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도 마찬가지다.
갑질은 대한항공 일가만 하는 게 아니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갑질이 일상화된 게 아닌가 싶다.
심지어 초등생 아들 녀석도 담임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의 권력 서열을 눈치 채고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저울질한다.
나 역시 강자 앞에 미소짓고 약자 앞에 오만하기 일쑤다.
갑질 사회를 고칠 방법은 뭘까?
겸손, 배려, 역지사지 같은 뻔한 대답 말고 모두가 한 번에 수긍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신박한 묘약은 없을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역시 개인의 인성이 좋아지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듯하다.
이 역시 나부터 실천하는 방법 밖에...
세상 모든 일이 나부터, 나만 잘하면 세계 평화도 어렵지는 않을텐데 싶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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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적자생존‘이라는 우스개소리를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기록을 남긴 이와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윤동주와 송몽규의 차이랄까?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를 알 수나 있었을까?
류성룡의 징비록이나 허준의 동의보감 등의 저작물이 없었다면 당대에는 높이 평가받더라도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회자될 수 있었을까?

개인의 사적인 기록물은 어떨까?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매일, 매순간의 기록이 쌓여 한 인간의 역사가 된다는 건 한편으론 대견하고 멋진 일이 아닐까?

현대의 지식인도 무엇도 아니지만 나 역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또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삶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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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다작, 다상량 모두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실천한다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을텐데 늘 반성뿐이다.
느리게 읽기가 요즘의 독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저절로 읽고 음미하고 밑줄 긋고 내 생각을 몇 자 적게 된다.
이덕무의 촌철살인 같은 글귀도 훌륭하지만 한정주의 해석이 더해져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더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만 권의 책을 읽더라도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배우고 익히는 데 만족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생각하고 이해하고 깨치려 한다면, 구태여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을 읽은 사람보다 더 많이 알게 된다.(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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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와 색깔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나의 향기와 색깔은 무엇일까?
길가에 핀 풀꽃 만큼의 향기와 빛깔이라도 있었으면...
악취만 풍기는 거짓말과 뒷담화, 게으름과 핑계로 가득찬 행동들...
나만의 향기와 색깔은 어떠할지 늘 깨어있어야하리.

사람 역시 모두 자기 나름의 향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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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앞에서는 비굴하고 말똥 앞에서는 거만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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