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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시 -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
정진아 엮음, 임상희 그림 / 나무생각 / 2019년 4월
평점 :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최치언-
우울한 날에는 당나귀처럼 설탕을 씹으세요
찬장을 뒤져서라도 설탕을 찾으세요
빠른 길은 동네 슈퍼에 가면 돼요
젖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주인에게도 설탕을 권하세요
보건청에서 나온 사람처럼 잔뜩 뒷짐을 지고
아! 하면 아! 하세요 그럼 희망을 넣어드리지요 하세요
시든 장미꽃에게도 설탕물을 주세요
썩은 이빨 사이에 설탕을 솜처럼 끼고 웃으세요
자 저를 따라 해보세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간혹, 불행이 불행을 치료할 수 없듯
설탕은 설탕의 중독을 치료할 수 없다니다-하는 이들이 있는데
꿀벌이 침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하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퉁퉁 부르튼 날엔
또 설탕을 먹으세요
설탕이 없는 날엔 당나귀에게 조금 빌려보세요
당나귀 나라의 말로 정중하게 한발 물러서서
먹다 남은 설탕 있습니까
아랫입술을 세차게 가로로 저어보세요
장미꽃에 얼굴을 묻고 문을 두드리세요
슈퍼 주인에게 어제의 희망의 값을 지불해달라고 위협하세요
당신은 그 동네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이 될 거예요
누군가 당신에게 설탕을 빌려달라면
이렇게 말하세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설탕은 달콤 사르르 하게 이내 녹아버리지요
"맛있는 시" 저자는 EBS FM 詩 콘서트 정진아 작가입니다. 저자는 방송 원고를 쓰기 위해 매일 청취자에게 들려줄 좋은 시를 찾는 과정에서 유독 음식에 관한 시에 인생의 의미가 깊게 배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시 콘서트는 즐겨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인데요. 특히 화요일에는 화요詩식회라고 시속에 담긴 삶을 꼭꼭 씹어먹는 매력적인 코너가 있어요. 삶을 시라는 은유와 상징에 글자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건 참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시 한 편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단상을 함께 실은 에세이를 옆에 써놓아서 시에 대한 이해에 폭을 넓히고 저자와 공감대 형성도 할 수 있어서 기분 좋게 읽어나갔습니다.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잘 차려진 밥을 먹으면 사랑받는 기분이 들잖아요. 시를 읽으면서 사랑을 담뿍 받는 기분이었어요. 편식하지 않게끔 저자가 엄마 손맛 느껴지는 된장에 대한 이야기와 바다향 듬뿍 담긴 멍게에 관련한 시 등을 소개하고 있어요.
위에 적어놓은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를 읽고 나서 옆에 쓰여진 저자의 에세이를 보니 달콤함을 즐겨도 되겠구나 하는 조금의 안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달콤함은 늘 경계에 대상이었다고 말합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책상 앞에서 아름다운 이십 대를 흘려보내고 취업이라는 달콤함을 위해 씁쓸한 인내를 삼키기도 했으니깐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어줄 나만의 설탕을 찾아보라는 말이 공감되었습니다. 저는 햇살을 마주하고 커피 한잔하면서 책 보는 달콤함을 느껴보려고 합니다.
<달고, 짜고, 맵고, 시큼하고, 씁쓸하고, 뜨겁고, 또 차가운 음식은 우리 인생과 많이 닮아 있다.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어엿한 된장이 되는 콩처럼, 우리 인생도 어른이 되기까지 길고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소금처럼 짜디짠 세상맛을 느껴봐야 하고, 고추장처럼 맵고 냉정한 순간도 겪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