야, 왠 얘들이 이렇게 많아, 얘들 때문에 놀지도 못하고 애들 따라 다니느라 부모들은 놀지도 못하고 우는 애들에 소리 지르는 애들에 저런 애들을 어떻게 키우냐? 내가 이래서 결혼을 못하겠다.”

여성2 : “ 그래 OO이 봐라 얘 보느라고 우리랑 이야기도 못하고 애 따라 다니느라 밥도 못 먹고 고생은 고생이다.”

여성1 : “얘들도 고생인데 뭐 하러 데리고 다니는지 몰라”

나 : “.......................”

부부 : “........................”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리고 그 부부도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난 잘못 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이 또래의 여성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책은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놀이에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젊은 여성의 일상과 생각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접하기 힘든 일상이니 말이다.

 

경쾌한 이야기가 될 줄 알았다. 많은 기대는 없었지만 밝게 웃고 싶기도 하였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은 좀 갑갑함과 철없음 그리고 멋대로의 인생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나이가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좀 가벼운 느낌, 어쩌면 백마를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백마를 탄 왕자님이 와서 하는 말이 공주님 거처를 물어 보며 하녀 취급을 받은 사람의 푸념 같은 느낌의 글. 그 속에 간간히 담겨 있는 자신에 대한 약간의 자신감과 혹은 좌절 같은 것이 담겨있는 글이라고 할 것 같다. 생각보다 대책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의젓한 것 같기도 하다가, 남자를 볼 때는 그 나이에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글이었다. 자꾸 책을 읽으면서 엘리베이터의 두 여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건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가치와 사고가 우리 사회에 공존하는 것을 가끔은 잊고 산다는 것 같다. 내 가치와 사고의 자를 들이대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내가 맞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기에 자유로운 젊음을 때로는 많이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녀는 바빠서 블로그를 닫은 것이 아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시시콜콜 끼적이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유치하게 느껴진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과 자신의 미성숙함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110쪽)

 

아마도 꾸밈없이 블로깅을 하면서 그리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살았을 것 같은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맞춰 나가기도 한다. 남자를 보는 눈이야 개인적인 성향이니 내가 이러쿵 저러쿵 할 말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조금 더 산 사람의 마음으로 본다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것을 불안해하면서도 즐길 줄 안다는 것이 어쩌면 부러울지 모른다. 그 속에서 다시 삶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멋진 삶인 것이니 말이다. 다만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남자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없는 것 같다. 자기 기준에 모두 백마 탄 왕자님이라 믿어주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남자만 있을 뿐이다. 그 허물이 벗겨지는 날 진정으로 둘이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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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 - 과거를 읽고 현재를 보고 미래를 그린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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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을까? 마지막으로 읽은 책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분이 이루지 못한 세상을 이야기 하고 있을지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 번의 출간 이후 다시 출판사를 옮겨 출간된 이 책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잊혀지지 말아야 할 그 흐름의 중심을 그렇게 찾아 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미래를 말하고자 하는 저자는 먼저 미국의 과거를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것이 정치 혹은 경제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좀 더 행복함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주변에 이 책을 권한 분의 속마음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진보, 보수 그 경계에서 생활과 생존의 경계에서 우리는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된다. 자신의 가치관의 변화는 때로는 게으름으로 때로는 자신의 이익으로 그렇게 숨은 뒷 축을 담당하며 합리화라는 포장된 언어를 이용하여 나를 혹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다가가지는 않겠지만 진보라는 의미 그리고 보수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어떻게 사람들이 진보의 손을 들어 주었다가 보수의 손을 들어주는 지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책과 사랑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다가오는 지 그렇게 차분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먼저 진보가 뭐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그게 뭘까? 신문, 방송 그리고 일상에서 그렇게 많이 들었던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 지고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어떤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 단순하게 이렇게 정의 하고 나면 무엇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정치적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 진보는 결코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정치 사회가 아닌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진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부분에서 다시 모순이 되는 생각이 떠오른다. 직장이 변하고 사회 분위기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진보적인 생각을 옹호할 것인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당장 눈앞에 닥치고 그 속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어려워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힘들다면 어떤 변화ㄹ를 원할 것인가?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변화를 원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보수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져 본다.

 

보수는 저자의 생각으로 지금의 것을 지키는 것. 변화 보다는 현재를 옹호하는 삶이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변화를 좋아할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하루의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가치관을 바꿀지도 모른다.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니까. 그럼 진보와 보수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생각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고 살아갈 것인가? 이는 아마도 철학자가 던진 인간이라는 질문에 근접하지 않을까?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질문. ‘너는 보수니, 진보니?’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고민거리, 즉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저자는 미국의 역사를 통해 즉 근대의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태동과 기원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과 시대상을 같이 고려하며 선거를 통해 미국 국민이 보여 주었던 진보와 보수의 우세와 열세를 분석하고 있다. 마치 전장의 느낌을 받듯이 선거이야기는 시대적 변수와 국민들의 생활수준에 귀결되며 사상이 변하고 그 상황에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사회변화에 반영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드라마틱하게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은 사회의 이슈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용하려 하였으며 혹자는 그 이슈를 놓치고 선거에 패배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우리의 정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았을 때 비교하며 고민해 본다면 더 즐거운 책 읽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출판사의 소개에서도 드러나듯이 진보학자이다. 진보학자이기에 보수진영에 대한 정책을 그리고 그들의 전략을 비판하고 사회구성의 균열을 고민한다. 보수진영이 자주 활용하는 전쟁, 테러, 그리고 공산주의 등에 대한 비판과 그들만의 도그 휘슬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보수는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그 전략을 따르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왜 그는 보수를 반대하고 진보를 선택한 것인가? 마지막 부분에 그가 강조하는 양극화라는 문제이다. 이 양극화가 가져올 사회적 혼란에 대한 걱정 그는 이 부분에 대한 해결을 아니 미래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양극화가 어떤 문제를 야기 할 것인가?

 

정치학자 에릭 우슬러너와 미첼 브라운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양극에 위치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사회적 믿음은 경제적 평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346쪽)

 

결국 사회구성을 위한 믿음의 문제 이것이 경제적 양극화로 갈 때 가져 올 수 있는 사회적 혼란이 어쩌면 진보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진보학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부족한 경제여건이라도 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을 추구하는 집단 그 것이 진보라는 개념의 출발이 아닐까한다. 이 개념은 공산주의라는 단어의 개념과 비슷하기에 주의해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우리는 진보와 공산주의 그 것을 잘 구분할 능력이 없는 것 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읽으셨다던 이 책,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읽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리의 지금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일지 못하는 도그 휘슬에 우리는 또 다른 해석을 하고 그렇게 다시 어려운 길을 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무엇이 정말 미래를 생각하는 일인지?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는 이 복잡하고 모두 다 옳은 것 같은 말 속에서 어떤 곳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하고 더 힘들게 사회를 바라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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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세팅 - 당신의 생각을 조종하는 숨은 권력
맥스웰 맥콤스 지음, 정옥희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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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는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젠다 세팅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신문사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하기도 하고 방송사 사장이 바뀔 때 마다 홍역을 치르며 그렇게 신문과 방송에 집중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면에서 그런지 이 신문과 언론이 한 성향으로 나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 되는지에 대한 생각은 구체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 재벌을 이야기 하는 이유도 그리고 그 언론이 정부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미국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우리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 신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 신문은 대중이 논의할 아젠다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권력은 어떤 법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신문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29쪽)

 

책의 초반에 박스를 쳐서 나온 문장에 몇 줄이다. 사실 무섭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인용했다. 내 생각을 신문이 결정한다고? 흥 하고 웃어 넘길 수도 있었는데 읽어 내려가면서 강한 부정은 약간의 부정으로 약간의 부정은 약간의 긍정으로 약간의 긍정은 강한 긍정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 그래 나는 언론이 정해준 아젠다 대로 생각하고 고민하였던 거야’ 그리고 그 이외의 나머지 일들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지.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 SNS도 마찬가지 아닌가? 신문이 방송한 주제를 가지고 고민들 하면서 찬반이 나뉠 뿐이지 다른 아젠다를 세팅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팔로워가 몇 만인 사람들은 신문에 이슈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1973년 서독의 석유 위기는 언론의 집중 보도로 자극된 급격한 수요 상승에서 발생한 것이지 공급량이 감소해서가 아니다. 이 경우 신문의 아제다 세팅 영향력은 현저성 및 공공의 관심 생성 범위를 넘어섰다. 다시 말해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당면 상황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개별적으로 반응하도록 행동을 유발한 것이다. 언론이 유발한 아젠다 세팅 효과는 이처럼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56쪽)

 

개인의 사고에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언론의 아제다 선정방식은 집단행동으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사례는 아니더라도 서독의 오일쇼크 때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언론이 선택한 아젠다에서 일반 시민들이 반응하고 흥분하면서 액선이 행해지고 이 행동은 결구 서독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만들기도 한다. 아쉽지만 불안감이 들게 만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닌가?

 

점점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정보의 양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보다 더 많다는 SNS 시대에서 언론은 그래도 유용할까? 젊은 세대들이 종이 신문을 보고 다닐 것인가? 조용히 관찰을 해 본 결과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아제다에 심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아닌가? 하는 질문에 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교육은 개인의 언론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뉴스에 나타나는 더욱 광범위한 이슈에 민감하게 하는 데 연대적 효과가 있다. 한편, 교육수준이 더 높다고 해서 뉴스의 강조 패턴에 대한 개인의 방어적 반응도 높아지지 않는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미디어 아젠다를 수용하는 데 심리적 장벽을 세운다거나 반박하는 경향도 더 크지 않았다. (83쪽)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는 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여지없이 망가지네요. 오히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더 안 좋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게 만듭니다. 아젠다 세팅은 교육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지만 저자긔 역할 론은 개인의 역할 론은 아닌 듯합니다. 언론은 어떻게든 자기검열을 가동해야하고 정치는 정치대로 그리고 독자는 독자대로 자신의 위치에서의 역할을 다 잘 할때 만이 아젠다 세팅의 피해를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구조상 그 것을 피하기는 쉬워 보이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서로의 역할과 숨은 뜻을 알아가는 과정은 언젠가 누군가 저에게 신문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고 한 말이 생각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내려가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분이 있었습니다. 마음과 의도를 담아내는 일에 진솔하셨지만 결국은 이 아젠다 세팅에 조금 미흡하셨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든 일이었겠지만 지금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는 것의 차이는 많이 다른 의미일 터이니 말입니다.

 

많은 경우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이 뉴스 아젠다를 설정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대외관계 정부부처 관계자들도 영향력이 세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은 언론의 뉴스 규범에 의해 여과되는데 이 여과력이 막강하다. 일간 짗 주간 뉴스 아젠다들이 뉴스 기관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표준화된다. 이러한 미디어 사이의 아젠다 세팅 과정에서<뉴욕타임스>나 <AP통신> 같은 위상 높은 언론은 다른 언론의 아젠다 세팅에 영향을 받는다. (207쪽)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합니다. 언론과 뉴스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거대 언론은 소수 언론의 아젠다 세팅을 주도하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생존해야 하는 소수 언론도 있으니 말입니다.

 

책은 이렇게 아젠다 세팅의 초기부터 역사적 사실 그리고 그 역학관계와 그 세팅의 중요성 그리고 사회구조상 이 아젠다 세팅을 걸러내야 하는 수용자들의 역할그리고 언론사의 사명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과 권력 그리고 언론과 기업은 도덕성에 충실한 기업이 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저의 부정적 생각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가져가는 일에 더 충실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언론에 우리가 휘둘리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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