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열리는 믿음 문학동네 시인선 66
정영효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안으로 웅크린다. 점점, 점점. 

내 두 팔이 무릎을 끓어안아 허리와 다리가 접히면서 웅크리면 나는 하나의 동그란 점으로 남을 것이다. 안으로 나는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러면 밖이 뚜렷해지리라. 점점, 점점. 밖에서 나는 소리가 뚜렷해지면 안과 밖이 확실해지면 나는 나를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그런 믿음이 필요했다.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 느리지만 조금씩 열리는 그런 열매처럼, 믿음이 열리길 바랐다.

사람들은 믿음이 열리는 나무를 한 그루씩 갖고 있어서, 언제라도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내 안의 내가, 나의 밖의 나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너를 알고 내가 그를 알고 내가 그녀를 알고, 이 세상에서 숨쉬는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A는 B이다"와 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더 깊이 받아들이는 것. 내가 숨을 들이키면 팽팽하게 폐가 부풀어오르듯 그 안에 믿음이 쌓이는 것이라고. 그러니 믿음은 나무에서 열려야만 했다. 사람들이 밤마다 뿌리는 것이 불신이 아니라 그 믿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 안에 그런 믿음이 씨앗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안'이라 불리는 세상과 '밖'이라 불리는 세상이 하나의 선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닌, '안'이라 불리는 세상과 '밖'이라 불리는 세상이 교집합처럼 겹쳐지길 바라는 것. 그 세상에서 나는 나와 너를 잘 알 수 있으리란 믿음. 오직 믿는 행위 하나. 유난히 이곳에 '안'과 '밖'이란 단어가 많은 것도 그런 바람이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쓴 사람의 바람인지 읽는 사람의 바람인지는 그 사이에 들어가봐야 알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너'라는 곳에 가서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풍경을 그린 것도, 그런 소망이 서려 있던 탓이 아닐까. 낯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분명 '나'의 것일까.


나는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나를 들여다보지 않아서 안으로 웅크리는 것에 힘이 들었다. 너무 벅차서 이곳에서 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지만 '너'라는 세상에서, 내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코너'를 돌기 직전 느껴지는 것이 설렘과 두려움이라면, 누군가 만날지도 모르는 설렘과 누군가 떠날지도 모른단 두려움 사이에서 맴도는 것이 '코너'라면 그 모습은 '너'였으면 좋겠다고. 'ㅏ'를 바꾸면 'ㅓ'가 되듯이 '나'를 바꾸면 '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계속 열리는 믿음> 안에서 나는 밖을 꿈꾼다. 너와 함께 달리기를 바란다.

믿음이 열리고 있다.


내가 열리는 시간이다.





이름들/정영효



내가 받은 첫번째 친절은

열두 마리 짐승 중 한 놈과 생일을 엮어 만든 계획

작명은 태내의 이후를 찾아 출생에 보태는 것이지만

간혹 내 이름을 불러보면

먼 소식이 풀리지 않는 사주를 차려놓는다

그렇게 하고, 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

또는 다짐이 나와 다르게 흐르고

문틈에 낀 밤의 외막 같은

몰래 다가오던 적요가 출입을 들킨다


이름이 가진 줄거리는 계속되는 이설

그걸 채우고 죽은 사람은 자신의 명(命)을 탐독했을까

남의 이름을 외울 때 뇌압에 귀가 멍하곤 한다

글자에 묻은 음색의 취향과 얼굴을 함께 떠올리면

인연을 데려온 이력이 궁금하고

낯선 공명이 관계를 꺼낸 채 탁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알아야 해서 곧 숨겨버리는 망각

이름이 처음 만나 베푸는 예의라면

기억하기 힘든 이들은

전래가 어긋난 속계(俗界)를 지닌 걸까

정해진 문답으로 인사하는 순간마다

내 육성을 의구하므로

이름은 나를 훔치기 위한 혐의인지

자주, 잊힌 이름들의 주기가 돌아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두리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두리'를 읊조려본다. 시골과 변두리는 분명 다를 것이다. 변두리란, 그야말로 어느 중심에서 한껏 벗어나 가장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중심에서 비껴간 삶이 그렇듯, 변두리란 단어에서 나는 아픔과 슬픔을 보았다.


도살장이 모여 있는 황룡동에 사는 사람들은 내장과 선지가 익숙하기만 하다. 난 선짓국도 못 먹고 돼지 내장이나 소내장을 먹어본 일이 드물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황룡동에 사는 사람들은 도살장이 일어나면 눈에 보이듯, 그들이 먹는 선짓국이나 내장국은 익숙한 풍경과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하다 하더라도, 백정의 딸이나 부모님이 도살장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부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인가 보다. 주인공 수원이 선지통을 매일 사고 갈 때면 선지가 아니라 약수라고 거짓말을 하듯, 도살장이 있는 황동룡에서의 삶은 어느 정도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서려 있다.


그렇기에 수길은 그곳에서 떳떳하고 당찬 아이처럼 빛이 난다. 나중에 도살장의 초원을 지키는 카우보이가 되겠단 소년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는 날까지 가장 아름다운 꿈으로 간직되어 있다.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할 진실을 가리는 어른들의 세계란 어딘지 모르게, 도살장과 닮았다. 매일 돼지나 소의 멱을 따서 죽여야 하는 그 피 비린내 나는 곳에서 어른들은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살기 위해서 그들은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린이들은 그저 순진무구하게 첫꽃을 따먹거나, 좀 더 희망찬 꿈을 꿀 수 있는 동심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도살장은 피 비린내가 나는 곳이 아니라 초원을 뛰어노는 소가 있는 그런 낙원 같은 곳이다. 그런 대립된 세상에서 도살장은 존재하고 있다. 그런 도살장이 있는 곳이야말로 삶의 변두리라고 생각한다.


수원은 정구가 수원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변두리가 아닌 어느 중심에 서 있는 것.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껴가는 것이 아닌 관통하는 삶을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경기도 수원에는 딸기밭도 많고 밤나무도 많다고 한 밤할머니의 말은 아득한 꿈결처럼 느껴진다. 아카시아 향이 가득한 수원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더 꿈꾸고 싶고 더 바라게 되는 게 아닐까. 밤할머니가 옛시절을 잊지 못해 자기 친정인 수원을 그렇게 과장해서 말하는 것도, 찬란했던 그날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찬란하길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도살장이라는 배경은 어딘지 모르게 거북하고 낯부끄러운 인상을 주지만 그곳을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묘하게 안정감을 느낀다. 아, 우리는 모두 똑같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변두리라는 것은, 아무리 사전에서 어느 한 지점의 가장자리라고 설명해도, 그곳이 바로 중심이 될 수도 있다. 황룡동이 개발로 인해 아카시아 나무가 뽑힐 때, 그곳은 변두리가 아닌 어느 한 곳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에 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삶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비록 지금은 수원과 수길이 황룡동이라는 변두리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정말 수원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정구와 정호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어도 되는 것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희망차다가도 절망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다가도 희망차다. 변두리란 그런 걸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남겨진 것들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중얼거려본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어 하나를 넣은 문장이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처럼 늘어나는 감정의 파도.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서는 '다'에서 어떤 물기가 뚝뚝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 검고 자욱하고 어딘지 모르게 출렁이면서도 진득한 것, 떨어지지도 않고 기름처럼 엉겨붙어서 눅진하게 달라붙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는 감정은 이렇듯 축축하다.

염승숙 작가의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발가락 끝에 힘을 주게 된다. 온몸에는 힘을 빼다가 어느 순간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이를 악다물게 되는 것이다. 어느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그저 무의미하게 넘기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는 것과도 같다. 뭘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를 오래 곱씹듯 염승숙 작가의 책을 곱씹어 본다.

 

 

불가해不可解

'이해할 수 없음'. 사전의 의미는 이렇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은 채, 그저 이해할 수 없다고만 정의되어 있다.

 

이해할 수 없음. 이 문장을 가만히 곱씹다 보면 염승숙 작가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불가해는 이 글 전체에 녹아 있으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간이 아닌 먼 미래, 혹은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을 대상으로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등 언저리에 나 있는 소나무와 같은 것, 또 예를 들면 AI방역으로 인해 오후 4시가 되면 호우가 내린다는 것, 또다시 말하자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 아니면 어쩌면 푸른 먼지가 뒤덮이는 세상과 같은 것. 그래, 말하자면 차갑고 시리고 푸른 것들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결코 현실과는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지도 않은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환상과 가까운 현실'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염승숙 작가의 세계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 바로 위에 어떤 색이나 막이 덧칠해져 본래의 모습을 숨긴 것과 같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염승숙 작가가 말한 '불가해'의 이해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온몸을 열어두고 있다란 몸짓과도 같은 것.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에, 어쩌면 '불가해' 그대로이기 때문에 '환상'이란 것을 넣어버리게 된 게 아닐까.

 

내 눈앞엔 어떤 세상이 있는가. 막상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 내 안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은 「노래하는 밤 아무도」 에서 아버지가 해준 말과 같다.

 

세상은 불가해한 곳이야. 이 고등어처럼 말이다. (86p)

 

눈앞에 있는 고등어를 보면서 하게 될 생각들. 그것이 단순히 소금을 뿌려 구워먹으면 맛이 있는 등 푸른 생선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을 먹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거야.(89p)

 

나를 알게 되면 삶에 조금 가까워지는 것일까. 어째서 염승숙 작가의 책에선 푸른 색이 유난히 많이 나온 것인지, 어째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초현실적인 풍경이 나타나는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초현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결코 한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는 결코 하나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그렇기에 아버지의 말대로, 잘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등에 귀를 하나 더 갖고 있었다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충실히 사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해(36p)

 

문득, 삶이라는 것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는 유난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소나무나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이나 같은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장치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볼 수 있도록, 잘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은 나와 타인을 아울러, '삶'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렇기에 염승숙 작가의 문장은 하나하나 무의미하게 스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문장에서건 한 템포 쉼을 쉬어야 하고 눈을 끔뻑이며 다시 되짚어야 한다. 염승숙 작가가 지닌 문장의 무게는 삶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무겁지만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다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단순히 '환상'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삶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 '나'는 죽은 후 벽돌이 되었다. 무엇이 벽돌이 되게 하는가. "외톨이"다. 현대 사회를 블루의 시대라고 하는 것도, 맨 마지막에 나오는 「청색시대」에서 세상이 모두 푸르게 되어버린 것도 단순히 환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말하지만 정작 그 군중 안에서 고독을 느끼게 하는 것, 군중 속의 고독과도 같은 것이 현대 도처에 푸르게 깔려있다. 어째서 푸른 빛은 우울함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푸른 빛이 쓸쓸하게 넘실거리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푸른 빛을 지울 수 있는가.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언젠가부터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는 개인의 삶은 자살을 부추기고 많은 범죄를 일으키게 하였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인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삶의 여행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난 이야기라기보단 사람과 사람이 헤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현'이란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했는데 삶을 여러 번 살아도 사람은 결국 헤어지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은 그렇게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철저히 외롭게 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삶이라면 자유롭게 살고 싶다. 마네킹에게 대체되기 싫어 스스로 마네킹이 된 여인처럼.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라 할지라도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위해서, 불가해한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죄책감 문학동네 시인선 61
임경섭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얼마 전, 일본드라마인 <베드로의 장렬>을 모두 보았다.

 

사기꾼이었던 한 남자가 버스를 탈취한다. 그는 경찰에게 세 명의 '악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데리고 오길 바랐다. 그 요청이 들어지기도 전, 경찰이 버스에 연막탄을 던진다. 남자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남자는 죽기 전 인질들에게, 위자료를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위자료를 받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기무라는 그 남자에 대해 알고자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남자를 알면 알수록,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위자료라고 받은 돈을 보고서는 욕망과 싸우기도 해야 했다. 그 돈이 온전히 제 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기를 해서 번 돈이라는 것을 알고는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다. 스기무라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인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아내만을 사랑했던 스기무라에게, 불륜은 크나큰 죄악이다.

 

그들은 모두 '베드로'였다.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남자 베드로.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란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베드로는 예수를 저버렸다. 위자료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가지지 않을 것인가. 사기로 번 돈을 가져도 되는 것인가. 인질이었던 자들은 모두 고민한다. 탐욕스럽게 탐을 내다가도 이내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들 안에 어떤 감정이 피어난다. 그들은 떳떳해지고 싶었다. 그것은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죄책감'이었음을 나는 깨닫는다.

 

나는 크나큰 착각을 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하게 깨끗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장렬>에서 스기무라는 다정하고 가정적이고 성실한 남자로 묘사된다. 그는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결고 '블륜'을 저지를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베드로의 장렬>에서 스기무라는 마노라는 여인에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유혹당했다. 마지막에 스기무라는 울었다. 아내와 딸에게 못할 짓을 한 자신을 자책하며. 그것은 슬프기도 했고 인간적이기도 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우는 그 남자가 그 순간만큼 인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이 그렇게 인간다워보일 수 없었다.

 

 

 

 

<휘날린>

 

휴지를 가지고 다닌다는 건

언제나 더럽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의 유년은

쌓여 있는 시간들 사이에

숨은,

뽑으면 더러워지고 뽑지 않아도

더러워지는,

한없이 순서를 기다리거나 한순간 구겨져

사라질,

얇은 고백들인 것

 

 

 

 

#

 

꼿꼿하게 몸을 세우려고 해도 구부러진 몸뚱이가 있다. 그것을 보며 추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이다. 구부러진 몸이기에 저절로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잘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숙여지는 고개처럼,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천국은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내 발 아래 있다고 믿고 싶다. 고개가 숙여지면 바로 보이는 바닥 너머에 존재하는 감정이 죄책감이 아니라, 상냥함이라고 믿고 싶다. 어느 누군가를 만나기 전엔 몰랐을 감정들이, 어느 누군가를 만나 폭발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까, 고개를 숙일 때 느껴지는 감정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정말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따스하다. 내가 나고 자라 만난 얼굴을 떠올리면 그렇다. 부모님에게도, 내 형제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나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하루에 몇 개의 잘못을 저지를까. 무의식이든, 의식적이든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가 깨끗하길 바라는 마음은, 결코 모순적이질 않을 것이다. 나는 휴지를 들고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휴지를 들고 살아왔음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어진 휴지로 내가 만들어낸 잘못을 닦아내고 다시 잘못을 흘리고 다시 닦아내는 것이라고.

 

 

 

 <죄책감>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따

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내려가도 내리막이었다

(...)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

 

 

 

 

#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온기를 전해주고 싶은 그런 생각을 늘 한다. 상냥하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떤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냥하길 바라면서 상냥해지질 않는다. 그것이 나의 죄책감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내 안으로 들어서는 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가야 할지 몰라 빙빙 돌다가, 결국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려간다는 것은 안으로 향한다는 의미다. 나의 잘못을 하나씩 되짚고, 나라는 인간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러면서 자아성찰을 하는 시간. 인간이었던 자가 다시 인간임을 깨닫는 시간. 그것은 고해성사를 하는 것과 같다. 어두운 성당에서 신부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하는 고해성사. 성호를 그으며 신을 찾다가 말아버리는 것.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을 형성한다고 말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성스럽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마주하여 새로 태어난다.

 

 

<탄성잔효>

 

구름을 새각할 때마다 들리는 음악이 있다

 

너를 녹음한 입자들이 잠들어 있는

 

기슭의 돌드을 모조리 던져넣는다 해도

 

이 시간은 범람하지 않는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람이 불어오는 시작점은 어디인가. 바람이 사라지는 끝은 어디인가. 나무는 왜 푸른가. 나무의 뿌리는 왜 단단한가. 새들은 왜 하늘을 나는가. 어째서 인간은 그렇게 완전하지 않는가.

 

오늘은 하늘이 무척 파랬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볼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얼룩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눈이 시큰해서 고개를 돌려야 할 때까지 하늘만 오롯이 보았다. 하늘은 나의 잘못을 알아차린다. 고개가 숙여지고 내 아래 있는 어떤 감정을 들여다볼 즈음, 나는 다시 믿었다. 천국은 저 아래 있다고. 인간다운 감정은 저 아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것, 나에게 주어진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 피하지 말고 바라봐야 할 것들. 그런 것이었다.

 

마음 밑바닥에 숨겨둔 죄책감을 응시한다. 나의 정체성이 그곳에 있다. 나는 이제부터 다시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  

 

 

 

<정체성>

 

한 공간의 이동이 정지한다

한 공간의 규모가 조각난다

 

충돌은 야간에 이루어지지

관측도 야간에 이루어진다

 

관측되지 않은 별은 별이 아니다

어떤 형편과 형편이 충돌하면

때론 거대함만이 살아남는다

 

아무도 위반한 적 없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았다

 

누구도 버린 적이 없어서

버림받지 않았다 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타살이 아니라 했다

 

정체성은 작아지지 않는다

정체성은 다져지고 흩어져 넓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티엔은 그곳에 머물기로 갑작스레 마음을 굳혔다. 어쩌면 저 위, 탄광촌 입구에서 카트린의 맑은 눈동자를 다시 본 것 같아서였을까. 어쩌면 르 보뢰 탄광에서 반란의 기운이 실린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에밀 졸라의 이름을 들을 때만 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나는 도저히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부정적인 예감. 그만큼 에밀 졸라의 이름에서 주어지는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제르미날>을 선뜻 집어들 수 없는 까닭도 그 압박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문학가 중 한 사람으로서 에밀 졸라가 적은 작품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하층민의 삶을 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으로, 그들의 삶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저 위로 향하려는 어떤 몸짓을 담고 있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삶이 <제르미날>에 담겨 있었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탄광에서 탄차를 운반하는 말들의 인생 또한 담겨 있으며, 탄광 주위를 감싸는 운하를 비롯한 산사나무, 떡갈나무와 같은 나무의 생도 함께 담겨 있다.

 

<제르미날>이 뜻하는 단어는 혁멱령인 '7월'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가 왜 이 작품의 제목을 <제르미날>이라 지었는지는 책을 읽어봐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담은 이야기지만 각 개인으로 들어가면 사랑, 질투, 야망과 같은 온갖 것들이 담겨 있는 대서사시인 것이다. 기계공이었던 에티엔이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예감을 느낄 수 있다. 에티엔의 성격은 불 같은 성정을 드러내다가도 이내 인간적이고 착실하고 성실한 면모를 보인다. 에티엔의 모습은 <제르미날>에서 보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은 쉽게 분노하다가도 어느 힘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 언제고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는 그런 예감을 보인다. 에티엔은 자신의 안에 있는 유전자적인 살인충동을 어쩌지 못해 노동자들을 인솔한다. 그는 싸우고 싶었고 싸우기 위해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지식이 짧아, 비록 그들을 온전히 이끌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그는 그들에게 씨앗을 던져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씨앗이 조금씩 틔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밀 졸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르미날>을 읽으면서 에밀 졸라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제르미날>로 돌아와 에티엔과 마외, 르 마외드, 카트린, 샤발과 같은 인물들을 요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결국 <제르미날>은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은 이야기므로 노동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이 파업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굶어죽지 않아서였다. 헌법 제 10조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싸움을 택한 것이다. 저 밑바닥에 있다고 짓밟히기보단, 자신들이 직접 무기를 들어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었던 시민혁명처럼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빵을 달라!"라고 노동자들은 외쳤다. 그들은 부르주아가 사는 곳으로 향하면서 그리 외쳤지만 그들이 정작 싸우고 싶었던 자는, '신'이 아니었나 싶다. 신에 의해 계급이 정해지고 신에 의해 가난한 자와 부자가 정해진 것이라면 억울한 일이지만, 그들이 부르짖었던 혁명은, 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의 위대한 힘 앞에서 그들은 고꾸라지고 말았고 탄광이 무너지면서 대자연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라나고, 자라나 결국 그들을 굶주리게 한 적을 굴복시킬 것이다.

 

처절하면서도,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자연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은 하나로 뭉친다. 네그렐이 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손수 앞으로 나섰던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적이었지만 자연 앞에서는 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뭉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운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게 아닌가 싶다.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듯, 죽지 않기 위해 자연을 상대로 싸우듯, 싸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비록 무너진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라나는 것이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