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겨진 것들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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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중얼거려본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어 하나를 넣은 문장이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처럼 늘어나는 감정의 파도.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서는 '다'에서 어떤 물기가 뚝뚝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 검고 자욱하고 어딘지 모르게 출렁이면서도 진득한 것, 떨어지지도 않고 기름처럼 엉겨붙어서 눅진하게 달라붙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는 감정은 이렇듯 축축하다.

염승숙 작가의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발가락 끝에 힘을 주게 된다. 온몸에는 힘을 빼다가 어느 순간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이를 악다물게 되는 것이다. 어느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그저 무의미하게 넘기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는 것과도 같다. 뭘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를 오래 곱씹듯 염승숙 작가의 책을 곱씹어 본다.

 

 

불가해不可解

'이해할 수 없음'. 사전의 의미는 이렇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은 채, 그저 이해할 수 없다고만 정의되어 있다.

 

이해할 수 없음. 이 문장을 가만히 곱씹다 보면 염승숙 작가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불가해는 이 글 전체에 녹아 있으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간이 아닌 먼 미래, 혹은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을 대상으로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등 언저리에 나 있는 소나무와 같은 것, 또 예를 들면 AI방역으로 인해 오후 4시가 되면 호우가 내린다는 것, 또다시 말하자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 아니면 어쩌면 푸른 먼지가 뒤덮이는 세상과 같은 것. 그래, 말하자면 차갑고 시리고 푸른 것들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결코 현실과는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지도 않은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환상과 가까운 현실'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염승숙 작가의 세계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 바로 위에 어떤 색이나 막이 덧칠해져 본래의 모습을 숨긴 것과 같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염승숙 작가가 말한 '불가해'의 이해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온몸을 열어두고 있다란 몸짓과도 같은 것.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에, 어쩌면 '불가해' 그대로이기 때문에 '환상'이란 것을 넣어버리게 된 게 아닐까.

 

내 눈앞엔 어떤 세상이 있는가. 막상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 내 안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은 「노래하는 밤 아무도」 에서 아버지가 해준 말과 같다.

 

세상은 불가해한 곳이야. 이 고등어처럼 말이다. (86p)

 

눈앞에 있는 고등어를 보면서 하게 될 생각들. 그것이 단순히 소금을 뿌려 구워먹으면 맛이 있는 등 푸른 생선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을 먹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거야.(89p)

 

나를 알게 되면 삶에 조금 가까워지는 것일까. 어째서 염승숙 작가의 책에선 푸른 색이 유난히 많이 나온 것인지, 어째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초현실적인 풍경이 나타나는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초현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결코 한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는 결코 하나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그렇기에 아버지의 말대로, 잘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등에 귀를 하나 더 갖고 있었다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충실히 사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해(36p)

 

문득, 삶이라는 것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는 유난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소나무나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이나 같은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장치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볼 수 있도록, 잘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은 나와 타인을 아울러, '삶'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렇기에 염승숙 작가의 문장은 하나하나 무의미하게 스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문장에서건 한 템포 쉼을 쉬어야 하고 눈을 끔뻑이며 다시 되짚어야 한다. 염승숙 작가가 지닌 문장의 무게는 삶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무겁지만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다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단순히 '환상'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삶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 '나'는 죽은 후 벽돌이 되었다. 무엇이 벽돌이 되게 하는가. "외톨이"다. 현대 사회를 블루의 시대라고 하는 것도, 맨 마지막에 나오는 「청색시대」에서 세상이 모두 푸르게 되어버린 것도 단순히 환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말하지만 정작 그 군중 안에서 고독을 느끼게 하는 것, 군중 속의 고독과도 같은 것이 현대 도처에 푸르게 깔려있다. 어째서 푸른 빛은 우울함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푸른 빛이 쓸쓸하게 넘실거리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푸른 빛을 지울 수 있는가.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언젠가부터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는 개인의 삶은 자살을 부추기고 많은 범죄를 일으키게 하였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인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삶의 여행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난 이야기라기보단 사람과 사람이 헤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현'이란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했는데 삶을 여러 번 살아도 사람은 결국 헤어지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은 그렇게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철저히 외롭게 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삶이라면 자유롭게 살고 싶다. 마네킹에게 대체되기 싫어 스스로 마네킹이 된 여인처럼.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라 할지라도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나를 위해서, 불가해한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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