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연쇄 독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의 연쇄
김이경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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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책을 읽는 것은 책에 대한 정보와 호기심 혹은 열독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행위처럼 생각됩니다. 마녀의 독서처방으로 책을 소개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 김이경의 책 이야기는 연쇄 독서라는 이름으로 다음 책을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마녀의 독서처방은 사람들에게 감정 선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책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면, 이번의 책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책에 대한 호기심을 따라가는 방법을 보여준 듯합니다.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옮겨지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연스럽게 옮겨지는 그 생각의 흐름을 책의 흐름으로 책에 고리를 묶어 놓은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자의 책 읽는 흐름은 럭비공과 같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같은 소설을 찾아 움직이다가 작가의 이름과 동명의 책 이름을 찾아 읽기도 하고 그 속의 제목 속에서 또 다른 제목의 책을 찾아 읽기도 합니다. 이렇게 읽어 내려가는 책의 이야기는 여주인공의 삶에서, 정말 앵무새의 삶 혹은 멸종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멸종에서 저자는 언어의 사멸 즉 언어의 멸종에 대한 책을 찾아보게 되며, 언어의 사멸과도 같은 한 시인의 죽은 시를 찾아 떠납니다. 이 속의 주인공이 허난설헌 인데요 박지원의 혹평을 받은 허난설헌을 읽고 박지원을 찾아 열하일기를 읽으며 여행기를 찾아 떠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찾는 여행에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찾고 이 이야기는 삶 또한 선택의 일환이란 생각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갑니다. 주제도 없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 간다고 해야 할까요? 놀라운 것은 책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저자이기에 가능했을 것 같은 일을 해 냅니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 미치는 것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책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도 연쇄의 흐름에서 몇 번 다른 주제로 갈아타기는 하지만 그 만큼의 지식이 뒷받침하기에 가능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저자의 이 재미있는 책 여행의 흐름을 보면서 제가 책을 읽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요. 라고 대답은 하지만 저에게도 쉬운 방법으로 책의 연쇄를 부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반대 되는 주장을 하는 글을 읽는 것입니다. 신문을 읽을 때 한 가지 성향의 신문만 보지 말고 두 가지 신문을 비교해서 읽어 보라는 어떤 분의 말씀처럼 한 쪽으로 치우친 글을 읽는 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래서 잠깐 정리를 해보니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책을 찾아 읽게 만드는 데, 최근에 저는 [현대 과학.종교 논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많은 반박의 논리를 제시하는 진화론자의 대표 주자인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또는 종교에 관련한 종사자의 글과 논문이기에 저에게는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결국 [이기적 유전자]를 읽게 만들더군요. 이 두 가지 관점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한 쪽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을 놓고 읽게 된 책이 [권력과 인간]이라는 책이었는데, 정병설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견해를 밝힌 책입니다. 이 책에는 당쟁의 희생이라는 논리보다는 엄한 아버지 영조를 둔 사도세자의 모자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반역이 단초가 되더군요, 이 말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이덕일 이라는 분이 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른 이 책의 논리는 당쟁의 희생자인 사도세자의 모습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읽게 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두 책을 접하고 다시 집어든 책이 신영복의 [강의]입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는 글귀가 떠올라서 인 것 같습니다. 읽은 지 좀 되어서 인지 다시 새롭습니다.

 

아무 연계가 없어 보이는 책을 저자는 그 연계성을 찾아내고(말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찾았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의 흐름대로) 다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자연도 나오고 역사도 나오고 과학도 나오고, 모든 인간생활이 나옵니다. 아마도 독서는 그런 관심이 시작이 되어 더 많은 독서를 권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에 편식하는 습성이 지식의 깊이를 만들어 준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마녀의 연쇄독서는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잡아내는 일에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독서가 아닌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진화론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단초가 되어 동성애에 대한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다]를 찾아 읽고 이 속에서 거대기업 몬산토를 끌어내고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의 흐름이 중간에 기생충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지니 연쇄가 기상천외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아마도 저자는 독서에 흥미를 갖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편의 독서처방은 처음 독서를 접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실망할 때, 때론 기쁠 때 등등 적합한 책들을 소개하였다면 이번의 책은 어느 정도 독서에 재미를 붙이신 분들에게 책을 선택하는 기준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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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본능 - 내 안의 생명력을 깨우는 직관의 건강법
김은숙.장진기 지음 / 판미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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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인 것 같습니다. 많은 질병에 관한 이야기와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혹은 자신만의 숨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술도 하지 않고 암을 이겨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약물로 이겨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질병은 인간이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만큼이나 오랜 시간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오랜 시간 바람을 우리는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면 아마도 어디가 아픈가? 에만 집중하고 그 것을 치료하기 보다는 완화시키고 제거하는 일에만 고민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장수를 바라던 우리 선조들도 이 건강과 질병에 관한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말입니다. 칼로 배를 도려내고 고름을 짜내고 환부를 잘라내는 일로 건강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몸을 통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 것이 먹고 싶다는 욕구 또는 짠 것이 먹고 싶은 생각 등은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합니다. 옛 사람들이 그랬듯이 배고프면 먹고, 먹고 나면 또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고 움직이다 보면 힘들어서 잠이 들기도 하고 이런 생활은 자연의 리듬 즉 낮과 밤이 주어진 시간과 자연이 움직이는 시간과 같은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그렇게 우리들 몸속에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욕구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생각과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치유본능인 것 같습니다.

 

또 사람마다 특징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자신이 처한 위치와 하는 일이 다른데 같은 질병이라고 같은 처방을 내리는 현대의 의학은 그 근본을 치유하지 못하고 병에 대한 완화를 시키지만 다른 곳을 더 망가트리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를 고치기 위해 다른 곳에 무리를 주는 것 같은 일이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런 역학을 음양오행을 통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기를 어떻게 다스리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 말 입니다.

 

자신을 진단하고 치유하고 사례를 들어서 설명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질병을 가져오게 된 원인을 찾아내고 사람마다 다른 병증을 어떤 방법으로 치유하고 회복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조금 낯선 부분도 있었습니다. 나무의 기운 불의 기운 물의 기운 등의 이야기는 저에게는 조금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들어 본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얼굴의 생김새나 행동으로 그런 것을 찾아내기는 수월한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 체질을 알아나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니 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태음인이니 소음인이니 하는 것으로 구분 짓는 일을 삼가라고 합니다. 딱 그렇게 구분을 짖게 되면 또 다른 오류가 생긴다고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말입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전의 사람보다 우리는 편리한 것을 추구하다가 많은 움직임을 줄여 놓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연과 너무 떨어져 사는 것이 문명인이라는 착각에 들어 산다는 것입니다. 많이 움직이고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만 해도 우리는 아마 많은 질병에서 자유로워 질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원에 들어가서 세월을 친구삼아 자연을 벗 삼아 사시는 분들이 많이 건강한 모습을 보면 얼추 증명이 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저도 마찬가지만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운동은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이란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차를 몰고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하고 차를 타고 집에 옵니다. 1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인데, 헬스클럽에 가서 런닝머신에서 4키로 미터 정도 걸으면 운동 많이 했다는 위안을 받기고 하구요. 좀 모순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핑계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공기가 안 좋아서 또는 가는 길이 너무 외져서 등등,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호흡법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걷는 걸음걸이 하나가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지금은 낮은 층은 좀 걷습니다. 차는 좀 멀리하려하구요. 왠 만하면 걷는 것을 생활화하려고 합니다.

 

너무 편해서 너무 풍족해서 생긴 병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연이 주는 만큼 사람이 먹고 마시면 그 것이 자연의 일부 인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일 것 같은데, 우리는 인위적으로 자신의 치유 본능을 무시하면서 타인의 메스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우리 몸 안에 나를 보호하려는 인자가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찾아 스스로 조절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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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Wisdom Classic 7
김경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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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는 것은 개인의 관념적 자유지만, 개인의 관념과는 무관하게 이기심은 자연법칙으로 존재한다. (39)

 

선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남에게 헤를 입히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기를 배워오며 그 것이 절대 선임을 강조하는 사회에게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를 만들고 평생 우정을 나누어야 할 학교에서는 점수와 등수로 사람을 평가하고 진학 혹은 취업률이 그 내면적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다. 사람은 어쩌면 이타적이기를 교육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장에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를 위하여 터득하며 살고 있다. 아이러니한 현장에서 말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이기적인 사람을 비난하며 조롱하지만 그 속에서 최대한 남에게 이기적이지 않게 보이면서 이타적인 모습으로 남을 도우면서 나의 이득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군주론은 그 부분에 있어서 탄생부터 많은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세인들이 말하는 비열함 혹은 냉혹함을 유지하기를 권하는 이야기이며 때로는 거짓과 강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방법도 서슴없이 제안하기 때문이다.

 

첫 문장의 인용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질문인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관념적 자유를 따를 것인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 것 인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행위이다. 다른 유전자의 번성을 막고 현재의 자신의 유전자가 생존 성장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찾아가는 유전자의 자연적 습성과 법칙을 위배하고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관념을 따라 그 행위를 버리고 이타적인 관념으로 살아가며 스스로 위안을 삼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40에 군주론을 선택한 것을 보면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한 관념의 변화 혹은 성공이라는 기준에 대한 절박함을 알기에 따온 제목이 아닐까 한다. 20대 세상에 대한 정의를 따라 살고 그 정의가 사회에 실현되기를 바라며 마음껏 자신의 이상을 필 것 같았던 나이 그렇게 서른의 열정적인 삶을 살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며 세상을 좀 더 알게 되는 시기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오만을 부리면 살던 시기 마흔은 나머지 인생을 결정하는 시기 이 시기에 군주론이라니 너무 각박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질문하면서도 이 책을 들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던 일이 아니라 리더가 되어서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하고 한 사람의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리더로서 자리 잡고 성장하고 커나가며 때론 경영자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군주론은 그 역할을 충분히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무서울 만큼 철저하게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업, 개인을 포함해 어떠한 집단도 생존을 위해 구사하는 책략과 속임수는 본능적이다. (50)

 

일단 승부가 벌어지면 승리 아니면 패배가 있을 뿐이다. 무승부는 승부를 잠시 미루는 것일 뿐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180)

 

어떤 방법을 쓰든 생존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선택하라. 군주론이 일반인에게 거부감을 들게 만든 이유,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비난을 받으면서도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습득하고 배운 것들이 남아있다. 다만 그는 그 것을 정리하였을 뿐이다. 남들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했던 영역을 말이다.

 

마흔의 나이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나이,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발전시키고 내가 속한 집단을 발전시킬 것인가 그 해답이 혹시 마키아벨리의 말 속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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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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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을 정해 놓고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여분이라는 이름의 아마리’, 저자는 그렇게 29살 생일에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 일 년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살기로 결심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없음을 느낀 순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일 년 남은 기간에 자신이 가장 해 보고 싶었던 일을 결심하며 자신의 인생을 딱 일 년 남겨 놓고 살아간다.

 

시한부 인생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사람과 달리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정해 놓고 살아간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하는 식의 시간은 그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무엇을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한 가지를 위해 일 년을 살아가는 아마리는 자신의 행동과 마음이 그리고 생각이 변하면서 주변에 친구도 생기고 여태까지 자신이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찾아간다. 삶의 동기가 가져다 준 변화는 누구도 만들어 주지 못한 스스로의 행복감을 만들어 주었으며 자신의 행동은 자신의 모습도 생활도 변화 시켜 준다.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내일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리가 선택한 길에서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 파견 사원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권하고 싶은 길은 아닌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일반적인 직업의 길에서 찾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가 원한 직업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활용하는 일 보다 어쩌면 사회가 기피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돈은 많지만 외로운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꼭 그렇게 사회가 이루어지고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는 글의 극적 요소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 방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이 글이 가지고 있는 교훈적인 부분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다. 모험을 방해하는 요소 즉 도전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처음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걷기가 힘들 뿐 그 것을 벗어나는 순간 가질 수 있는 많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새로운 삶에 대한 교훈은 우리에게 현재 자신이 찾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위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끊임 없는 성찰을 유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 때 스스로 자신이 빛이 나고 세상이 자신을 바라봐 주고 주목한 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여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삶에서 최고의 삶을 경험해 보고 싶었던 주인공 아마리의 새로운 삶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마지막이라는 데드라인을 선정한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 순간 다음 시간으로 미루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이 시간은 내일 다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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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 종교 논쟁 - 이성의 칼날로 오래된 논쟁의 21세기 급류를 헤쳐나가다
앨릭스 벤틀리 엮음, 오수원 옮김 / 알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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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과학의 도전! 혹은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종교의 반박! 종교와 과학이 가지는 단면성은 인류의 역사가 품어온 아이러니 혹은 모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의 과학자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인이었던 과학자들은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는 연구를 하지 않으려 하였을지 도 모르니 말이다. 그 끊임없는 대화를 이 책은 시도하고 있다. 조금은 종교적인 부분에 치우쳐서 말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요즘 우리시대에도 많은 이슈거리를 만들고 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우리는 각 진영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하는데, 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르는 사람들의 이상한 이론일 수도 있고,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 과학은 신앙에 위배되는 이론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책의 서두는 이기적 유전자를 주창한 도킨스에 대한 반박이 지배한다. 진화론에 대한 반박은 어쩌면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 할 수 있지만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억지에 가까운 논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보이는 것이 아니고 과학은 보이는 것은 증명하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다면 사람이 먼저 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이론이 더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럼 우리는 어떤 이론을 후세에 가르쳐야 할까? 창조론? 진화론? 종교가 있는 아이에게 진화론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그렇다고 종교가 없는 아이에게 창조론은 어떤 의미로 전달되어질까? 두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자.

 

어떤 쪽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이론이 아닐까? 무신론자에게 창조론을 교육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강요로 오인 받을 수 있으며, 종교인에게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윈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 책은 어떻게 그 해결 방안을 찾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책의 요점을 찾아 가게 되었다. 결국 극단적으로 가지 말자는 결론을 자신의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처하게 된 위치와 해결 방법은 어쩌면 머리말에 몇 줄로 요약이 되어있었다.

 

오늘날 영국에서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지는 것은 미국에서 무신론자로 알려지는 것만큼이나 경력에 불리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이어서, 잘못된 대립 자체가 문제다. 나이프 포크, 걷기와 숨쉬기 중에 선택할 필요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 17-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집단적 사고의 흐름에 소외되지 않기 위한 발버둥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선택에 강요를 받을지 모른다. 사회가 가진 집단적 사고에 의하여 이 논리 역시 변함없이 상충된 의견을 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것 역시 어쩌면 적합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현명한 선택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논문들로 이루어진 책의 내용은 좀 머리 아픈 이야기가 많았다. 전에 접하였던 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입각한 책에서 그 반대의 내용을 들어 보면 조금은 부정확한 논리도 포함되어 보이지만 이론적 근거를 종교적 입장에서 대는 것과 과학적 입장에서 대는 것은 어쩌면 나의 교육이 과학적 객관성을 더 추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좀 색다른 내용의 책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양 쪽의 입장을 다 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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