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열리는 믿음 문학동네 시인선 66
정영효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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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으로 웅크린다. 점점, 점점. 

내 두 팔이 무릎을 끓어안아 허리와 다리가 접히면서 웅크리면 나는 하나의 동그란 점으로 남을 것이다. 안으로 나는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러면 밖이 뚜렷해지리라. 점점, 점점. 밖에서 나는 소리가 뚜렷해지면 안과 밖이 확실해지면 나는 나를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그런 믿음이 필요했다.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 느리지만 조금씩 열리는 그런 열매처럼, 믿음이 열리길 바랐다.

사람들은 믿음이 열리는 나무를 한 그루씩 갖고 있어서, 언제라도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내 안의 내가, 나의 밖의 나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너를 알고 내가 그를 알고 내가 그녀를 알고, 이 세상에서 숨쉬는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A는 B이다"와 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더 깊이 받아들이는 것. 내가 숨을 들이키면 팽팽하게 폐가 부풀어오르듯 그 안에 믿음이 쌓이는 것이라고. 그러니 믿음은 나무에서 열려야만 했다. 사람들이 밤마다 뿌리는 것이 불신이 아니라 그 믿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 안에 그런 믿음이 씨앗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안'이라 불리는 세상과 '밖'이라 불리는 세상이 하나의 선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닌, '안'이라 불리는 세상과 '밖'이라 불리는 세상이 교집합처럼 겹쳐지길 바라는 것. 그 세상에서 나는 나와 너를 잘 알 수 있으리란 믿음. 오직 믿는 행위 하나. 유난히 이곳에 '안'과 '밖'이란 단어가 많은 것도 그런 바람이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쓴 사람의 바람인지 읽는 사람의 바람인지는 그 사이에 들어가봐야 알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너'라는 곳에 가서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풍경을 그린 것도, 그런 소망이 서려 있던 탓이 아닐까. 낯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분명 '나'의 것일까.


나는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나를 들여다보지 않아서 안으로 웅크리는 것에 힘이 들었다. 너무 벅차서 이곳에서 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지만 '너'라는 세상에서, 내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코너'를 돌기 직전 느껴지는 것이 설렘과 두려움이라면, 누군가 만날지도 모르는 설렘과 누군가 떠날지도 모른단 두려움 사이에서 맴도는 것이 '코너'라면 그 모습은 '너'였으면 좋겠다고. 'ㅏ'를 바꾸면 'ㅓ'가 되듯이 '나'를 바꾸면 '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계속 열리는 믿음> 안에서 나는 밖을 꿈꾼다. 너와 함께 달리기를 바란다.

믿음이 열리고 있다.


내가 열리는 시간이다.





이름들/정영효



내가 받은 첫번째 친절은

열두 마리 짐승 중 한 놈과 생일을 엮어 만든 계획

작명은 태내의 이후를 찾아 출생에 보태는 것이지만

간혹 내 이름을 불러보면

먼 소식이 풀리지 않는 사주를 차려놓는다

그렇게 하고, 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

또는 다짐이 나와 다르게 흐르고

문틈에 낀 밤의 외막 같은

몰래 다가오던 적요가 출입을 들킨다


이름이 가진 줄거리는 계속되는 이설

그걸 채우고 죽은 사람은 자신의 명(命)을 탐독했을까

남의 이름을 외울 때 뇌압에 귀가 멍하곤 한다

글자에 묻은 음색의 취향과 얼굴을 함께 떠올리면

인연을 데려온 이력이 궁금하고

낯선 공명이 관계를 꺼낸 채 탁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알아야 해서 곧 숨겨버리는 망각

이름이 처음 만나 베푸는 예의라면

기억하기 힘든 이들은

전래가 어긋난 속계(俗界)를 지닌 걸까

정해진 문답으로 인사하는 순간마다

내 육성을 의구하므로

이름은 나를 훔치기 위한 혐의인지

자주, 잊힌 이름들의 주기가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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