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김종옥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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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옥 작가의 글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보았다. <거리의 마술사>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그 작품을 보고 숨 막히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학교 왕따 문제를 '마술'이란 소재와 접목시켜서 신비롭게 쓴 이야기였다. 몰입하며 읽었다.


소설집이 나왔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다. 어떤 상상을 보여줄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하지만 <거리의 마술사>와 같은 글은 없었다. 어느 시간에 머무른 느낌이 강한 단편이 많았다. 어느 시간대에 정지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이야기. 시간을 박제한 것만 같은 단편집이었다. 작가의 추억일지, 작가가 내심 바랐던 기억을 소설로 적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추억'을 보았다. 모든 추억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모든 추억이 슬픈 것도 아니다. 어떤 추억은 그저 추억이기 때문에 존재하기도 한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그러했다.


언뜻 보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벌이는 연애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냥 '그'와 '그녀'의 이야기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지만 그 사랑은 어딘지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 것일까. 그 결핍이 불편하고 먹먹했다. 자꾸만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이야기가 닮아 있고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꼭 한 사람인 것만 같다. 그리고 이별. 누군가와 헤어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녀와 헤어져야만 했던 이야기. 그녀와 헤어진 후의 이야기. 그것이 불편하고 먹먹했다.


또 한 가지,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어렵다. 초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글이었다. 내가 사는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어서 적은 느낌이 강했다. 이별은 그렇게 초현실적인 것일까. 사랑은 그렇게 현실을 넘어서는 일인 것일까. 어딘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유령의 집>만 해도 그와 그녀가 모텔에서 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 대화는 석연찮다. 무언가 걸린다. 게다가 모텔 직원과의 일도 어딘지 석연찮다. 그야말로 "유령의 집"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닌지라, 난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종옥 작가의 글은 기대가 된다. 어쩌면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던 <작가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던 작가의 고백. 현실과 비현실이 머무는 글 사이에서 건진,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 그것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작가가 좀 더 많은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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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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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의 말대로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였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았다. 대부분의 일들이 불확실한 가운데 벌어지며 그 내막과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임에도, 인간이 선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은 세상의 몇 안 된느 진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것이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것을 결행하려면 진실에 침묵해야 했다. 무엇보다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일도 하는 존재였다.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거짓말을 일삼고 농락하고 사기치고 협박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_77~78p




사람은 언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가. 홀로 있어도 외롭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외롭다. 그렇지만 홀로 있어도 연결될 때가 분명 있다. 그 순간은 너무 옅어서 알아차리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점과 점이 계속 만나면 선이 되는 것이 분명하듯 사람도 사람과 만나면 연결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선의 법칙>을 읽고 나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윤세오, 신기정, 조미연, 부이, 신하정, 세오의 아버지, 이수호, 이수호의 늙은 어머니, 김우술, 신재형. 각각의 인물들은 각기 혼자 있었지만 스치고 만나고 그러면서 '인연'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조금 차갑다. 춥고 외롭다.


윤세오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조미연. 이 두 사람은 확고한 선으로 이어졌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들 사이에 부이가 끼어들면서 선은 점점 옅어진다. 친구라 불리던 이름이 빛을 잃고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한다. 조미연이 3년 후 세오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다단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미연은 세오를 다단계에 끌어들이고 도망친다. 세오는 그곳에서 1년 넘게 있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아득바득 친구, 친구 아닌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거나 사정해서 다단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부이다. 부이는 흔쾌히 세오와 함께 해준다. 그리고 그 역시 조미연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하필이면 연결된 선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라니. 그것은 슬픈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조금은 웃음이 나오는 일일까. 각각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점점이 이어질 때, <선의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학교 선생이었던 신기정은 동생이 죽어서 동생을 추적해간다. 동생이 궁금해서 하나씩 과거를 되짚다 윤세오를 알게 되고 부이를 알게 되고 동생이 다단계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신기정과 윤세오 사이에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선이 연결된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스쳐지나가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 풍경을 누가 알아차리고 누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따라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한 발짝 발을 담그는 것으로 인연은 확실해진다.


삶은 홀로 살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선의 법칙>에 나온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다단계를 하면서 정말 외롭고 고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선 일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순간 연결되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세오가 부이를 감시하고 세오를 팀장이 감시한 것처럼.


신기정과 원도준의 관계도 그렇다. 원도준이 신기정에게 훔친 물건을 조금씩 준 것은 그녀를 곯리기 위해서였다기보다, 그저 하나 정도는 자신이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 그것이 악의든 호의든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 혼자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신하정이 그렇게 죽어버린 것은 혼자 있었으면 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너무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것에 지쳐버려서 이제 혼자 남았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닐까. 예전 트위터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홀로 있었기 때문에 그 외로움을 차지하기 위해 죽어버린 것이라고. 신하정은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데리고 온 동생이다. 그녀는 신기정의 어머니와도 신기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독립적인 존재. 마치 홀로 있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외로움이 그녀 그 자체라면 그녀는 부이야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동아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동아줄이 홀로 떠났을 때 그녀의 심정은, 다시 외로움이 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죽은 게 아닐까. 자살이든 자살이 아니든.


어째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까. '그럴 리가 없는 것'이 인간이라니. 선의도 악의도 모두 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할 수 있는 존재라니. 세오가 이수호를 쫓아다니면서 품은 감정을 봐도 그렇다. 그녀는 절대 그럴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살을 할 리 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미연에게 전화를 받고서 만나지 않는 길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수호에게 증오를 품지 않고 그저 슈퍼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 살아가기 위해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신하정은, 살아가기 위해 물에 빠져든 것이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을 테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한 글이었다. 점점 물속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오가 아버지를 잃고 다단계를 했을 때의 과거를 떠올릴 때 이수호를 쫓아다니면서 본 풍경을 볼 때, 사람이란 수렁에서 빠지면 빠졌지 거기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수호가 빚을 받아내기 위해 인간성을 점점 잃어가는 것처럼. 윤세오가 아버지를 위해 증오를 품는 것처럼.


오직 부이만 헤어나간 것 같다. 신하정은 죽고 이수호는 증오를 품는데 부이는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선의 법칙>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절망에 빠지다가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해준 글이다. 선으로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는 선의도 있고 악의도 있고 인간으로서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오직 그뿐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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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닮은 도시 - 류블랴나 걸어본다 4
강병융 지음 / 난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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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책의 날개 부분에 류블랴나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가 되어 있다.



유럽 한가운데 우리나라 대구광역시의 인구보다 사람이 적은 나가라 하나 있다(200만 명). 국토도 전라남북도를 합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20,273km). 서울에서 서쪽으로 8,530km쯤 가면 이 나라의 수도를 만나게 되는데 면적은 성남보다 조금 크고(163.8km) 인구는 목포 정도 된다(27만 명). 그중 한국인은 열 명 남짓. 그 도시에 동쪽으로 서울에서 대전(140km)만큼 가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하고 남서쪽으로 서울에서 대구(240km)만큼 가면 이탈리아의 미항 베네치아를 볼 수 있으며 동쪽으로 그만큼 가면 헝가리가 나온다. 북동쪽으로 서울에서 부산(380km)만큼 가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가 나오고 남쪽으로 서울에서 군산(206km)만큼 가면 '꽃보다 누나'로 유명해진 크로아티아의 관광명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닿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면적 일부만큼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 그 나라를 알게 된 순간 나는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연 기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또 있구나, 그만큼 설레는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슬로베니아를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글이 사람에 대해 적으면서 조금씩 스며든다. 작가의 아내, 그리고 작가, 그리고 작가의 딸. 한국인이 살고 있는 류블랴나. 과연 어떤 곳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 순간 나는 어느새 이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사진마저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세심하게 찍힌 사진은 류블랴나의 일부였던 탓에 그 너머의 풍경이 궁금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작가는 이 도시가 자신의 아내를 닮았다고 하는 걸까.


세 가족이 살아가는 풍경은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이다. 한국에서 슬로베니아에 처음 왔을 때의 일, 슬로베니아에서 겪은 유학시절,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했던 순간들, 딸이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리고 류블랴나를 둘러보는 일상. 담백하게 풀어가는 슬로베니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 거리가 8,530km나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사는 곳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소박하지만 늘 푸른 나무를 볼 수 있는 곳. 조금 세련된 느낌이 강한 슬로베니아지만 왠지 내가 사는 곳과 다르지 않다면 나 역시 그곳에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은 왜 그렇게 반짝거리는지. 사람인지 도시인지, 아니면 나와 다른 세상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세상 너머에 펼쳐진 곳은 언제나 찬란하다. 류블랴나를 둘러보는 작가의 이야기를 다 읽고나서 느낀 점은 '따스함'이었다. 그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도시마저 따뜻하게 느껴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슬로베니아 사람들을 묘사할 적에 왠지, 아내를 닮았다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따스하기 때문에 그 도시마저 따스하다고 느끼게 된 게 아닐까. 닮았으니까. 닮았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란을 가는 여정이나 조금 자유분방하게 느껴졌던 메텔코바, 슬로베니아의 상징인 용, 그리고 호수, 포스토이나. 낯선 이름에서 보여진 풍경은 봄날의 햇살처럼 푸근했다. 작가의 문장이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따스한 곳에 발을 담그고 직접 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고 싶다 생각했다. 작은 나라지만 작기 때문에 느껴지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인사도 듣고 싶고 나도 그들에게 덕담을 건네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더군다나, 아내를 향한 그 마음. 작가가 얼마나 따스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작가와 아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고 배려하고 서로를 위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작가가 꿈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그 아내에게도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노벨상 만찬에 초대 받는 거!

-당신이 좋은 글을 쓰는 거!(133p)


남편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꿈이 될 수 있다니. 으, 너무 화목해서 부러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대신하여 누군가의 꿈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꿈 자체를 포기한 게 아니라,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그 사람이 사랑해서 그 사람의 꿈을 함께 꿀 수 있다는 것! 그래, 이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의 꿈을 함께 꾸는 것을 꿈꾸는 아내의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아, 이렇게 행복하구나. 그게 책에서 물씬 넘어와 나를 감싸는데 그 감각이 너무 좋았다. 아, 행복하구나. 이렇게 말하니 나도 함께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는 건 조금 죄책감이 들지만(사생활이니까) 엿볼 수 있기에 내가 류블랴나를 알게 되고, 슬로베니아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았다. 베네치아와 가깝고 크로아티아와 가까운 슬로베니아.


어떤 곳일까.

읽으면서 내내 이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읽으면서 내내 그들을 꿈꿨다.


어쩌면 그곳은 샹그리아와 같은 낙원일지도 모르겠다. 꿈꾸지만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그런 세상.

그렇기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류블랴나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만큼 물리적인 거리도 가까웠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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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소년 문학동네 청소년 29
오문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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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비겁함을 이기지 못해 트럭 앞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일까. 비겁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도저히 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투신이다. 주인공이 트럭에 뛰어든 건. 그렇지만 그 어떤 이유가 되었건 그는 살았고 살아났기에 싸우기를 택했다. <싸우는 소년>은 제목 그대로 싸우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이 말하는 어른, 주인공이 말하는 십대. 강자와 약자. 비겁한 자와 강한 자. 싸워야 것과 도망치는 것의 무게. 어찌 보면 주인공이 트럭에 치인 것은 주인공 나름대로의 도피일 수도 있고 주인공 나름대로의 싸움일 수도 있다. 서찬휘라 불리는 한 소년을 위해 했던 행동. 제 자신을 향한 증오와 혐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기지 않을 선택. 그렇기에 눈을 떠 보았던 "싸워"라는 단어가 그를 일으켜세웠는지도 모른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싸워. 지극히 단순한 생의 진리.


서찬휘는 따돌림을 당했다.

주인공은 그것을 방관했다.

안승범은 서찬휘를 괴롭힌 가해자였다.

서찬휘는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저주를 하면서 옥상에서 투신했다.


죽음.

어느 한 사람의 목숨.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아서 함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다. 따돌림이나 괴롭힘, 누구도 알 수 없는 소리 없는 비난. 내가 먹힐지도 모른다는 약육강식의 세계. 먹히지 않으려면 먹는 쪽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교실의 풍경. 그곳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쉬이 편해질 수 없다. 그 진리를 주인공은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지만 그는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서찬휘의 죽음은 그를 뒤바꾸기에 충분하다. 그가 변한 것은 '친구'라는 무게가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도망치다 도망치다가 끝끝내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싸움을 택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산이 누나. 산이 누나는 권투를 한다. 누군가 때려주기 위해 권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주인공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주인공이 왜 권투를 시작했는지 알게 될 때 그녀는 주인공에게 권투를 시작했던 계기를 둘려준다. 그녀 역시 따돌림의 피해자. 그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사람. 주인공은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싸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양아영도, 강준혁도. 양아영은 따돌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에게는 비겁한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될 때의 그 착잡함과 죄책감. 결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속단할 수 없는 것이다. 직접 겪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의 비겁함을 탓할 수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싸우는 소년>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여전히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하고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굴종한다. 이미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이미 너무 많이 어긋났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일까. 수 간호사가 자신의 괴롭힘을 무마하기 위해 후임을 괴롭히는 것 또한 어쩌질 못해 하는 행동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싸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처절하게 싸우고 있을 사람들. 그렇기에 주인공은 끝까지 싸우려고 한 게 아닐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싸워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피할 수 없는 싸움이란 게 있다. 도망치는 게 최선이 아닌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주인공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오문세 작가는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주인공이 진정 싸워야 하는 대상은 안승범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고 넌지시 말해준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어제의 나와 싸워 이겨야 한다. 어른으로 가는 길은, 분명 그럴 것이다. 누군가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제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


싸워.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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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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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희한하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 인물에 집중하여 쓴 글이 많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는 이구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정귀보 씨라는 한 인물에 대해, <조중균의 세계>에서는 조중균이란 사람에 대해, <임시교사>는, 좀 모호한 구석도 있지만 P부인에 대해. 어찌 보면 문학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수상작품집에선 그 한 사람을 대놓고 집중시켰다. 그것은 흥미로웠으며 동시에 재미있었고 또 동시에 씁쓸했다.


먼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다룬 이구란 인물. 이구란 인물이 황실의 마지막 왕자라는 것보다도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분명하지 않아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는 것에 놀랐다. 모국에게도 한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짙은 에스프레소는 향기라도 있지, 이 씁쓸함에는 아무런 향기도 없었다. 그저 씁쓸함만 고요하게 머물러 이구를 바라보게 했다. '시'를 쓰고 싶었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런 이구를 바라봐주지 않았을 때에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씁쓸함'이 이구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시' 대신 '건축'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시'를 쓰는 삶을 간접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말따마다 "건축은 땅위에 시를 짓는 일입니다(11p)"였는지도 모른다. 땅위에 시를 짓는 일. 그는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 작품은 '이구'란 인물에 초점을 두면서 '이구'가 아닌 것을 점진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가령, "김중업"이란 건축가와 같이, 서울 건축물의 "역사"와 같이.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허구인지에 대한 흥미보다도 이 여러가지 요소가 어떻게 "이구"와 연결되는지 그것에 관심을 두었다. 어쩌면 이 글은 "이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글은 건축가였던 "김중업"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한 건축가. 그리고 "밤섬"이 있다. 폭파된 섬. 무국적으로 떠돌던 이구, 프랑스로 망명한 김중업, 폭파당한 밤섬. 그리고 떠돌게 된 밤섬 사람들. 나는 이 글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은 글이었다. 다만 이 글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이해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 이구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들을 하나하나씩 열거해가면서 이구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과 어떤 상관이 있을지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철학적이면서도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적인 것은, 어느 한 부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어느 한 부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허구인지 진실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 모두의 장귀보>는 읽고 난 순간 전율이 일었던 작품이다. 문장, 내용, 서사적인 구조, 정교하게 만들어진 어떤 기계장치를 본 기분이었다. 촘촘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귀보 씨의 삶이 명쾌하게 보인 글이라고 해야 하나.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어디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진실"의 인물. 정귀보 씨가 그러했다. 이 소설에서, 정귀보 씨를 특별하게 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난하게 적지도 않았다. 남들 하는 것처럼 살아갔을 인생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여준다. 이 글의 첫부분을 떠올려도 화가 정귀보 씨에 대해 적어야 할 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고 하지만 덤덤하게 정귀보 씨를 말하는 그 삶은 결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살아온 한 무명화가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에 대해 덤덤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하고 이 글은 어딘지 모르게 이기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네 이해를, 공감도 바라지 않으나 여기 이곳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청중도 독자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글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왠지 정귀보 씨답다고도 생각했다. 마지막에 해변에서 스르르 올라와 한 걸음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했을 작가의 문장처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다 할 감상"을 남길 수 없는 것도 지극히 정귀보 씨다운 느낌이었다. 그것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하다 싶을 정도다. 나는 정귀보 씨의 삶을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 다만 여기, 이런 글이 있노라 몇 줄 적을 뿐이다.


<루카>. 난 이 글이 왜 이렇게 먹먹한지 모르겠다. 먹먹해서 읽고 나서 꿈으로 꾸기까지 했다. 찰나의 오수였으나 꿈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난 것은 내 바람이 아니었나 싶다. 소설 속 인물이 이렇게 꿈으로 스며드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바라서 만나는 게 아닌, 무언가 그들이 원해서 나를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 루카, 나는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퀴어문학이라는 표현도 처음 알았다. 성소수자를 다룬 글을 "퀴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나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왠지 성소수자들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넣어서 말하는 말 같다. 성소수자는 퀴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루카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쩌나. 내 이런 독단적인 마음에 루카처럼 속으로 앓다 그렇게 사라지면 어쩌나. 그것이 쓰리게 아팠다. 나는 그저 이 글을 "루카와 딸기의 가슴 아픈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윤이형 작가는 "평범한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왠지 사랑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조롱처럼 들린다. 평범한 사랑이 있을 리가 없다. 루카와 딸기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가슴이 아픈데, 다른 사랑이라고 가슴이 안 아플까. 루카, 루카, 가만히 부르는 이름. 꿈에서도 나는 루카를 불렀다. 서로 떨어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루카"만"을 불렀다. 루카는 태생적으로 안타까웠다. 신을 모시는 아버지, 성소수자들을 위해 일을 하려는 딸기.... 그들 사이에 "중립"이란 게 있었다면 루카는 그렇게 불행했을까. 어느 누군가를 위한다는 이기적인 행동이 어느 한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참회해야 한다. 루카를 위해. 그러니, "루카"라고 부르는 것조차 나는 숨이 막혀서 꾸었던 꿈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근린>은 지극히 일상적인 글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랬다. 어느 공원이 나오고 수다를 떠는 노부인들이 나타나고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 가을 날씨를 누리는 한 여인이 있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중년의 여자가 있고 엄마와 함께 공원에서 뛰어노는 여자아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고 느낄 만큼 기분 좋은 분위기가 있는 배경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한 여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어색한 것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노부인들을 보면, 똥꿈을 꾼 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삼만원으로 팔았지만 그 꿈의 효험은 꿈을 산 사람이 아닌 꿈을 판 사람에게 돌아왔을 때, 그 기저에 깔린 시기를 보았다. 정말 원하는 것을 다른 이가 혼자 누릴 때 느낄 그런 불쾌함과 배신감.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한 노인 둘이 탈출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정분이 나서. 이 기가 막힌 상황조차 일상처럼 다뤄진다. 마치 자연스레 스며드는 수다처럼. 그러면 아이는? 아이는 행복한 듯 엄마와 함께 공원에 나오지만 엄마에게는 우울증이 있다. 지극히 나른한 일상 아래 깔린 것은 어둡다. 글 제목이 "근린"인 것은 그것을 말하기 위함인가.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 뜻하는 이 단어에서 주는 것이 모든 스토리를 관통한다. 노부인들, 아이와 엄마, 사랑에 빠진 요양원의 노인. 공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가까이 이어져 있다. 그것을 한가로운 일상이라는 무대를 통해 서서히, 조심스레 침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섬뜩했다. 확 드러난 섬뜩함이 아닌 살살 긁어내는 섬뜩함이었다. 그래서 읽고 나서도 무겁고 찜찜했다.


<조중균의 세계>는 독특하다. 튀지도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는 한 교정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나"는 조중균 씨를 동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배려하지 않는 것도 아닌, 사무적인 관계다. "나"를 결코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회사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해란인 다르다. 해란이는 조중균 씨를 동정하고 친해지려고 하고, 자신을 드러낸다. 정규직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길에서 결국 "나"는 정규직으로 남았지만 해란인 그렇지 않게 되었다. 조중균 씨는 독특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조중균 씨야 말로, 자기 자신을 놓지 않은 채 회사에서 "잘" 살아왔던 사람일 수도 있다. 점심식사비를 받은 부분에서 그게 정말 잘 드러났다. 본부장에게 꼬박꼬박 사인을 받으면서까지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면을 증명했단 것은 어찌 보면 희극적일 수도 있겠으나 그 희극적인 것이야말로 처절하다. 누가 보면 "그렇게까지 해서 그 돈을 돌려받아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 나 또한 이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처절"함이야말로, 그런 아득바득 아끼는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가. 그렇기에 조중균 씨는 희극적이 되면서 처절하게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비록 나중에 교정하는 일로 해고되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뜻한 바를 고수하는 것이 조중균씨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멋지지 않나. 해고될지라도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 처절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 그 모습에 나는 아찔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어서.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조중균씨가 가진 처절함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것에 있다. 점심식비를 받기 위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본부장에게 꼬박꼬박 사인을 받은 것,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것에 사인을 받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 교정기한을 어기면서까지 교정지를 붙들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은 조중균 씨가 자기 자신을 놓지 않겠다는 단 하나 가진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존엄이다. 그 모습에 어찌 전율을 하지 않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될까. 어느 책에서건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조중균 씨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후일담을 적은 것도, 어찌 보면, "나답게" 사는 것을 조금이나마 조중균이란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작가"로서의 모습이 그 모습의 본연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단 기분이 든다. 작가란 자기 자신의 모습이 되었기에 조중균 씨를 적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임시교사>는 교사로 한평생 살아온 P부인이 가정교사가 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 엄마나 아이 아빠에게 어떠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속물적이지만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P부인이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타인이란 얼마나 감정을 절제하게 만드는가. 어느 누구에게 손해를 끼쳤다고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글에서 오히려 "따스함"을 느꼈다. 가정교사로 일한 P부인은 교사로 일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전적으로 희생했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정교사가 될 수 없어 임시교사로 전전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가정교사는 완벽하게 그녀를 위한 "임시교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녀의 절제된 행동,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배려, 끝까지 완수하는 책임감.... 어딘지 인간적이면서도 어딘지 차가운 인상을 남기는 그녀에게서 나는 그 모습이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면서 느낀 감정조차,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란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마지막에 한 말조차 그녀가 한 행동이 결코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276p)".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인생을 존중한다. 그 담담한 희생을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나쁜 사람"으로 지칭할 수 있는지, 혹은 반대로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빠진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끈임없이 '다른' '나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_278p


<여름의 정오>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분명 반짝반짝해야 할 첫사랑인데, 어째서 한 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애절함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타카히로가 죽으려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죽음이 반짝반짝할 첫사랑의 느낌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나? 아니다. 나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첫사랑도 반짝반짝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여름을 배경으로 잡아 찬란하지 않은 이야길 적었다. 결코 빛날 수 없는, 조금은 쓸쓸하고 흐릿한 풍경으로 담아냈다. 나는 뜨거운 여름을 상상하며 읽었는데 전혀 뜨겁지 않았다. 첫사랑을 겪어낸 스무 살의 "나"가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니게 되었을 때를 느낄 때, 아, 여름이 뜨겁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납득하고야 만 것이다. 타카히로의 삶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은 없어(301p)". 어느 곳에 살아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었다. 서른 살의 타카히로는 스무 살의 "나"에게 그걸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스무 살의 "나"는 그런 타카히로가 너무 멀리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타카히로가 죽으려 했던 것을 통해, 그녀는 알아버렸던 것이다. 외로운 삶, 을. 그러나 그것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외로움을 알아버렸다고. 그렇기에 여름의 정오는 눈이 따가울 만큼 뜨겁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무엇을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좋았다. 각 인물들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결국 문학은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이 밀집하게 연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독립된 개체가 스치고 만나게 될 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될지도 모르고 느슨하게 연결될지도 모르며 종국에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 속에서 삶은 외로울 것이고 외롭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말하는 "삶"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읽어"가면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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