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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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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은 그곳에 머물기로 갑작스레 마음을 굳혔다. 어쩌면 저 위, 탄광촌 입구에서 카트린의 맑은 눈동자를 다시 본 것 같아서였을까. 어쩌면 르 보뢰 탄광에서 반란의 기운이 실린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에밀 졸라의 이름을 들을 때만 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나는 도저히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부정적인 예감. 그만큼 에밀 졸라의 이름에서 주어지는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제르미날>을 선뜻 집어들 수 없는 까닭도 그 압박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문학가 중 한 사람으로서 에밀 졸라가 적은 작품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하층민의 삶을 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으로, 그들의 삶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저 위로 향하려는 어떤 몸짓을 담고 있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삶이 <제르미날>에 담겨 있었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탄광에서 탄차를 운반하는 말들의 인생 또한 담겨 있으며, 탄광 주위를 감싸는 운하를 비롯한 산사나무, 떡갈나무와 같은 나무의 생도 함께 담겨 있다.

 

<제르미날>이 뜻하는 단어는 혁멱령인 '7월'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가 왜 이 작품의 제목을 <제르미날>이라 지었는지는 책을 읽어봐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담은 이야기지만 각 개인으로 들어가면 사랑, 질투, 야망과 같은 온갖 것들이 담겨 있는 대서사시인 것이다. 기계공이었던 에티엔이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예감을 느낄 수 있다. 에티엔의 성격은 불 같은 성정을 드러내다가도 이내 인간적이고 착실하고 성실한 면모를 보인다. 에티엔의 모습은 <제르미날>에서 보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은 쉽게 분노하다가도 어느 힘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 언제고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는 그런 예감을 보인다. 에티엔은 자신의 안에 있는 유전자적인 살인충동을 어쩌지 못해 노동자들을 인솔한다. 그는 싸우고 싶었고 싸우기 위해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지식이 짧아, 비록 그들을 온전히 이끌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그는 그들에게 씨앗을 던져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씨앗이 조금씩 틔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밀 졸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르미날>을 읽으면서 에밀 졸라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제르미날>로 돌아와 에티엔과 마외, 르 마외드, 카트린, 샤발과 같은 인물들을 요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결국 <제르미날>은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은 이야기므로 노동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이 파업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굶어죽지 않아서였다. 헌법 제 10조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싸움을 택한 것이다. 저 밑바닥에 있다고 짓밟히기보단, 자신들이 직접 무기를 들어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었던 시민혁명처럼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빵을 달라!"라고 노동자들은 외쳤다. 그들은 부르주아가 사는 곳으로 향하면서 그리 외쳤지만 그들이 정작 싸우고 싶었던 자는, '신'이 아니었나 싶다. 신에 의해 계급이 정해지고 신에 의해 가난한 자와 부자가 정해진 것이라면 억울한 일이지만, 그들이 부르짖었던 혁명은, 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의 위대한 힘 앞에서 그들은 고꾸라지고 말았고 탄광이 무너지면서 대자연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라나고, 자라나 결국 그들을 굶주리게 한 적을 굴복시킬 것이다.

 

처절하면서도,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자연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은 하나로 뭉친다. 네그렐이 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손수 앞으로 나섰던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적이었지만 자연 앞에서는 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뭉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운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게 아닌가 싶다.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듯, 죽지 않기 위해 자연을 상대로 싸우듯, 싸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비록 무너진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라나는 것이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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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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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있다. 죽은 자가 있다. 남자를 잘 만나겠다고 한 여자가 있다. 나이가 든 할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청년도 있다. 갱년기를 피하고 싶은 여인이 있다. 시골에서 잘 살아보고 싶은 아이의 아빠가 있다. 범죄를 침묵해버린 대리운전기사가 있다. 잠을 갈망하는 여인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하나의 의문을 품고 살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이 나은 삶인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기력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죽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편해지고 싶은 마음뿐일 텐데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그리운 이를 만나게 하고, 결국에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누구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단짝친구와 경쟁을 하고 결국 아이를 가졌지만 남자가 떠나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자고 싶은데, 정말 자고 싶은데 잘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나는 자고 싶은데, 잠을 자고 싶은데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인생 별 거 있나, 한판 살다 가는 거지, 하고 호기롭게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고 점점 하루 벌어 살아가는 세월이 버거워진다. 빚까지 져서 결국 끝까지 절망적이 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나이가 든다는 게 두렵다. 언제까지나 젊어지고 싶은데, 세월을 피할 수 없다. 스러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죽어버린 왕들 앞에서 죽음은 그렇게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원한 것은 단란한 시골생활이었다. 어쩌면 낙원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돼지 축사만 아니었더라면, 그놈의 개만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전원의 꿈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렇게 절망은 반복된다. 겨울은 춥다. 대리운전으로 살아가기도 퍽퍽한 세상이다. 일이만원 때문에 새벽 늦게까지 운전을 해야 한다. 핑크색 옷을 입은 뚱뚱한 여자는 은밀하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버린 남자는 더 은밀하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봄은 왜 그렇게 따스한가. 모든 것을 녹아버릴 것만 같은 빛깔은 가난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어둠을 더 짙게 만든다. 할아버지와 살아가야 하는 젊은 청년은 그 안에서 무기력을 느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낀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절망은 정녕 모든 것을 앗아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싸웠다. 불가항력적인 죽음은 물론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는 싸움에서, 삶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서, 잠이라는 끈적끈적한 존재 앞에서, 외로움, 근심, 수렁텅이와 같은 질척한 삶 앞에서. 그들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같지 않다. 하루하루 벌어 사는 사람에게 편안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꾸역꾸역 버텼다. 버티는 게 그들의 싸움법이다. 결국, 누군가를 죽이고 무언가를 불태워버리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게 엿 같은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살아있다고 나타내주는 증명이기도 했다. 저항, 그들은 저항했다. 거세게 몰아오는 인생의 파도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저항한 것이다. 
 
너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가. 또 다른 이가 물어왔다. 도망치기만 하는 건 인생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쾌함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결코 절망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천명관의 소설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빛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혈육이거나, 아니면 한 마리의 칠면조이거나, 이혼한 마누라이거나, 이미 죽어버린 아이이거나 하는 것들이다. 노동자가 살아가는 힘은 자기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망가져버린다. 그렇기에 필사적이 되는 것이다. 지키기 위해, 지키기 위해, 또한 살기 위해. 
 
인생 별 거 있나.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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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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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조심스러움'이다.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인가.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의식한단 의미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 상대방을 어쩔 수 없이 바라봐야 한단 의미다. 결국 신중해진다는 것은,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그로 하여금 신중하게 하는 것일까. 지하철을 걸어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살짝 몸을 튼다거나 걸음을 조금 멈춘다거나 하는 행동을 볼 때가 있다. 지하철에게 빠르게 나오는 사람들을 어쩌질 못해 가만히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결코 먼저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신중하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중한 건지도 모른다. 이승우 작가님의 <신중한 사람>은 그런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면서, 그런 직업을 갖지 못한 '나'는 선배의 부탁을 받아 한 지방의 임시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변변찮은 벌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모른단 두려움. 안정적인 것에 대한 강박. '나'는 여관에 머물면서 밤마다 켜지는 텔레비전에 시달린다. 리모컨이 있다면 그나마 덜 스트레스일 텐데, 그놈의 리모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선배가 도시를 구경시켜준다면서 밤마다 불러대는 통에, 거절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그는 자신에게 일을 준 선배에게 피곤하다고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히지만 결국 선배와 함께 하게 된다. 갑갑하면서도 답답한 인생에서 그가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여관에 없는 리모컨이다. 삶이란 그렇게 무기력한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절실히 원하는데 상대방은 "원래 없어요"란 대답으로 산뜻하게 요구를 묵살한다. 그때의 기분은 참담하고 비굴하고 또 분하다. 삶은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Y에게는 꿈이 있다. 조용한 전원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 그 꿈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그러나 딸이 패션디자인을 하겠다고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마련한 전원주택은 친절한 이웃의 관리에 맡겨진다. 생활비를 대주기 위해 외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자신이 마련한 집은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 친절한 이웃이 자신의 집이라 속이고 전세를 준 것. Y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중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심스러워한다는 의미가 맞는 것일까. 나는 사전적 의미를 다시 고민해봐야 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신중하다는 것은 사전에서 말하는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Y의 꺾인 자존심을 의미했다. 뼈 빠지게 일해서 꿈의 주택을 마련했지만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당해 먼 타국까지 갔다. 열심히 일한 후 고국에 돌아도니 자신의 주택은 다른 누군가가 멋대로 전세를 주었다. 무기력해진다. 다시, 또, 무기력해진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마치 그 전원주택이 전부라는 듯, 그는 필사적으로 버틴다. 그곳에서 나는 또, 삶에 대한 절망을 엿보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절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필사적인 건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

윤은 J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편지를 발견한다. 소설가로 유명해진 윤은 처음에 J선생의 유품을 정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J선생과의 오랜 인연을 떠올리며 선생의 작품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편지는. 그 편지는 한 친구의 부정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윤은 그 편지를 읽고서 수치심을 느낀다. 결코 세상에 드러내선 안 되는 편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시기였다.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된 친구의 부정은 그에게 있어서 밝혀내야 할 것이었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는 듯,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싸늘하다. 사실은 윤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시기심으로 그랬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오래된 편지에 적힌 j선생의 첨삭은, 그에게 그런 수치심을 안겨준 것이다. 사람은 단순하다. 누군가가 잘 되면 그것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본성을 잘 드러낸 글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이미에서 나와 어디로 향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글은 조금 독특했다. 이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여관에 머물며 어디로 가기를 꿈꾼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미에서 나와 어디로 향하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누군가의 현실이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과거다. 삶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어떤 통로와도 같다. 과거에서 나왔지만 미래로 가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현재가 있다. 과거에서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서도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를 거쳐와야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듯, 이미에서 내가 존재해야 어디에도 나는 존재한다. 이미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사람이 질투에 눈이 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명한 소설가의 글을 다른 사람이 썼다는 인터넷글이 불러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이 그가 했다고 밝혀졌을 때엔 씁쓸하기만 했다. 망상증이 있는 소설가였던 그가, 망상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계획. 그것은 그의 망상인가. 현실인가. 그 애매모호한 현실이 바로 삶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하게 되면 파멸로 가는 것은 그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간다. 삶은 덫이다. 삶은 늪이다. 빠지면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 허우적대는 게 삶이라고 처절하게 말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빛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와 절연을 당했다. 커틀러스 검을 가진 아들은 아버지가 두려워 칼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칼을 수집하는 사람은 칼을 우표나 동전을 수집하는 것처럼 수집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칼은 유일한 자존심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그렇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거워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있기 위해 커틀러스를 품은 남자처럼. 아버지에게 절연당한 '내'가 아버지와 마주하기 위해. 빛이라는 것은 때론 모든 것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존재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더 또렷하게 보이는 법이다. 모든 것을 다 밝힐 수는 없다. 밝힐 수는 없기에 슬픈 것이다.

한국에서 실패한 삶을 청산하기 위해 외국으로 가려는 남자. 유는 그 삶을 갈망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는 가질 못했다. 인생은 농담 같은 것인가. 그토록 원하는 외국행이 바로 직전에 고꾸라지더니. 허망해서 웃음이 비져나왔다. 마지막을 보았을 때 유의 고통이 확 느껴졌다. 오직 외국을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고 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던 유였는데, 비자가 나오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가질 못하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란. 삶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고꾸라뜨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때론 살아가는 이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했을 때,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은 어리석다. 하지 않았으므로 증명할 길도 없다. 이렇게 적어가는 문장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요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에 뼈 아픈 진실이 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추궁을 받을 때, 추궁받은 자의 인생을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의 중간에 어떤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연예인뿐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살고 있다. 예전에 어느 기사에서 한 남자가 여자애를 성추행했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알고 보니 무혐의였었단 사실이 밝혀진 일이 있었다. 사건조사에 대한 미비로, 남자는 억울하게 모든 일을 뒤집어썼다. 세간에서는 그를 추악한 성추행범이라고 욕을 했다. 이미 일이 터지고 나선 수습할 순 없다. 그의 인생은 이제 어린 애를 성추행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이미 터지는 순간, 인생은 파멸하고 만다.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 그것은 꽤나 버겁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두 다리에 엄청난 무게를 가진 추를 매달게 되듯, 그대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절망적이지만 버텨내야만 하는 일, 진실을 파헤치는 것, 그것이 삶이라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그 진실 하나뿐이다.

참 이상하다. 이승우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모두, 신중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약하다. 나약하다는 것이 죄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성정이다. 마치 이 글은 그들을 보호하기로 하듯 적혀 있다. 그들을 비난해서도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우리는 모두 신중하므로, 신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다듬어줘야 한다고. 삶은 어느 순간 당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럴 땐, 신중해지자. 나약하다는 것은 당연하므로, 그렇기에 사랑하자. 작가의 말을 읽으니, 왠지 모르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삶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_<작가의 말>에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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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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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농담 같은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조잡한 농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때론 농담이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도 있다. 농담인 듯 농담이 아니듯, 누군가에게는 웃어 넘길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어넘길 수 없는 것.

삶도 그렇지 않을까? 팬터마임이나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상황도 있을 것이고 살짝 찌푸린 채 먼 곳에 뜬 달을 바라보는 삶도 있을 것이다. 농담과 농담이 아닌 상황 사이에서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그것은 어찌 보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찌 보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모순과 역설의 반복적인 쳇바퀴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나는 그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때로는 서늘하고 또 때로는 진실한 삶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얼마나 유명한 작품인지, 나는 이미 밀란 쿤데라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 그림을 표지로 했다는 밀란 쿤데라 전집도 오직 한 권만 소장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 <무의미의 축제>가 발간되었을 때, 나는 이 작가와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그리고 만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150페이지도 되지 않는 중단편 분량의 글을 나는 하루만에 다 읽어내려가고야 말았다.

정말 농담 같은 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벼이 읽힌다는 면에서, 우스꽝스러운 유며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어떤 희극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아래 깔린 무서운 진실을 나도 모르게 외면하게 된 건 아닌가 두려움이 들었다. 칼리닌그리드에 대한 유래를 들려주는 대목에선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그 부분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대목이었다. 라몽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 말은 아직도 잊히질 않고 있다.

알랭, 나는 죽은 다음에도 십 년마다 다시 깨어난 칼리닌그라드가 여전히 칼리닌그라드로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래야만 나는 인류에 대해 약간의 연대감을 느끼고 관계를 회복해서 다시 내 무덤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_44p

별 거 아닌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이 일화를 들여다 보면 인간의 어떤 성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방광이 약해 계속해서 화장실을 가야만 했던 칼리닌의 희극적인 요소엔 어떤 비극이 깔려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준 일화는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희극적인 배경 아래 깔린 진실은, 어떤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게끔 하였다.

사실 이 작품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랭이 배꼽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그 배꼽은 알랭의 탄생에까지 다가가게 되었다. 샤를이 스탈린의 일화에 고집하게 되면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칼리방이 우스꽝스러운 파키스탄어를 창조하여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 그대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나 싶다. 알랭, 샤를, 칼리방, 라몽이 들려주는 각각의 이야기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았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다. 무의미한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라몽이 다르델로에게 해준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는 것,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을 떼어놀 수 없다는 말. 삶은 모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시시하고 하찮고 별 볼 리 없지만,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 무의미한 것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게 될 적엔, 사실은 무의마한 것이 아닌 우리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라몽은,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고 말해주었다. 사랑하라고. 마치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삶은 없듯. 알랭이 마지막에 어머니와 화해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단순히 어떤 사람들의 사소한 일화를 담은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의 모든 인생을 담은 글이었다.

삶이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에 도달해있을지도 모른다. 별 볼 일 없는 것을 사랑하다보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랑하자. 우리의 무의미를. 그것이 축제가 되는 날까지.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_14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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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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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읽었을 땐 이야기 자체가 오싹하다고 느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사실 <목걸이>는 알고 보면, 친구에게 빌린 목걸이에 얽힌 이야기였을 뿐이다. 지금 다시 읽고서도 그다지 오싹하다고 느낄 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땐 왜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까.

나에게 항상 기 드 모파상은 오싹한 작가로 남아 있다. <목걸이>뿐 아니라 다른 단편도 그리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기 드 모파상>이라는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을 읽으며, 오싹하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비곗덩어리>와 같은 단편은 오싹하기 그지 없다. 직접적으로 무섭거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심리를 아주 무섭도록 잡아낸 글이라 여겼다. 눈이 와서 굶주렸던 부분부터 시작하여, 프로이센 장교에게 여인을 바치는 부분까지. 사람은 얼마나 본성에 충실한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어찌 보면 잔혹하다. 동물보다도 잔혹하다. 그 잔혹미를 <비곗덩어리>가 드러냈다. 제목이 말하는 비곗덩어리는 단순히 창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모두 같은 비곗덩어리라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리라.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잔잔한 이야기도 있다. 사랑 이야기도 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전원 비화>는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두 집안이 서로 반대의 상황이 되어갈 때의 모습은 폭소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어쩔 땐 행복하다가 어쩔 땐 불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선택을 잘못하여 행복해질 수 있었던 상황을 놓친 거라면, 그건 누구를 원망해야만 하는 걸까. 원망할 수 있는 것이긴 할까.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내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하진 않다. 그는 인간의 깊은 곳까지 다가가 그 마음을 드러내고 때론 주위에 존재하는 세상을 펼쳐 보인다. 나는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프랑스의 1800년대 상황, 그리고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사실적인 묘사는 물론이요, 오감까지 충족되어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기 드 모파상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가 묘사하는 사랑은 얼마나 슬픈지. <의자 고치는 여자> 이야기는, 사람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무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남자인데도 그녀는 그를 평생 사랑했다. 평생. 평생토록. 평생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숨까지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아름답기에 슬프다. 그녀의 사랑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슬프다. 때론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미스 해리엇>은, 나이가 들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나이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외로움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것을 이겨낸단 말인가. 고독에 휩싸여 죽은 사랑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 드 모파상>에 사랑 이야기가 많은 것은, 작가가 사랑을 어찌 바라보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사랑은 할수록 행복해지는 것, 버림을 받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사랑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글을 읽으면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데 <기 드 모파상>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볼 수 있었다. 기 드 모파상이 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활자에 있지 않았다. 활자를 통해 그 시대로 날아가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는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의 문화를 보았고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을 보았다. 기 드 모파상의 작품에서는 그때 당시의 프랑스를 아주 긴밀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은 가치 있다. 물론 이뿐 아니라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낸 인간상도 제대로 볼 수 있다. 욕심 많은 인간, 가여운 인간, 질투하는 인간, 두려워하는 인간, 불가사해한 인간, 외로운 인간.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담아낸 것만 같은 단편집. 펼치기만 하면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듯 소설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내는 세상은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게 해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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