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존 캅 지음, 이경호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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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믿음이 과연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교회에서 만든 교리를 자신의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대다수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 되고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 목사들은 각 교단에서 설립한 대학교에서 배출된다. 그렇다고 보면 대다수 교회의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가진다기 보다는 각 교단에서 제공하는 교리를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믿음이 아니라 그 동안 내려온 관습(기독교신조)를 자신의 믿음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 상당수가 자신의 생각과 그러한 신조와의 갈등에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부작용은 감수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교리는 오랜 세월 동안 뛰어난 성직자, 신학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칭하면서 강조하는 기독교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신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므로 교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 믿음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관습을 따르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교리 중심의 믿음은 지나친 교회강조, 교회일치로 이어져 믿음의 화석화를 부르며, 그 결과 영성이 고갈되고 믿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리게 된다.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그저 그게 맞다고 하니까 받아들인 믿음이 오래가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믿는다고 하면서 사회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교리 중심의 믿음은 결국 부정직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나의 관계에 다른 사람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이지 다른 누가 대신 서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며, 교리는 어디까지나 좋은 참고자료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평신도 신학이다.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모든 기독교인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모두 신학자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무오성을 비판하고 나오게 된 생각의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신학이란 어떤 특별한 계층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는 것이며 다만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전문가로서 도움을 줄 뿐이다. 평신도신학은 평신도들이 만들어가는 신학인데 사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므로 평신도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떻게 보면 중복된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학이라고 하면 전문가들이 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다수의 신도들이 신학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단어는 그 논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용되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전문화, 파편화 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게 되었다. 사실 그러한 행동은 현명한 것이다. 혼자서 끙끙대기 보다는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는 게 더 빠르고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에게만 맡길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건강 같은 문제는 의사가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개인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챙겨야 할 문제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야 하고 필요하면 전문가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길 필요도 있지만 그 전에 개인 역시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TED에서 나온 내용 중 병과 관련된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바꾸겠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건강 이상의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정하는 문제를 전문가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게 합당할까? 존 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동안 성서의 권위는 계속 축소되어 왔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과학의 발달로 많은 문제가 해결된 지금 성서의 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성서에 완전히 어긋난 이론은 아니다. 그리고 과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해서 성서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자본주의는 성서와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이 있으며 과학이란 권위는 성서가 자연의 여러 현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성서를 가지고 진화론이 거짓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과학의 권위 앞에 성서의 권위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은 기독교가 결국 사멸하지 않겠냐는 전망까지 내보이게 하고 있다. 지금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 앞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무릎을 꿇고 있고 과학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 교리를 방어하느라 급급해 하고 있다. 정말로 기독교는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일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자본주의나 과학 역시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외부에서 만들어진 여러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여 오늘날 기독교를 공고한 자리에 올려 놓았다. 사실 기독교의 많은 이론들은 성서만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리스 철학, 계몽주의, 과학이론 등 많은 외부의 생각들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진화론 역시 존 호트(신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생물학자, 게놈 프로젝트의 수장) 같은 학자들이 기독교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 외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시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외부의 권위나 생각을 무작정 거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자세는 평신도들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사회 여러 분야에 기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이야 말로 다른 권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의 협소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으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예시 : 바이오로고스(유신론적 진화론), 기독교 사회주의, 좋은 교사 운동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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