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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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 밑에 분은 책에 대해서 평점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 점수를 매기는 것인지...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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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 십대들의 창조적인 인생 밑천 만들기 프로젝트
김종휘 지음 / 양철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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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사회의 발달속도가 빨라지면서 세대차이가 빠르게 그리고 넓게 생기는 것 같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나는 50대 분들의 정서를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있다. 그분들과 공유하고 있는 몇몇 부분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 대한민국 10대 초반 아이들은 도통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는다.

 

물론 30대라도 다 같은 30대가 아닌 만큼 나만의 문제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터넷 댓글들을 봐도 10대 아이들에 대해 감정적 대응 또는 피상적 인식만 있는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현 대한민국 10대는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신인류인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싶다.

 

10,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고, 교과서에서는 질풍노도의 시기, 과도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예전에 보았던 뇌과학 서적에 따르면 호르몬 분비가 불안정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시기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이 사회의 기득권인 어른들은 그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그들을 마냥 어린아이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정쩡한 잣대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과거에는 학생이라는 명확한 정체성과 기준이 있었다.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10대 역시 극히 일부가 탈선을 할 뿐 대개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체성과 기준이 무너졌다. 학생? 어쨌다는 것인가? 주변의 학생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이 같은 학생이라고 할 만한 어떤 기준이 분명하게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같은 학생 사이에서 파벌이 생기고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지금 시점에서 학생이라는 말로 그들을 가두는 것은 무리다. ‘청소년이란 단어는 어울릴 수 있지만 청소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사회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 학교가 더 이상 폐쇄적일 수 없다는 것이 과거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진 중요한 이유다. 물론 지금도 학교는 다른 기관에 비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긴 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과 정보혁명의 시작으로 이미 학교 내에 바깥의 문화가 들어온 지 오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학교의 체제에 순응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따름이다.

 

10대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양한 프레임을 사용하여 10대에 대해 설명한다. 산업혁명 세력을 핫세대, 386 민주화 세력을 쿨세대, 지금 10대를 웜세대로 부르는 데 전적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지만 제법 그럴듯하다.

 

저자는 10대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라고 요구한다. 지금 10대는 부모세대의 과보호를 받아 자기결정력을 상실한 세대다. 그들은 모든 결정을 부모에게 미루고 부모의 명령에 순응한다. 그러다보니 20대가 되어 사회에 나서야할 시기에도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경험의 축척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그들의 멘토 역할을 해줘야 한다.

 

프랑스에는 은퇴한 노인들과 불량 청소년이 짝을 이루어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끝내고 나면 불량 청소년은 변하게 된다. 자신보다 많은 인생을 겪은 노인들과 같이 부딪히고 어울리며 그들은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해나가는 경험을 쌓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이고 쌓인 결과 성장하게 된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10대는 과거와 다르다. 정보의 홍수로 이미 알 것은 다 아는 나이고, 어른들의 부조리함도 명확히 알고 있다. 지금 정권의 횡포에 맞서는 고등학생도 존재하며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미성숙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저쪽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는 것은 어른들의 편견, 오만일 따름이다. 오히려 10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필요가 있는 쪽은 바로 그 어른들이다.

 

저자는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10대와 파트너십을 구축할 때 그들의 잠재력이 폭발하고 창의성이 발휘되며 사회적 기업들이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아직 근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몇몇 성공적인 사례를 보면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시킨들 학력인플레만 초래할 뿐이고 소수의 승리자를 위한 들러리로 전락시킬 따름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니 어울려야 한다.

 

제목만 보면 놀이에 대해 설명하는 책 같지만 이 책은 10대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들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책이다. 물론 제목에 어울리게 10대의 특성 중 놀이정신이 나온다. 그들은 일과 놀이, 학습을 구분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른과 달리 이 셋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이 놀이고, 학습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학교 교실에서 교사의 수업을 받는 것만이 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뇌리에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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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육 현장 보고서 - 핀란드 초등학교 선생님이 직접 쓴
리카 파카라 지음, 고향옥 옮김 / 담푸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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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와 한국, 공통점과 차이점

핀란드 교육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려진 대로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지향해야할 바라는 것은 대개의 평이다. 다만 우리나라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역시 대다수가 이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이 정말 지향해야할 바라면 현실 운운하기 전에 그 나라 교육이 어떻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여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현실에만 머물러 있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이번에 읽게 된 핀란드 교육 현장보고서는 핀란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10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리카 파카라씨가 쓴 핀란드 교육의 내밀한 부분과 그 학교 교사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책의 쪽수는 200쪽도 안되며 내용은 꽤 알찬 부분이 많아 읽을만 하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 나온 내용 대다수는 한국의 교사들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저자가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수준별 수업도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보고 꽤 놀라웠다. 핀란드에서는 협동을 강조하기에 수준별 수업은 거의 안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당연하다 듯이 수준별 수업 이야기가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이많은 친구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점, 좋은 선생님이란 지식과 경험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 교수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 7살 이전에 부탁합니다.’‘고맙습니다.’‘미안합니다를 가르쳐야 된다는 주장들은 짧은 교사 생활이지만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핀란드 교사들이나 한국 교사들이나 생각의 큰 차이가 없음을 알았다. 어떤 점에서 저자는 꽤 깐깐한 교사에 속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학교는 아이들에게 즐거운 곳이고, 한국 학교는 아이들에게 창살없는 감옥과 다를바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교사들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에 교사를 둘러싼 환경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교사는 교육부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다. 교사의 노력도 그 지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교사가 교육과정에 대해 손댈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 재구성 뿐이다. 게다가 정부는 교사를 지원한다기 보다는 통제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핀란드는 교사들에게 많은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최소한의 지침에 그치고 있고 교과서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진로에 교사의 평가는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만약 한국이라면 교사의 멱살을 쥐는 학부모들이 꽤나 있을 것이다. 물론 핀란드가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되어 있고 양극화가 심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부러운 면모고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교사의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입학시험은 없다. 학생들의 진로는 초등 6+중등 3년을 합친 기초교육에서 결정하며 기초교육에서도 거의 시험은 치지 않는다. 이거야 말로 우리나라 수행평가의 궁극적인 지향점 아닐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수행평가는 요식행위일 뿐 중요한 것은 일제고사라 불리는 중간, 기말 평가다.

 

교사를 수동적인 객체로 보는 이상 교육혁명은 불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이 사회가 교사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물론 교사의 중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동안은 교사의 수업능력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그나마도 형식에 지우친 수박 겉핥기며 교사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교사의 통제는 더 강화한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어 왔다. 교원능력개발평가를 위시한 다양한 교사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분투하는 교사들이 있지만 교육행정의 목표는 평범한 교사도 최선의 교육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특별하다기보다는 평범한 교사에 가깝다. 어떻게든 교사를 경쟁시켜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교육부를 비롯한 윗분들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는 교육의 양극화만 초래할 뿐 해결책이 아니며 그들의 책임회피이기도 하다.

 

 

몬스터 페어런츠와 학교, 외교능력

핀란드에도 자기 자식의 입장만 고려하는 학부모들이 있나보다. 교육열이 강한 우리나라나 일본에만 그런 학부모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이면서도 왠지 유대감이 느껴졌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부모들을 몬스터 페어런츠라고 부른다.

 

이런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에 문제가 된다. 학교의 교육권은 부모의 양육권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데로 학교를 운영할 수는 없다. 학교의 교육권은 부모의 양육원과 달리 공공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학교가 기업이나 학원처럼 운영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부모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이들의 요구를 귀담아 듣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현실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요구는 귀담아 듣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지만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학교, 교사의 외교능력이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 말하고 학부모를 대할 것인지 매뉴얼이 있어야 하며 우리학교에서 하고 있는 평화샘프로젝트에서도 학부모 대응 매뉴얼이 존재한다.

그런데 학부모, 특히 흥분한 학부모를 대할 때 교사 혼자에게 책임을 모두 떠안기는 것은 좋지 않다. 핀란드의 경우 교장은 물론 사회복지사까지 같이 힘을 합쳐 대응한다고 한다. 이는 핀란드가 교사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교감, 교장 선생님이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해결책이 임시방편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교사나 학교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학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시 사회복지사, 상담사, 심리학자 등으로 구성된 교사지원체계가 하루 빨리 구축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들의 조화, 누가 결정권을 가지는가?

저자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것 같다. 일화로 8살 먹은 아이에게 심리검사를 받을 것인지 결정하게 한 학부모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매우 특이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동감이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 아이는 독립한 존재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의견대로 하게 두는 것은 제멋대로 인간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학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결정권을 많이 부여한 편이었는데 이는 자치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너무 지나친 감이 있는 것 같다. 학교는 공동체이자 하나의 목표를 가진 집단이다. 그렇다면 그 집단 내에서 지켜야할 규칙이란 것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의 결정권 역시 그 안에서 주어져야 한다.

 

민주적 공동체는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도 모두가 평등한 것은 아니다. 평등은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인권에 한한 것이지 교사인 나와 아이들의 의견이 동등한 값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그동안 이를 간과해왔다.

 

물론 그렇다고 독재자가 되어서도 곤란하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면 때로는 내 뜻대로 밀어붙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내가 과연 옳은지 질문을 던질 필요는 있겠지만 아이들 뜻대로 움직이는 교사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라 나이 많은 친구일 뿐이다.

 

 

밑줄긋기

당신은 꼭 모든 학생이 만점을 받길 바라는 것 같아. 하지만 아이들 중에는 공부하고 싶지 않은 아이도 있을 거야.

 

학교에서, 교실에서,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이 많은 친구가 아니라 어른이다. 물론 학생들과 친구가 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교사와 학생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의 수준이 같다면 누가 가르치고, 누가 학교생활의 기준을 정할 것인지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학생들은 교사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학교는 개인 행동 뿐 아니라 단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배우는 장소이다. 이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숙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이외의 곳에서 여분의 공부를 해야 하고,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부모가 아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숙제는 학생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어린 아이들은 푹 자는 것이 중요하므로, 교사는 학부모들에게 제발 아이들에게 뉴스를 보여주지 말라고 부탁한다.

 

핀란드 인의 98%가 기독교인이지만, 대부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들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기 때문에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교통비다.

 

핀란드에서는 학생들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는 인터넷 접속은 물론 문자도 보낼 수 없는, 그야말로 기본적인 통화기능 밖에 없다. 당연히 학교 내에서는 사용금지다. 휴대전화가 범죄의 온상이 되는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린이용 GPS 기능만 있는 단순한 기계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예의범절에 관한 문제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항상 일관성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몬스터 페어런츠라고 해서 요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무조건 무시해버리면 절대 안 된다.

 

괴롭힘을 당하면서 강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랜 기간 같은 학생들을 담임하는 것은 교사에게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집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부모와 아이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PISA의 결과에 놀란 것은 좋은 성적을 거둔 것뿐 아니라 뒤처지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사회전체가 교육제도를, 학생들을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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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 이 한 권의 책이 한국 교육을 살린다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수호믈린스키 지음, 수호믈린스키 교육사상연구회 옮김 / 고인돌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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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아이들이 마음이 들떴는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애는 교사인 내가 보여주거나 하는 활동에 딴지를 걸거나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교실이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 역시 화도 나고 답답하고 그래서 애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온전한 마음을 쏟기가 어렵다. 물론 책임감까지 저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임감으로 애들을 억지로 이끌다 보니 어느덧 나도 강압적인 교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 행정형 교사가 되어간다는 소리다.

그 와중에서 우연히 알라딘에서 수호믈린스키의 명저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이란 책을 보게 되었고 특이한 제목에 관심이 생긴 나는 바로 구입해 읽게 되었다.

책이 일반적인 책보다 두꺼워 읽는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그러나 읽어보고 나니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 책은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수호믈린스키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 이런 교육자를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아쉽다. 이 책은 단순히 교육방법을 이야기하거나 아동중심교육을 하자고 권하는 책이 아니다. 그의 교육철학이 담겨져 있으며 그 철학을 구현하기 위하여 어떻게 교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는지 그 실천과정이 잘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과 어떻게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지, 문제있는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지간한 교육학 책들을 읽기보다는 아마 이 책 한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이 교사에게 더 나을 것이다.

아이들의 건강문제, 뇌의 작용에 대해 고심하고 특히 자연을 교재로 삼는 그의 교육활동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기 충분하다. 그가 쓴 글들의 한 구절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의 혜안에 감탄이 나온다. 어떻게 이런 깊이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또한 공부에 대한 관점 및 지도방법은 교사로서 기억해둘만 하다. 학생이 앉아서 꾸준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지식에 대한 목마름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영어 광풍에 언어적 인지능력에만 초점이 맞춰진 한국 사회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연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어른들의 눈은 아이들의 기운을 꺾어버리고 모든 일에 무관심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아이들의 내면세계에 주목하는 그의 교육론은 지금 한국의 교사는 물론 부모, 기타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교사들의 내면세계의 힘에 주목하는 파커 J 파머처럼 수호믈린스키는 어떤 교육활동이나 교재든 아이들의 내면세계와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아동중심교육은 아동의 원대로 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동을 존중하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교육에 대해 듀이는 물론 수호믈린스키 역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과 세상을 연결짓는 교육이야 말로 아동중심교육이다. 우리는 이런 기초적인 원칙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장 닥친 진도나 평가라는 암초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교육이라는 긴 항해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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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
최은희 지음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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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최은희 선생님이 그동안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이야기를 하나하나 조금씩 모아 이루어진 아름다운 콜라주와 같은 이야기다. 선생님은 이 책에서 아이들이 그림책을 만나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그 만남에서 본인은 어떤 것을 배웠고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 라는 제목처럼 최은희 선생님이 읽어준 그림책 이야기들이 있으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색깔을 내고 있는지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몰랐는데 이 책을 보고 비로소 그림책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그림책을 듣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림책을 관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수동적인 학생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그림책에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고 그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같이 엮어가는 능동적인 탐구자다. 책을 읽어줘도 자기 이야기만 하는 우리 반 아이들과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때문에 이러한 교육활동이 고학년에게도 통할지 의문이 든다.

비록 고학년 학생들에게도 이런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에서 작은 희망을 얻는다. 최은희 선생님의 말처럼 책 한권이 아이들을 확 변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사실 변화한다면 그것도 나름 무서운 일이리라. 이러한 이야기,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쌓여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고 다를까? 그동안 읽어온 책들이 비록 그 내용 자체는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이다.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읽어온 책들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 중 하나(126)가 있다. 크고 당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부모건 교사건 교육이라는 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 닿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매일 크고 당위적인 이야기, 흔히 훈계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한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아이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구분할 줄 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책의 구절처럼 우리 삶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좋은 그림책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것도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닌가 싶다. 대학에서 아동문학에 대해 겉핥기로만 공부하여 아는 게 별로 없다. 지금도 그쪽 분야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 일단 나부터 그림책을 읽어 봐야겠다.

그림책은 단순히 어린 아이들이 읽는 책이 아니다. 아이들이 발견해가는 그림책의 다양한 의미와 상상의 나래를 보면서 그림책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선생과 중등학교 선생 사이에 무슨 교육 수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림책이 비록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성인용 책에 결코 뒤지지 않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되돌아보는 저자처럼 나도 그렇게 내 삶을 되돌아보고 치유하고 싶다.

언젠가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삶을 나누는 그런 수업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미 중학교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언젠가, 언젠가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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