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관계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같은 인간과 어울려 이 세상을 살아 나간다.
때문에 인간이란 누구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계를 잘 풀어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복함을 그만큼 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관계가 행복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해도, 일반인들의 경우 그 관계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지속적으로 입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살다 보면 잘못된 관계를 맺거나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정 맘에 안 맞으면 안보고 살면 그만이다.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대학생 이상 어른들에게만 해당된다. 고등학생 이하의 경우 학교라는 그다지 개방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관계가 잘못 맺어진다면 매우 큰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나는게 바로 왕따현상이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이 현상은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된다. 성급하면서 배려없는 접근은 도리어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헤집는 것과 별 다를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가해자 훈계 및 처벌, 피해자 상담 및 보호라는 방법을 통하여 해결한다. 물론 이러한 해결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어른들이 더 큰 힘으로 아이들의 세계에 관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피해자가 찌질이로 낙인찍혀 더 지속적이고 은밀한 괴롭힘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속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일회성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동안 학교에서 고수해온 방법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임시처방에 불과하다.
http://ebs.daum.net/knowledge/episode/1214 이 영상을 참고하면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문제는 학교에 만연한 '서열'이라는 이름의 문화다. 공포와 억압을 근본 동력으로 하는 이 문화를 똑같은 공포와 억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넌센스다. 그러나 학교 행정의 움직임 역시 이를 하나의 동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학교가 문제를 감추는데 급급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학교폭력문제를 학교나 교사의 문제로 몰지 않는다. 때문에 이를 감추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학교폭력 문제를 사회 모두의 책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에 상담사, 복지사 등등 다양한 지원인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책임추궁이 먼저 이뤄지기 때문에 사건을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문제가 커지는 경우가 많아지자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통한 해결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교사가 방관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폭력문제는 그 학급 구성원 모두의 문제다. 기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로 봤지만 이러한 일이 학급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 학급 구성원들이 피해자를 돕기보다는 방관하는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를 도우려는 방어자가 3~4명만 있었더라도 학교폭력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학교폭력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상담사인가? 상담사의 조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학교폭력문제는 학급의 문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은 교사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학급의 고착화된 위계질서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것은 교사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적절한 방법 더 필요하다.
이 어려운 문제는 이미 노르웨이나 핀란드 같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노르웨이의 경우 올베우스 프로그램, 핀란드의 경우 키바 코울르 프로젝트 같은 제도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제도들을 본받아 한국에 맞게 조정한 평화쌤 프로젝트가 대두되고 있다.
급선무는 교사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애들끼리의 일로 여기면 곤란하다. 교사가 적극적으로 방어자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더불어 학생들의 문화를 괴롭힘으로 가득한 서열 피라미드에서 서로간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민주적인 문화로 바꿔야 하다. 즉 방관자의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학생들을 방어자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때로는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근본으로 두고 있다. 학교의 경우 폐쇄적인 공간에 가깝기 때문에 그 위험도가 현실화하기 딱 좋다. 이러한 학교의 폐쇄성과 위계질서는 피해학생을 자살로 몰고 있다. 더 최악은 이러한 문화가 기존의 방관적인 학생들도 가해자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임기응변의 처벌과 보호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학급의 전체적인 관계, 즉 문화 또는 분위기다. 결코 폭력이 용납되지 않으며 괴롭힘 당하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학교 전체가, 사회전체가 머리를 모아 강구해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