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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바보개와 아가씨
Ciel 그림, 김휘빈 글 / 앨리스노블 / 2015년 6월
평점 :
TL이라고 하는 장르는 처음 접했다. 틴즈러브라고 하던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19금 소설을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최근, 리디북스에서 이런 19금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어쨌든 전자책이어도 책으로 나왔으니 나는 읽고 리뷰를 적는다. 그리고 꽤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꽤는 아니고, 정말 만족스러웠다.
<바보개와 아가씨>는 메르헨 판타지다. 아기자기하고 조금은 부드러운, 그런 느낌. 이 소설의 주인공인 루진과 디하는 남녀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순수한 아이들이다. 그런 두 아이가 축제날, 서로 몸을 뒤엉키고 단순히 본능에 이끌려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디하는 곧 고민에 빠졌다. 이런 위험하고 야한 장난을 서로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쾌감에 이끌려 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루진을 어찌 보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루진의 존재는,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정령의 수호자인 루진은, 그 수호자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야성을 키웠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일 수도 있지만(그래서 제목에 "바보개"가 들어간 것이겠지), 그렇지만 순진하고 낭만적인 그런 늑대정령의 수호자이다. 그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선 철석같이 말을 듣는다. 스무 살이 넘었는데, 애처럼 구는 루진은, 기존의 남자 캐릭터와는 확연히 다르다. 너무 순수하고 때론 멍청하고 또 때론 너무 답답해서.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나는 얼마나 위험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로맨스라 하면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이끌려간다는 구도가 많다. 드라마도 그렇고 책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바보개와 아가씨>에서는 아니다.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디하가 루진을 리드한다. 루진은 얼핏 보면 이끌리듯 하지만, 어느 순간 디하와 나란히 선다. 디하가 둘의 관계에 고민할 때 루진은 완강하게 거부한 것이다. 루진은 디하에게, 언제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결코 필요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관계가 좋다고 말한다. 그게 아니라면 싫다고. 그렇게 두 사람은 어느새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 이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모르리라. 늘 누가 이끌고 누군 따라가는 그런 관계가 아닌, 너와 내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같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관점이 깨어졌다고 해야 하나. 남자와 여자는 각각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관계는 성별로 좌우되는 게 아니었다. 남자라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이 소설에서 남주와 여주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디하"와 "루진"으로 불려야 하는 관계였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의미했다. 사랑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게 아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것이었다.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나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루진은, 디하에게, 단순히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상대가 아닌 루진 한 사람으로서 디하가 봐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위해선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대전제가 필요했다. 너는 여자애니까 이래야 해, 너는 남자니까 이래야 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가 없는지, 이 책을 읽고 확연히 알게 되었다.
작가의 세계관이 너무 자연스레 글에 녹아 있다.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풋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래, 디하와 루진은 사랑을 이제 시작한 초보자들이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선 확고하다. 어쩌면 이건 사랑하는 사이만이 아닌, 단순한 친우 관계에서도 통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불확실하고 서툰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서툴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마치 은은한 달빛처럼 반짝인다. 그렇기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반짝이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닌, 어둠도 좇아야 온전히 서로를 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것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있어서 어때야 하는지 확실히 말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