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책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심지어 이제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이라는 매체에 접근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자신의 폰을 켜고 터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꽤 드문 편이다. 세계 출판률 7위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읽는 사람만 읽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출판사가 영세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벼리라고 부르는 자녀에게 마치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쓰여 졌다. 과거 책에 미치고 책만 알고 살아간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통하여 독서가 무엇이며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독서광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물론 옛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보다 책을 안 읽는다고 비판한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 수험서 위주의 책이 제일 잘 팔리는 현실에서 이 책에 주는 울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과거 독서가들은 독서를 어떻게 했을까? 독서는 크게 다독과 정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독이란 고래가 마치 한 번에 물고기를 빨아들이듯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밀도가 떨어지는 책들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을 때 적합한 방법이다.

 

정독은 소가 여물을 먹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듯이 읽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을 읽을 때 적합하다. 주로 사서오경과 같은 기본 경전, 오늘날로 치자면 고전이 이에 해당된다. 고전보다 가볍고 물렁물렁한 책이 인기를 끄는 지금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다독과 정독, 둘 다 독서가에게 필요하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든 중요한 책의 경우 정독과 다독을 병행해야 한다. 정독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황, 이익, 박지원, 정약용, 특히 김득수와 같은 독서가들은 기본 경전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암기력이 뛰어나서 외운 것이 아니다. 정말 하루에 규칙적으로 여러 번 외워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거의 우공이산 수준으로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금씩이든 시간나는 데로 꾸준히 읽는다면 한 책을 만 번 이상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암기보다는 이해가 강조되는 시기고 무조건 암기의 부작용을 겪어봤기 때문에 외우기에 대한 찬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최소한의 암기는 필요한 법이고 책에서 암기만 했다고 경전을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외우기는 과거 선비들의 학습 방법 중 하나로 경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의 결과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무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저자가 왜 그렇게 썼는지 따져봐야 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책을 읽음으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독서가들의 독특한 독서법이 더 있는데 바로 낭독 또는 음독이다. 오늘날 낭독은 시라는 장르에서 국한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 외에서 낭독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마도 한자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 문자를 쓰던 시기를 벗어낫기 때문 아닌가 싶다. 여하튼 책을 읽을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설령 옆에 누가 있더라도 낭독보다는 묵독을 하는 것이 대다수 현대 독자들이다.

 

그러나 낭독의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고, 비록 입을 열지 않더라도 어감과 같은 말의 맛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마치 입을 열어 읽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 과거 종로담베가게 살인사건만 보더라도 낭독의 힘은 분명하며 과거 서구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가끔은 옛 선비들처럼 입을 열어 책의 글귀를 직접 읽는 것도 나쁘지 않는 듯 싶다.

 

위편삼절이란 말이 있다.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 그 가죽끈이 3번 끊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다. 오늘날에는 많이 읽는다고 책의 끈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공자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게다가 너무 많은 책이 출판되는 지금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왠지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도 다시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듯 이미 읽었던 책도 특히 고전의 경우 다시 읽으면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 천성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진 못하지만 꾸준히 읽어야겠다. 그렇다면 나도 과거 독서가들에 버금갈 수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책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심지어 이제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이라는 매체에 접근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자신의 폰을 켜고 터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꽤 드문 편이다. 세계 출판률 7위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읽는 사람만 읽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출판사가 영세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벼리라고 부르는 자녀에게 마치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쓰여 졌다. 과거 책에 미치고 책만 알고 살아간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통하여 독서가 무엇이며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독서광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물론 옛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보다 책을 안 읽는다고 비판한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 수험서 위주의 책이 제일 잘 팔리는 현실에서 이 책에 주는 울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과거 독서가들은 독서를 어떻게 했을까? 독서는 크게 다독과 정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독이란 고래가 마치 한 번에 물고기를 빨아들이듯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밀도가 떨어지는 책들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을 때 적합한 방법이다.

 

정독은 소가 여물을 먹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듯이 읽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을 읽을 때 적합하다. 주로 사서오경과 같은 기본 경전, 오늘날로 치자면 고전이 이에 해당된다. 고전보다 가볍고 물렁물렁한 책이 인기를 끄는 지금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다독과 정독, 둘 다 독서가에게 필요하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든 중요한 책의 경우 정독과 다독을 병행해야 한다. 정독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황, 이익, 박지원, 정약용, 특히 김득수와 같은 독서가들은 기본 경전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암기력이 뛰어나서 외운 것이 아니다. 정말 하루에 규칙적으로 여러 번 외워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거의 우공이산 수준으로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금씩이든 시간나는 데로 꾸준히 읽는다면 한 책을 만 번 이상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암기보다는 이해가 강조되는 시기고 무조건 암기의 부작용을 겪어봤기 때문에 외우기에 대한 찬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최소한의 암기는 필요한 법이고 책에서 암기만 했다고 경전을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외우기는 과거 선비들의 학습 방법 중 하나로 경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의 결과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무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저자가 왜 그렇게 썼는지 따져봐야 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책을 읽음으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독서가들의 독특한 독서법이 더 있는데 바로 낭독 또는 음독이다. 오늘날 낭독은 시라는 장르에서 국한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 외에서 낭독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마도 한자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 문자를 쓰던 시기를 벗어낫기 때문 아닌가 싶다. 여하튼 책을 읽을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설령 옆에 누가 있더라도 낭독보다는 묵독을 하는 것이 대다수 현대 독자들이다.

 

그러나 낭독의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고, 비록 입을 열지 않더라도 어감과 같은 말의 맛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마치 입을 열어 읽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 과거 종로담베가게 살인사건만 보더라도 낭독의 힘은 분명하며 과거 서구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가끔은 옛 선비들처럼 입을 열어 책의 글귀를 직접 읽는 것도 나쁘지 않는 듯 싶다.

 

위편삼절이란 말이 있다.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 그 가죽끈이 3번 끊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다. 오늘날에는 많이 읽는다고 책의 끈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공자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게다가 너무 많은 책이 출판되는 지금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왠지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도 다시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듯 이미 읽었던 책도 특히 고전의 경우 다시 읽으면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 천성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진 못하지만 꾸준히 읽어야겠다. 그렇다면 나도 과거 독서가들에 버금갈 수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자연과 문명


동양과 달리 서양은 자연과 인간을 공존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원론으로 구분하여 이를 정복 또는 지배해야할 대상으로 본다. 이는 그들 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두 기둥,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공통의 생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존을 강조하는 동양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현대과학문명을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송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우월했던 동양의 과학이 서양에 추월당한 것은 그들이 자연을 객체로 보고 관찰하고 연구하고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들은 서구 열강에 짓밟힌바 있고 그 기억은 우리나라가 서양문명에 받아들이고 서양의 사고에 맞추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 들어서 서양에서는 동양의 노자, 장자와 같은 사상가를 연구하고 자연의 공존에 대해 관심이 가지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문명의 고도화가 자연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분리시켜 인간을 자연의 우위로 놓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헤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거에 비해 늘어난 자연재해와 상승하는 대기 온도는 자연의 변덕인 것도 있겠지만 인간의 문명에 영향 받은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연과 문명을 인간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문명을 만들고 그 혜택을 받아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연의 자식으로서 그 품을 그리워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나 역시 인간의 문명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자연의 장엄함과 웅장함, 그리고 다양함에 마음을 빼앗긴다. 모순적인 인간이다.

 

이 책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의 저자 호시노 미치오는 일본인으로 알래스카에서 장기 거주하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다. 물론 단순한 사진작가라고 보기에는 그의 글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은 동양이지만 서구의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전적이 있고 최근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이다. 현대문명을 향유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래스카를 동경하여 그곳 사람들과 연을 맺고 그 삶을 관찰한 이 남자는 확실히 별종이다.

 

그는 많은 사진과 깔끔한 글로 알래스카라는 아직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이야기해주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노래한다.

 

이에 따르면 알래스카라는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지금 매장되어있는 세계 최대급인 유전을 개발하려는 세력과 그곳의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보호하려는 세력이 맞부딪히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인간의 문명과 자연이 그 힘을 겨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시간은 근대에 들어와서 항상 문명의 편이었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은 호시노 미치오의 시간에서 이미 파괴되고 있는 중이고 유전개발은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니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원주민들의 삶이 최선이라는 보장이 없는 이상, 그들 전통이 무너져가는 것이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사회복지제도1)처럼 분명 미국의 개발과 개입으로 그들이 얻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고 미국의 자본주의적 삶이 최선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땅을 개인이 소유하고 자연을 개발하는 행위가 인간의 삶을 항상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집을 구하기 힘들어 결혼을 포기하는 남녀가 늘어나는 지금 땅의 사유화가 옳은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경제논리로 재단하여 불법침입 운운하는 것은 전에 읽었던 나무소녀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과연 땅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이와 대조적으로 알래스카 사람들의 삶은 자연친화적이다. 그들은 자연을 경이로 대하고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고래를 잡으면서 고래에 대한 감사제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2)은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불교 용어를 차용하면 인드라망 사상이다.3) 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야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최근에는 문명의 폐해가 큰 탓인지 이들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 역시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 자연이 없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임을 알고 있으며 자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케니스 누콘처럼 기존의 삶을 고수하는 것도 나름 멋진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그 생존을 위해 탄생한 것이다. 과연 문명이 사라지면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멋진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케니스 누콘과 같은 사람도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고 집이라는 인간이 쉴 수 있는 곳을 만든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아내라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보자.

 

우리는 자연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자연과 같진 않으며4)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자연은 변덕스럽기도 하며 언제든지 인간의 삶을 침범할 준비가 되어있다. 사실 보통 우리가 예찬하는 자연은 이미 우리 손에 길들여진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을 다룰 능력이 있는 특별한 존재다. 또한 동시에 자연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또한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의미한다. 자연의 변덕에 대해서는 맞서야겠지만 자연의 질서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것이 문명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

 

지금처럼 자연의 질서를 아예 붕괴시키는 것은 문명의 근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다. 알래스카 원주민처럼 자연을 경이로 보는 샤머니즘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자연에 예의를 갖추는 그들의 정신은 배울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의 만든 많은 발명품은 자연에서 따온 것이 많다.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가 동물들의 사회질서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아직도 우리는 자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젊은 원주민의 삶


한편으로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호시노 미치오가 이 책을 낼 무렵 이미 그들의 삶은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하긴,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코카콜라를 먹는다고 하는데 미국 땅임이 분명한 알래스카가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한 원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저자의 친구 미러처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원주민들이 많은 모양이며, 동시에 자살률도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원주민들은 미국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되니 아마 차별도 받을 것이다.

 

과거 인디언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듯 하다. 정치적 알력 문제가 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보호구역을 설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원주민의 삶을 보장해줄 수 없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그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곧 있으면 사회에 나오게 된다. 한국 사회는 과연 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개인의 노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것이 긍정심리학의 한계다. 기본적인 사회구조가 모든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다. 그들이 드는 사례들은 다 일부로 그와 비슷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 중에 실패한 사람들도 상당수라는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동화정책에 의해 그들의 전통과 문화는 해체된 상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미국 사회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정신적 아노미 현상에서 알래스카 젊은이들은 방황한다. 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육이다. 또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기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책 96쪽에 따르면 서로 다른 부족들이 손을 잡고 조금씩 일어서려 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미미한 움직임이지만 이는 분명 희망의 씨앗이 싹트는 것이다.

 

최근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을이 혼자서 갑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자신이 을이라면 다른 을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자기 몫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1) 책에 따르면 이 사회복지제도가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한다.

2) 비뚤어지게 보면 악어의 눈물이긴 하다. 그리고 굳이 잡을 필요가 없는 고래를 관습에 의해서 잡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말 자연친화적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그냥 과거에 해왔던 데로 하는 것일 수도?

3)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라고 해야 옳다. 식물은 다른 생물에 의존하지는 않으니까.

4)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 큰 자녀 싸가지 코칭 - 1318 어려운 자녀 쉬운 사용 설명서
이병준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비는 처음부터 화려한 날개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에 나비는 알에서 그리고 애벌레로 태어난다. 애벌레 상태에서 열심히 먹고 자고 성장한 후 성충이 되면 스스로 뿜은 실로 고치를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 번데기가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시 지내다가 마침내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로 세상에 나타난다.

 

인간도 가히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어린 시절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 가능성을 내보이지 못한다.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세상에 펼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심이 약한 청년들이 사회문제가 되는 시대다. 그 독일에서도 젊은이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아 문제라고 한다.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는 대한민국의 경우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대학교육까지 받는 우수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의 초점은 젊은 세대가 아닌 이들을 키워낸 부모 세대에 맞춰져야 한다. 현 부모 세대는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희생한 세대다. 반면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가망이 아주 높은 세대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부모가 해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막상 부모의 부양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즉,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겠다는 것인데 보통 이런 경우 싸가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지금 부모 세대는 싸가지 없는 자식 세대를 길러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요즘 아이들은 매우 자유분방하며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다. 게다가 부모를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당연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족 속에 살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현상이다.

 

풍족 속에서 부모에게 말만 하면 다 해주니 아이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돕는다 말하지만 잘 보면 돕는 게 아니라 애들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마땅히 가르쳐야할 사회규범을 애들 기죽인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니 아이들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자식 세대들이 부모를 제대로 모시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마마보이, 파파걸로 대변되는 부모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나이에 맞는 행동을 가르쳐야 한다. 나이에 맞는 행동이란 곧 ‘싸가지’로 아이들에게 싸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을 옹호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며 마냥 사랑으로 감싸주면 해결된다는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문제다.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책의 저자 이병준은 책 내용에서 닥터 지바고라는 인물로 화하여 아이들이 싸가지가 있는 나이에 맞는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이 되게 풀어내고 있다.

 

책 내용의 전개에서 두 축은 바로 경숙(민들레)과 예준이다. 예준이의 경우 ADHD로 판정을 받고 난 후 완전히 삶이 달라졌다. 나는 ADHD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준이의 경우와 같이 이를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과 나이가 들면 자연치유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를 너무 의식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경숙은 속상해하면서도 예준이의 요구에 순응한다. 닥터지바고는 이를 동반의존 관계라 설명했는데 한국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 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정말 맞는 말이다.

 

닥터 지바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ADHD가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부모는 나이에 맞는 행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또한 제2의 출생, 과거라면 성년식이라고 불렸을 과정을 통과해야만 어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은 성년식이라는 과정이 없어지고 대학생이 되면 자기들끼리 자축하는 행사를 가지는데 생각해보면 성년식이라는 과정은 어른들과 함께 하는게 맞는 것 같다.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여 현실을 극복할 힘이 없는 자식 세대들에게 자발성과 자기 통제력을 길러주어 궁극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동 중심 교육학, 심리학의 영향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맥락에 따라서 맞는 말이지만 과잉사랑으로 인한 문제일 경우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 따라서 돌봄에서 교육으로 부모 자신도 성장할 필요가 있다. 자식을 돌보기만 해서는 자식이 성장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원리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선을 그어야 한다. 측은지심에 의해 자식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자식에게 지는 것을 떠나서 해악이 된다. 측은지심을 강조했던 맹자가 타에 추종을 불허하던 독설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음의 표현은 예라는 형식에 의존해야 한다.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앞으로 사회에 나가 도움이 될 원리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좀 의외였던 것은 명령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세한 설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닥터 지바고의 말에 따르면 길게 설명하는 것은 잔소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굵은 소리, 즉 확실한 기준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원리 원칙을 강제할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따라서 아버지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줘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보통 집안일에 잘 관여를 하지 않는데 이는 자식교육을 여자에게 떠넘긴 것으로 스스로 아버지 역할을 제한시켜 버린 것과 같다. 아버지가 부재한 아이들에게 생기는 문제점을 생각해볼 때 아버지가 돈만 벌어다 주는 역할에 만족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겠다.

 

보통 상담이라고 하면 공감을 최우선으로 둔다. 나는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는 이야기가 옳다고 여기는 한편 가끔 불편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잘못한 사실이 엄연히 있는데 공감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해소시켜 줬다.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공감과 더불어 확실한 기준 하에 아이들의 싸가지를 바로 잡는 게 필요하다. 아이들의 요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은 많은 보탬이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과 인간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같이 해온 사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다 제외 시켜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란 것도 전쟁의 틈바귀에서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 떨궈내고 싶어도 떨궈낼 수 없는 그런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어떤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도둑질이 항상 있어왔다고 해서 도둑질을 용납해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비록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위험한 행위다.

 

이 책 <나무소녀>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책이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지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나무소녀가 겪는 책 내내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경험들은 인간이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전쟁이란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일어난다. 평화주의자들의 일각에서 대두되는 ‘군대무용론’이 얼마나 허접한 이론인지는 상식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군대가 있어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있기에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무용론’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무책임한 제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왜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 책만큼 한 국가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단위든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폭력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폭력에 의한 지배욕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만약 자신과 같은 평등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지배욕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보면 대다수가 강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대다수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행한 폭력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남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1)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의 ‘라티노’라고 불리는 기득권층은 이러한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인디오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사용하여 이들을 착취한다. 아마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니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그런데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종차별은 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의 수준이 높아지고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차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에 대한 차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선포하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축약하면 ‘선민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선민사상’의 무서운 점은 이게 어떤 사상, 신념체계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데 있다. 자신의 것만 소중하다,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고 언제든지 폭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2)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에 의한 인종청소 사건이다.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독일인]이 가장 우수하며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집시, 유대인들은 쓰레기 인종으로 반드시 멸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아우슈비츠, 즉 홀로코스트다.

 

히틀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럽 열강의 지배자, 시민들은 대다수가 백인들이 황인,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존재하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의 차별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동남아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이 존재한다.3)

 

총칼로 이루어지는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은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문화에 대한 증오 역시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우려되는 움직임이다.4)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지속되면 인간은 광기에 휩쓸리게 된다. 시위자들과 맞서는 전경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단 아군이 다치기 시작하면 정의, 도덕 같은 관념들은 힘을 잃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일단 이기는 것이 중요해 진다. 평화란 말은 바닥에 쳐 박히며 생존이라는 가치 앞에 인간의 존엄은 사라진다. 가브리엘라는 그녀가 겪은 험하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5)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돈 앞에 인간의 생명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것을 모른 척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휩쓸려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우습게 여긴다. 우리와 ‘라티노’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평화로운 사회란 인간의 존엄이 우뚝 선 사회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훌륭한 ‘시민’이다. 민주주의는 그에 걸 맞는 ‘시민’에 의해 유지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소수에 의한 참주정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의 족쇄에 사로잡혀 자본을 많이 축척하고 있는 자본가를 우러러보며 자본의 먹이그물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고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면 탄압받는다. 뭐, 노동자 계급[블루컬러]의 사람들도 자기 자식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별과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대만이 사람을 차별하려는 시도와 이로 인한 비인간화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만이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연대가 차별을 위한 모든 시도를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 한국 교육은 과연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주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이 원하는 숙련된 노동자만을 ‘생산’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상으로 이 사상의 원류인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논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발전에 초점을 둔 것은 그 당시에 획기적인 일로 오늘날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어느 사상이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무조건 지켜야한다는 율법주의자들처럼 현대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경쟁, 기업의지를 교리처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6) 그 결과는 양극화 및 세계경제 침체다. 경쟁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의 경쟁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떨궈지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비능력이 없을 것이고 가면 갈수록 소비능력이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밥을 몇 끼 먹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소비력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이고 이는 자본의 순환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종적인 결과는 대공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매력에 홀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위해 봉사해야하는 자본에 스스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대다수다. 과거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의 이라크 공격에 찬성하는 미국인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이라크 공격에 찬성한 이유는 정의 실현보다는 기름값 때문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전쟁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다.7)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189쪽에서 가브리엘라는 마야인들의 삶과 그링고들의 삶을 비교한다. 땅과 하늘과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이루어진 가브리엘라의 마을과 자기들이 만들어낸 물건들로 둘러싸인 미국의 도시.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가? 지나친 개발로 염증이 난 현대인 입장에서 아마 전자가 더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사고의 전환은 필요하지만 극단적인 인공주의에서 다시 극단적인 자연주의로 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는 자연이 우리 인간을 도와주고 인도한다느니, 자연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서 그 현명한 계획을 인간이 실현하도록 북돋아주고 밀어준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왠지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것도 그럴 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부두 노동자로 살았던 에릭 호퍼에게 자연은 언제나 고통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다. 자연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자연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자연이다. 이들이 자연을 찬양하는 모습은 과거 선비들이 정자에 앉아 자연이 아름답다고 시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편하게 자연을 예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일반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모른다. 자연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구현되어야지 이를 교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소녀 가브리엘라가 겪은 전쟁도 참혹한 것이지만 이 지구상에는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군벌들의 경쟁으로 힘없는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나무소녀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와 환경에서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마리오의 말처럼 우리가 싸워야 할 적과 치러야 할 전쟁은 한 둘이 아닌 것이다. 삼성의 백혈병 노동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고 쌍용차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역시 현존하며 최근에는 남성연대라는 기괴한 단체도 나타난 상태다.

 

불합리와 부정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해 가고 있다.

 

가브리엘라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외면한 자신을 저주하며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장 크게 저버린 행동이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책의 끝 부분에서인데 가브리엘라는 결국 부모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수용소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후퇴가 아니며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볼테르의 말처럼 자기 정원을 가꾸어야 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8) 그리고 언젠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1) 자신의 말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말이 옳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2) 자신의 생각에 신뢰를 보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만’ 신뢰한다는 것.

3) 반대급부로 백인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 역시 존재한다.

4) 독일에서도 새로운 세력, 네오나치가 등장했다.

5) 이것은 나치의 전략이었다. 같은 지능을 지닌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치는 고의로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수용소를 꾸몄고, 빅터 프랭클 같은 특별한 사람 외에 상당수가 희망과 인간의 존엄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즉, 짐승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6)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원류인 하이에크는 ‘공정한’ 경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기업의 부당한 행위를 경계했다.

7) 우리나라도 할 말이 없는데 아직도 베트남에 대한 사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8) 그러나 과거를 그냥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문제지만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을 그대로 묻어두는 것 역시 문제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전진하는 것은 진보라기 보다는 퇴보에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