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밥상 - 농부 시인의 흙냄새 물씬 나는 정직한 인생 이야기
서정홍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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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이자 시인인 서정홍 저자는 이 책에서 농촌에 대한 강한 그의 신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나오고 있는 주제는 바로 농촌, 농업, 생명, 땅이다. 이 주제들은 저자에게 있어 하나와 같은 것으로 저자는 농촌이 희망이며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정직한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주장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이다. 농촌이 쇠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농업이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대다수의 농가들은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수입농산물과 겨뤄야 하기 때문에 가격만 보면 경쟁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이 희망이라는 저자의 말은 왠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내 생각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나 역시도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포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우리나라 헌법은 사유재산을 보장하고 있으며 사람들 대다수가 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나쁠 것이야 없다. 문제는 이를 넘어서 재산을 불리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집중을 하는데 최적인 제도이며 또한 이러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정당화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부채질과 정당화가 인간이란 존재를 한없이 추락시킨다는데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과거의 봉건적 신분제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속박은 해결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라는 말로 대변되는 경제적 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주의가 이를 허용하고 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일어난 백혈병 환자나 쌍용차의 경우만 봐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격차가 사실상 과거 봉건적 신분제와 별 다를 바 없음은 분명하다. 아니, 사람들이 그 격차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과 비슷한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더 최악이라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의 최고 근본인 땅까지 사유화시킴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집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땅이란 다른 물건과는 다르게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품목(?)이다. 필요하다고 더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독점이 쉽게 가능하고 가격 역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우리나라 인구 17%가 60% 이상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을 팔면 미국도 살 수 있을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환경이다. 자본주의의 철학에서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은 인간의 이기적인 행위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념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현실과 들어맞는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이 이념이 자연의 유한함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자연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받아줄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인간의 지속적인 개발과 성장은 자연이 소화하기 힘들 정도였고 그 결과 지구 환경은 파괴되고 자원은 고갈되어가고 있다.(아메리카에서 셰일 가스 층이 터졌다고 하니 이야기가 좀 다를 수 있겠다.)

 

자본주의가 비록 공산주의를 이겼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난점들이 산재해 있는 이상 완전한 제도라고 볼 수 없으며 비인간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사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농부이자 시인인 서정홍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그는 농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아는 사람이다. 도시에서부터 농업과 관련된 사회운동을 해온 그는 직접 농사지어 얻은 작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잘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 땅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그 땅을 경작하는 농부는 성직자다. 땅과 하늘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부는 정직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몸을 부단히 움직이는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쁜 생각을 먹을 겨를도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미친 돈바람으로 인해 농촌이 붕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확실히 농촌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이는 국가적 위기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관여해야할 문제다. 저자의 말만 따라 수입농산품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건강을 떠나서 식량주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외교적으로 불리하며 제대로 된 주권국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농촌이 가지는 존재의미와 그 필요성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결심이 무엇보다 중요하긴 하겠지만 저자와 다르게 현대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다수고 나는 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인류가 이룩한 진보를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과거 수렵채취 생활로 돌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극단적 결론까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60억이 넘는 인구가 농업에만 종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 책의 근본 목적은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대안적 길을 제시하는 것이고 저자가 정책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러한 나의 아쉬움은 투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저자의 생각에 동조한다 하더라도 과연 이를 행동으로 옮길 사람이 몇이나 될지 회의적이다. 그리고 농촌과 도시를 도식적으로 이분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매력적이다. 자신의 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편한 길을 버린 농부로서 느끼는 감정을 글로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저자의 모습은 너무 편한 길만 가고 있는 나에게 왠지 열등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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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 관계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같은 인간과 어울려 이 세상을 살아 나간다. 

때문에 인간이란 누구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계를 잘 풀어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복함을 그만큼 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관계가 행복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해도, 일반인들의 경우 그 관계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지속적으로 입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살다 보면 잘못된 관계를 맺거나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정 맘에 안 맞으면 안보고 살면 그만이다.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대학생 이상 어른들에게만 해당된다. 고등학생 이하의 경우 학교라는 그다지 개방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관계가 잘못 맺어진다면 매우 큰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나는게 바로 왕따현상이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이 현상은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된다. 성급하면서 배려없는 접근은 도리어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헤집는 것과 별 다를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가해자 훈계 및 처벌, 피해자 상담 및 보호라는 방법을 통하여 해결한다. 물론 이러한 해결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어른들이 더 큰 힘으로 아이들의 세계에 관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피해자가 찌질이로 낙인찍혀 더 지속적이고 은밀한 괴롭힘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속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일회성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동안 학교에서 고수해온 방법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임시처방에 불과하다. 

http://ebs.daum.net/knowledge/episode/1214 이 영상을 참고하면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문제는 학교에 만연한 '서열'이라는 이름의 문화다. 공포와 억압을 근본 동력으로 하는 이 문화를 똑같은 공포와 억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넌센스다. 그러나 학교 행정의 움직임 역시 이를 하나의 동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학교가 문제를 감추는데 급급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학교폭력문제를 학교나 교사의 문제로 몰지 않는다. 때문에 이를 감추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학교폭력 문제를 사회 모두의 책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에 상담사, 복지사 등등 다양한 지원인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책임추궁이 먼저 이뤄지기 때문에 사건을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문제가 커지는 경우가 많아지자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통한 해결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교사가 방관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폭력문제는 그 학급 구성원 모두의 문제다. 기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로 봤지만 이러한 일이 학급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 학급 구성원들이 피해자를 돕기보다는 방관하는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를 도우려는 방어자가 3~4명만 있었더라도 학교폭력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학교폭력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상담사인가? 상담사의 조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학교폭력문제는 학급의 문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은 교사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학급의 고착화된 위계질서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것은 교사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적절한 방법 더 필요하다. 

이 어려운 문제는 이미 노르웨이나 핀란드 같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노르웨이의 경우 올베우스 프로그램, 핀란드의 경우 키바 코울르 프로젝트 같은 제도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제도들을 본받아 한국에 맞게 조정한 평화쌤 프로젝트가 대두되고 있다. 

급선무는 교사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애들끼리의 일로 여기면 곤란하다. 교사가 적극적으로 방어자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더불어 학생들의 문화를 괴롭힘으로 가득한 서열 피라미드에서 서로간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민주적인 문화로 바꿔야 하다. 즉 방관자의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학생들을 방어자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때로는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근본으로 두고 있다. 학교의 경우 폐쇄적인 공간에 가깝기 때문에 그 위험도가 현실화하기 딱 좋다. 이러한 학교의 폐쇄성과 위계질서는 피해학생을 자살로 몰고 있다. 더 최악은 이러한 문화가 기존의 방관적인 학생들도 가해자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임기응변의 처벌과 보호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학급의 전체적인 관계, 즉 문화 또는 분위기다. 결코 폭력이 용납되지 않으며 괴롭힘 당하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학교 전체가, 사회전체가 머리를 모아 강구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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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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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의 책은 언제나 읽기 편하다. 물론 그러한 점이 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반 대중들도 읽기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신주 교수는 정말 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강신주 교수의 이번 저작은 그의 전작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편이다. 전작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책은 크게 그가 그동안 다루어온 타자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시와 관련된 철학자의 사상을 이용하여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마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라면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짐멜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본은 곧 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주장을 검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돈 그 자체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만 있다면 더 행복할거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생각이 어느 정도 맞다는 사실이다. 돈만 있다면 예쁜 여자랑 놀 수도 있고, 명예도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의 기회도 보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보장은 미래의 더 나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그 결과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지게 된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된 자본주의는 기존 종교들에게까지 스며들어 자본의 생리를 억제해야할 그들을 변질시키고 있고,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부른 대중문화의 유혹을 통하여 사람들의 연대와 대화를 막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제에서 비롯한 것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더라도 사유재산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재산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 하에서 과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게, 즉 사회양극화를 극복하는 게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뜻한 자본주의란 말을 난 허황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부자들의 기부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을 증가시켜 양극화를 완화시키고 사회 경제 정의를 바로 세워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복지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걱정 근심을 완화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이 아무리 오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기회를 잡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제도도 독점이나 과점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한 그 한계는 명확하다. 이미 돈의 쾌락을 맛보고 돈의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만족을 보장한다 한들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명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말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도나 사회구조의 개선만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공산주의는 도리어 독재로 흐르면서 더 큰 악으로 변질된 바 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을 토대로 한 강력한 복지제도를 자랑하던 유럽은 그리스의 사례를 보듯이 몇몇 국가들은 재정운영의 파탄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강력한 복지제도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란 이야기다. 국가라고 땅파서 돈 나오는게 아니고, 재정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복지제도는 화근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가장 단순한 해답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의 연대와 협력, 상생의 정신만이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인간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는 물론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겠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신의 가호가 자신에게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래야 한다. 자본주의는 좋은 종교는 아니다. 종교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경제제도이고 신을 자본으로 대체한 어떻게 보면 매우 불순한 이단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종교들이 하는 이야기, 인의예지, 사랑, 자비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곧 인간과 인간의 대화, 타자에 대한 배려, 인류애로 이어지며 비로소 경제원리에 의한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삶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강신주 교수가 타자에 대한 접근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책에는 자본주의에 관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타자에 대한 철학이 상충되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칸트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타자란 질적인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점수가 몇점인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중요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량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제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지, 근본적으로 타자는 우리가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는 존재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있어 타자이고 그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존재다.

 인류는 이제 다시 한번 도약해야 한다. 비지니스적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며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상대를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강신주의 이 책은 그동안 그가 해온 작업들의 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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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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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문기사에 현대판 노예제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다수의 댓글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용 일색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노예제는 고대로부터 시작된 아주 뿌리 깊은 제도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시작인 아테네 역시 노예들의 피눈물나는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 아닌가? 노예제는 그 반인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 과거에는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이를 승인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제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노예제를 합법화하지 않는다. 이는 인류가 그만큼 성장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동시에 노예제가 더 이상 국가나 세계 경제를 이루는 근간이 아님을 나타내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나 법과 현실은 다르다는데 있다. 나는 이러한 현대판 노예가 극히 일부의 일이고 이런 일이 전 세계적 문제일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책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 따르면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노예제가 버젓이 존재하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공인까지 받는다고 한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고 책 뒷표지에 나와있는 아마존 독자의 서평에 공감하게 된다.

 

현대의 노예제에 대해서 논란은 있겠지만 일단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무임금이라면 노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예전 중세 농노보다 못한 신세 아닌가? 이러한 노예제가 유지되는 것은 노예들이 가져다주는 ‘이윤’ 때문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런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윤’은 정말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수요가 있다한들 공급이 없다면 노예제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신매매나 사기와 같은 불법적 방법이 동원된다. 이러한 불법은 특히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벌어진다. 구소련 붕괴 후 동유럽이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 교육 수준이 낮고 경제근간이 뒤흔들리는 곳에서 이러한 불법이 자행된다고 한다. 이런 나라들은 불법을 막을 수 있는 여력이 없고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들이 부패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여성들의 경우 겪는 고통은 남성들보다 심할 경우가 많다. 고통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느냐만은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 외에 성적 착취를 당한다는 점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다. 이들은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한 후 쉬지 않고 가사노동에 시달리거나 윤락가에서 성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주인들은 엉터리로 이자를 계산하여 이들을 풀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부려먹는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악한 행위의 주체가 여성일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포주나 여주인이 남성들보다 더 악랄하게 부려먹는 일이 꽤 있는 것 같다. 반대로 노예 상태로 전락한 이들을 구하는 여성들도 꽤 있지만 이러한 노예제를 다룰 때 ‘성’에 관한 선입견으로 접근하면 안 되겠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인신매매나 사기 같은 경우 인류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더욱 내 머리를 헤집는 사실은 네팔이나 인도 같은 경우 사실상 성노예인 여사제 제도가 존재해서 노예제를 종교, 문화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복합적인 문제이며 노예제를 사람들이 아예 긍정한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이 세상에 노예는 없다는 인식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인데 새삼 깨닫게 해준다.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이유 중 무력분쟁과 환경파괴가 있다. 로마가 전쟁이 없어진 후 노예들이 급감하여 사회혼란이 일어난 것처럼 전쟁과 노예제는 가까운 관계에 있다. 현 무력분쟁이 휘말린 지역은 정부나 반군이나 모두 어린 아이들이나 성인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어 전쟁에 참여시키고 있다. 인권이라는 이름과 국제사회의 중재는 이 지역들의 혼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환경의 파괴는 그 지역 공동체의 근본을 무너뜨려 이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환경파괴야 어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지만 그 결과 노예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이 노예들이 다시 환경의 파괴에 종사하게 되는 악순환적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로로 노예가 되는 이들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환경, 그리고 장시간의 노동으로 인해 영양실조나 척추 불구와 같은 건강상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각종 성병에 노출되어 고통스러워한다. 대부분의 노예주들은 이들의 고통에 큰 관심이 없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의 소모품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인권에 대한 이론을 고찰하지 않더라도 노예제는 직관적으로 볼 때 폐지되어야 한다. 노예제는 범죄 네트워크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에 매우 적은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다. 노예제가 폐지되더라도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인류의 윤리적 수준 역시 노예제를 혀용하고 있지 않다. 과거와 달리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에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단위의 주체들에게 제안을 던지고 있다. 이 중 개인들이 실현할만한 것들도 꽤 있다. 먼저 우리는 퇴직 기금 같은 자산을 노예제를 이용하고 있는 회사들에게 투자하지 않을 수 있다. 국회의원들에게 탄원서를 보낸 수도 있으며 주변의 노예제의 징후를 감시할 수도 있다. 감시는 매우 중요한데 만약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앞의 신문기사의 여성이 그러한 일을 당할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주변사람들이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다면 이장문 씨와 같은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특기나 기술을 노예제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에 제공할 수도 있고 공정무역 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개인이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효과적인 활동이다.

 

여러 가지 이유와 경로로 노예제가 존재하며 이는 우리의 인간성을 위협한다. 비록 아주 적은 숫자나 지역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노예제를 인정한다면 인권은 위협받을 것이고 우리 역시 이러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우 이 책의 내용과 같은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본가가 주인이 되고 노동자가 노예가 되는 노예제에 가까운 일들은 벌어지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언제 일자리에서 쫓겨날지 걱정해야 하며 물가는 오르는데 최소임금은 아주 조금 오르고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노예제가 없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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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 / 한문화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경제사상은 정치, 문화, 심지어 교육에까지 침투되어 여타 물건은 물론이려니와 이제는 사람까지도 수치로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속성 중에 숫자로 파악할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도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 더 있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들은 숫자로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숫자에 집착하다 못해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삶과 죽음 중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이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사회문제로 공동체 차원에서 나설 문제인 것이다.

 

교사들 역시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몇 명의 학생이 참석했는지, 부진아 숫자는 없는지, 전국에서 몇 등을 했는지 등등 많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수치화가 꼭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필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교육의 본질인가?

 

이러한 시달림에서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열정이나 제정신을 유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같은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이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리가 있다. 숫자의 압박 속에 교사들은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하나의 숫자로 대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학생과의 마주침에서 이를 억제하려 한다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교사들은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교육적 열망이 식어가고 그 자리에 회의감, 무력감이 자리 잡게 되어 현실에 함몰하게 된다.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냉소로 대하고 별 수 없는 거라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교사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봐야 옳다.

 

그러나 사회문제로만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사로서의 소명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저버리기에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에 너무 무겁다. 비록 버거워도 교사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들의 딜레마를 극복하는데 파커 J.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서 내면의 풍경을 가꾸는 작업을 이야기 한다.

 

그는 외부의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활동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외부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외부의 억압에 인간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마 현실에 냉소적인 사람들도 이러한 결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좋은 교구와 실력있는 강사의 설명, 문제집, 질 좋은 참고서만 있으면 학업성취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교과부의 고위 관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막대한 예산을 기초학력 증진에 퍼붓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듯 그런 방식으로 부진아 문제는 극복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비난은 학교가 감당하고 있다.

 

물질적인, 기술적인 투자만으로는 학력을 증진시킬 수 없다. 공부란 학생이 하는 것이고 학생의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훌륭한 테크닉이 아니라 교사라는 존재 자체가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신뢰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의 자아를 열어 학생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교육은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미신이 아니다. 브리크와 슈나이더에 의하면 신뢰관계-교사와 행정가,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신뢰-가 일반적으로 학교의 역량을 좌우하는 최고의 결정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외적 요소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의 논문에 실린 내용에 이러한 실험결과가 나와 있는데 1994년에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 학교가 신뢰도가 낮은 학교보다 읽기와 수학 점수에서 3배나 더 급격한 향상을 보였다고 한다. 1997년에는 신뢰도가 낮은 학교들은 일곱학교 중에서 한 학교 정도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선 데 반해, 신뢰도가 높은 학교들은 두 학교 중에서 한 학교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섰다고 한다.(p.23)

 

이러한 신뢰 관계는 인간의 마음활동-공감, 헌신, 동정, 인내-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 활동은 우리의 마음, 즉 내면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결론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현 한국 교육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바로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스킬, 즉 방법론이다. 과거의 경직된 수업모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교사들은 만능열쇠를 찾듯이 어떻게? 무엇을? 왜? 라는 질문에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방법론적 환원주의로 교육의 경직화, 획일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고 파머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테크닉 역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교사의 내면의 지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누구?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이 바로 인간의 마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다.

 

혹자는 배움은 학생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교사가 아니라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교사가 필요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배우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학생이 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 배우는가? 어른과 접촉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소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막대하게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아무런 조력 없이 학생 혼자서 습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시간낭비다. 때문에 교사의 조력이 필요하며 교사는 학생의 배움의 환경을 창조 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교사 역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 자신이 학생에게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이다.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이다”라는 프레데릭 뷔흐너의 말처럼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직업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소리야말로 진정한 소명의식이며 교사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다. 이러한 목소리와 자신을 단절시킨다면 무기력과 허무감,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며 결국 교육은 실패하게 된다.

 

공포는 학교의 조직을 지배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다. 외부에서 작용하는 권력이 학교를 다루기 위하여 택하는 것이 바로 공포다. 한국의 교사들은 이러한 공포에 굴복하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 특히 승진을 생각한다면 위의 권력에 굴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사들의 생태는 교실에서도 똑같이 반영되어 경력과 다른 후광으로 자신을 가리고 학생들을 공포로서 통제하게 만든다.

 

이러한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교실에서 공포로서 자신을 감추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어의 권위라는 단어는 authority 인데 author은 우리말로 저자 즉, 권위의 주인을 의미한다. 권위는 권력과 다르다. 권위는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의 내면에서 비롯된다.

 

내면의 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고려해 보건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간 서구 전통에 도도하게 흐르는 객관론이라는 거대담론은 이러한 내면의 힘을 부정하는 듯하다. 객관론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주관에 의해 진리를 오염시키는 행위가 된다. 때문에 사물과 거리를 두고 분석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객관론은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약관화하다. 객관론의 신화는 자신만이 옳다는 전제주의나 타자의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제1,2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며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객관론의 신화를 부정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철학의 작업 외에서 객관론의 신화를 뒷받침해온 과학 역시 새로운 관점을 내세우고 있다. 생물학은 과거의 약육강식의 자연관에서 탈피, 상호협력과 공존의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물리학은 기존의 원자론에서 벗어나 입자간의 관계와 전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양자론이야 말로 객관론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과학이론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란 주관과 관련 없는 개념 덩어리가 아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설명해야하는 대상이 있고 프로인 교사가 있으며 아마추어인 학생이 있는 객관론의 신화에 근거한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주제를 중심으로 무수한 인식자들이 의사소통하는 진리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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