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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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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여기 창조과학회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애들이 정말 많구나. 진화론자들이 죽을 때 거짓임을 밝히고 갔데. 십계명에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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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이브 - 부조리의 하느님 아포리아 법정에 서다
김사라 복자 지음 / 정신세계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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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종의 극본 형식으로 쓰여진 재미있는 글이다. 철학자, 신학자, 심지어 예수, 신마저 등장하는 이 책은 내가 보기에 여성신학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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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 우주의 신비와 한계
장 피에르 뤼미네.마르크 라시에즈 레이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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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에 관한 여러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의 견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번역 탓인지 내 독해력 탓인지 몰라도 굉장히 읽기 힘들었다. 배경지식이 좀 뒷받침되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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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존 캅 지음, 이경호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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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믿음이 과연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교회에서 만든 교리를 자신의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대다수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 되고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 목사들은 각 교단에서 설립한 대학교에서 배출된다. 그렇다고 보면 대다수 교회의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가진다기 보다는 각 교단에서 제공하는 교리를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믿음이 아니라 그 동안 내려온 관습(기독교신조)를 자신의 믿음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 상당수가 자신의 생각과 그러한 신조와의 갈등에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부작용은 감수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교리는 오랜 세월 동안 뛰어난 성직자, 신학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칭하면서 강조하는 기독교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신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므로 교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 믿음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관습을 따르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교리 중심의 믿음은 지나친 교회강조, 교회일치로 이어져 믿음의 화석화를 부르며, 그 결과 영성이 고갈되고 믿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리게 된다.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그저 그게 맞다고 하니까 받아들인 믿음이 오래가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믿는다고 하면서 사회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교리 중심의 믿음은 결국 부정직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나의 관계에 다른 사람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이지 다른 누가 대신 서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며, 교리는 어디까지나 좋은 참고자료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평신도 신학이다.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모든 기독교인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모두 신학자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무오성을 비판하고 나오게 된 생각의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신학이란 어떤 특별한 계층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는 것이며 다만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전문가로서 도움을 줄 뿐이다. 평신도신학은 평신도들이 만들어가는 신학인데 사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므로 평신도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떻게 보면 중복된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학이라고 하면 전문가들이 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다수의 신도들이 신학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단어는 그 논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용되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전문화, 파편화 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게 되었다. 사실 그러한 행동은 현명한 것이다. 혼자서 끙끙대기 보다는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는 게 더 빠르고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에게만 맡길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건강 같은 문제는 의사가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개인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챙겨야 할 문제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야 하고 필요하면 전문가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길 필요도 있지만 그 전에 개인 역시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TED에서 나온 내용 중 병과 관련된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바꾸겠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건강 이상의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정하는 문제를 전문가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게 합당할까? 존 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동안 성서의 권위는 계속 축소되어 왔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과학의 발달로 많은 문제가 해결된 지금 성서의 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성서에 완전히 어긋난 이론은 아니다. 그리고 과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해서 성서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자본주의는 성서와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이 있으며 과학이란 권위는 성서가 자연의 여러 현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성서를 가지고 진화론이 거짓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과학의 권위 앞에 성서의 권위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은 기독교가 결국 사멸하지 않겠냐는 전망까지 내보이게 하고 있다. 지금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 앞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무릎을 꿇고 있고 과학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 교리를 방어하느라 급급해 하고 있다. 정말로 기독교는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일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자본주의나 과학 역시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외부에서 만들어진 여러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여 오늘날 기독교를 공고한 자리에 올려 놓았다. 사실 기독교의 많은 이론들은 성서만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리스 철학, 계몽주의, 과학이론 등 많은 외부의 생각들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진화론 역시 존 호트(신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생물학자, 게놈 프로젝트의 수장) 같은 학자들이 기독교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 외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시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외부의 권위나 생각을 무작정 거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자세는 평신도들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사회 여러 분야에 기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이야 말로 다른 권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의 협소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으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예시 : 바이오로고스(유신론적 진화론), 기독교 사회주의, 좋은 교사 운동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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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쇼크 - 정보를 재화로 만드는 기술
송조은 지음 / 좋은시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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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재화로 만드는 기술’이라는 타이틀에 마음이 쏠려 구입한 이 ‘독서쇼크’란 책은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요약이 왜 필요한지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능력이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내세울 만한 것은 사고력 밖에 없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가공할 번식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세월을 거쳐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며 다른 생물의 생사여탈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 사고력 덕분이다. 물론 이 사고력이 정말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다른 동물과 비교해 볼 때 인간의 사고력은 특별하다고 할 수 밨에 없다. 인간은 사고를 통하여 정보를 취급하고 정보를 활용하여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정보를 벽돌이라고 하면 인간의 사고는 시멘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고를 비교, 대조, 추론, 논증, 분류, 분석, 종합, 평가로 나누고 있는데 비교, 대조는 정보를 인식하게 하고 추론, 논증은 정보의 사실성을 입증하게 한다. 그리고 분류, 분석은 정보를 체계화시키고 종합, 평가를 통하여 하나의 체계성 있는 우리가 일컫는 학문을 만들게 된다. 물론 실상 이러한 과정은 거의 순식간에 일어나고 그러한 순서대로 꼭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인간의 사고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사고력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원동력이라면 이러한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또한 인간의 집단 중 최고봉인 국가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바로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독서야 말로 사고력을 기르기 위한 궁극의 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 지식사회로 넘어온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정보를 습득할 것이고 어떻게 습득한 정보를 잘 활용할 것인지 그 방법이다.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사고력을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왕벌과 일벌의 초기 생물학적 능력은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로얄제리를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여기서 로얄제리는 인간에게 있어 바로 독서다. 독서의 대상인 책은 명사의 지식이 담겨 있는 정수이고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명사와 대화를 하게 되고 정신을 단련하게 되며 그 결과 사회에 유용한 사람, 명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이 육체를 단련시키는 것처럼 독서는 정신을 단련시키며 그 과정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얻게 되고 명사의 사고과정을 답습함으로 인해 사고력도 키울 수 있다. 그 결과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창조성과 문제해결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독서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아무 정보나 습득해서는 의미가 없다. 정보만 습득하려면 차라리 구글링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독서를 하는 것은 그 책의 저자의 사고과정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좋은 책을 선택해야함은 물론이고 책 읽는데도 아무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즉,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데로 우선 좋은 책을 선정해야 한다. 좋은 책이란 가치 있는 정보가 있으며 깊은 사고가 베어 있는 책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고전 또는 경전이라 불리는 책이 이에 해당된다. 저자는 이러한 책 이후에 미래학에 관한 책을 읽기를 권유하고 있는데 아마 저자가 사고력의 최종목표는 미래예측이라고 말한 것과 관련있지 않나 싶다. 좋은 책을 선정 했으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때 중요한 것이 주제와 구성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듯이 주제와 구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게 되면 뇌리에 단편적인 사실 파편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안 읽는 것보단 나을 것이고 유식하다는 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데는 부족하다. 따라서 주제와 구성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제와 구성의 파악은 이 후 책을 요약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는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이 말은 좀 과장된 감이 있지만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생각하면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지식, 부분지식, 오류지식의 상태에 있을 뿐인데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겸손한 자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저자를 존중하면서 읽으라는 소리로 파악하면 무리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약을 통하여 책의 내용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해야 한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는 원페이지 요약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네이버에 카페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는 다르게 요약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기존에 말하던 요약은 저자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짜집기’일 뿐이다. 요약은 저자의 주제와 구성을 이해하고 이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것으로 재구조화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모방을 통한 창조이며 짜깁기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사고과정인 셈이다. 더불어 저자는 우리나라 교육에 관해서도 한마디 하고 있는데 기존의 교육은 교과서를 연구하게 하고 책은 취미로 읽게 하고 있다 한다. 교과서는 국가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한다고 인정한 지식들이 집결된 책으로 우리나라 학생들은 교과서를 암기하듯 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무수한 정보를 암기할 수는 있지만 사고력이 길러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저자의 비판은 최근 여러 교사집단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이며 학습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고력이 길러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 교과서는 일종의 개론서이기 때문에 사고과정을 배울 수 없어 최근 교육사조와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영국같은 경우 교과서를 탈피하여 책읽기로 교육과정을 전환했다 한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나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사고력의 증진이고 이를 위해 독서가 필요하며 요약훈련을 통해 효율적인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업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우리에게 유용하며 독서에 대해 색다른 관점을 제시해준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유용한 정보를 하나의 주제로 잘 엮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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